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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유 - StarDream
40.
동훈은 기력이 없다. 온 몸에 힘이 빠져 눈꺼풀조차도 뜨고 있기가 힘들다. 가슴도 답답하다. 무엇인가가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알 수 없는 고통이 말초신경을 통해 대뇌를 자극한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간지러운지 알 수가 없다. 신경계가 뒤섞여 버렸다. 차라리 아예 모든 신경계가 끊어져 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쁜놈. 살인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다. 아직은 아이티가 난다. 동훈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사실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한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살인자!』
동훈의 눈앞에서 <살인자>를 계속해서 주절거리는 것은 자신이 권총 오발로 사망시킨 19세의 소년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동훈은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다.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다. 업무상 과실이었을 뿐이다.
『과실? 웃기고 있네. 나의 이마에는 아직도 이렇게 총알 구멍이 남았어.』
소년은 동훈에게로 순식간에 이동해 왔다. 마치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날아 온 것 같다. 소년은 자신의 머리에 난 상처를 확인이라도 시키듯 이마를 동훈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실제로 소년의 이마에는 총알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의 저쪽이 보였다. 총알에 완전히 관통 당한 모양이다.
『난 겨우 19살이었어. 니 까짓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렸어. 우리 부모님들이 슬퍼하는 마음을 니가 알아? 이 살인자야!』
"아니야. 나는 경찰로서의 의무를 다 했을 뿐이야!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는지 알기나 해?"
『그래. 그 사람들의 목숨은 가치 있지만 나 같은 쓸모 없는 인간의 목숨은 사라져도 상관없는 것이라는 얘기야? 사람의 목숨도 차별대우 받아야 한다는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아. 사람의 목숨은 같은 거야. 나의 실수였어. 하지만 그 실수는 이미 사죄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사죄하면 끝이란 말인가? 이기적인 놈.』
동훈은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해. 너 같은 살인마가 경찰을 해선 안 돼. 이 더러운 놈.』
소년은 동훈에게 계속해서 책망을 가한다. 한번 말문이 막히자 동훈은 계속해서 소년의 말을 끊임없이 듣는 수밖에 없었다.
『너의 오발로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어.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부모님들은 그 날 이후로 단 한번도 웃음을 지으신 적이 없어.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셨고 아버지는 매일 같이 술로 하루 하루를 겨우 보내고 있어. 넌 나 뿐 아니라 한 가정을 완전히 파괴 해버린 거야. 내 앞에 펼쳐져 있던 수 십년간의 시간들은 누가 보상해 줄꺼지?』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계속해서 흐른다. 애처러운 표정으로 동훈을 쳐다본다. 동훈의 마음이 적지 않게 흔들린다. 한 소년의 삶과 한 가정의 행복을 모두 파탄 내어 버렸다.
동훈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자신의 상황이 서러운지 머리를 만지든 말든 상관 안한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만 있다.
"그래…… 내가 경찰을 계속할 자격이 없지……"
동훈은 결국 소년의 말에 긍정한다.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미안하다."
『그렇지. 그래. 너 같은 놈은 차라리 죽어야지. 죽어야지. 죽어야지.』
동훈의 사과의 말을 들은 소년이 갑자기 지금까지와 다른 표정을 짓더니 곧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훈은 자신의 눈에 무언가가 끼인 듯한 느낌이 들어 옷소매로 몇 번 문지른다. 하지만 소년은 계속해서 일그러졌다. 그리고 점점 일그러짐이 심해져 그 형태를 알아 볼 수조차 없을 때였다.
『죽어야 하는 너를 내가 삼켜주지……』
갑자기 소년의 목소리가 아닌 요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동훈의 귀에 메아리 쳤다. 동훈은 갑자기 돌변한 상황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데를 쳐다볼 필요는 없지.』
소년이 일그러저 이상한 형상을 띠던 물체가 갑자기 또다시 일그러져 무엇인가로 또 바뀌어져 갔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나체 여인의 상반신이 보인다. 아직 상반신의 밑은 일그러져 있는 상태다.
『나에게 좀 더 다가오라.』
아름다운 여인이 동훈을 불렀다. 동훈은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간다. 조금씩 걸어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안겼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동훈은 어느새 자신의 의식을 인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41.
동석은 방안에 있다. 사방이 붉은 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마치 피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섬칫하다. 나가는 문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문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천장도 둘러본다. 한참을 이리저리 눌러보고 조사하던 동석은 자신이 지금 문이 없는 붉은 방안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가 어디지?'
문을 조사하느라 계속 방을 돌아 다녔더니 다리가 아프다. 동석은 한쪽 구석의 벽에 등을 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완전히 폐쇄된 공간인데도 그렇게 두렵지 않다.
『동석……』
누군가가 동석을 부른다. 목소리의 근원지가 어딘지 확실치가 않다.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먼 곳에서 소리쳐 부르는 듯도 하다.
"누구세요?"
동석은 결국 궁금함을 못 참고 상대방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신의 여자.』
알 수 없는 내용의 대답. 동문서답이다.
"누구세요? 장난치지 마시고 이리 나오세요!"
상대방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 동석은 큰소리로 상대방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어디 있어요! 어서 나와요!"
『난 어디에도 있어……』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귀에 들려온다. 붉은 벽 탓인지 쉽게 흥분하게 된다. 사실 동석은 그렇게 다혈질은 아니다.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나오라니까요!"
더 이상 상대방을 부르는 것에 지쳤는지 이제 짜증난 말투가 배어 나온다.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쑤욱!
그때 갑자기 바닥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올라왔다. 붉은 색 벽지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마치 사람의 손이 붉은 고무 장갑을 낀 형태다. 처음에는 두 개가 튀어나오더니 점점 그 수가 늘어난다. 동석이 일어서서 방의 구석으로 도망치는 동안 모두 6개의 팔이 바닥에서 튀어 나왔다. 마치 동석을 찾는 듯 팔들은 튀어나온 채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로 가. 이리로 와. 이쪽으로.』
팔 여섯 개가 동시에 동석을 향해 손짓한다. 그 움직임에서 요염한 여인의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동석은 잠시 그 현란한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단지 좌우로, 아래위로 움직일 뿐인데도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을 부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저 손들에게로 다가서고 싶다. 저 손들에게 만져지고 싶다.
『이쪽으로……』
동석은 다시 한번 들려오는 유혹의 목소리에 잠시 망설이다가 튀어나와 있는 여섯 개의 팔 근처로 다가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동석의 손끝이 여섯 개의 팔 중 하나의 팔의 손에 닿는다. 마치 민감한 곳이 만져진 듯 동석의 손이 닿은 팔이 갑자기 흠칫하며 놀란다. 하지만 곧 그 팔은 동석의 손에 휘감기며 마치 애무를 하듯 동석의 손과 팔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단지 손과 팔이 만져지고 있을 뿐인데 굉장한 쾌감을 느낀다.
눈을 감는다. 아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마음의 풍요로움이 호르몬으로 바뀌어 대뇌피질을 살살 자극한다. 아득하다. 동석에게 지워져 있는 현실의 삶이 아득해져 간다.
동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섯 개의 팔 사이에 누워있게 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터치가 이루어진다. 손과 팔뿐 아닌 전신을 마사지 당한다. 적지 않은 쾌감이 한번에 몰려온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쾌감을 느꼈을까…… 동석이 누워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움직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약간씩 떠오른다. 동석은 알 수 없는 변화에 약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기우. 그의 몸을 떠오르게 만든 것은 아리따운 알몸의 여성 3명이다. 이제는 단순히 손으로 애무하는 수준에서 그치지가 않는다.
'아…… 마치 꿈만 같다.'
동석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쾌감에 자신이 마치 꿈속에 있는 듯 했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
'꿈?'
무언가 이상하다. 꿈이라는 단어가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석의 뇌를 천천히 각성 시켰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악몽들, 빈혈 사망자, 최일환, 라미아……
'그래. 나는 최일환이 쓰러진 뒤 흘러나오는 노란빛에 닿았었다. 그리고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지.'
동석은 현재 상황이 모두 일환의 소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여자들에게서 빠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가 않다.
『깨달아 버렸군……』
아까의 목소리가 동석에게 들려온다.
"난 이런걸 원치 않아!"
『훗…… 가증스러운 놈. 여자들의 품에 안겨 쾌락에 빠졌던 것은 네가 아니란 말이냐?』
여자들의 애무가 거세어진다. 남자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 동석은 자신이 상상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쾌락을 계속해서 느낀다. 뒷통수가 저릿저릿 하다. 여자들 잠시 애무를 중단한다. 안타깝다. 계속해서 쾌락을 느끼고 싶다.
동석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들의 애무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물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의 현실에서의 생활을 생각해 봐라. 나는 너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알고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힘든 삶을 계속 하고 싶은가?』
쾌락에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온다.
『너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억해라.』
동석의 머리에 저절로 자신의 괴로운 현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그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 많은 기대아래 신문사에 들어갔으나 말단 기자로 귀퉁이 기사나 계속해서 썼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위에선 동석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빈정거림만 가득하다. 힘겹다.
『계속해서 이 꿈속에 남아 쾌락을 즐기고 싶진 않은가?』
여자들의 애무가 다시 시작된다. 민감해진 몸을 그녀들이 만지기 시작하자 경련이 일어난다.
'그래…… 내가 기자 생활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 걸까?'
동석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기자가 되려고 마음먹었었다. 물론 기자라는 직함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에서 생긴 꿈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사회의 불신감, 모호한 대중의 생각을 기자가 되어 없애 버리려는 생각이 그의 기자가 되고자 하는 꿈의 원천이 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꿈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 왔던 일들에 대한 회의가 든다.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아무리 내가 기자 생활을 열심히 해도 나 스스로의 만족일 뿐 그동안 아무도 나를 인정해 준 적이 없다. 괴로웠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날 믿어 주시고 도와 주셨는데……
'부모님!'
갑자기 동석은 부모님의 얼굴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세상에 나의 존재를 있게 해주신 부모님. 동석은 자신의 존재가 없는 부모님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빠져나가야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석은 천천히 온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계속 머무르는 게 어떤가?』
귓가에서 이미 익숙해진 목소리가 질문을 건네 온다. 하지만 동석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 계속해서 그 목소리와 대화를 하게 되면 꿈속으로 더더욱 빠져 들어가게 된다. 점점 현실을 잊고 꿈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어 결국 꿈에서 벗어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여자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애쓴다.
'깨어나자. 이건 꿈이다.'
동석은 마음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42.
사람의 꿈은 그 어떤 것보다 공포스러운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을 인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43.
동석은 어둡고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약간 어지럽고 울렁거린다. 가라앉는 기분이 굉장히 싫다. 바이킹을 처음 탔을 때 느꼈던 그것과 같다.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 갑자기 볼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난 것은 피부다. 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코가 촛불 타는 냄새를 감지했다.
'지하실이다!'
동석은 눈을 떴다. 지하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누워있었다. 차가운 기운의 정체는 지하실 바닥이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변을 둘러 봤다.. 지하실 바닥에는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아직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한 상태다. 동훈 역시 동석의 옆에서 잠에 취해 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다.
뒤통수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크크크…… 결국 잠의 유혹에서 깨어났군……"
한쪽다리에 피를 아직도 흘리고 있는 일환이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얼굴은 새하얗고 입술은 파랗다. 다리 한쪽을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나 동석에게로 다가왔다.
"이러면 당신에서 무슨 이득이 있지? 무엇을 원하는 거야?"
동석은 일환에게 말을 시켜 조금이라도 다가오는 시간을 지연 시켜 보려했다.
"나는 단지 영생을 원해. 내 몸 안의 팔찌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줄꺼야. 크크크……"
일환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설마……'
"크크크. 나는 팔찌를 내 몸 속에 박아 넣었지. 바로 이 심장에…… 조금이라도 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의식이었다. 덕분에 난 이렇게 젊어지게 됐지."
"말도 안돼. 그런 일이 가능 할 리가 없어!"
"저런... 지금 이 광경을 보고도 모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동석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모두 하나같이 하얀 얼굴의 일색이다. 마치 피가 모두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듯 했다.
"팔찌를 몸 속에 넣은 뒤 나는 인간의 피를 직접 마시는 것 뿐 아니라 잠든 틈을 타 악몽을 이용해 그들에게서 조금씩 피의 기운을 빨아 들여 나의 젊음으로 뒤바꿔 왔어. 이 주름 없는 피부를 봐. 방금 빨아들인 피의 결과물이지."
일환은 자신의 얼굴을 동석에게 보여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크크크…… 난 이대로 영생을 얻게 될 거야. 라미아님이 말씀하신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나는 영생 할 수 있어."
일환의 눈초리가 매섭게 바뀌었다. 동석의 팔에 아직도 안겨있는 아기를 향해있다. 동석은 그 낌새를 눈치채고 아기를 양손으로 보듬어 안고 말을 꺼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죽었어. 더 이상의 희생을 가만히 지켜 볼 수는 없어."
"어차피 인간은 쾌락을 위해 사는 존재. 그리고 쾌락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도 인간이다."
막 말을 끝마친 일환의 몸에 약간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 하더니 그의 송곳니가 조금씩 길어서 입술사이로 삐져 나왔다.
"보이느냐…… 신의 힘이…… 라미아님의 힘이……"
44.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가지의 작은 쾌락을 느끼며 살고 있다. 도로를 건너기 바로 전 횡단 보도가 바뀌어 기다리지 않고 건넜을 때, TV를 켰더니 어제 보지 못했던 즐겨보던 드라마의 재방송이 할 때 등등 이 작은 쾌락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45.
일환은 갑자기 맹수처럼 동석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맹수였다. 마치 표범을 방불케 하는 긴 송곳니와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든 눈동자. 그리고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동물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석은 재빨리 아이를 안고 옆으로 굴러 일환의 돌격을 피해내었다. 덕분에 일환의 몸이 세게 벽에 쳐박혔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아까 다리에 맞은 두발의 총탄에 의한 고통 역시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환은 벽에서 돌아서 동석을 내려다 봤다. 동석은 아이를 안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 일환이 그대로 공격해온다면 동석과 아기는 꼼짝없이 당할 판이다.
"크르……"
일환의 입에서 걸죽한 침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피를…… 다오.』
동석이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가야 한다. 주위를 살핀다. 동훈이 쓰러져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다. 계속해서 이대로 놔두면 죽을지도 모른다. 동석은 급한 마음에 동훈을 부른다.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어떻한다……'
일환은 점점 거리를 좁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천천히 동석을 벽 쪽으로 밀어 넣으며 다가간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동석은 계속해서 뒷걸음친다. 하지만 곧 자신의 등에 차디찬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환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퍼진다.
"이제……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지……"
일환은 긴 송곳니 탓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동석에게 죄여오는 공포를 크게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동석은 일환의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죽음의 사자가 자신을 천천히 잠식해 가는 것처럼 느낀다.
『피…… 피를 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것을 신호로 느낀 듯 일환은 오도가도 못하는 동석의 목을 잡아챘다. 마치 가벼운 인형을 들 듯 일환은 동석을 한 손으로 든다. 동석은 아기를 놓칠세라 양손으로 아이의 몸을 휘감아 잡는다.
"케엑!"
저절로 기침이 나온다. 엄청난 힘이 동석의 목을 조인다. 처음에는 목을 잡는 충격에 아픔의 고통이 있지만 두 번째는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동석이 이리저리 버둥거려 보지만 일환의 팔은 단단한 기둥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이제 곧…… 너와 이…… 제물로…… 신이…… 부활하신다……"
일환은 어렵사리 말을 마치고 동석을 벽에 내동댕이친다. 굉장히 큰 소리가 지하실 방을 채웠다. 동석은 벽에 던져지며 머리를 잘못 부딪혀 정신을 잃고 만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 안 좋은 일이 겹친다.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제물을!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라!』
일환의 귀에 여자의 목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 퍼진다. 목소리의 울림이 어느 정도 끝나자 일환은 자신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동석의 손에 안겨 있는 아기를 빼낸다. 아기 역시 잠에 빠져 있다. 하지만 피가 빠져나가진 않았다. 아기의 순수한 영혼에게는 어떤 악몽도 소용없다.
『신선한 아이의 피…… 실로 몇 백년 만인지 모르겠군……』
일환은 단검을 아이의 목 위에 올려놓는다. 그대로 목을 그어 버릴 생각이다. 아직 아이의 목에는 아까 사람들이 떨어뜨린 피의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울긋불긋한 피부가 조금 징그럽다. 단검을 든 일환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아이의 목에 작은 상처가 생기며 단검의 날이 아주 조금씩 파고 들어간다. 아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46.
동훈은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안겨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다. 자신의 죄를 추궁하는 소년 따윈 더 이상 없다. 오로지 따뜻하게 감싸 안는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만이 느껴진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라구……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단지 난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동훈은 자신의 과거를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알 수 없는 자극적인 냄새가 동훈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다. 친숙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거부감이 스며든다.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
갑자기 생겨난 호기심에 동훈의 뇌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경험했던 장면을 되새김질하며 지금 느끼고 있는 향기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피.'
아름다운 그 여인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의 향기가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 동훈은 갑자기 느껴지는 위화감에 그녀의 품에서 두 세걸음 물러섰다. 그 자리에서 지켜본 그녀는 반인반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헉!"
동훈의 놀라움의 한숨을 터뜨리자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놀라지? 나의 몸의 매력에 빠져 품에 안겨 왔으면서…… 흉한가?』
사실 그랬다. 적어도 동훈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상체는 아름다운 인간의 여인이었지만 하체는 비늘이 번뜩거리는 뱀의 꼬리가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커다란 뱀의 꼬리는 둥글게 꽈리를 트고 있다. 동훈의 눈이 저절로 다른 곳을 향했다.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뱀의 꼬리를 보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편치 않은 일이다.
『그래…… 그렇군……』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낌새다. 여인이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리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얼마를 그렇게 울음소리가 그녀 쪽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동훈은 그녀에게서 나는 소리말고 또 다른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형사님…… 이형사님……"
몇 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먼 곳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다. 동훈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지만 주위는 온통 하얀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이형사님……!"
다시 한번 들려온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 동석이다! 애송이 기자!
47.
'꿈이었다.'
동훈의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프다. 굉장히 심한 빈혈이다. 눈앞에 있는 것도 확인 못할 정도다. 한참을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나자 그때서야 눈앞이 희미하게 보인다.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 있는 동석이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몸이 축 늘어져 있다. 동훈은 아직 사태파악이 안되었다. 꿈속에서 너무 심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탓이다. 그리고 유난히 심한 빈혈도 한몫했다. 평생 빈혈이라고는 느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젠장…… 몸을 움직일 수가 없군.'
몸 어느 한곳이라도 말을 듣는 부위가 없다. 관절이라는 관절은 모두 쑤시고 아프다.
『신선한 아이의 피…… 실로 몇 백년 만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동훈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재빨리 소리의 근원을 찾아 눈을 굴렸다.
'최일환!'
동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환이 단검으로 아까 자신이 구해냈던 아이의 목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이미 손가락 마디 하나정도의 상처가 생겼다.
구하고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온몸의 힘이 빠져 주먹조차 쥐기가 힘들다. 하지만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훈은 손을 지렛대 삼아 일어나 보려했다. 그때……
'권총!'
동훈의 손 바로 옆에 그의 권총이 떨어져있다. 잠들기 전에 떨어뜨린 것이 분명하다. 동훈은 일환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권총을 집어 들었다.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어 넣는 것도 힘겹다. 겨우 방아쇠에 손을 끼워 넣고 양손으로 권총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환의 머리에 조준점을 맞추었다.
"으아아앙!"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단검으로 생긴 상처에서 고통이 느껴지고 있다. 아프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아직 말을 할 줄 모른다. 단지 울뿐이다. 일환은 입가에 잔뜩 미소를 머금고 있다. 하지만 곧 이를 다물고 인상을 쓴다. 단검을 들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목을 한번에 끝까지 잘라낼 생각이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전혀 상관치 않는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으아앙!"
동훈은 조준점을 간신히 일환의 머리에 맞춘다. 허벅지나 종아리를 맞춰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일환은 허벅지에 두발의 총알을 맞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서있다.
'머리를 맞추어 주마.'
권총의 조준점이 정확히 일환의 귀에 맞추어졌다. 동훈의 사격에 대한 오감이 발동된다. 완벽한 타이밍. 바로 그 순간에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48.
인간의 몸은 신비로운 것이다. 어떤 한가지 일에 익숙해지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용케도 몸이 그것을 기억해낸다. 작은 예로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배우는 자전거를 들어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서 자전거를 배우고 10여년이 넘은 시간이 흘러서도 자전거를 타는 법을 잊지 않는다. 약간의 어색함 뒤에는 10년 전처럼 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전거뿐만이 아니다. 줄넘기, 운전, 타이핑 등 인간은 뇌로 기억하지 않고 몸으로 기억하는 일이 많다. 몸을 이용하여 기억하는 이 방법은 뇌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수명이 길고, 정확하다.
49.
탕!
동훈의 오감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총알이 발사되었다. 1초를 몇 십개로 나눈 시간을 거쳐 일환의 머리를 꿰뚫는다.
『꺄아악!』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동훈에게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일환이 떨어뜨린 아이를 겨우 받아냈다.
"이형사님!"
동석이다. 총소리에 기절에서 벗어났다.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벽에 머리를 좀……"
동석은 머리가 아픈지 약간 인상을 찌푸린다.
"그건 그렇고 이형사님은 괜찮으세요? 이형사님도 분명 꿈에서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동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동석을 쳐다보았다.
"자세한 얘기는 우선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해드리겠습니다."
동석이 일어섰다. 동훈은 아직 일어서는 것이 버겁다. 동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로 아기를 끌어안았다. 둘다 일환을 주시했다.
『꺄아악!』
일환은 다시 한번 비명을 크게 지른다. 머리에 생긴 권총 구멍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온다. 저런 상처를 입고도 아직 그 자리에 서있다. 물론 굉장한 상처를 입은 듯 하다. 적어도 아까 허벅지에 맞은 총알보다는 그 여파가 몇 배는 차이가 났다.
동석과 동훈은 계속해서 일환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램이다.
『우에엑!』
일환이 갑자기 등을 활처럼 굽히고 얼굴을 천장으로 향하게 들고 구토하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헛구역질을 하는 듯 했으나 두 세번 크게 그의 몸이 요동치고 나자 입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50.
천장을 향해서 솟구치는 피는 천장을 적시며 마치 비처럼 사방으로 떨어졌다. 끔직한 광경이다.
『우에엑!』
처음에는 약간 맑고 붉은 피가 흘러나오다가 나중에는 점점 진해져 그 색이 어둡고 칙칙한 붉은색이 되었다. 그리고 피의 농도도 점점 진해져 마치 토마토 주스를 떠오르게 했다.
동석과 동훈은 떨어지는 피를 피해 지하실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일환의 토해내는 피의 양은 단순히 피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피가 점점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요."
동석이 무심코 내뱉었다.
"여차하면 지하실에서 빠져나가면 돼. 우선 최일환부터 잡아야해."
동훈은 아직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일환의 체포를 신경 썼다. 피는 이미 발목 가까이 차 올랐다. 하지만 피는 그칠 줄 모르고 일환의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오히려 그 양이 더 많아진다.
동훈과 동석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일환의 몸에서 토해져 나오는 피가 언제 그칠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상대는 총을 머리에 맞고 서있을 수 있는 괴물이다. 섣불리 다가섰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나의 피…… 나의 피를 돌려줘! 아악! 어서 돌려줘!』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석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계속해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진원지가 정확치가 않은 까닭에 답답한 마음이 든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자의 비명소리가 계속되자 동석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물론 대답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나…… 나는 라미아…… 벨로스왕의 딸……』
대답이 들려왔다. 여자의 목소리 주인공은 라미아였다.
"당신이 여기엔 무슨 일이십니까?"
동석은 차분히 하지만 큰 목소리로 똑똑하게 물었다. 이미 그는 라미아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의심하고 있었다.
『일……환…… 그가 나를 불렀다.』
라미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에엑!』
일환의 입에서 나오는 피의 양이 몇 배로 는다. 이제 천장에서 튀기는 피가 동석과 동훈의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들의 온몸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나의 피를 돌려줘…… 수 천년간 쌓아온 나의 힘…… 나의 힘을 돌려줘……』
이제 일환의 입에서 나오던 피는 아예 검은색에 가깝다. 고인 피들이 이것저것들이 합쳐져 괴이한 붉은 형태를 띠었다.
"아무래도 이 피는 라미아가 그동안 흡수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피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석의 이 말에 군소리 없이 동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정도 믿는 것은 아무 상관없을 법하다.
동훈은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는지 권총의 남은 총알을 확인하고 제대로 총을 빼어 들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아기는 동석이 감싸 안고 있다. 떨어지는 피에 맞아 셋의 옷과 피부 모두 붉은 색을 띠었다.
"허리를 넘어섰어. 이대로라면 지하실을 꽉 채울지도 몰라.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어."
동훈은 다른 두 사람의 앞에 서서 천천히 피로 가득 차가는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과 달리 피는 젤리 같은 성질 때문에 이동하는데 상당한 힘이 들었다. 물론 그 속도도 빠르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가 차 오르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에 거의 도착했을 쯤 피는 이미 가슴께로 올라왔다.
"이형사님 어서 문을 여세요."
동석은 역한 피 냄새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잠깐만……"
동훈은 불투명한 피 속에서 어렵사리 손잡이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자마자 비틀어 당겼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질 않는다.
"헉! 큰일이야!"
갑자기 동훈의 외마디 비명에 동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문이 열리질 않아. 이쪽에서 피 때문에 생긴 압력 때문에 문을 당길 수가 없어!"
동석은 할말을 잃었다. 동훈 역시 겨우 회복된 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 힘없는 멍 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피를 계속해서 토해내는 일환뿐이었다.
지하실 전체가 점점 어두워졌다. 벽이나 바닥에 켜놓았던 수 백개의 촛불의 대부분이 그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끝나는 건가요?"
동석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동훈에게 말을 건냈다. 턱 근처까지 올라온 피 때문에 아기를 든 손은 머리위로 올려야 했다.
동훈은 아무 대답을 않는다. 피에서 올라오는 비린내가 싫은 듯 잔뜩 얼굴만 찡그리고 있다.
51.
마지막 촛불까지도 피에 잠겨 지하실 안은 완벽한 어둠으로 가득 찼다. 이제는 피가 어느 정도 차 오르는지 몸으로 느껴야 했다.
동석은 눈을 감았다. 이제 곧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마음의 준비를 한다. 사인은 익사가 될 것이다. 피에 익사하다니. 신문에 나면 굉장히 음산한 내용으로 꽤나 잘 팔리게 될 듯 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기사 생각을 하다니……'
동석은 피식 웃었다. 코로 따뜻한 피가 느껴진다. 피 냄새를 너무 많이 맡은 까닭에 이제 코 안의 세포가 피 냄새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편리한 기능이다. 아기를 계속해서 머리위로 들고 있었던 까닭의 동석의 팔에 감각이 없다.
코가 피에 잠겼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
52.
어두워진 다음부터 동훈은 혼자였다. 바로 곁에 동석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둘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피가 입과 코를 막았다. 끈적거리는 피 속에서는 수영도 불가능했다. 마치 늪에 빠진 느낌이다.
동훈은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려 당겼지만 문은 꼼짝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손잡이를 아예 놓아 버렸다. 그리고 어두운 지하실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밝을 때의 지하실 모습과 겹쳐지며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곳이 떠올랐다.
'인간이 산소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지……'
동훈은 자신의 남아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53.
동석과 동훈은 채 3분이 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아기 역시 동석이 정신을 잃자마자 떨어뜨려 피 속으로 가라앉았다. 더 이상 아기를 돌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피는 계속해서 차 올라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가 된 뒤에야 그 수위를 멈추었다.
54.
누구나 가슴아픈 과거 한 두가지쯤은 가지고 있다.
55.
"당신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어요. 나에게 더 이상 강요하지 말아요."
한 그리스 여인이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애원하듯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죄했다.
"미안해. 이제 다시는 바람피지 않을게."
남자의 간절한 사과에도 여자는 매몰차게 방문을 열고 나선다. 밖은 이미 캄캄한 한밤중이다. 여자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쓰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씩 밀려오는 슬픔이 턱 밑까지 올라온다. 여자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듯 걸음걸이를 빠르게 하여 집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한적한 숲의 귀퉁이다. 아무 곳에다 주저앉아 버린 그녀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잠시 확인하고 곧이어 계속해서 꾹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 피는 모습을 그녀가 목격해 버렸었다. 남편의 옆에 있는 여자는 그녀보다 아름답고 젊었다.
『왜 울고 있나요?』
그녀가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을 그치고 나에게 이야기 해봐요.』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다 들어 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편의 바람, 자신이 느낀 소외감, 분노,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이나 계속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집에서 뛰쳐나와 울고 있었답니다."
『저런…… 그 남자 나쁜 사람이군요. 제가 혼쭐내 드릴게요. 집이 어디세요?』
친절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목소리.
"저쪽 산등성이 아래쪽 첫 번째 집이에요."
여자가 얼떨결에 집을 알려준다. 집을 알려주는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잠깐의 돌풍이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은 저녁도 먹지 못했다. 계속해서 사과하는 것을 생각해보니 조금 측은하다.
여자는 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바로 집이기에 그렇게 급할 것은 없다.
푸드득!
어디선가 새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살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탓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굉장한 것을 발견한다.
사람보다 약간 작은 박쥐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여자의 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56.
나무로 된 나막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일본 사람들이 즐비하다. 장이 서는 날이다. 이날은 밤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도 아이들이 밤늦게 까지 노는 것을 허락한다. 하지만 이번 장에는 최근 마을 어귀에서 벌어지는 실종 사건 때문에 마을 어귀에는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신신당부했다.
아이들 여럿이서 장이 선 길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한다. 시끄러운 장 분위기를 한껏 돋워 준다.
"이제 내가 술래 할게."
아이 한 명이 술래가 되어 나머지 아이들을 쫓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뿔뿔히 흩어져 마을 안으로 사라져갔다. 술래의 역할을 맡은 아이는 천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찾는다.
부스럭.
건너편 집 벽 뒤에서 소리가 난다. 아이는 한 명을 찾았다는 생각으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벽 뒤가 보이는 곳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약간의 소리가 났던 것일까? 벽 뒤에 숨어 있던 아이는 순식간에 달려나간다. 눈치 챈게 분명하다. 술래는 단순히 눈으로 찾기만 해서는 안된다. 쫓아가서 도망가는 아이의 신체를 손으로 건드려야 비로소 찾은 것으로 인정된다.
술래가 앞에서 달리는 아이의 뒤를 쫓는다. 쫓아가는 술래의 입장은 앞에서 달리는 아이의 입장보다 덜 스릴 있다. 도망가는 입장에 서면 뒤에서 쫓아오는 술래에 대한 공포감이 극대화되는 법이다.
앞서가는 아이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진다. 마을 어귀에 놓아두었던 통행 금지 팻말이다. 어느덧 두 아이는 마을 어귀에 와있었다. 술래는 천천히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간다. 술래로서가 아니다. 넘어진 아이를 뒤에서 건드린다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다.
"자. 일어나."
술래가 손을 내민다. 넘어진 아이가 약간 몸을 움직인다. 앞으로 넘어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고마워.』
분명 남자아인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난다. 그때.-
푸드득!
술래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박쥐 한 마리가 술래를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57.
동석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크게 동떨어져 있다. 자신의 의식에서 자신은 오로지 지켜보는 역할이라니……
아까부터 그는 이상한 영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환이 토한 피 속에서 질식으로 정신을 잃은 것은 분명한데, 갑자기 떠오르는 영상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던 <주마등>일리도 없다. 죽기 전에 떠오르는 영상은 항상 자신의 과거다. 행복했던 추억, 괴로웠던 추억들이 번갈아 가면서 몇 십년간의 시간을 간추려 떠오르는 것이다.
'박쥐……'
동석은 한가지 영상들의 공통점을 기억한다. 박쥐. 성일 병원의 정신과 닥터가 악몽을 꾸는 사람들의 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도 박쥐라고 했었다.
'박쥐…… 라미아……그래! 어쩌면!'
동석은 라미아가 뱀파이어의 시조로 불린다는 것을 생각해내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뱀파이어> 로 검색해 찾아낸 한 문장을 생각해내었다.
<뱀파이어는 박쥐, 늑대, 안개로 변신하여 희생양을 사냥한다.>
'그래…… 박쥐는 바로 라미아였어.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영상들은 다른 사람들의 꿈?'
그랬다. 동석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단편적인 영상들은 바로 다른 사람의 꿈이었다. 벌써 수십 가지의 영상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신기하게도 질식당한 동석은 계속해서 정신을 말짱했다.
'분명히 나는 정신을 잃었을 텐데……'
동석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하나의 영상이 그의 뇌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동석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한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왠지 모를 친숙함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58.
한 아이가 방안에 갇혀있다. 거의 일주일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먹었다. 급기야 더 이상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굶주림에 익숙해졌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약간의 재산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많은 빚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덕분에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는 갖은 고생을 하며 질긴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 몰래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아이에게 점점 아버지의 무능력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주로 그것은 폭력과 감금으로 표출되어졌다.
아이가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다락방에 가두어 놓았다. 아이는 다락방에 자주 갇히는 일이 일어나자 점점 다락방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바깥보다 다락방에서의 생활이 더 편했다.
그러던 중 큰일은 일주일 전에 터졌다. 어머니가 데려온 남자에게 아이가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개새끼야! 우리 엄마 아프게 하지마!"
아이는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계속해서 아프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어머니의 교성 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59.
아이가 자라났다.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싫다. 아버지가 없다는 설움 때문에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외간 남자를 집에 자꾸 끌어들인다는 소문은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주었다.
아이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뒤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갔을 터였다. 아이는 집에서 낮잠이나 잘 생각이다.
집에 도착해서 이제 막 방문을 열려는 때였다.
"아......아."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금새 알아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
"남편도 이렇게 해줬나? 응?"
아이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방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서 말해봐. 남편도 이렇게 해줬어?"
남자가 아이의 어머니를 다그치고 있다.
"아니. 당신이 최고야. 그 자식은 아무것도 몰라."
아이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재꼈다. 방안에서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아이의 어머니가 알몸으로 뒤엉켜 있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아이의 손에는 큰 쇠파이프 하나가 들려있었다.
60.
동석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의 주인공에게 알 수 없는 애뜻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영상속의 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아이의 분노가 단지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져 온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동석은 자신이 처한 입장을 어느새 잊어 버리고 아이의 인생을 집중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61.
아이는 어느덧 20대가 넘어섰다. 소년원을 나와 한 택배회사에 취직해 꽤 많은 돈을 저축했다. 어머니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머니를 대신할 한 여인을 찾았다. 그다지 아름답지도, 특별한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인이었다.
아이는 택배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었고 여인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했다. 이 시간들이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늘 꿈꾸어 오던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 있어 주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가 그렇게 쉽게 행복을 쟁취하게 가만두지 않았다. 여인과 함께 지낸지 1년 정도가 흐르자 여인은 아이가 직장으로 나간 틈새를 이용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했다. 바빠서 늦게 들어오는 아이의 애정을 의심한 여인의 행동이었다.
아이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여인과 영원히 헤어졌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겨져 버린 것이다.
63.
아이는 깊은 강을 건너는 다리로 갔다. 그리고 뛰어내릴 채비를 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없으면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와 가치가 없다. 조심스럽게 다리의 난간으로 올라선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옷 사이로 싸늘히 스며들었다. 뛰어내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미련은 그녀에 대한 미련이 전부다. 아이는 눈을 감고 그녀와 행복했던 시간을 회상한다. 더 이상 그녀와의 추억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아이는 이제 모든 미련을 버린다. 조용히 난간 앞의 공간으로 발을 내 딛는다. 점차 중력에 의해 균형을 잃어가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이제 막 감았던 눈을 뜨려는 찰나에 차가운 강물이 아이를 삼켜버렸다. 한번 크게 물이 요동친 후, 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도시의 불빛만 유유히 반사했다.
아이는 물의 저항에 뛰어 내려가던 속도의 몇 십분의 일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옷과 몸에 붙어 있던 기포들로 인해 강물 안에 하얀 거품이 일어났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뛰어 내리기 바로 전 아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어 더 이상 폐에 들어있는 여분의 공기가 없다. 굉장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폐는 자꾸 부풀어 올라 밖의 공기를 받아들이려고 했고, 아이는 그것을 억지로 막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물이 폐 속으로 들어가는 고통은 이미 예전에 소년원에서 경험했었다. 다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이다. 마치 폐를 갈퀴로 긁어내는 듯한 쓰라림. 그리고 기관지로 들어간 이물질을 토해내기 위한 격렬한 기침. 될 수 있으면 물이 폐에 들어가지 않은 채로 죽고 싶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숨을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곧 그 한계가 자신에게 닥쳐오는 것을 목에서 느꼈다. 목이 수축한다. 폐가 억지로 부풀어 오르는 바람에 목의 기관지가 수축한다. 기관지에 남아있는 산소까지 모두 폐로 스며들어간다. 이제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아무리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있다고 해도 조금씩 스며드는 물이 생긴다. 물은 입을 거쳐 기관지로 흘러들어간다. 씁쓸한 오염된 강물 맛이 난다.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덕분에 아이는 두통과 함께 시신경과 균형감각의 이상을 경험한다. 눈앞이 뿌옇게 되어갔다.
점점 폐로 흘러가는 물의 양이 많아진다. 작게 기침을 한번 했다. 하지만 물속이라 소리가 흘러나가지는 않는다. 목에 걸려 있는 물을 걸러내기 위한 기침이었지만 입이 벌어져버렸다. 되돌릴 수 없다. 아이는 계속해서 기침을 한다. 하지만 기침을 한번 할 때마다 들여 마시는 물의 양이 너무 많다. 벌써 폐에 물이 거의 찬 것 같다. 쓰라리다. 폐는 단지 산소를 원할 뿐이다.
아이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옴에 따라 물에 뛰어내린 것을 후회한다. 차라리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찡-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며 아이의 마지막 의식이 그와 손을 놓았다.
64.
『살고 싶은가요?』
아이의 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65.
동석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이미 알고 있다. 라미아다. 라미아가 아이에게 접근해가고 있다.
66.
아이는 방금까지 느꼈던 익사의 고통에서 순식간에 헤어난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음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여긴 어디인가에 대한 물음이 반복되어진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다. 검푸른 물속이다.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다.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숨을 쉴 수가 있다. 그리고 아무런 육체적 고통도 없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복잡하다.
『살고 싶은가요?』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정신의 틈을 뚫고 들어온다. 고막을 울려 전해지는 파장의 소리가 아닌 생각에서 생각으로 전해지는 텔레파시와 같다. 아이는 잠깐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살폈지만 주변은 물만 가득 차 있다. 위쪽을 쳐다보았지만 위쪽도 역시 간간히 약한 빛이 눈에 뜨일 뿐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살고 싶으면 고개만 끄덕여요. 제가 당신을 구해 드리겠어요.』
구해준다구? 아이는 몇 초간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곧 그 질문에 대해 긍정의 대답을 해야 할지 부정의 대답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그런 여자에게 미련을 가지지 말아요. 이 세상에는 그녀보다 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여자가 많은걸요.』
갑자기 아이의 눈앞에 수많은 여자들이 나타난다. 생김새가 가지각색이다. 옷을 입고 있는 여자, 옷을 입지 않은 여자가 있다. 또한 검은 피부가 있고, 하얀 피부도 있으며, 화려한 장신구를 잔뜩 찬 여자나, 가볍게 원피스 하나만을 걸친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환하게 웃고 있고,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미인들이라는 점은 공통분모였다. 처음 보는 여자들의 향연에 아이는 정신이 황홀해짐을 느꼈다. 정말 이 세상의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기분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알겠어요? 한 여자 때문에 목숨까지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 말에 약간 마음이 흔들린다. 구지 이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 그녀를 잊어야 하는 것일까? 아이는 약간의 회의가 든다. 그리고 그 약간의 회의가 호수에 던져진 돌에 의해 생긴 물결처럼 그의 정신을 흐트려 놓기 시작했다.
『어서 대답해줘요. 너무 늦으면 구해드릴 수가 없어요.』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 말고도 여잔 얼마든지 있다.'
첫댓글 뭐여 이 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