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하문(不恥下問)
아니 불(不), 부끄러워할 치(恥), 불치(不恥)라 함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뜻이고, 아래 하(下), 물을 문(問), 하문(下問) 이라함은 ‘아랫사람에게 묻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불치하문’이라 함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아무리 지위가 낮고 신분이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모르는 부분은 알 수도 있으니,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자기가 모르는 것을 묻는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된다는 의미이다.
불치하문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위나라에 공어(孔圉)라고 하는 대부가 있었는데, 죽은 뒤에 시호를 문(文)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공문자(孔文子)라고 불렀다. 이 일을 두고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어느 날 공자에게 “공문자는 왜 시호를 문(文)이라고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자공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 공문자가 남의 아내를 강제로 취하는 등 평소 행실이 도저히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공문자의 인간성이 이와 같았는데도 시호를 ‘문’이라고 했기 때문에 자공이 의아하게 여겨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
시호(諡號)는 선왕의 공적이나 학자·관료의 행적을 칭송하여 그가 죽은 뒤 임금이 추증(追贈)하는 이름을 말한다. 시호법에서 문(文)이라는 글자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퇴계선생의 시호를 문순(文純), 이율곡선생의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했으며, 정약용선생은 순종으로부터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렇게 문(文)이라는 시호는 학덕을 칭송하는 시호인데, 행실이 좋지 않았던 인물에게 붙이는 것이 의아해서 공자에게 물었던 것이다.
그 물음에 공자는 ”그가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했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시호를 문이라고 한 것이다.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文也: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문야)” 라고 대답했다.
‘불치하문’은 바로 공자의 이 말에서 유래한 성어로, 진실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기꺼이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있다.
물어보는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부귀빈천을 구별하지 않는다. 공자 같은 성인도 뽕 밭에 있는 아낙네한테 구슬을 꿰는 방법을 물어 구슬을 꿰었다. 이를 공자천주(孔子穿珠)라고 한다.
어린아이도 그 지혜가 어른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어린아이한테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 보아야한다. 50대~60대라고 하더라도 손주같은 어린 유단자 소년한테 자기가 잘 모르는 바둑을 주저 없이 물어보아야 한다. 그래야 바둑이 는다.
‘위지(魏志)’라는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위나라 무제의 아들인 ‘창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아주 재기가 있었다. 그래서 대여섯 살 때 이미 어른과 같은 지혜가 있었다. 어느 날 오나라의 손권이 커다란 코끼리를 위나라에 보냈다. 무제는 코끼리의 체중을 알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그 방법을 신하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잴 방법을 생각해 내는 자가 없었다. 그때 어린 창서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 코끼리를 커다란 배에 태워서 그 무게 때문에 배가 물에 가라앉는 곳에 표시를 하세요. 그리고 따로 돌이라든지 나무의 무게를 재서 이것을 배에 싣고 그것을 비교해서 잰다면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대로 실행해서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홍섬(洪暹) 같은 경우이다. 홍섬이 여섯 살 때 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니, 그 아버지께서 베개를 베고 낮잠을 주무시는데, 뱀이 아버지의 가슴과 배 위에 가로 걸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를 알고 있었으나, 뱀이 깨물 가 두려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목석과 같이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홍섬은 즉시 수풀 가운데로 가서 개구리 서너마리를 잡아와 그것들을 땅위에 풀어놓으니 개구리들이 뛰어 흩어졌다. 뱀이 이에 똬리를 풀고 사람을 놓아두고개구리를 쫓아갔다. 이래서 아버지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홍섬은 지혜롭기가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자라서 과거급제하고 선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무릇 배우기를 좋아하면 자동적으로 궁금한 것이 많기 마련이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필자는 과거에 대학교 학장을 하면서 10여 년간 강의를 했다. 강의할 때, 질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듣는 학생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수준이 높고 배우려는 의욕이 왕성한 집단에서는 자연히 강의내용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수준이 낮은 그룹에서는 질문도 없고, 그저 강의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논어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이를 “삼인행필유아사언 (三人行必有我師焉)” 이라고 한다. 길을 같이 가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본받아 나도 인격을 수양하고, 나쁜 사람이 있으면 그의 나쁜 행실을 거울삼아 나의 행실을 되돌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나의 스승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라고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이 말했다. 알려면 배워야하고, 배우려면 누구한테나 물어 보아야한다. 배우지 못하면 무지(無知)하게 되고, 무지하면 남한테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
업신여김을 한자로 모멸(侮蔑)이라고 한다. 모(侮)자는 사람 인(亻)과 매양 매(每)가 합쳐진 글자이다. 매일 매일 배우지 않으면 머릿속이 텅 비어 다른 사람에게 멸시(蔑視)당한다는 뜻이다.
모멸당하지 않으려면 배워야한다. 배우려면 자기가 모르는 것은 체면 차리지 말고, 계급장 떼고, 서슴없이 아무에게나 물어야한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2023.8.27)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