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잠바를 입은 사람 코트를 입은 사람 가방을 멘사람 가방을 든 사람 그들은 모두 걸어서 나갔다 나도 덩달아 지하철 문을 걸어 나왔다 아!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 나도 아직은 살아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나도 코트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개찰구를 향해서 저들과 같이 걸어가는 것이지
2. 진죽역의 미담
지금은 청소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60년 전 쯤은 진죽역이었다 그러니까 진죽역이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친구가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와 십 오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진죽역에 도착했으나 타려던 홍성을 가려던 기차를 놓쳤다 어둑어둑한 저녁 진죽역으로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친구의 할머니는 청년에게 물었다 다음 기차가 몇 시에 있느냐고 청년은 대답했다 조금 전에 떠난 기차가 마지막 기차였다고 했다 그리고 청년은 친구와 친구의 할머니를 역 주변에 사는 자기의 집으로 안내했다 청년의 어머니는 따뜻한 저녁을 차려주고 하룻밤을 재워주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 했다
3. 새로운 풍속도
손자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1년이 넘도록 보지 못한 손자를 보았다 개구쟁이 모습은 다 어디가고 키까지 훌쩍 커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거리두기를 하고 두 손을 모으고 배꼽인사를 했다 어느새 그 생활이 몸에 익어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운동장에 모인 다른 가족들도 마스크를 하고 거리두기를 했다
4. 어머니의 메시지
식탁에 남은 잔 물기를 닦다가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궁이 있는 재래식 부엌에서 흙으로 된 부뚜막까지 고운 흙물을 풀어 씻어놓으시고 설거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던 어머니 이렇게 옛날 같은 일들이 어제 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늦은 나이 공부를 하여 훈장 같은 학위를 받았으니 가정을 잘 돌보라는 예시일까 어머니는 늘 가정을 중요시하셨으니까
5. 창경궁
초등학교 동창들과 창경궁에 왔다 옛날에 창경원이라는 이름이었을 때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그들과 벚꽃놀이를 왔었다 그 때 나는 만학도가 되어 수원에 있는 학교에 다녔었다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왔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좋아했고 함께 온 동생과 동생친구도 즐거워했었다 어찌 되었든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반백의 초등학교 동창들과 왔다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 좋아했다 창덕궁 너머 창경궁 단풍은 장관이다 단풍을 날리는 바람조차 멋이 있다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친구들이 역사공부에 빠져 이곳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곳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은 곳이다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들의 말을 듣다보니 즐거웠던 단풍놀이가 쓸쓸히 쓸려갔다
6. 헤헤헤
어!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 귀에 익은 저 웃음소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잘 아는 웃음소리 자신의 가슴을 달래는 소리 아! 거기에도 공통점이 있구나
7. 아이러니
긴장마가 끝난 서울거리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장마 비가 모든 먼지를 다 쓸어갔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뜨거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한 날 이었다 그런데 누구의 장난인지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고 얼굴을 붉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날도 내가 사는 서울거리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거리였다
8. 꽃피던 시절
옷 한 가지를 사면서 옷을 파는 아가씨에게 누구에게도 하지 않던 이야기를 했다 그 아가씨는 옷을 파는 일 외에 상담료를 받는 상담사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같은 또래의 입장이어서인지 남자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어서인지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 냉면집에서 있었던 일 심지어는 개새끼 소 새끼라고 욕을 하여도 그건 좀 그렇다 그건 좀 그랬겠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가도 왜 그러느냐고 재미없는 듯 하다 가도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었다 아마도 산에도 들에도 옷가지에도 꽃으로 장식된 계절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