심곡서원(深谷書院)은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심곡이란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으로 설립하게 됐으며, 용인시 상현동에 있다.
용인 심곡서원
심곡서원은 조광조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鄭夢周) 제향의 충렬서원에 입향하였다가 위패를 옮겨왔다.
심곡서원 강당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 일소당(日昭堂,강당), 재실(齋室),
장판각(藏板閣),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다.
일소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合閣)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목판벽(木板壁)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당 측면
사우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사적 제 530호로 지정(2015.1.28) 되어있다
동재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1482~1519)선생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 훈구파로 혼란해지자,
이들의 견제가 필요해서 등용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재
조광조는 유교 정치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위해
도교 사당인 소격서의 철폐, 향약 실시,토비와 노비 하사의 특권을
인정받았던 훈구 공신의 명부인 훈적삭제 등 왕도정치의 이상 세계 구현을
위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조광조의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장서각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된 장서각에는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 도난을 당하여
현재는 정암집(靜庵集)과 조선사(朝鮮史) 등만 남아 있다.
장서각옆 공간
사당 내삼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이며 맞배지붕으로 심곡서원의
건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건물이며,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엔 화재를 방비하기 위해 만든 화방벽이 있다.
담 너머로 본 사당 건물
사당 내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사당을 둘러싼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다.
사당과 담장 측면
재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반칸의 합각 홑처마로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심곡학원과 심곡서원
사각 연지
심곡서원의 수령 500여년 느티나무(보호수)까지 둘러보고 묘역으로
가까운곳의 한양조공 정암 광조선생 묘역(漢陽趙公 靜菴 光祖先生 墓域)
정암조선생 사세지절구(靜菴 趙先生 辭世之節句)
조광조(趙光祖,1482~1519)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나라를 걱정하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 /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밝고 밝은 햇 빛이 세상을 굽어보니 /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거짓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 / 소소조단애(昭昭照丹哀)
*이 시는 조광조선생이 38세이던 1519년(중종14) 섣달 스무날 아침
화순 능주 유배지에서 금부도사가 건네준 사약을 받고 북쪽을 향해
큰 절을 올린 후 죽기전 마지막으로 읊은 사세지절구(절명시)이다.
신도비각 ~ 네개의 기둥만 등그렇게 있는 특이한 비각
조광조선생 신도비
정암 조광조선생의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우리나라 18현(賢)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각 향교에서 배향하고 있다.
정암 조광조선생의 묘와 묘비
조광조선생 묘와 석물
위에서 내려다본 한양조씨(조광조) 묘역
아래에서 본 묘역
큰길입구에서 본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