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행복을 만드는
기술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
행복을 찾았고, 어떤 사람은 찾지
못하는게 세상살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미 가지고있는 행복을 알아차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해
자기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하는가.
사전적인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고
흐믓해 하는 상태라고
한다.
만족은 마음에 흡족한
것이며,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흐믓한것은 마음에
흡족하여 불만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주체는 ‘마음’
이다.
행복은 물건처럼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는게
그 뜻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마음’ 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마음이다. 따라서 행복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행복의
요체가 거기에 있다.
이 세상에는
200여개의 나라가 있으며,
우리는
그중 13번째로 잘 사는
나라다.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나라에 잡혀온 소말리아 해적이 자기나라의 웬만한 호텔보다
우리나라 유치장이 더 좋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세계의 부자나라들 클럽이라는 OECD 회원국은
34개나라다.
우리는 그
안에서도 13위의 경제대국이다.
스칸디나비아에 있는 나라들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는
분명
우리보다 잘 살지만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나머지는 우리만
못한 것이 한눈에 보인다.
단 두 세대전, 우리는
다음 끼니를 걱정했다. 고기는
설과 한가위에만 맛볼 수
있었다.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그게
어디든 걸어다녀야 했다.
미군의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지금 분리수거로 내 놓는 물건들은,
그때라면 전부
집어가는 유용한 물건들이다.
자고 일어나면 방안의
물이 어는 추위속에서 살았으며
제한송전으로 석유등을 쓰고
살았다.
지금 우리네
살림은, 천지가 개벽한
만큼 달라졌으며 모두가 부자들이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
글로벌마켓인사이드가 10개국
5,190명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에서, ‘매우 행복하다’ 고
대답한 한국인은 7% 였다.
브라질이 57.2%로 가장 높았다.
우리국민의 대다수는 ‘매우
행복하지 않은 것’ 이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표정을 보면 이 수치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있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불같이 커져서 주먹다짐이 오가는 심성(心性)도
마음속이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 13번째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치고
앞뒤가 안맞는
현상이다.
이번 설문조사에 관여한 12명의 해외자문단은,
‘한국인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겪는 과정에서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 이제는
부(富)의 증가가 곧
행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고
충고하고 있다.
그들은 체험을 통해 돈이
곧 행복이 아님을 알고있는
것이다.충분조건과 절대조건의 차이를
알고있다는 얘기다.
압축성장이 건너 뛴 많은 과정중
돈과 행복에 대한 ‘상대적 관계’ 도
포함된다.
학습이 없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매우
행복하지 못하다’ 고 느끼는 조건중,
첫째는, 돈이
곧 행복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돈은 행복할수 있는
많은 조건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돈은 ‘충분조건’ 이다.
돈의 가장
큰 속성은 ‘구매력’ 이고 그건
곧 ‘편리’와 직결된다.
그러나 아무리
편리해도 그 편리자체가 곧 행복은
아니다.
값비싼 진수성찬도 소태처럼 써서
못 먹을 수 있고, 값싼 라면도
꿀맛일 수 있는게 그 차이다.
돈이 곧 행복이라면 그
진수성찬은
언제나 맛이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없다.
벌면
더 벌고싶은게 돈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재물을
쌓을 수는 없다.
로마인들은 돈을 ‘소금물’ 이라고 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 심해지고 계속
마시면 결국은 죽게된다.
돈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돈이 곧 행복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돈‘
때문에 다친 사람들이 많다.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의 끝이
교도소 담장안에서 마감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모두가 ‘돈’
을 탐하다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무섭다. ‘매우
행복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남과 자기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정체성 부족 때문이다.
비교는 경쟁을 낳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를 ‘남’ 을 통해 보려는
착시현상까지 가지게
된다.
인간은 그게 누구든, 속이 비어있으면
남과 자기를 비교한다. 그
속이 꽉찬 사람은 ‘나는 나다’ 하면서 산다.
이런 사람들의 안중에는 비교해야할 ‘남’
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과 자기를 비교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박탈감이 생기고 그게
열등감으로 연결되면 불행해
지는것이다.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그게 지나치게 되면
경쟁자체가 목적이 되어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강박관념은 그 다른 이름이
‘감옥’ 이다.
이 증세가
커지면 우울증이 생기고 극단적
으로는 자살에 이른다.
때문에 남과
자기를 비교 하는것은 대단히
위험한골목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수 없을만큼 우리사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중 하나가, 오직 ‘일등’ 만 있는
현실이다.
2,3등도 사실은 일등에
버금가는 실력임에도 오직 일등, 최고만이 존재 하는게
우리 사회다.
언제나 일등은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전혀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하나만 ‘행복’ 하고 나머지
모두는 ‘불행’ 할수밖에 없는 이상한
풍토다.
‘일등’ 은
철저히 배타적이다.
나머지를 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더더욱 일등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살벌한 사회가
된것이다.
오직 ‘결과’ 에만 매 달리는,
모든 중요한 ‘과정’ 을 인정하지 않는
무서운 사회인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과정들’ 이 쌓여 일등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일등만 사는 세상은 아니잖는가.
2등도 3등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1,2,3등 모두가 사실은
우수한 것이다.
그 차이라는게 종이한장 정도다.
그걸 알아야 한다.
‘행복’ 은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낄수 있는 마음은 만들어 질수 있는게
아닐까.
휴넷의 대표이사인 조영탁이 이런말을 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행복은
바이올린 연주나 자전거
타기처럼 배울수 있는 기술이다. 사람은
행복해 지겠다고 마음먹는 만큼
행복해 질수있다. 행복은
지금 당장 취할 수 있는
선택이다.‘
들어보면
이게 체험에서 나온 얘기임을 곧 알 수있다.
행복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행복은
당장 취할수 있는
선택이다.‘
무슨 말인가. 이미 자기주변에 주어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차지하라는 것이다.
기술이 무엇인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내 생활에 적합하도록 이용하는
수단이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내일
나타나는 것도 아닌,
지금 내 주변에 있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선택이고 기술이 된다.
‘행복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을때 정말 행복하다. 책을 읽으면 2천년, 3천년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수
있고,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눌수 있다.
공맹의 가르침은
물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도 받을수
있다.몰랐던 것을 알게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깨달을때의 기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다.
책을 통해 예수에게 질문할 수도 있고
베드로를 흘겨볼 수도 있다.
법정의 글들을
읽으면서 또다른 신앙의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장하준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진 사회체제의
깊숙한 모순들을 알게된다.
이제 사람들은, flipboard라는 최첨단의 앱 으로 글을
읽지않고
눈으로 보기만 한다.
보는 것은 일과성이고 표피적이고 표면적이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은 사고-思考, 생각을
요구한다.
보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은 표층에서 마감하지만 읽는 행위는
심층에 이르게 해 준다.
인간은 심층에
이르지 못하면 ‘인생’ 을 알 수없다.
겉돌다 가는
것이다. 앱의 시대에 종이책을 고집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책은 단지 간단한 상품이 아니다.
책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문화적인 인류의
진정한 유산이다.
글자와 읽기가 있기전 시대를
선사시대-역사가
있기 이전의 시기라고 말 하는게 그 뜻이다.
독서는 인간이
구축한 대단히 견고한
문화의 기술이다.
앱 때문에 종이책을 손에서 놓는 것은
반쪽인간이 되겠다는 얘기다. 앱과
종이책은 필요에
따르는선택의 조건일 뿐이다.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일 수는 없는게
세상이다.
나는 음악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아니 음악을
지극히 사랑한다. 교향곡을 연주하는 관현악단-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내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현악기, 목관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연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심도있는 음악감상은 그
자체가 이미 ‘철학’ 이다.
그래서 음악은 ‘영혼이 거니는 뜰’ 인 것이다. 훌륭한
연주가 주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높은경지의 행복이다.
한편, 학문의 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자기성장’ 은
곧 기쁨이며 행복이다. 자료들을 찾는 일, 그것들을 읽고
소화하는 일, 그리고 글을쓰는 일련의 작업은 인간만이 할
수있는 문화적인 기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행복,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행복,
글을 쓰면서 느끼는
창작에의 기쁨과 행복, 만족감은 모두가
일상적인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다.
찾아내서 활용하면 ‘행복’ 이고 방치해
두면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다.
나는 언제나 ‘값’
과 ‘가치’에서단연코 가치를
선택하는 생활을 한다. 값-물질-돈은 일시적이고 가변적 이지만,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내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언제나 가치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 라는 성경속
바울의 가르침은 그래서 참이다.
왜 법정이 ‘무소유’ 를 가르쳤겠는가. 법정은
떠났지만 그 말씀-정신은 지금도 내
곁에 살아있는 것은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이다.
며칠전 조용현은
자기의 고정칼럼에서 이런 얘길했다.
장성 축령산의 세칸
오두막집에서 추운겨울을 지내고 있는데
장작,
등산화,
뜨거운차(茶)가
자기의 세 친구라고 했다.
눈쌓인 언더길을 오르내리는데는 등산화만한게 없고, 밖에서
언 몸도 온돌방에 돌아와 마시는 뜨거운 차 한잔이면 녹고, 아궁지앞에 쭈구리고 앉아
장작과 참나무를 땐 후 방에
들어와 구들장에 등짝을 대고 누우면
온몸이 따뜻해 진다. 그는,
추운겨울에는 등만
따뜻해도 인생의 반절은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고
썼다.
읽을수록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등만 따뜻해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그 ‘기술’ 만은
평가해야 할 것같다.
나도 나대로의 원칙이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개성적(個性的) 이어야 한다’ 는게
그것이다.
행복은 주관적인 자기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게 악(惡)이 아니라면,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내식대로 사는게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믿고있다.
잘 살펴보면 행복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걸 발견 하는 것도, 나를
위해 활용하는 것도, 그래서 ‘기술’ 이다.
‘매화를 찾아
세상을 헤매다 돌아오니
제집뜰에 매화가
피어있더라’ 는옛 어른들의 말씀이 바로 그
뜻이다.
by/yoro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