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은 조선 왕조의 4대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이다. 전통적으로 남향으로 대문을 내는 우리 풍속만 보더라도 남대문이 가진 의미는 지극히 크다. 남대문은 방위를 떠나 대외적인 출입의 기준점 역할을 한 곳이다. 다른 나라로 나가는 사신을 전송하고 다른 나라 사신들을 맞아들인 문 역시 남대문이었다. 그 남대문의 편액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한 것은 우리나라가 ‘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곳이며 누구든 우리의 도성을 드나듦에 있어 예를 다하라는 엄숙한 가르침을 표현한 일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예를 매우 중요시해왔다. 이렇듯 예를 중히 여긴 까닭은 예가 도를 발현해내는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는 어떤 것인가? 도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이치대로 살며 마음을 편히 하는 일이다. 또한 도는 원래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미덕을 일컫기도 한다. 우리의 선인들은 그런 도의 현실적 구현을 예라고 믿고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숭례문은 우리 민족이 도와 예를 실현하고 있음을 표현한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방예의지국’, 숭례문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몸소 대변해주는 문이었던 것이다.
그 숭례문이 어이없는 방화로 인해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은 것은 아무리 마음을 넓게 가져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건립 이후 갖은 내란은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 정유 양란에도 굳건히 견딘 문이 숭례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전재했고 625동란에서도 의연히 그 모습을 지킨 것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그 어려운 시기를 다 이겨낸 숭례문이 요즘 같은 평안한 시대에 오히려 화를 당해 전소했다. 과연 이것을 우연한 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우리나라는 더 이상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가 예전의 끈끈하고 두터웠던 예와 도와 정을 느끼지 못한 채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물론 호적조차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은 것인 양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부부의 이혼율은 세계최고의 수준에 이르렀고 제자가 매 몇 대 맞았다고 스승을 경찰에 신고하는 나라가 된 지도 오래다. 대부분의 친구는 내신 성적의 굴레를 넘지 못한 채 무한 경쟁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학교마다 폭력서클과 왕따 분위기가 팽배했다. 과연 이러고서도 숭례문을 지니고 있는 국민으로서 그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인가?
물론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려운 간난을 다 물리치고 의연히 제 모습을 지켜오던 숭례문이 이렇게 전소된 것을 마냥 인재로만 규정할 수 있을까? 화재발생이후 무려 50대의 소방차가 달려들어 다섯 시간 넘게 물을 끼얹었다. 아무리 회벽칠을 해서 방수가 잘 된 벽이라고 하지만 그 많은 소방차와 소방관이 달려들어서도 끄지 못한 불이었다. 지난 밤 숭례문의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줄기를 보면서 저 정도 물을 뿌렸으면 응당 불이 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데 결국 숭례문 편액이 떨어지다 못해 건물 자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과거에는 나라에 큰 사고가 생길 경우 위정의 우두머리인 국왕들이 겸허하게 자중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하늘이 왕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왕이야말로 도를 지키고 예를 행하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노무현정권이니 이명박인수위 등을 따지기 이전에 위정의 선두에 선 사람들부터 겸허하게 이번 사고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미 현정권은 국민들에게 치명적일 정도로 신뢰를 잃은 정부다. 국민에게 행했어야 할 도와 예를 잃어버린 채 교묘한 말장난만 일삼은 끝에 민생과 경제와 교육과 문화를 다 망쳐놓은 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일만 해도 행정수도 운운의 파장을 미봉책으로 생색내기 위해 문화재청을 대전으로 옮겨 놓음으로 인해 사고를 키웠다는 후문이다. 문화재청 관련자들이 대전에서 출발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효율적인 화재진압을 못한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새로 출범할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도와 예를 잃은 정부라는 멍에를 쓴 채 출범하는 정부가 되었다. 어쩌면 숭례문은 경제 논리에 편승해 도와 예를 무시한 채 억지로 출범하는 차기 정부를 준열히 꾸짖고자 스스로 그 몸을 태운 것인지도 모른다. 온갖 수업을 영어로 진행해야겠다고 벼르는 새 정부다. 나를 버리고 남만 높이는 것 역시 예가 아니다.그것을 모른 채 함부로 국민을 제 편인 양 착각하는 새 정부는 이번 일을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역시 지나치게 결과론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국보 제 일호로서 우리 민족의 자존과 영광을 지켜온 숭례문이 이렇듯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단순한 화재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다. 방화범이 다른 곳도 아닌 숭례문에 불을 지른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 땅에 예와 도가 멸절하고 있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불탄 숭례문을 보며 현정부와 차기정부는 물론이고 국민 모두가 겸허하게 반성하는 계기를 삼는 것은 어떨까? 앞으로 다시 복원될 숭례문을 지켜보며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예와 도를 다시금 되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숭례문의 전소에 마냥 아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첫댓글오류들... / 1. 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쳐서 서울성문 중 정문 격인 남대문에 '예' 자가 들어갔다가보다, 동서남북 = 인의예지 를 대응시키다 보니 남쪽에 '예' 를 넣게 되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있지 않을런지? 초기의 조선이 그렇게 '예' 를 중시하는 나라인지는 모르겠음. 2. 유교의 '예' 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되살리기에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함. 삼강오륜에서 잘 보이듯, '예' 는 사람의 위아래를 명시하고 각자가 위아래에 걸맞는 위치를 고수하고 이를 어기지 않음으로서 사회의 '안정' 을 보장하는 일정의 규범이 됨. 나아가 국제질서로서의 '예' 는 국가간의 위아래를 설정하고
아랫국가가 윗 국가를 사대하고, 윗 국가가 아랫 국가를 돌보는 식의 중심-주변의 세계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함. 이런 의미에서 '예' 는 일종의 국제 레짐 역할도 함. (예의 관점에서 이성계의 4불가소 중 '이소사대' 는 틀린 말이 아니지요) 이는 국내적, 국제적인 현 질서, 현 체제의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만, 현 체제가 갖는 불합리성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막는 역할도 함. 이런 '예' 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필요한지는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용법에 따라서는 '예' 라는 그 수직적이고 엄격한 규범을 잘 지키는 '꼴통 나라'라는 비아냥으로 쓰일 수도 있을 듯 하다고 생각함)
3.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이 '남대문' 이라.... 조선에서 중요한 사신이라면 일본, 여진보다는 역시 명(청) 이었을 텐데, 중국 사신은 '서대문' 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듦. 사실 서대문 밖 독립문도 그 자리에 본디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있었던 자리일 정도니.... 게다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보내던 사행길도 남대문이 아니라 서대문에서 시작되어 의주를 지나 북경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음.
4. 마지막으로... 과연 '도'道 와 '예'禮 가 그리 궁합이 좋은 관계인지 솔직히 의심스러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대로 도를 '무위 자연' 의 개념, 즉 억지(인위)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극히 인위적, 제도적, 규범적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규제하는 '예' 와 상충된다고 봄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함. 예에 따르는 삶이 과연 자연스럽고 억지가 없는 '도' 의 모습을 띨런지... 오히려 예와 도는 상충된다고 생각함. 굳이 비유하자면, '예' 는 보다 공동체주의/집단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도' 는 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을 듯함.
저는 예를 현대적 의미로 풀어썼는데 예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주셨습니다. 세겨 듣겠습니다. 그러나 도에 있어서는 생각해볼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는 도가 계열의 사람들과 유가 계열의 사람들이 각각 따로 정의합니다. 도가 계열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유가 계열의 도는 분명히 하늘의 뜻 혹은 가장 큰 규범같은 것을 뜻합니다. 제가 인용해서 쓴 도는 두 가지를 아울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지적에서 보듯 이 카페가 역사카페란 것이 실감이 납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의견을 올리겠습니다. 미주가효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오류들... / 1. 예를 최고의 덕목으로 쳐서 서울성문 중 정문 격인 남대문에 '예' 자가 들어갔다가보다, 동서남북 = 인의예지 를 대응시키다 보니 남쪽에 '예' 를 넣게 되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있지 않을런지? 초기의 조선이 그렇게 '예' 를 중시하는 나라인지는 모르겠음. 2. 유교의 '예' 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되살리기에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함. 삼강오륜에서 잘 보이듯, '예' 는 사람의 위아래를 명시하고 각자가 위아래에 걸맞는 위치를 고수하고 이를 어기지 않음으로서 사회의 '안정' 을 보장하는 일정의 규범이 됨. 나아가 국제질서로서의 '예' 는 국가간의 위아래를 설정하고
아랫국가가 윗 국가를 사대하고, 윗 국가가 아랫 국가를 돌보는 식의 중심-주변의 세계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함. 이런 의미에서 '예' 는 일종의 국제 레짐 역할도 함. (예의 관점에서 이성계의 4불가소 중 '이소사대' 는 틀린 말이 아니지요) 이는 국내적, 국제적인 현 질서, 현 체제의 유지에는 도움이 되지만, 현 체제가 갖는 불합리성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막는 역할도 함. 이런 '예' 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필요한지는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용법에 따라서는 '예' 라는 그 수직적이고 엄격한 규범을 잘 지키는 '꼴통 나라'라는 비아냥으로 쓰일 수도 있을 듯 하다고 생각함)
3.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이 '남대문' 이라.... 조선에서 중요한 사신이라면 일본, 여진보다는 역시 명(청) 이었을 텐데, 중국 사신은 '서대문' 을 통해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듦. 사실 서대문 밖 독립문도 그 자리에 본디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이 있었던 자리일 정도니.... 게다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보내던 사행길도 남대문이 아니라 서대문에서 시작되어 의주를 지나 북경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음.
4. 마지막으로... 과연 '도'道 와 '예'禮 가 그리 궁합이 좋은 관계인지 솔직히 의심스러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대로 도를 '무위 자연' 의 개념, 즉 억지(인위)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지극히 인위적, 제도적, 규범적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규제하는 '예' 와 상충된다고 봄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함. 예에 따르는 삶이 과연 자연스럽고 억지가 없는 '도' 의 모습을 띨런지... 오히려 예와 도는 상충된다고 생각함. 굳이 비유하자면, '예' 는 보다 공동체주의/집단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도' 는 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을 듯함.
저는 예를 현대적 의미로 풀어썼는데 예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주셨습니다. 세겨 듣겠습니다. 그러나 도에 있어서는 생각해볼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는 도가 계열의 사람들과 유가 계열의 사람들이 각각 따로 정의합니다. 도가 계열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지만 유가 계열의 도는 분명히 하늘의 뜻 혹은 가장 큰 규범같은 것을 뜻합니다. 제가 인용해서 쓴 도는 두 가지를 아울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지적에서 보듯 이 카페가 역사카페란 것이 실감이 납니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의견을 올리겠습니다. 미주가효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