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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으로 외람되게 윗글을 쓰고 난 후, 나무위키에서 찾은 내용입니다.
1. 십일조란
그리스도교에서 자신의 수입의 10%(=1/10)을 헌금 등으로 납부하는 것이나 수입이 수익인지 수입인지를 따져야 한다. 물론 후자가 더 헌금액수가 많아진다. 구약의 원어를 살펴보면 '테부아'로서 열매, 증가, 수익이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원래는 농사를 지어서 나온 수확물의 십분의 일이었다. 목축업은 전통적으로 첫 새끼를 바치는 것이 원칙이다. 양계장으로 따지면 초란은 원래 다 헌금해야 할 것. 현대사회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월급 생활자들과 자영업자로서는 실질적으로 비용을 공제한 수익이 원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월급생활자들이 많아서 보통 한국의 교회에서는 달마다 걷지만[2] 성서에 따르면 연마다 걷어야 하는 것이고,[3] 논리적으로 수익보다 빚이 많아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입이라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성경 신명기 14장 22절부터 29절까지로, '매년 토지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예배하며 먹고 마시는 것과 삼년마다 너희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성중의 고아와 과부를 먹이고 레위 지파인들에게 주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다음 구절은 7년마다 빚 탕감하기... 원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설교 후 빵과 포도주(즙)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고, 유대교 예배도 희생제물을 불에 태우는 등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과정에서 제거되는 부위는 주로 피와 내장 부위였다. 남은 제물의 부위를 굽거나 삶은 고기나 빵, 과일 등의 음식들을 예배자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 후 같이 밥을 먹는 것은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 그리고 그 구절의 유래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던 노략물의 10분의 1 구절.[4]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 교구민(敎區民)으로부터 수입의 1/10을 징수하기도 했는데 '10분의 1세', '10분의 1교구세'라고도 했다. 고대의 유대교도에게 수입의 1/10을 하느님께 바칠 것을 명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연유한 것인데,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기도 하였고, 바쳐진 것의 9/10은 레위인들의 소득을 위해서, 1/10은 제사장들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점차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1078) 및 1179년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의 교회제도 개혁을 통하여 영주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참고로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유럽에는 십일조가 없다'라는 오해가 퍼져있는데, 당연하지만 유럽에도 십일조는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교가 국교였던 유럽국가들은, 십일조가 세속법에 의해서 보장이 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권에서 차츰차츰 교권과 속권이 더 엄격하게 구분되며 '세속법에 의한 십일조 보장'이 폐지되었기에 이런 오해를 부른 것이다. [5] 어차피 한국에서는 천주교든 개신교이든 국교가 된 역사가 없고, 따라서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 십일조는 역사상 언제나 '세속법이 아닌' 순수한 종교적 의무의 영역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 이후의 유럽권 교회와 유사하다. 물론 종교적으로 의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신자의 경우 신부나 목사와 상담하여 사정을 설명하면 얼마든지 면제받을 수는 있다. 중세와의 차이점은, 이것을 세속법이 보장해주느냐 마느냐이다.
2. 대한민국 개신교에서의 십일조
개신교의 경우, 걷히는 헌금에 대해 지출하는 구제비는 3.8% 미만이기 때문에, 이들이 걷는 십일조는 사실상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라고 하기가 어렵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십일조로 받은 돈은 100% 구제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를 착복하고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제사장에 속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도 십일조를 주라고 했으니 목사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주장이 있으나, 개신교 교리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망했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는데 이것은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누구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증표라고 했으며, 개신교를 창시한 마르틴 루터가 제창한 '만민사제주의'에 의하면 목사는 제사장에 속하는 사제도 아니고 흔히 '평신도'라고 불리는 일반 교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애초부터 천주교에서 사제들이 갖던 배타적인 권한을 부정하면서 나온 것이 개신교였다.
개신교에서 구원을 특히 강조하는 경향에 대해 십일조를 이용하여 비꼬는 유머가 있다. 왜 구원을 주느냐고 하니까, 원래는 10원을 주려고 했지만 십일조로 1원을 떼가서 결국 잔액인 9원만 준다는 식의 블랙 코미디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11조 내고 9원 받는다는 개그도 있다. 십일조가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만연하여 이곳저곳에서 폐단을 내보이는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2가지로 첫째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여 마치 많이 내야만 믿음 있는 사람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교회에서의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많은 헌금을 강요한다던가, - 아래 반론 참고) 2번째로 목사와 그 처자식의 생계, 필요를 넘어서 과도하게 물질적인 부를 안겨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에게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할 때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서의 차를 넘어서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위해(특히 다른 교회에게) 고급차, 혹은 외제차를 준다던가 말이다.
3. 비판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느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느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 천벌받을 것들아, 너희 백성은 모두 나를 속이고 있다. (공동번역)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개역개정)
말라기 3장 8-9절
현대 개신교 교회에서 목사들이 주로 하는 설교이다. 목사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잘 내지 않는 성도가 많으면 주로 하는 설교인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을 도둑질하는것은 저주받을 행위이므로, 십일조는 꼭 지켜야 하고 꼭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저 구절은 일반 성도가 아닌, 목사에게 하는 소리이다.
보통 3장 8절과 9절만을 읽게 하는데, 앞뒤 문맥을 읽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십일조로 받은 헌물을 제사장(현대의 목사)들이 사사로이 사용한 것. 십일조는 100% 과부와 고아, 거지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돈이다. 즉, 목사가 십일조를 받았으면 한치의 흠도 없이 그 십일조의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고아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목사들 중, 소수의 개혁파 목사들(무교회, 무보수 목사)을 제외하면, 모두가 저 구절에 걸린다. 기독교인들, 특히 목회자에게 성경은 양날의 검이며, 남을 베려다 자신이 베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다니,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실, 이 단락만으로도, 국내의 십일조 변명은 한번에 정리가 된다.
만약, 십일조를 받았다면 모든 목사들은 그 십일조를 한푼도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십일조를 모두 기부하거나, 모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단 한푼도 이 외의 용도에 벗어나는것은 하나님이 명시한 저주받을 행위이다.
1. 위의 비판에도 잘 드러난다. 일단 구약 시대 레위 지파 제사장들과 현 개신교 목사들은 동일 위치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제사장은커녕 성직자조차 아니다. 그냥 평신도일 뿐. 이는 개신교의 근본정신인 만인사제주의를 무시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목사의 생계를 내세워 십일조를 합리화하는 것도 병크다. 목사라는 직업 자체는 일종의 자원봉사로서 목회 활동 자체는 수익구조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십일조 이외에 매주마다 걷는 헌금은 정작 따로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교단의 지원도 받는다. 또 목사 개인의 강연활동 등으로 투잡을 뛸 수도 있으며, 현대에서는 맞벌이가 일반적이기에 배우자나 직장이 있는 자녀 등 외적인 수입원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기에 십일조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유대교 항목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랍비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기 직업을 따로 가지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예 종교인로서 무소유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도 분명 있다. 애초에 한국의 개신교에서 교회의 빈곤이란 개척교회 시스템에서 비롯된 성장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2. 흔히 들을 수 있는 변명 중에 하나가 건축자금이다.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구휼보다 앞서는 교회의 목적이므로 허술하게 할 수도 없다.'고 하는 주장인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반대에 있는 주장이다. 예수는 그 호화로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선언했으며 통곡의 벽 빼고 그대로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 건물도 여기 해당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그 전에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27][28] 라는 구절, "너희 중 가장 낮은 자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는 것이다."라는 구절도 있으며, 최후의 심판 시에 일생 동안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목 마르고 나그네 된 주변의 헐벗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지 않은 것이 예수 자신을 돕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돕지 않은 이들을 악인으로 분류하여 지옥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자기 주변의 가난하고 헐벗은 예수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교회 건물 마련하는 것이 앞서는 목적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십일조에 대한 비판은 '청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종교가 돈을 요구하고, 그 돈을 구제나 사회정의 구현 등에 쓰는 대신 목사의 사업자금 내지는 비자금으로 쓰이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애초에 십일조가 정말로 목사 생계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돈이고 목사가 그 돈을 최소한 구제하는 데라도 잘 썼다면 십일조 비판이 나오기나 했을까?
3. 대부분의 교회에서 권사, 장로의 직분을 줄 때 정기적인 십일조의 여부를 확인한다. 가장 개혁적이라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을 하던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교회의 경우에도, 권사 임직시 200만원, 장로 임직시 1,000만원의 헌금을 여러 구실로 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부 이단 드립을 치겠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독일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정부에서 교회세를 떼어가서 종교예산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차라리 독일처럼 정부에서 관여하여 교회세를 떼어가면 모를까, 한국의 개신교와 목사들은 분류상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면서도 단 1원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
또한 주마다 주보에 감사헌금 및 십일조를 납부한 사람들의 실명 명단을 공개하는 교회가 대부분인데다, 그것이 일정 액수, 이를테면 10만원 이상이면 따로 명단을 올리기도 하는 교회가 상당수이기에, 개인의 자유로 내는 것이라는 말도 사실상 궁색하기 이를 데 없어진다. 위의 상단 짤방을 다시 보자.
4. 십일조라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 구약 율법의 일부이다. 예수가 와서 구약 율법을 일일히 지키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였음에도 같은 구약 율법인 십일조는 지키도록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는 모순이 있다. 또 십일조로 마련된 금액은 성경대로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써야 하는데, 십일조를 포함해서 교회 내 헌금의 8할 이상은 목회자 월급과 성전건축에 들어가는데 이에 반해 구제비는 3.9% 미만이라는 통계자료가 존재한다.[29] 또, 십일조 자체가 강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십일조 납부를 장려하는 주보의 문구나 목사의 설교를 대부분의 교회라면 흔히 접할 수 있다. 또 십일조를 착실히 작정하였다는 록펠러를 앞에 내세워 십일조를 권유하기도 한다.즉 십일조를 강제하지 않지만 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산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 내면 그만'이라는 옹호론의 가장 큰 문제는 만약 십일조가 '안 낼 수 없고, 내도록 강요하는 것'이라면 응당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할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물론 교회가 십일조를 강도처럼 뜯어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목사 이하 교직자들은 죄다 쇠고랑 찼을 테니까. 그나마 강탈해 가지는 않으니 이런 원론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끼리 우리 맘대로 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라는 주장은 십일조 작정에 대한 본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십일조 옹호론에 대한 근거로서 적절치 않다.
5. 또 복음서나 사도행전 등등에서 12사도들이나 바울이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을 들고 나오는데 그러한 사례금을 어디까지나 '사례금'의 명목으로 받은 것이지, '십일조'라는 이름으로 받아 주머니에 넣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받은 사례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이고 최소한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 조금 더 되는 금액이었지, 매달 부를 축적할 정도의 받은 것은 아니었다.
6. 가난한 과부 이야기는 오히려 '십일조를 착실하게 내라'보다는 '종교인들아, 가난한 사람들 등쳐먹지 마라'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일화이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신자가 외람되게 낀거죠
이제 댓글 하나 달렸네요
복받으실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