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b Marley 'No Woman, No Cry'
영국 식민지 시절의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의 빈민가 트렌치 타운에서 영국군 장교 출신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밥 말리는 자메이카의 음악 레게를 세계에 널리 알린 카리브해의 영웅이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의 엄마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그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의 스승은 자메이카 빈민가 뒷골목의 현실 그 자체였다. 그는 말한다. 자신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영감을 얻었노라고. 만약 계속해서 (지배자의) 교육을 받았으면 멍청한 바보가 되었을 거라고.
레게는 흥겨운 오락음악이 아니다. 그리고 달콤한 사랑 타령은 더더욱 아니다. 적어도 밥 말리에게 레게는 독립적인 흑인 왕국을 수립하기 위한 혁명의 무기다. 그래서 그가 열다섯 살에 결성한 밴드 이름은 '절규들(Wailers)'이다. 그의 인생작 'No Woman, No Cry'〈사진〉는 1974년 스튜디오 버전 앨범 'Natty Dread'에 먼저 발표되었지만 이듬해 나온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7분여 버전이 더 감동적이다.
이 노래는 여인의 눈물에 대한 감성적인 발라드가 아니다. 이 노래는 압제자의 주구 노릇을 한 위선자들에 대한 분노와 영원히 떠나 버린 동료를 그리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피력하는, 비장하면서도 낙관적인 혁명가이다. 여기서 '여인'은 나 자신마저 희생하는 것이 결코 두렵지 않은 자유와 독립을 은유하는 '임'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외세와 결탁한 우익정당으로부터 총탄 세례를 받기도 했고 망명하기도 했으며 32세 나이에 암 판정을 받고서도 치료를 포기하고 자신의 뜻을 세계에 알리는 공연과 음반 작업을 계속했다. 4년 뒤 종양이 뇌로 침투하고서야 고작 서른여섯 살인 그의 목소리는 비로소 멈춘다.
그의 노래 ‘짐바브웨’는 동명의 아프리카 신생 국가의 국가(國歌)가 됐고, 그의 정신은 어둡고 낮은 곳에서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