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현공풍수양평일원답산때.연안이씨한분을만났는데, 연안이씨종중문적박물관을열으셨다기에관심이많이가더라... 기획<익산연안이씨종중문적종친회장, 이천인 박사> 인터뷰
<충간공 이숭원 선생 영정>
보물제651호 삼기면 기산리 현동사(玄洞祠) 종친회장 이천인(42)박사를 만나 의견을 들어봤다./편집자주>
<삼기면 기산리 현동사 가을 풍경>
#보물제651호 익산연안이씨 종중문적은? 성종때 충간공(忠簡公) 이숭원(李崇元,1428~1491) 선생에 내려진 좌리3등공신록권과 공신회맹록1책, 세종2년(1420)~명종원년(1546)에 이르는 교지 18매다.
<이천인 박사가 사무실에서 찰칵~>
#충간공과 이천인 회장과 관계는?
원조의 휘는 무(茂 )로 당고종 때 중량장으로 소정방을 따라 백제정벌에 참여했다가 신라에 남아 연안후에 봉해졌다.
충간공이 좌리3등공신에 봉하자 충간공 조부 '백겸'은 延城府院君으로 봉군되고 병조판서에 증직됐으며, 부친은 예조참판 '보정'으로 사후 예조에 추증돼 延川君에 봉했는데 의정부찬성 이숙의 딸을 맞아 충간공을 낳았다.
충간공 '이숭원' 할아버지는 세종10년(1428) 태어나 성종22년(1491)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충간공이 졸했을 때 성종의 애도함이 극심해 3일간 철조철시하고 부의를 보내 조정관원을 파견해 사제했다”(성종실록).
본인은 충간공 16대손으로 전국 종친을 찾아 자료를 수집하고 충간공실기와 친필록 등을 찾는 쾌거를 거두었다.
충간공 업적을 알리는데 후손으로써 의무라 여겨 자료를 수집.연구한다.
직후 도승지(현 대통령비서실장)로 승정원에서 6년간 刑房만을 맡아 빈틈없는 업무처리로 "분명하고 진실한 사람'이라 칭송받았다. 경상도관찰사, 한성부사, 형조판서,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이조판서, 의정부좌참찬, 지경연 의금부사를 역임하다 중국사신으로 다녀와 우참찬으로 옮겼다. 형조판서를 거쳐 성종22년(1491) 병조판서가 됐으나 질병으로 사퇴하니 ‘군(君)’으로 봉해졌다.
유교이념을 품고 관료의 치적으로 장식된 분으로 능숙능란.유연자재해 국사를 짧은 시간에 깔끔히 재결하니 천부적 재능 탓이다. 효도가 극진했고, 형제우애가 돈독했다. 동생 부부가 죽어 의탁할 곳 없는 어린 조카들을 출가시켜 가정을 갖게 한 인자함은 자주 거론된다. 권세를 누렸으나 가재도구도 없어 지위가 없는 사람과 같다. 부인은 廉氏로 장남은 한성판윤(현 서울시장), 차남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충간공은 겸손히 백성을 다스리며, 궁한 듯 살았고 집안보다 三族에 인정을 쏟았다. 살림은 넉넉치 못했으나 도덕에는 넉넉했다. 육신은 영원히 떠났으나 이름만은 영원히 남으리라>
-이는 경기도 양평 용문산 묘소 신도비문에 충간공 성균관사 후배 '홍귀달'이 충간공을 업적을 기록한 내용이다.
중중때 청백리에 녹천되어 증조이하 3세가 모두 '봉군'되고 판서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내고 사후에는 '충간'이란 시호와 부조묘의 특전이 내려졌다.
<장원급제 교지>
승정원이나 사헌부에 있을 때 어질며, 명확히 관찰하고 삼가해 원통한 옥사를 파악해 죄를 감면한 바가 많아 어찌 칭찬하고 포상하지 않겠는가. 공을 좌리삼등공신에 녹훈해 어서각을 세우고 영정을 내리며,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고, 숭원의 후손은 죄를 범해도 용서함이 영원하니 병졸, 노비 , 관노비, 전토(5만5천평), 말 한필을 받으라. 이에 교시하노라>
충간공 둘째 구령은 봉화현감을 거쳐 연산조때 지례(김천시 지례면)에 은둔하니 후손이 세거한다. 한성에서 봉송한 영정.유물은 지례를 거쳐 익산, 충남의 집에 봉안됐다.
충간공 10대손 택이 영정을 세우고 어서각.영당.부조묘 등을 짓고 홍살문, 하마비를 세우니 영당과 '현동사'라 편액을 붙이고 충간공 장자후손이 세거한다.
한편 '지례'는 영정을 세웠고 영조47년(1771) 도동서원 이름으로 중건됐는데 충간공 종제 숙기와 증손 오봉을 배향하고, 숙기의 아우 숙함과 그 증손 후백을 추배하니 '五賢院'이며, 둘째아들 후손이 지례 광천, 김천 상좌원, 거창 동호 등에서 세거한다.
500여년 문중 역사와 숨결이 사라지는 기로다.
충간공은 청렴히 국정을 논해 청백리로 녹천돼 칭송을 받는다.
익산일반산단도 국가와 익산발전을 위한 중대사항이므로 협조하는게 충간공의 높은 뜻을 받드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영원히 볼 수 없으므로 산단내 공원이나 조성되는 마을에 현모습을 모형이나 축척형태로 관람케 하면 주민은 물론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선산에는 익산의 가장 오래된 300여년 된 노송이 있다. 익산시와 협의해 영구보존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다.
익산에는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에 가려진 많은 유물과 유적이 많다. 문화와 문명을 통해 작은 것을 토대로 큰 것이 빛나고, 삶의 과정에서 휴식공간과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고는 지역의 미래는 밝아오지 않는다.
이 고장의 가려진 것을 찾아내 연구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많은 관심과 성원으로 익산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며, 국가와 시민을 위해 노력하는 인재들이 많이 나와 주길 바란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미륵산을 자주 오르다 보니 전국을 제패한 태권도선수도되었다.
태권도전공학과 배움을 토대로 후배를 양성해 10년간 전국소년체전 전북도 대표선수를 매년 배출해 금메달 영광과 전국대회에서 2년연속 2관왕을 배출했으며, 석사.박사과정 거쳐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충간공업적을 연구하고, 대학강의와 후배양성에 힘쓴다.
태권도공원이 조성되면 태권도 우수성과 함께 충간공 공신회맹록에 수록된 서양보다 100년 앞선 수결(싸인)이 민족의 자부심이라는 것을 외국 태권도 지도자에 전파하고 싶다.
전국소년체전 대표선수를 무수히 배출했고 5층 건물을 세워 새벽 청소부로 하루를 시작해 밤중까지 경희대스포츠센타대표, 경희대박사태권도장관장, 건양대학교경찰행정학과외래교수, 연안이씨종중 회장으로 최선을 다 한다.
일요일 미륵산 등반 후 고향인 '현동'마을에서 부모님과 아침식사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아는 이 박사는, 아내의 '드러나지 않는 희생'이 오늘의 밑받침이 됐다고.
고재홍 기자> |
출처: 어풍대08블로그임다 원문보기 글쓴이: 어풍대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