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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 詠池中團石‚ 詠池中築石種菊‚ 觀天下圖‚ 望月臺‚ 吟詩‚ 次先集韻戱呈權游餘-以鏺‚ 堂前小瀑‚ 夢覺‚ 夏日暴水方塘汎溢所畜魚族夜從溢處亡去‚ 孤山草堂次友人韻‚ 孤山雜詠‚ 謹次栗亭韻‚ 閒中謾詠‚ 瀑布‚ 六月十八日雨‚ 次柳上舍景輝-日祥-韻‚ 聞雲南消息有感‚ 寄權仲明‚ 陽山寺贈仁師‚ 時化驛‚ 別友人‚ 曉發果川‚ 謹次矗冷臺韻上仲父‚ 次贈張秀士器彦-萬杰‚ 輓辛慶山‚ 我無家行‚ 水田種蒿行‚ 偶成‚ 次權游餘韻‚ 槐亭講會韻‚ 山行‚ 輓張玧‚ 日洞潭上夜泛‚ 早春權游餘及世卿‚ 江興‚ 輓朴世說‚ 訪柳上舍不遇‚ 輓李參奉-尙逸‚ 題愛菊堂‚ 夜歸‚ 偶吟‚ 留客‚ 孤山‚ 春曉‚ 雪行‚ 戱呈權上舍雨中著簑笠還家‚ 雪中醉還‚ 詠月‚ 西江月餞春‚ 酬柳景輝醉歸-幷序‚ 九日贈金秋伯-兌一‚ 寄呈鶴城使君-張瑱‚ 問矮松‚ 矮松答‚ 輓權游餘‚ 輓尹上舍-商美‚ 謾詠‚ 秋日蘆翁見寄‚ 輓李在寬‚ 戱次黌堂諸友‚ 登鶴駕山望內延懷柳景輝‚ 秋日寓居阿飱里‚ 醉歌行贈柳景輝‚ 聞召命‚ 移竹‚ 自嘲‚ 向陽齋用晦庵韻‚ 李景儀宅敬次孤山先生白蓮歌‚ 秋日還京和薛少保韻‚ 七月旣望屛山夜泛‚ 樵夫詞‚ 牧童詞‚ 采蓮詞‚ 暮相思‚ 烏夜啼‚ 我面紅‚ 大雷行‚ 輓柳拙齋-元之‚ 次任道三寄花山伯李玄祚佳字四十韻‚ 贈李監司伯春-萬元‚ 次兪方伯-道一-韻‚ 碧樹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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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 楓嶽路次崔上舍-相殷-韻‚ 望海中漁冊‚ 大康驛次先祖韻‚ 靑烏‚ 仙遊潭‚ 鉢淵‚ 馬上折丹楓一枝分贈柳上舍‚ 夢泉庵‚ 普德窟次趙副學-持謙-韻‚ 靑鶴洞‚ 丹楓橋‚ 山映樓‚ 楡店寺‚ 雁門岾‚ 望毗盧峰‚ 天逸臺‚ 歇惺樓‚ 蓬萊山月歌‚ 金剛山‚ 朝望‚ 下山‚ 外水砧‚ 三峽橋馬上次柳上舍韻‚ 百川橋望隱仙瀑‚ 出山‚ 道中‚ 別山僧‚ 夜行‚ 降仙驛‚ 宿海上‚ 東海神廟‚ 石人臺大風‚ 送山人‚ 華陰橋‚ 天吼山‚ 立春日和祥雲丞琴文叔-聖奎‚ 用前韻和柳致中‚ 又次柳致中韻‚ 次祥雲丞韻‚ 東軒敬次松齋先祖韻‚ 臥仙臺‚ 巫山飛仙臺次霑上人軸中韻‚ 送姪兒還鄕‚ 次柳上舍‚ 觀打魚‚ 詠秋荷‚ 看竹‚ 登大關嶺‚ 洞山驛同扞城太守祥雲督郵聯轡下鏡浦臺‚ 降仙驛謹次先祖韻‚ 次祥雲督郵‚ 原城道中‚ 珍富驛‚ 蓮葉酒‚ 次贈李參判文若-泛‚ 次鳥嶺道中雜詠‚ 次贈曹君敘‚ 又次贈酒席韻‚ 又疊堂字贈文若-附原韻‚ 入洛後贈博泉‚ 洪行叔席上次贈博泉-附原韻‚ 次瓜背詩韻-幷序‚ 柳上舍日祥亦曾有是事其韻又同可異也更疊其韻贈日祥‚ 上元日道中次花山使君送行韻寄呈求敎鶴駕山中臺寺次六老座上韻 大殿春帖: 乘月往謝竹峯主人主人有詩次韻奉呈‚ 守歲‚ 疾風‚ 藏氷‚ 冬至‚ 立春日酬秋伯‚ 柳校理-世鳴-遷厝輓‚ 呈蘆隱鄭丈‚ 病中校長以酒相問適對客自酌頓覺愁圍稍解走筆草謝‚ 龍門席上次諸長老韻‚ 梧桐-庚午月課‚ 石榴‚ 芭蕉‚ 牧丹‚ 西湖柳‚ 讀書堂‚ 報漏閣‚ 慶會樓 大殿端午帖: 玉淵酬唱韻‚ 閒吟‚ 渡漢江‚ 輓朴參判-廷薛‚ 滯京述懷‚ 輓李進士-萬榮‚ 與李舜卿-華翊-酬唱‚ 送金吏部聖起-文夏‚ 權先達叔寬慶席謹次睡軒賦松齋先祖慶席詩韻‚ 輓金參判-賓‚ 送花山使君之任‚ 次山陰姜中樞回婚慶席韻‚ 寄柳上舍‚ 輓孫遇馹‚ 次校中小池韻‚ 天意‚ 輓李上舍-元才‚ 次丁丈‚ 敬次靜齋銘詩仰呈輓思庵座下-乙丑‚ 木齋洪先生輓‚ 輓沈判書-梓‚ 遊燈心寺次延陵君李-萬元-韻‚ 次蔡仲耆-彭胤‚ 道中敬次內舅芋園公贈行韻‚ 次潘孟陽元和布澤韻‚ 次杜工部暮春韻‚ 大谷寺次高麗李相國韻‚ 戱贈蘆洲‚ 次宣城李使君韻‚ 黌堂會罷呈蘆老‚ 輓人‚ 過中原阻閽‚ 次洪天敘‚ 春日謾詠‚ 輓李丈‚ 寄金校理天若-世欽‚ 滯京述懷‚ 遊武陵橋-橋在靑玉山中甘露寺下‚ 碧灘驛道中遇旱感吟‚ 次碧樹丞具-筴-韻‚ 和權春卿-斗寅-竹西樓韻‚ 用前韻酬李國材-棟完‚ 酬碧樹丞借魚梁‚ 次碧樹丞‚ 七月夜泛海‚ 除夕‚ 次兪使相韻‚ 酬金景昭-瑞呈‚ 李茂卿將行邀余敘別茂卿詩用松齋先祖按節時韻余感其意敬次‚ 移卜春陽‚ 題海印寺紅流洞僧帖‚ 題書封贈金正則-楷‚ 輓人‚ 次蘆洲臘日老杜韻‚ 輓金學詩‚ 掖垣直中次贈友人‚ 李存齋輓-徽逸‚ 洛山寺春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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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修撰疏 (1) | 1689. 3. 昌樂察訪으로 있던 중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어 올린 사직소이다. 天性이 어리석은데다가 다른 형제가 없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므로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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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獻納疏 (2) | 1689. 5. 27. 부수찬에 제수되어 상경하던 중 다시 헌납에 제수되어 所懷를 진달하며 올린 사직소이다. 配所에서 돌아오던 趙嗣基를 上疏로 인해 다시 遠地에 유배한 것은 지나친 처분이며‚ 吳斗寅‚ 朴泰輔는 仁顯王后를 폐위한 것을 잘못이라고 직간하였다가 유배되던 도중에 사망하였으니‚ 마땅히 노여움을 풀고 遺族을 위로하는 은전을 베풀고‚ 李尙眞(1614-1610)도 석방할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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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修撰疏 (5) | 1689. 다시 修撰에 제수되어 올린 사직소이다. 본인의 용렬함을 살피고‚ 병든 것을 불쌍히 여겨 削職해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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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乞郡疏 (6) | 1690. 4. 3. 교리의 직임을 遞免하고 지방관에 제수해 줄 것을 청한 소이다. 獨子로서 늙은 홀어머니의 병을 간호해야 하니 情理를 생각하여 지방관에 제수해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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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請還收將母上來之命仍乞歸覲疏 (8) | 1691. 모친을 모시고 上京하라는 왕명을 거두고 고향에 내려가 覲親하게 해 줄 것을 청한 소이다. 교리로 있으면서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였는데 과분한 王恩을 입으니 놀라울 뿐이며‚ 모친이 연로하여 먼길을 왕래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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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命賜老母衣資食物疏 (10) | 1691. 저자의 노모에게 옷감과 식물 등을 하사하도록 한 명을 거둘 것을 청한 소이다. 분에 넘치는 王恩을 거두어 安分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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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司諫疏 (11) | 1693. 司諫으로 있을 때 올린 사직소이다. 병든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臺諫의 言路를 개방하고‚ 공정하고 충실한 宰臣 몇사람을 가려 뽑아 특별히 우대하여 國事에 힘을 쏟게 할 것 등을 진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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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同副承旨疏 (15) | 1693. 동부승지에 승진한 후에 올린 사직소이다. 천성이 미련하여 감히 重責을 탐할 수 없으며 落傷한 후유증으로 행보가 어려우므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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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乞郡疏 (16) | 1693. 우부승지로 재직 중에 지방관에 제수해 줄 것을 청한 소이다. 고향에 계신 노모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연락이 왔으니 公事를 보는 가운데 틈틈히 어머니를 찾아뵐 수 있도록 지방관에 제수해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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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辭戶曹參議疏 (19) | 1695. 호조참의에 제수된 후에 올린 사직소이다. 병든 노모가 홀로 계시므로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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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承召至龍仁請歸省病親疏 (20) | 1695. 경기도 용인에 와서 올린 사직소이다. 사직소를 올리고 체직을 허락받지 못한 와중에 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나 용인까지 이르렀는데‚ 다행히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하니 고향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체직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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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三陟民瘼疏 (21) | 1697. 삼척부사로 재직 중에 민간의 폐단을 아뢴 소이다. 1695년 이후 흉년이 계속되어 곡식이 귀하고 商販과 交易도 끊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봄가뭄 후에 큰비가 내려 농지가 다 유실되어 백성이 살아갈 길이 없으니 廟堂으로 하여금 속히 周旋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아뢰고‚ 삼척에는 水田이 적고 읍의 재력이 미약하므로 旱田에도 給災를 허락할 것과 都護府의 예를 따르지 말고 田結의 다소에 따라 잡역을 부과할 것을 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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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鼎山書院請額疏 (25) | 1677. 경상도 醴泉에 있는 鼎山書院에 賜額을 청한 소이다. 정산서원은 1614년(광해군 6)에 士林들이 公議로 건립하였는데‚ 退溪 李滉과 月川 趙穆을 奉享하고 序次와 儀式은 모두 禮安 陶山書院의 院規를 따랐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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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丹山書院請額疏 (26) | 1693. 충청도 丹陽에 있는 丹山書院에 賜額을 청한 소이다. 丹陽은 僻邑으로 俎豆의 예가 오래도록 거행되지 못하였는데‚ 1660년(현종 1)에 수령이 나서서 禹倬과 李滉의 위패를 모신 서원을 건립하였으나 창립 초기에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곧 폐해질 염려가 있으므로 賜額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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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巖書院請額疏 (27) | 1693. 경상도 奉化에 있는 文巖書院에 賜額을 청한 소이다. 1604년(선조 37)에 도내의 사림들이 서원을 건립하여 李滉을 봉향하고 이어 趙穆을 從享하였는데‚ 국가에서 書院의 疊設을 금지하고 있으나 李滉은 중국의 朱子와 마찬가지로 받들어야 할 것이니 특별히 사액해 줄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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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請移建醴泉鄕校聖廟疏 (29) | 예천향교의 大成殿을 移建할 것을 청한 소이다. 본현의 향교는 들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여름에 논에 물을 댈때마다 향교로 물이 넘어 들어 목재가 썪기 쉬우니 높고 마른 땅으로 이건할 것을 청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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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公山民瘼疏 (30) | 1672. 공주의 민폐를 아뢴 소이다. 숙부인 反招堂 李溟翼(1617-1687)이 공주 판관으로 있을 때 저자가 대신 지은 것이다. 본부의 大同과 각사의 米布 중에 退奉 등의 사유로 수년간 거두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아 풍년이 들어도 다 바치지 못할 형편이니 辛亥年(1671) 이전의 미납 米布를 蠲減해 줄 것을 청하고‚ 공주가 요충지로 使客의 접대나 열읍의 都會가 빈번한 까닭에 지출이 타읍에 비해 번다한 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는 것과 糶糴의 명목이 많아져서 오히려 민간의 고통이 되고 있으니 1671년 이전의 還穀 중에 거둘 곳이 없는 것은 탕감해 달라는 뜻을 진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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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玉堂陳時務箚 (34) | 1691. 9. 21. 우뢰의 災異가 있은 후 홍문관에서 時務를 진달한 차자이다. 언로를 개방하여 直諫하는 기풍을 지키고‚ 공도를 넓혀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를 도모하고 名器를 중히 여기지 않는 폐단을 바로 잡아야 하며‚ 紀綱을 진작시켜 대소 관료가 무사안일을 일삼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교리는 저자와 沈仲良‚ 許頻이었고‚ 수찬은 李日井‚ 李浚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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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論謁聖還宮時倡優前導啓 (38) | 1693. 왕이 성균관에서 謁聖試를 치르고 還宮할 때에 倡優(광대)를 앞세운 일을 논한 글이다. 御駕의 앞에 급제자들을 세우는 것은 儒生들을 독려하는 뜻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倡優와 雜戱를 앞세운 것은 未安한 일이라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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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殿冬至賀箋 (38) | 冬至에 大殿에 올린 축하의 箋이다. 관찰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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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殿誕日賀箋 (38) | 大殿의 탄신일에 올린 축하의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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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世子冊封賀箋 (39) | 세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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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長秋殿失火時大殿箋 (39) | 長秋展에 화재가 난 후에 대전에 올린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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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王大妃箋 (40) | 대왕대비에게 올린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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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宮殿復位後大殿賀箋 (40) | 중전인 仁顯王后가 복위된 후에 대전에 올린 축하의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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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宮殿賀箋 (41) | 중궁전에 올린 축하의 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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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殿箋 (41) | 대전에 올린 箋이다. 兵營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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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 (1) | 1692. 孤山 李惟樟(1624-1701)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유장이 새로 우거한 石頭에 대한 詩를 지어 보내고‚ 방문하는 일을 의논하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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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 (2) | 李惟樟에게 보낸 답서이다. 治石할 때 가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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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 (3) | 李惟樟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유장이 방문하였을 때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碣文에 대한 일은 여러 의견을 십분 살핀 후에 다시 알려 주겠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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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兄弟 (3) | 李惟樟 형제에게 보낸 답서이다. 冊子를 收拾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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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內舅箕山公 (4) | 외숙인 金如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번다한 내용을 가르치지 말고‚ 엄밀하게 익히도록 하는데 힘쓰면 몇년 후에는 반드시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큰 아이들은 날마다 經書의 大文을 誦讀하게 하면 좋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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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內舅箕山公 (4) | 외숙인 金如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上疏와 관련하여 浮浪한 말이 있다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으나 자신의 뜻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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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內舅箕山公 (5) | 외숙인 金如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祥期를 당하여 감정을 절제하는 데 힘써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청나라가 箋文 중의 두 글자를 트집잡아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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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鳳覽書院儒生 (6) | 1690(?). 경상도 진보의 봉람서원 유생들에게 보낸 답서이다. 李滉을 봉안한 봉람서원이 사액을 받아 移建하는 것을 축하하고‚ 자신은 騈儷文에 능하지 못하므로 부탁한 글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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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張仲溫 (6) | 錦江 張璶(1629-1711)에게 보낸 답서이다. 엄한 가르침을 보낸 것에 감사하고‚ 장신이 表裏가 서로 부합하지 않는 병폐가 있는 것 같으니 평소에 自省할 것을 권유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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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張仲溫 (7) | 張璶에게 보낸 답서이다. 가르침을 보낸 것에 감사하며 進退는 결정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장신이 지적한 道‚ 再拜 등 글자의 쓰임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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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蔡仲耆 (8) | 希菴 蔡彭胤에게 보낸 답서이다. 편지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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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柳爾能 (9) | 寓軒 柳世鳴(1636-1688)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의 모임에서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하였는데‚ 유세명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위로가 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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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金重伯 (9) | 金南一에게 보낸 답서이다. 띠집 몇간을 얻어 자연 속에서 지내고 있으니 가을에 방문해주기를 기대하며‚ 풍속이 영남과 다른 임지에서 스스로 단속하여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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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權春卿 (10) | 1690(?). 荷塘 權斗寅(1643-1719)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두인이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였다는 소식을 금강산에서 듣고 보낸 안부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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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春卿 (10) | 權斗寅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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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權春卿 (10) | 權斗寅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방관으로 있는 권두인에게 평소에 배운 것을 시험해 볼 것을 권하고‚ 자신은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어서 여러 차례의 왕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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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春卿 (11) | 權斗寅에게 보낸 답서이다. 자신의 아들이 권두인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어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며‚ 日課의 문자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課外로 고금의 閑雜한 글이나 일용에 관한 일로 啓發시켰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저자의 장남인 晦兼은 권두인의 사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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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春卿 (12) | 權斗寅에게 보낸 답서이다. 琴仲舒의 일에 대해 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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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權春卿 (12) | 權斗寅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두인이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안부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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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春卿 (12) | 權斗寅에게 보낸 답서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면 喪服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를 논의한 것이다. 古禮에는 朞年服을 입는다고 하였으나 ≪朱子家禮≫에는 이런 구절이 없으니 자신은 자녀들에게 삼년복을 입게 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저자가 처상을 당하였기때문에 이런 논의가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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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關東伯兪寧叔 (13) | 강원도 관찰사 兪道一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모친의 병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마땅히 찾아뵈어야 하지만 가뭄으로 주린 백성에게 폐를 끼칠 우려가 있어 갈 수가 없다는 뜻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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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李淨源 (14) | 1698(?). 李湜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식의 상을 위로하고 자신이 모친상을 당한 것을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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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天章 (14) | 權斗經에게 보낸 답서이다. 보내 온 詩를 칭찬하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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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啓商 (15) | 李啓商에게 보낸 답서이다. 가까운 곳에 지방관으로 부임해 온 이계상에게 지난 날의 일에 대하여 해명하고‚ 지방관으로서 힘써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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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仲舒 (16) | 李萬敦에게 보낸 답서이다.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한 것을 사죄하고 힘써 노력하여 벗들의 기대헤 부응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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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柳晦夫 (16) | 柳後光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울의 선비들이 소문대로 丁丈을 변론하는 소를 올렸는지를 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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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晦夫 (17) | 柳後光에게 보낸 편지이다. 瑞霞洞은 이주할 만한 곳이 못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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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柳君晦 (17) | 主一齋 柳後章(1650-1706)에게 보낸 편지이다. 臺諫의 引避와 鶴峯 金誠一(1538-1593)에 관한 일을 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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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金顯于 (18) | 金顯于에게 보낸 답서이다. 朋友의 道는 規警에 있는데 顯于가 저자의 잘못을 깨우쳐 주지 못하니 輔仁의 德을 제대로 베풀지 못하는 것이라고 논하고‚ 顯于의 글은 言語와 酬應에 懇惻하고 敦實한 맛이 적고 輕重이 법도를 벗어나 있다고 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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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金京伯天與 (20) | 金世鎬와 金昌錫에게 보낸 편지이다. 喪中에 있으면서 보낸 안부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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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朴文翁 (20) | 朴施采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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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朴文翁 (20) | 朴施采에게 안부를 전한 답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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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宜仲別紙 (21) | 1689. 李宜仲에게 보낸 답서이다. 薦擧의 진행 여부를 묻고 拔擢을 돕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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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張器彦 (21) | 張萬杰에게 보낸 답서이다. 장만걸이 아직 젊으니 날마다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면 반드시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우고‚ 경박한 士習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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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張器彦 (23) | 張萬杰에게 보낸 답서이다. 禮에 뜻이 있는 자는 ≪朱文公家禮≫를 지키고‚ 고금의 예법이 다르거나 소략한 것은 諸儒들이 보충한 것을 헤아려 행하면 과오가 적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장만걸이 ≪家禮考輯≫을 저술한 것과 관련된 논의로 추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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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景輝 (23) | 柳日祥에게 보낸 답서이다. 남아는 千仞의 氣가 있어야 하고 좌절해서도 안된다는 내용으로 유일상을 격려하고‚ ≪燕行錄≫과 ≪滄溟集≫을 구해 보고 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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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景輝 (24) | 柳日祥에게 보낸 답서이다. 語註에 대한 답변은 別紙에 있으며‚ 필사한 글은 천천히 읽어보니 스스로 가소로울 지경이라서 남들이 보게 되면 병통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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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別紙論濟南文 (24) | 柳日祥에게 보낸 답서의 別紙이다. 濟南 李廌의 문장을 논하면서 柳日祥을 질책 면려한 글이다. 유일상이 李廌의 글이 비할데 없이 기묘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경박함을 질책하였다. 이어 유일상이 글을 지을 때 點綴에만 힘을 쏟아 命意를 온전히 하지 못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文章의 法度를 깊이 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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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景輝 (28) | 1672(?). 柳日祥에게 보낸 답서이다. 새로 지은 草廬의 名을 ‘孤山草廬’라고 하고‚ 齋名은 ‘向陽’‚ 小軒의 名은 ‘翠寒’으로 정하였으며‚ 주자의 元韻으로 知友들에게 詩를 구하니 유일상도 사양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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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景輝 (29) | 柳日祥에게 보낸 답서이다. 閒居 중에 매우 무료하여 전에 지은 시들을 때때로 꺼내어 보고 있으며‚ 陰山에서 두 사람이 와서 같이 역사서를 읽고 있다는 근황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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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柳景輝 (30) | 1690(?). 柳日祥에게 보낸 편지이다. 高城의 海山亭 주위에 鑑湖‚ 永朗湖‚ 三日浦 등이 모여 있어 경치가 천하제일이라고 하므로‚ 만사를 제쳐놓고 같이 갈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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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洪天卿 (30) | 洪相民에게 보낸 편지이다. 丁進善 어른의 疏 중에 理氣를 논한 부분이 시비거리가 된다고 하니 놀라우며‚ 선생의 遺稿 중에 禮說과 丙午年의 疏草를 빌려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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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景仲 (31) | 權景仲에게 보낸 답서이다. 조정에서 死六臣의 節儀를 褒獎하는 일을 논의 중에 있으며‚ 자신도 후세를 격려하는 뜻으로 褒獎해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다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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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權景仲 (31) | 權景仲에게 보낸 답서이다. 다른 사람의 시기를 당하여 근심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우스운 일이며‚ 장부의 榮辱이 다른 사람들의 붓끝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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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金元仲問目 (32) | 金爾甲의 問目에 답한 글이다. 金爾甲이 질문한 ‘靜之主一其太極之境界’‚ ‘敬譬如鏡義便是能明底’‚ ‘却學從那處去何處是收功處’‚ ‘天理人欲同行異情’ 등의 의미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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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洪甥相晉 (33) | 사위인 洪相晉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신이 올린 上疏때문에 서울과 인근에서 비방이 일어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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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從兄別紙 (33) | 4촌형인 李震標에게 보낸 편지의 別紙이다. 집안에 喪이 잇달아 일어나 妻의 練祭를 지내지는 못하였으나 祥祭는 初朞日이니 지내지 않을 수 없으며‚ 古禮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의 母喪(父在母喪)에 대해 朞年喪을 지내게 하였으나 ≪朱子家禮≫에는 三年喪을 지내게 하였으므로‚ 자녀들로 하여금 삼년상을 지내게 하였고‚ 禫服은 時俗을 따라 白立을 사용하였다는 것 등 喪禮와 喪服에 관한 자신의 견해와 시행 여부를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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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從弟敬而 (35) | 4촌동생인 李學標에게 보낸 편지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이학표가 자성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전한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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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萬景寺勝會序 (1) | 1694. 10. 저자가 萬景寺 禪房에서 내외 종형제 등과 함께 이모부 黃公‚ 외숙 金汝萬 등을 모시고 모임을 가진 일을 기록한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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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覽德樓記 (2) | 1681(?). 天燈山 鳳停寺의 覽德樓에 대한 記이다. 봉정사의 동서루가 한편에 치우쳐 있어서 산의 경치를 다 볼 수가 없었는데‚ 1679년부터 공사를 하여 높고 웅장한 樓를 새로 지어 이름을 覽德이라고 하였다. 이황이 봉정사에서 독서하였는데 그 향기가 지금까지 사람의 耳目을 비추고 있으니 진실로 ‘봉황이 머물러 덕이 빛난다’고 할만하므로 ‘鳳停’과 ‘覽德’이라는 이름도 이 뜻에 매우 잘 부합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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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遊金剛山錄 (4) | 1690. 저자가 양양부사으로 있으면서 柳日祥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온 후에 쓴 기행문이다. 峴山‚ 降仙驛‚ 淸澗亭‚ 萬景臺‚ 杆城‚ 大康驛 등을 거쳐 高城에 도착하였는데‚ 그 사이에 淸草湖‚ 永郞湖‚ 廣湖‚ 蘇湖‚ 仙遊潭‚ 花津湖‚ 鑑湖 등을 방문하였다. 海山亭에 올라 천하의 문장가들이 이 곳의 절경을 노래한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어 三日浦‚ 蒙泉庵‚ 鉢淵寺‚ 百川橋‚ 狗岾‚ 盧偆井‚ 獐項‚ 三峽橋‚ 丹楓橋‚ 明月橋‚ 山映樓‚ 楡岾寺‚ 虛谷庵 등의 명승지를 찾았고‚ 雁門岾을 거쳐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日觀峯‚ 月觀峯을 지나 衆香城 아래에 있는 摩訶衍庵에 들렀다가 獅子峯‚ 火龍潭‚ 船潭‚ 龜潭‚ 眞珠潭‚ 碧霞潭‚ 白龍潭‚ 黑龍潭을 거쳐‚ 香爐峯을 통해 仙遊巖‚ 萬瀑洞에 이르렀다. 만폭동에서 고금의 여러 인물들이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보았는데‚ 특히 楊蓬萊라는 글씨는 字體가 날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후 表訓寺‚ 正陽寺를 거쳐 天逸臺에 오르니 여러 봉우리의 삼라만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歇惺樓‚ 衣鉢寺‚ 三莊庵‚ 表訓寺‚ 白華庵‚ 鳴淵‚ 長安寺을 찾은 후 다시 외설악으로 넘어와 유점사를 거쳐 돌아왔다. 산행길에 저자와 유일상은 시를 읊어 본 것을 기록하였는데‚ 겨를이 없어 대략 들른 곳만을 기록하고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한다고 하였다. 특히 天逸臺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정경과 저자의 所懷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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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遊白馬江錄 (9) | 1677. 4. 백마강 기행문이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백마강 낙화암의 명승에 대해 익히 이야기를 들어왔는데‚ 1677년 4월 서울에서 귀향하는 길에 충청도 都事로 있던 仲父를 방문하였다가 백마강 유람길에 올랐다. 裨將인 宣傳官 安必勃과 遂安 崔昌運이 동행하였다. 조반을 먹은 후 拱北樓에 올라 錦江을 굽어 보고‚ 뱃사람들이 준비한 濯錦亭이라 부르는 有屋彩船을 타고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속세를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熊津‚ 龍巖江을 지나면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武夷九曲을 읊고 시를 지었다. 저물녁에 元山亭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보고‚ 다시 배에 올라 定山倉‚ 釣龍臺를 거쳐 皐蘭寺에서 묵었다. 다음날 落花巖에 오른 후 고란사로 돌아와 부여 태수 南宮鈺와 함께 釣龍臺에서 배를 탔는데‚ 落花巖의 뛰어난 경치는 臺에서 볼때보다도 더 좋았다고 한다. 浮山寺에 오르고‚ 李白江亭에 정박하여 주변의 경관을 감상한 후 밤에 百濟城 안의 村舍에서 묵었다. 다음날 半月城을 거쳐 십여리 내려가 李存吾의 旌閭閣을 방문하였다. 利仁驛‚ 胎封‚ 熊峴을 거쳐 공주 관아의 布政堂으로 돌아왔다. 釣龍臺‚ 落花巖‚ 白馬江에 얽힌 義慈王과 金庾信의 전설을 소개하고 유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 매우 상세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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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本朝開國後請國號奏 (21) | 1687. 조선 개국 후에 명나라에 국호를 청한 奏文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1687년(숙종 13) 月課로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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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本朝請賜世子七章冕服奏 (23) | 1688. 조선에서 세자에게 七章冕服을 내려 줄 것을 청한 주문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1688년(숙종 14) 月課로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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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本朝君臣請賜洪武正韻奏 (24) | 1689. 조선의 君臣들이 중국에 <洪武正韻>을 내려 줄 것을 청한 주문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1689년(숙종 15) 月課로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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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漢相國蕭何等請令四人各職一時奏 (25) | 중국 한나라 때 相國인 蕭何 等이 박학하고 陰陽에 조예가 깊은 사람 네 명을 뽑아 각 계절의 일을 전담하게 할 것을 청한 주문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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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唐特進魏徵請勿以儲偫譴官吏奏 (26) | 1693. 중국 당나라의 魏徵이 왕이 巡狩할 때 접대하는 것의 豊約으로 관리를 譴責하지 말 것을 청한 奏文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1693년(숙종 19)에 月課로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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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本朝請遣子弟詣太學讀書奏 (27) | 조선에서 자제를 중국의 太學에 보내 讀書하게 할 것을 청한 奏文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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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漢中丞薛宣請申勅部刺史奏 (29) | 중국 漢나라때 中丞 薛宣이 部刺史를 신칙하여 王化가 민에게 고루 펴지게 할 것을 청한 奏文을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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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擬漢後主拜蔣琬尙書令制 (30) | 중국 蜀나라의 마지막 왕인 劉禪이 蔣琬을 尙書令에 除拜한 制를 모방하여 지은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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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川西新屋上樑文 (1) | 1689. 저자가 46세 때 醴泉 川西村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지은 집의 상량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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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齋舍上樑文 (3) | 太子山 남쪽 支實에 지은 齋室의 상량문이다. 지실은 이동표의 선조 묘소가 있는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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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健元陵伐木時告由祝文 (4) | 태조의 능인 健元陵에서 벌목을 할 때 올린 고유축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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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獻陵修改時告由祝文 (4) | 태종의 능인 헌릉을 개수할 때 올린 고유축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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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孝陵修改時告由文 (4) | 인종의 능인 효릉을 개수할 때 올린 고유축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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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王后陵告由祝文 (4) | 왕후의 능에 올린 고유축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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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廟地衣修改時告由文 (4) | 종묘의 자리를 개수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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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永寧殿地衣修改時告由文 (4) | 영녕전의 자리를 개수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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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永昭殿靑盖修改時告由祝文 (5) | 영소전의 靑蓋를 개수할 때 올린 고유축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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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南別殿珠簾床巾修改時告由祝文 (5) | 남별전의 珠簾과 床巾을 개수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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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順陵丁字閣修改時告由祝文 (5) | 成宗妃 恭惠王后의 능인 순릉의 정자각을 개수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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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石城神堂文 (5) | 1693(?). 光州 府使로 재직 중에 경내에 있던 石城神堂에 올린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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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社稷壇神文 (5) | 1696(?). 삼척 부사로 재직 중에 경내의 社稷壇神에게 올린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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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岐谷始祖墓失傳設壇後祭文 (6) | 진보 기곡에 있는 眞城 李氏 시조묘의 정확한 소재지를 몰라 산에 壇을 설치하여 제사지낼 때 올린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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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岐谷墓事變後改封築告由文 (6) | 族孫이 犯葬하는 일이 일어나 기곡에 있는 진성 이씨 시조묘의 소재를 확인하고 봉분을 개축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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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外先祖墓加土後祭文 (7) | 외가의 선조 묘소에 加土한 후에 올린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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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臨成君熀賜祭文 (8) | 臨成君 熀에게 내린 제문의 代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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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統制使申瀏賜祭文 (8) | 통제사 申瀏에게 내린 제문의 代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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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嬪御宮賜祭文 (9) | 嬪御宮에 내린 제문의 代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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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木齋洪先生文 (9) | 스승인 木齋 洪汝河(1621-1678)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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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權游餘文 (11) | 저자의 친구인 權以鏺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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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金參判文 (13) | 참판 葛川 金賓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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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內弟察訪金文 (13) | 외사촌인 찰방 金夏鈗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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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 (15) | 외사촌인 찰방 金夏鈗에 대한 제문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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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柳軍威文 (16) | 군위 현감을 지낸 柳世哲에 대한 제문이다. 장인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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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僉樞李文 (17) | 첨지중추부사 李朝漢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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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仲父監司公遷厝文 (17) | 저자의 숙부인 관찰사 李溟翼을 遷葬할 때 올린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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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亡弟季則文 (18) | 아우 世標에 대한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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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又祭大祥文 (22) | 아우 世標의 大祥 때 제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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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忠孝堂金公行錄 (24) | 忠孝堂 金恊(1546-1638)의 행록이다. 김협의 본관은 順天‚ 자는 吉甫‚ 호는 忠孝堂이다. 父는 감찰 自順‚ 母는 仁川 蔡氏로 형조 판서 紹權의 딸이다. 부친을 여읜 후 효성을 다하여 모친을 봉양하는데 온힘을 쏟았으며‚ 임진왜란 때 火箭을 개발하여 공을 세웠고‚ 五運六氣의 서적에 정통하여 만년에 惠民署 注簿에 제수되었다. 淸陰 金尙憲(1570-1652)‚ 松江 鄭澈(1536-1593)‚ 東岳 李安訥(1571-1584)‚ 西厓 柳成龍(1542-1607) 등과 교분이 있었다. 부인은 鐵城 李氏 永後의 딸이며‚ 允榮‚ 允興 두 아들을 두었다. 묘소는 龍宮 外東面 葛川에 있다. 김협의 손자인 重後의 부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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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年譜 (1) | 저자의 연보이다. 어려서부터의 행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특히 1689년(숙종 15)에 吳斗寅 朴泰輔 李世華 李尙眞 등을 伸救하는 상소를 올린 일‚ 수찬으로 있을 때 홍문관에서 閔鼎重(1628-1692)을 논죄하기 위하여 저자에게 草啓를 쓰게 하였으나 잘못을 통렬히 논박하고 귀향한 일‚ 1691년 교리로 있으면서 雷變을 당하여 修省할 것을 아뢴 일‚ 1690년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판서가 세도가의 자제를 淸選하도록 저자를 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낙향한 일‚ 1693년 사간으로 있으면서 時政을 논한 상소를 올린 일 등이 疏文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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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行狀 (1) | 1767. 저자의 행장이다. 李世澤(1716-1777)이 썼다. 저자의 가계와 일생 동안의 행적‚ 官歷‚ 사후에 증직을 받게 된 경위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史家들의 기록이 소략하여 세인들이 저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겉으로 드러난 행적에 근거하여 실천의 독실함이나 문장의 아름다움 등만을 논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저자의 道學과 文章은 道에 근원하고‚ 名節과 風聲은 學力에 근본을 두었다고 평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章句에 얽매이지 않고 향상에 힘썼으며‚ 학문은 正心과 誠意를 本으로 敬을 主로 하였고‚ 六經과 ≪論語≫‚ ≪孟子≫‚ ≪小學≫‚ ≪心經≫‚ ≪近思錄≫을 중시하고 ≪朱文公家禮≫를 節文의 근본으로 여겼다는 것 등 그의 학문과 처세에 대하여 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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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諡狀 (19) | 1784(?). 저자의 諡狀이다. 徐有隣(1738-1813)이 撰하였다. 1784년(정조 8) 영남 유생 權屨度 등 396명이 伏闕 상소하여 저자에게 시호를 내려 風聲을 세우고 풍속을 진작시킬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한다. 저자의 행적과 관력 등을 소상히 서술하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쉽게 물러가는 절개를 지킨 사람이 저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리를 곧게 지키고 자신의 뜻을 엄하게 지킨 그의 절개는 세상을 감복시킬만하다고 평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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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道碑銘 (27) | 저자의 신도비명이다. 정조 때 영의정 蔡濟恭(1720-1799)이 썼다. 세인들이 숙종조의 인물을 평가할 때 저자에 대해서는 다 名臣이라 하는데‚ 기사년에 소를 올려 바른 말을 하고‚ 權貴의 무리를 배척한 것은 학문 가운데 한 조항의 일일 뿐이라고 하였다. 저자의 가계‚ 행적‚ 관력을 서술한 후 저자의 학문은 靜과 敬을 주로 하였고‚ 四書와 伊川‚ 朱子의 글을 탐독하였으며‚ 敬과 義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모친의 봉양을 극진히 하고‚ 義理를 지키고 나아가고 물러남이 절도에 맞았다고 평가하였다. 저자의 증손인 鎭祜의 부탁으로 신도비명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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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墓誌銘 (34) | 1770. 저자의 묘지명이다. 洪重孝(1708-1772)가 썼다. 1689년 기사환국 후에 朴泰輔 吳斗寅 등을 伸救하기 위하여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疏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평일에 학문에 힘써 理에 밝고 義에 용감하였기 때문이었으므로 名節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저자의 가계와 행적‚ 관력 등을 자세히 서술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君心을 바로잡고 사람들의 기강을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재야에 있을 때에는 道學을 밝히고 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아 각자의 재능에 따라 後進을 성취하게 하였으니 陶山의 一脈이 그에게 의지하여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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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墓表 (42) | 저자의 墓表이다. 鄭宗魯(1738-1816)가 썼다. 저자의 행적과 관력‚ 가계를 간단히 서술하고‚ 李滉의 가문에서 태어나 大賢의 遺風을 저버리지 않고 백세에 드리웠다고 평가하였다. 저자의 玄孫인 漢籌가 묘표를 부탁하였는데‚ 필자의 선조인 文莊公 鄭經世(1563-1633)의 夫人이 李堣의 증손녀이고‚ 신도비를 새길 때 저자가 글씨를 쓴 인연이 있어서 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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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祭文 (1) | 저자에 대한 제문들이다. 작자는 權斗寅‚ 柳日祥‚ 柳後光‚ 李在弼‚ 외숙 金如萬‚ 門人 金爾甲‚ 李濰‚ 洪相勛‚ 李䨵‚ 尹燿 등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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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輓詞 (12) | 저자에 대한 輓詞이다. 작자는 李惟樟‚ 權斗寅‚ 權斗紀‚ 洪萬朝‚ 張璶‚ 成瓘‚ 李坽‚ 嚴緝‚ 柳栽‚ 鄭岐胤‚ 孫萬雄‚ 趙鳳徵‚ 李光斗‚ 沈橃‚ 姜碩臣‚ 李時善‚ 李斗精‚ 丁思愼‚ 朴紬‚ 金壽聃‚ 李琓‚ 洪道翼‚ 文道器‚ 權泰時‚ 權斗經‚ 權瑍‚ 金夏相‚ 金輝璧‚ 柳後章‚ 成文夏‚ 丁惟愼‚ 權壽良‚ 李蓍晩‚ 金萬柱‚ 柳日祥‚ 金侃‚ 李瑞雨‚ 李麟徵‚ 金昌錫 등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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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諸賢筵說 (22) | 저자와 관련하여 조정에서 논의된 사실들을 발췌 기록한 글이다. 權大運이 不次擢用할 것을 청한 일‚ 1741년(영조 17) 영의정 金在魯가 영남의 선비들을 등용할 것을 청하여 저자를 追贈하고 아들 濟兼을 각별히 錄用하게 한 일‚ 李濟兼의 奉祀孫을 錄用하게 한 일‚ 1788년(정조 12) 蔡濟恭이 淸南과 濁南의 始終을 아뢴 일 등이 수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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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諸賢記聞錄 (26) | 여러 사람들이 저자에 대해 기록한 것을 모아 정리한 글이다. 權相一‚ 權萬‚ 姜再淑‚ 張萬杰‚ 李濰 등의 기록에서 발췌하였다. 1689년 仁顯王后의 遜位 문제를 간쟁하다가 죽은 吳斗寅·朴泰輔 등을 구원하기 위하여 상소한 일‚ 모친인 金氏가 저자를 엄히 훈계한 일‚ 저자의 文章과 學行이 남보다 앞섰던 일‚ 숙부 李溟翼이 저자의 국량을 높이 평가하여 지방에 부임할 때 데리고 간 일‚ 저자가 모친을 지극히 봉양한 일‚ 後進을 가르칠때 재질에 따라 성취시켜 각자의 역량을 다하게 한 일 등이 수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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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贈職時詩 (37) | 1741(?). 영조 17년 저자에게 이조판서 겸대제학의 증직이 있었을 때 李光庭과 조카 李徵兼이 지은 시이다. 모두 序文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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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贈牒焚黃時有吟 (40) | 1741(?). 영조 17년 저자에게 이조판서 겸대제학의 증직이 있어서 증직첩을 焚黃할 때 金景泌이 지은 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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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安東邑誌 (40) | ≪安東邑誌≫에 실린 저자에 대한 소개이다. 博學하고 文章이 있었으며 풍모와 절개가 一世를 진동시킬 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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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醴泉邑誌 (40) | ≪醴泉邑誌≫에 실린 저자에 대한 소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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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禮安邑誌 (40) | ≪禮安邑誌≫에 실린 저자에 대한 소개이다. 1689년에 吳斗寅 朴泰輔 등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평생토록 권귀에 아부하지 않고 물러나 自修하였으며‚ 1741년 이조판서 겸대제학의 증직이 있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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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奉安文 (41) | 1845. 예천에 元山書院울 건립하고 저자를 立享할 때 올린 봉안문이다. 古溪 李彙寧(1788-1861)이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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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常享祝文 (42) | 1845. 저자를 奉享하는 예천 元山書院의 상향문이다. 海隱 姜必孝(1764-1848)가 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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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 戱呈權游餘-以鏺-一首見原集‚ 次權游餘韻‚ 閒中兒輩戱作紙片帖古詩韻字令人懸揣得之名曰摘韻是日權兄遇强韻窘甚旣而意得之頗自矜因用所得誇字韻戱贈‚ 同權游餘次聯珠韻‚ 權游餘謂家有燕巢八窠次韻却寄‚ 觀漲‚ 奉呈姜明府-碩臣-行軒‚ 次伽倻山僧詩軸韻‚ 輓張友-珣‚ 戱答柳上舍譏余窓前植竹太近‚ 輓從弟-端標‚ 題靈泉庵‚ 元日寄金南甲‚ 秋月‚ 秋閨‚ 次韻寄金天若‚ 再遊武陵‚ 大風‚ 冬至病臥次碧樹丞‚ 次除夕韻‚ 次碧樹丞長律‚ 次謝碧樹沙餠之贈‚ 將赴碧樹之招阻雨不果詩來督過頗深‚ 輓琴以哲‚ 星磨嶺‚ 次李進士蓮池韻‚ 輓高君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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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 (1) | 1679. 孤山 李惟樟(1624-1701)에게 보낸 답서이다. 疏로 인하여 軍威의 儒會에서 施罰하자는 公論이 일어나 거취에 곤란을 겪고 있으며‚ 거듭 가르침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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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李孤山 (2) | 1691. 李惟樟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방관에 제수된 이유장이 謝恩할 것을 권하고‚ 좌의정이 溫溪의 族祖에게 贈諡할 것을 진달하여 윤허받았다는 것을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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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李孤山 (2) | 李惟樟에게 보낸 편지이다. 외사촌 동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벌인 宴會에 참석하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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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孤山 (3) | 李惟樟에게 보낸 답서이다. 시국이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국가의 嘉禮가 이미 지났으니 태평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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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 (3) | 李惟枋에게 보낸 답서이다. 어려움을 당하여 自得하면 대장부가 될 수 있다고 하며 이유장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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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湖南伯崔 (3) | 光州 牧使로 있을 때 전라 관찰사인 崔奎瑞에게 보낸 답서이다. 저자의 仲父인 李溟翼이 광주목사로 있을 때 月峯書院에 題名하였는데‚ 체직되어 돌아간 후에 李璘이라는 자가 멋대로 이름을 지워버린 일이 있었다. 이 편지는 李璘의 처리 방안을 둘러싸고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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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姜醴泉 (6) | 예천 군수 姜碩臣에게 보낸 답서이다. 霞液을 보낸 준 것에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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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姜醴泉 (7) | 예천 군수 姜碩臣에게 보낸 답서이다. 盆梅가 말라 죽었다는 등의 안부를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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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閔士會 (7) | 閔昌道에게 보낸 편지이다. 읍저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암자를 지어 지내고 있으며‚ 10월 25일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작은 잔치를 베풀려고 하니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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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閔士會 (7) | 閔昌道에게 보낸 답서이다.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고 있으며 다행히 체직을 허락받았다는 안부를 전하고 민창도가 올린 疏가 시행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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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張仲溫 (8) | 張璶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에 柳都事가 別語를 청하였는데‚ 장신의 漫錄이 別紙에 있어서 古道로써 장신을 諷諫하였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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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張仲溫 (8) | 張璶에게 보낸 답서이다. ‘외는 것에만 의지하여 몸소 실천하는 데는 힘쓰지 않는다’고 질책한 것에 대하여 힘써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는 뜻을 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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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都事 (9) | 都事 李東郁에게 보낸 답서이다. 문안 편지를 보내 준 것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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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內舅箕山公 (9) | 외숙인 金如萬에게 보낸 편지이다. 碣文에 약간의 내용을 添入하려고 하였으나 근래 痢症이 있어서 서늘해 진 후에야 마감하려고 하며‚ 돌에 새길 글자의 수가 많으면 안되기 때문에 글을 짓기가 쉽지 않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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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李瞻叔 (9) | 李玲에게 보낸 답서이다. 적막한 곳에 있으면서 오랫만에 편지를 받아 만난듯이 반가우며‚ 근래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속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한스럽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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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權明仲 (10) | 權晟에게 보낸 답서이다. 보내온 시에 대하여 화답하는 시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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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友人書 (10) | 친구에게 보낸 답서이다. 뜻하지 않게 좋은 글을 받아 매우 기쁘며‚ 여러 친구들에게 보여서 같이 화답하는 詩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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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丁萬始 (10) | 丁達燾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을의 경치가 더욱 짙어지는데 자신은 이 곳을 떠나게 되어 스스로를 비웃고 있다고 하며 詩를 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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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金安世 (11) | 金世平에게 보낸 답서이다. 進退의 가부를 한결같이 단언할 수는 없으며‚ 일시에 호연히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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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答柳景輝 (11) | 柳日祥에게 보낸 두편의 편지이다. 첫 번째 답서에서는 유일상의 글을 얻어 보니 얻은 바가 전과 달라졌다는 뜻으로 칭찬하고‚ 잣구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두 번째 편지에서는 唐律을 방불할 만한 글이 없는 것은 사람의 기상이 각각 다른데도 다른 사람의 뜻에 부합하는 글을 짓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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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鄭景瞻 (12) | 鄭에게 보낸 편지이다. 창가에 작은 平床을 만들 재목을 청하고‚ 사위의 공부하는 자세가 자못 예리하여 반드시 크게 이루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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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兵使啓 (13) | 兵使에게 보낸 글이다. 병사의 治德을 칭송한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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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與巡使啓 (13) | 巡使에게 보낸 글이다. 순사의 治德을 칭송한 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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