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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길었다. 이후로 수년간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 교인들은 매주 일요일 강남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서초 예배당 건너편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금요일 밤에는 서초 예배당 앞에서 마당 기도회를 열었다. 오 목사 측은 물리적으로, 법적으로 계속해서 압박했다. 서초 예배당 앞에서 기도회와 시위를 할 때면 오 목사를 지지하는 부목사들과 교인들의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다. 매주 금요일과 일요일, 서초역 앞에 경찰이 출동하는 건 다반사였다.
유혜경 씨는 처음부터 마당 기도회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교회에 등록은 했지만 내부 일에 크게 관심이 없던 그는, 마당에 모이는 교인들을 일부러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다. 서초 예배당으로 이전하기 전, 안수집사들이 오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회보를 만들어 돌려도 일부러 받지 않으려 했다. 그때는 주일성수 하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만 좋으면 그만이었다. 복잡한 내용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시절, 오정현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이 유인물을 배포하는 마당 기도회 교인을 폭행하고 도주한 일도 직접 목격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오 목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교회에 등록한 유혜경 씨는 오 목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별로 없었다. 설교가 미흡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찬양하는 시간은 좋았기 때문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오 목사의 논문 표절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에도 관심 없었다. 2013년 11월 교회가 서초 예배당으로 이전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 오히려 마당 기도회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교회가 이전하기로 했으면 다 같이 가야지, 왜 저렇게 한 마음을 품지 않고 반대하는지 의문이었다. 마당 기도회 사람들이 '어둠의 무리'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보디발의 아내 그 미친 X이."
유혜경 씨가 돌아선 것은 설교 시간 오 목사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였다. 다른 교인들을 보니 그냥 웃어 넘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목사라는 게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 주에 오정현 목사의 설교를 방송하는 기독교 방송사의 설교 영상을 찾아 다시 들어 봤다. 그 부분만 쏙 빠져 있었다. 유혜경 씨는 그제야 자신이 왜 서초 예배당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서초 예배당 앞에서 매주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와, 시위하고 있는 갱신공동체 교인들에게 가서 물었다.
"혹시 아직 강남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건가요?"
"그럼요."
다른 교회에 가는 것보다는 제2의 고향 같은 사랑의교회에 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갱신공동체 교인들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들은 정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초 예배당 앞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피켓 시위를 했다. 당시만 해도 30대였던 그는 나이 많은 어른들이 저렇게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진기했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우산을 쓰고 방한복을 입고 손을 호호 불어 가며 기도하는 모습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서히 이들의 신앙을 닮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신앙인으로서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런 모습이겠구나.'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에 소속한다는 건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오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부목사들에게 비방과 욕설, 감시와 채증을 당했다. 사회 법적으로는 교회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고, 교단법적으로는 출교를 당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법적 다툼에 시간과 돈을 써야 했다. 수십 년간 다닌 교회는 단순히 신앙생활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망이 교회에서 형성돼 있다. 갱신공동체로 간다는 건 그 망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당장 경조사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초 예배당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강남 예배당보다는 차라리 다른 교회에 가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를 선택한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이렇게 말하는 게 좀 뭐하긴 한데… 저는 좀 비겁하다고 생각했어요." 김성만 집사는 이런 이유로 마당 기도회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랑의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관계 혹은 비즈니스 때문에 서초 예배당으로 간 사람들도 일면 이해하는 편이다. 그들에 대한 원망은 없다. 그저 자신에게 적용되는 잣대일 뿐이다. 또 한 가지, 그에게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는 시구처럼 '내 아이들을 키운 건 8할이 사랑의교회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 교회를 두고 떠난다는 것이 그에게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김성만 집사에게 강남 예배당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비록 사랑의교회는 서초 예배당으로 옮겨 갔지만, 사랑의교회의 정통성은 강남 예배당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김성만 집사의 지인이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랑의교회는 오 목사님이 저쪽으로 나가신 거 아닌가요?" 김성만 집사는 그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가, 담임목사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초창기부터 마당 기도회를 주도했던 김근수 집사에게는 사랑의교회 본질 회복 운동이 곧 사랑의교회에서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야말로 제자 훈련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오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이 훨씬 더 많은 상황 자체가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이 실패한 것'이라 진단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이 가르친 제자 훈련의 결과 중 하나가 우리이기도 해요. 정말 배운 대로 실천하는 건 우리라고 생각해요."
2013년 12월 6일 저녁 8시,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가 서초 예배당에서 마당 기도회를 하려 할 때 오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격한 충돌이 있었다. 갱신공동체 교인들은 마당으로 들어가려다 저지당해 길바닥에서 기도회를 했고, 오정현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은 저들끼리 찬양과 기도를 하면서 마당 기도회를 방해했다. 양측 각각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찬양과 기도는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는지 겨루는 듯했다. 야유와 비난, 채증이 난무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출동한 경찰들도 생경한 광경에 혀를 찼다. 오 목사 비호에 앞장섰던 부목사는 당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들과 다른 점은 교역자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 훈련 할 때 말합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지막에는 교역자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크게 빗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교역자의 말을 거절하고 교역자를 폄하합니다."
"난 그런 '히에라르키(Hierarchie·피라미드식 상하 서열·위계를 갖춘 조직)' 체제를 인정할 수가 없어요." 김근수 집사는 말했다. 옥한흠 목사뿐 아니라 옥 목사에게 배운 부목사들도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역자라고 했어요. 우리는 역할만 다를 뿐 동일한 동역자라고. 목사고 집사고 그런 직분은 차이가 없다고. '작은 목사'라고 했어, 우리한테.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맞는 말이죠. 다 같은 제사장이잖아요. 옥한흠 목사님 따라서 그렇게 가르쳐 놓고, 지금은 담임목사·목회자를 중심으로 히에라르키를 형성한다? 저는 그런 사랑의교회는 인정할 수 없어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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