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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어린이 책 시민 연대 충남권 원문보기 글쓴이: 이휘라
‘추천도서’는 출판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이 시대는 추천도서 범람의 시대다. 너나없이 추천도서를 제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우리독서운동본부(이하 한우리)나 아이북랜드 같은 상업적 단체, 어린이도서연구회(이하 어도연)나 책읽는따뜻한세상을만드는교사들(이하 책따세) 같은 공신력 있는 단체, 문화관광부,간행물윤리위원회,대한출판문화협회,한국출판인회의 등 기관,출판단체가 선정한 목록이 수시로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이제 추천도서를 내지 못하는 단체는 권위를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마저 조성된 듯하다. 가히 ‘독서 상업주의’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추천도서 목록이 늘어났다.
추천도서는 ‘해악’이 될 수도
『책따세와 함께 하는 독서교육』이란 책의 표지 뒷면에는 “추천도서는 독서교육의 나침반”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사실 2005년 3월에 논란이 됐던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라면 나도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두고 벌어진 시민단체들의 격렬한 토론을 여러 차례 듣고 나서는 적어도 이 땅에서 추천도서가 ‘게으른’ 교사나 학부모에게는 확실한 ‘실무지침’이 될지 모르지만 그 대상이 되는 아이들에게는 ‘해악’이 될 확률이 더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인식은 다음과 같은 칼럼을 쓰게 만들었다.
중고생을 위한 책을 공정하게 추천해 권위를 쌓아온 한 교사단체는 최근 일종의 카피레프트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인기 작가들에게 저서 한 권씩의 저작권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 작품의 데이터를 단체 사이트에 올려 무료로 내려 받아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취지만 본다면 전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작권은 저자나 출판사에 생명 같은 것이다. 설사 명성과 여유가 있는 저자 중에 그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하더라도, 출판사는 쉽게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불만이 있는 출판사도 냉가슴을 앓을지언정 대놓고 항의하지 못한다. 이 교사단체의 위력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독서교육과 독서운동을 이끌어가겠다고 자칭하고 나선 한 독서운동본부는 처음에는 유아와 아동, 청소년에게 좋은 책을 골라 읽히려는 순수한 목적으로 운동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독서지도사 양성을 주 사업으로 삼더니 운동에 필요한 책을 싸게 공급하지 않는 출판사의 책은 슬슬 선정에서 배제했다. 몇 년 전부터는 계열 출판사를 차려놓고 그 출판사의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회사건물을 짓는 데 20여 출판사로부터 거액의 출자를 내락 받은 뒤 거의 그 출판사들의 책만 추천하는 몰염치를 보였다. 이 단체의 하는 양을 보면 독서를 빙자한 상업주의의 한 전형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그 단체 독서지도사의 추천이나 의견을 끊임없이 실어준다.
도서대여업을 하는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책만 골라 대여하다가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면, 비록 좋은 내용이지만 공급률이 비싼 출판사의 책은 목록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장장악력이 있는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의 추천도서 또한 믿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선정기준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거나, 이벤트 비용을 협찬하거나, 광고비용을 부담하거나, 진열비용을 직간접으로 부담하는 책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브랜드전도 출판사가 출혈에 가까운 마케팅 비용을 부담해야만 열어준다. 따라서 서점의 추천을 무조건 믿고 책을 샀다가는 낭패를 볼 확률이 높다. 요즘 1년에 6만 종, 하루에 200권 가까운 신간이 쏟아진다. 그 많은 책 중에서 진정 좋은 책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책은 더는 미디어의 ‘제왕’도 아니다. 무료정보가 난무하다 보니 책이 독자의 선택을 받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책은 이제 스스로 존재이유를 밝힐 수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권위를 가진 저자의 책이나 강력한 임팩트를 갖는 책이 아니면 독자에게 선택되기 어렵다. 또 그런 권위를 덧씌우기 위한 과도한 마케팅이 횡행한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가 책을 먼저 읽고 좋은 책을 가려 추천해준다면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이 땅의 ‘추천권력’은 초발심을 잃었거나 부도덕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로 인해 좋은 책을 펴내면서 원칙을 지키려는 출판사가 오히려 악전고투하는 이상한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갈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비율이 높아가는 이 비극적 현실에서 할 말은 오로지 하나다. “추천도서는 다 사라져라.” 진정으로 그렇게 목 놓아 소리치고 싶은 현실이다.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한겨레> 2007.7.21)
이 칼럼에서 언급한 추천도서 유형은 세 가지다. 글에서는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책따세, 한우리독서운동본부, 그리고 유통업체 등이 추천하는 책이다. 가장 먼저 언급된 책따세에 참여해 학생들에게 권할만한 책을 추천한 교사들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책따세의 추천도서를 계속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의 ‘성공모델’이 교육당국의 정책대안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서다. 그래서 제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에 서울시교육청은 추천도서를 바탕으로 “두 달 남짓 시범 실시를 한 다음 교육청 산하의 모든 학교에서 조만간 실행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2004년에 교육인적자원부가 각급 학교에서 독서이력철을 작성하도록 만들어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고 공표한 것과 함께 독서교육을 위한 교육 당국의 의지를 입증”(아래 성명서에서 인용)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런데 2007년 오늘 현재 학교현장에서 독서이력철은 엄연한 현실이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2005년 4월 27일, 17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는 “서울시교육청은 독서교육이란 이름 아래 참다운 독서를 저해하는 ‘독서지도자료’를 전면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성명서는 서울시교육청의 이번 시책을 “독서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서 그 자체를 파행으로 치닫게 만들 위험이 다분히 존재”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미 발표한 “독서지도자료를 전면 철회하고, 독서에 관한 올바른 문화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바람직한 독서교육을 진지하게 모색”해 줄 것을 서울시교육청에 촉구했다.
‘추천’ 이상의 ‘진화된’ 운동이 필요하다
성명을 낸 시민연대는 서울시교육청의 독서교육 방안이 안고 있는 문제로 독서의 본질 훼손,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 침해, 출판문화의 건전한 발전 왜곡, 학습도서와 권장도서의 선정 근거 불투명, 학교교육 정상화 저해 등을 들었다. 이미 절판된 도서를 포함했는가 하면 학생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의 추천도 적지 않았다.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추천된 경우도 있는데 교사가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학생들의 잘못된 독후감을 보고 추천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한눈에도 졸속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행정의 입안자들이 독서의 의미도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연대는 서울시교육청의 독서교육 방안이 출판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왜곡하는 이유에 대해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생물종의 다양성이 생태계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중요하며 또 필수적이라고 알고 있다. 다양한 생물종들은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서로의 존립을 가능케 하며, 공존함으로써만이 발전을 거듭해 갈 수 있음을 늦게나마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보존?유지되어야 하듯, 마찬가지로 문화의 한 부분을 점하고 있는 출판 또한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한다. 다양한 출판물이 생산되고, 유통되며, 또 소비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문화적 역량은 쉼 없이 증대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의 ‘독서지도자료’는 특정한 몇몇 책들을 학습 도서와 권장 도서로 선정함으로써, 여타의 책들이 다양하게 존립할 수 있는 여지를 현저하게 잠식한다. 획일화된 도서의 선정은 분명 바람직한 출판문화에 대한 폭력적인 도발이 아닐 수 없다. 교육청의 선정 도서들은 출판문화의 자율성을 잠식하며, 출판 풍토를 왜곡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책따세의 선구자적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책따세 선정도서’와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책따세 선정도서’가 더 공정하게 선정됐다는 것 말고 다른 차이가 있는가? 전국의 교사들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획일적으로’ 그 추천도서를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필독도서로 선정한다면 결과적으로 “독서의 본질 훼손,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 침해”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학교현장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독서이력철이 현실화된 마당에 책 읽는 습관을 키운다는 것은 당위성이 있다. 그리고 수시로 필독도서가 제시된다. 그러나 학교현장에서는 교사들이 토론을 통해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관이나 단체가 선정한 목록에서 ‘적당히’ 뽑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독서운동을 열심히 하는 한 교사는 현장의 사서교사들마저 자신이 선정하는 도서의 30퍼센트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충실하고 착실한 내용 검토와 ‘임상실험’을 통해 선정된 목록이라 해도 다양성을 침해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그런 목록들은 모두 사라지는 편이 낫다.
그리고 우리 현실은 선정도서 이상의 한 단계 진화된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시급한 것은 학교도서관 활성화와 모든 학교에의 사서교사 배치, 수없이 쏟아지는 아동 청소년도서에 대한 일선 교사의 상시적 비평이다. 사서교사 집단에서 일정 수준에 다다른 신간도서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책따세는 엉뚱하게도 ‘1책 1저자’ 운동을 벌였다. 저자들이 자신의 저서 중 한 권의 저작권을 포기하게 해서 책따세 사이트에 올려놓은 다음 학생들이 무료로 다운받아 읽게 하겠다는 것이다. 책따세가 이 운동을 벌이자 일부 저자는 체면치레로 자신의 저서 가운데 가장 시장성이 없는 책 한 권을 못이기는 척 내놓는 ‘아량’을 베풀었다. ‘선정권력’으로 저자나 출판사를 압박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을 무료로 읽게 한다는 근본목표가 달성됐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따세의 이번 운동을 비판했던 것이다.
교육현장에서 영향력 있는 추천도서는 ‘출판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왜곡하기도 한다.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가 발표된 당시에도 출판유통 시스템은 즉각 움직였다. 그 당시 온라인서점에서는 ‘서울시 교육청 추천도서 기획전―초등, 중등 필독서 최고 30% 할인+출판사 이벤트’ 같은 판촉전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대형서점에서는 특설코너를 설치했다. 졸속으로 선정된 책이 대단한 ‘권위’를 갖고 학부모나 학생을 압박한 것이다. 이 책들을 읽지 않으면 학교에서 도태되고 결국 원하는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해 인생낙오자가 될 것처럼. 이런 암묵적 강제성은 ‘목록’만이 유통되는 왜곡된 시장구조를 만든다. 2005년 4월 27일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가 주최한 ‘올바른 학생 독서문화 진흥을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출판계 대표로 토론에 참가한 박성경(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기획팀장) 씨는 이런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지의 발언을 했다.
권력을 갖는 목록은 출판문화도 황폐화시킬 수 있다. 아무리 객관성을 갖고 정성을 쏟아 섬세하게 만든 목록이라도 출판되고 있는 모든 책을 검토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좋은 책이란 기준보다는 목록을 선정하는 이에게 얼마나 노출되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또 그 안에서 좋은 책이란 기준은 선정하는 이의 주관적 판단 하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에 출판사들은 이러한 권력을 갖는 목록에 자신이 출판한 책을 진입시키기 위해 기관으로 또 선정하는 이에게로 줄을 서 로비를 할 것이란 것은 출판인이라면 모두가 뻔하다 말할 것이다. 현재도 상당수 출판사들은 몇몇 지명도 높은 각 기관과 단체의 선정도서 목록에 자사의 책이 선정되게 각종 로비를 하고 있다. 상당수의 출판사들은 책의 기획방향을 선정이 가능한 책으로 맞추어 갈 것이다. 선정되지 않은 책은 학생들이 읽지 않을 것이 뻔하고 목록에서 탈락하는 책을 많이 만들어내는 출판사는 결국 학생들을 위한 책을 출판하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또 지금까지 좋은 책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세워 지켜온 많은 출판사들이 그 기준을 목록이란 두 글자로 바꿔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출판의 황폐화는 독자인 학생들에게 그 피해가 갈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디지털 세상은 산업화 시대가 아니다. 지식기반사회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개인의 창의적 능력과 지적 다양성, 그리고 개성이 중요하다. 이런 시대적 조류를 반영해 국정교과서마저 “인류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표준지식”이 아닌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더 깊은 지식습득의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의 역할로 그 상을 바꾸자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마당에 획일적으로 같은 책을 읽히고, 나아가 시험까지 보게 해 평가한다는 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독서상업주의의 전형, 한우리
두 번째로 언급한 것은 독서상업주의의 전형이라 할 한우리 같은 단체의 추천도서다. 앞의 칼럼이 발표되자 한우리의 한 간부가 내게 ‘몰염치’라고 몰아 부친 것을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나는 결코 사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목표 지향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선정도서의 객관성이 부족하다면 그것 또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첫째, 그들은 ‘운동’과 ‘사업’을 병행했다. 추천도서를 독서지도사에게 공급하면서 이른바 일정한 이익을 취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발생한 이익은 ‘독서교육과 독서운동’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이익에 무게를 두다 보니 값싸게 공급하는 출판사의 책으로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수많은 양서목록이 있는 한 출판사의 책은 공급가 거래가 성사되지 않은 뒤 최근 몇 년 동안 단 한 권도 선정되지 않았다. 또 우수한 책을 꾸준히 펴내지만 공급조건은 까다로운 출판사들이 갈수록 선정목록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둘째, ‘해와 나무’와 ‘가지 않은 길’이란 계열사의 책을 선정도서에 다수 편입시켰다. 동일한 사업을 추구하는 출판사 중에서 전적으로 자사의 책만을 선정하기도 한다. 차라리 내놓고 하는 일이라면 괜찮은데 공익을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자사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셋째, 사옥을 짓겠다는 목표로 출판사들의 출자를 받으면서 이를 목록선정과 연결시켰다. 선정된 책의 공급 금액의 절반을 출자금액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실제로 그 정책이 도입된 이후에 선정된 목록은 대부분이 출자의향서를 제출한 출판사의 책으로 채워졌다. 선정된 책이 비록 형편없는 책은 아닐지라도 최상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책은 앞에서처럼 학교현장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문제가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한우리’의 모델을 모방한 후발주자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형 유통업체는 이익이 많은 책만 추천해
마지막으로 대형서점의 ‘추천’이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1990년대 이후 한국출판 성공신화의 핵이라 할 아동출판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되돌아보자.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동출판은 전집류의 방문판매와 졸속 제작된 책들의 ‘총판’영업이 주류였다. 우리 아동출판이 급속하게 성장한 데는 1980년대 인문사회출판사들이 대거 아동출판에 뛰어들어 양서를 펴내고자 한 의욕과 자기 자식에게 좋은 책을 읽히려는 ‘386세대’ 부모의 열의, 전교조 합법화 같은 학교 교육현장의 변화, 좋은 책을 골라주려는 어도연 같은 시민단체의 노력, 어린이책 전문서점과 전문도매상의 출현, 일간신문의 어린이책 소개지면 마련, 저작권의 확립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온라인서점과 할인점이 할인판매를 시작하면서 아동출판을 성장시켰던 동력 중 하나인 어린이책 전문서점과 전문도매상이 힘을 잃어갔다. 한때 전국적으로 100여 개에 이르렀던 어린이전문서점은 지금 거의 맥을 못 추고 있다. 어린이책 전문서점에 책을 공급하려고 등장했던 어린이책 전문도매상 또한 일제히 도산이라는 비운을 겪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금력은 부족하지만 좋은 책을 펴내려는 열의를 가진 출판사들이 좋은 책을 펴낼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어린이전문서점이 힘을 잃으면서 매출은 몇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라인서점을 통해 여러 단체에서 추천한 책의 판매가 커져 발전적인 유통의 흐름이 이어지는 듯했다. 내용이 이미 검증된 스테디셀러가 온라인서점 영업 초기에 대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전문서점에서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정작 책은 온라인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러면서 어린이 전문서점은 견본전시장 수준으로 전락해갔다. 아울러 추천의 ‘위력’ 또한 서서히 줄어들었다. 한우리의 추천이 자체 조직망을 통해 ‘권력’의 힘을 계속 유지한 반면 어도연 등의 추천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 틈을 대형서점의 ‘추천’이 메웠다. 그런데 시장장악력이 큰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의 추천도서 선정기준은 서점 판매이익을 높여주거나, 이벤트 비용을 협찬하거나, 광고비용을 부담하거나, 진열비용을 직간접으로 부담하는 책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런 결과 ‘팔리는’ 책이 곧 선善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무조건 많이 팔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오늘날 대형 온라인서점의 초기화면은 언론 매체의 역할을 대행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간신문에 크게 소개되는 것보다 온라인서점 초기화면에 노출되는 것이 판매에 더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판사는 어떻게든 온라인서점의 초기 화면에 책을 노출시키려고 한다. 최근에는 초기 화면에 책을 띄우려면 공급률을 48퍼센트 이하로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한때 대형서점들은 POP 광고를 하는 출판사의 책으로 판매대를 도배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는 무엇보다 출판사의 경영을 심각할 정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제프리 폭스는 『마케팅 슈퍼스타』(더난출판)에서 “가격할인은 가격전쟁을 초래해 사상자를 낼 뿐 수요를 창출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격할인은 곧바로 이윤감소로 이어진다. 맥킨지 연구결과에 의하면 단위 판매량의 증가 없이 1퍼센트의 가격할인이 이루어질 경우 영업이익은 평균 8퍼센트 감소한다. 가격할인 정책을 쓰는 기업은 일종의 ‘가격 살해범’이며 무능한 기업”(이홍, 「세상에 나온 책들의 고민」, <기획회의> 210호에서 재인용)이라고 지적했다. 이 지적을 그대로 출판시장에 적용하면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책을 팔면 팔수록 밑지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온라인서점 등장 이후 아동서 시장에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대형 스토리만화시리즈다.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홍은영 그림, 가나), 『서바이벌 만화상식』(코믹컴, 아이세움), 『마법 천자문』(시리얼, 아울북), 『코믹 메이플 스토리』(송도수, 서울문화사) 등의 대형 만화시리즈는 출간될 때마다 온라인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점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이런 결과는 출판사가 한 권 한 권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대형 기획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2003년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홈쇼핑’의 대대적인 할인판매다. 이는 긍정적으로 성장하던 책 시장을 다시 ‘박제된 도서목록’이 횡행하는 부정적인 시장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 홈쇼핑으로 책을 구매하는 주부들은 그동안 책을 멀리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홈쇼핑의 ‘현란한 유혹’에 빠져 한꺼번에 책을 잔뜩 사서 쌓아놓는 것이 일반화되면 가족이 함께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며 참다운 삶의 가치를 깨닫는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시장이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지면 다시 긍정적으로 돌리는 데 지난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기에 지금의 매출 상승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더구나 홈쇼핑의 득세로 아동총판들의 위기가 초래되고 있어 아동출판 자체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아동출판시장의 흐름
그렇다면 아동출판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아동출판 시장은 대략 창작동화, 그림책, 논픽션 등으로 3분 된다. 그 세 분야의 최근 흐름을 각기 살펴보자(『21세기에 한국인은 무슨 책을 읽었나』등에 실린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의 분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1 창작동화
『동화를 먹는 치과의사』의 저자이자 창작동화 출간에 몰두해온 신형건 푸른책들 대표가 2005년에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겨우 10여 년 전만 해도 한 해에 출간된 국내 창작동화는 20여 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한 온라인서점에서 판매 중인 국내 창작동화는 2200여 종이었는데 그 중 2000년 이전에 출간된 것은 350여 종이다. 최근 5년간 출간된 책이 85퍼센트나 차지한다. 2002년과 2003년에는 각각 403종, 466종으로 정점에 도달했다가 2004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1) 스테디셀러의 아성이 되었다.
2) 추천도서와 필독서 중심의 소비가 이뤄지면서 유명작가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3) “질이 담보되지 않은 쏠림현상이 만들어낸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4) 신간의 시장진입이 어렵다.
5) 주제는 ‘일하는 아이들’과 ‘생각하는 아이들’로 크게 나뉘었다.
6)『전봇대 아저씨』의 채인선,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의 임정자, 『학교에 간 개돌이』의 김옥, 『왕당콩 갈비 게으름이 욕심쟁이 봉식이』의 김리리 등이 던져 준 새로운 상상력(또는 감수성)이 주목받았다.
7) 리얼리즘 계열은 생활동화, 사실주의 동화, 현실동화 등으로 변신했다.
8)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의 힘이 커졌다.
9) 아동문학은 최근 ‘각종 문제의 전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10) 최근 유망한 신인들의 등장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대형 신인의 출현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2 그림책
2005년부터 그림책은 전집을 제외하고 한 주에 70여 권 정도가 출간된다. 그러나 성수기에는 150여 권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다. 1997년만 해도 몇 출판사가 ‘선구자적’ 자세로 악전고투하면서 1년에 겨우 몇 권 펴내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전체적으로 어린이책 시장은 인지도가 높은 외국책으로의 쏠림현상이 너무 심각한데 그림책 시장은 국내 작가가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완성도와 인지도가 높은 외국그림책의 실질적 시장점유율이 95퍼센트 이상이다. 『돼지책』『우리 엄마』 등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나올 때마다 ‘의심의 여지없이’ 독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존 버닝햄, 클로드 부종, 레이먼드 브릭스 등 국내에서 인기 있는 외국 작가들의 그림책은 나오는 족족 번역 출간되고 있어 ‘익숙한’ 저자로의 쏠림현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림책의 1차 독자는 ‘글로벌’ 안목이 높은 주부들인데 그들은 책의 질만 놓고 평가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1) 그림책은 어릴 때 보고,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읽어주고, 나이 들어 다시 읽는 책, 즉 가와이 하야오의 말처럼 ‘평생 세 번 읽는 책’이 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어쩌다가 『구름빵』(백희나, 한솔수북) 같은 대형 신간의 출현을 가져오기도 한다.
2) 말과 그림이 결합한 매체의 장점을 보여준다. “‘보여주며 말하기’는 모든 예술, 모든 지식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우월한 형태이며, 멀티미디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3) 그림책의 밀리언셀러 시대가 왔다. 하지만 『달님 안녕』(보드 북까지 합해 100만부), 『강아지 똥』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이상 60만 부), 『사과가 쿵』 『곰 사냥을 떠나자』 『작은 집 이야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이상 50만 부) 등은 모두 오래전에 출간된 스테디셀러다.
4) 어린이책 운동의 성과, 온라인서점의 활성화, 육아관련 포털사이트의 영향력 등으로 말미암아 스테디셀러의 아성이 되었다.
5) 홈쇼핑용 전집물 생산과 판매가 크게 늘었다.
6) 방문 대여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7) 앤서니 브라운, 존 버닝햄 등 해외 인기작가의 신간은 1만 부가 금방 팔릴 정도로 인기지만 국내 작가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8) 시장이 세분화되고 있다.
9) 전반적으로 시장이 크게 위축되었다.
10) 그나마 성인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좋은 징조다.
3 논픽션
『신기한 스쿨버스』시리즈가 성공을 거두며 어린이 과학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문학 영역에 비해 미개척지라고 볼 수 있다. 논픽션 도서 대부분은 동물, 식물, 곤충의 한살이나 특징 등을 서술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생명과학 일반, 지구과학이나 우주과학, 물리과학 영역은 극히 제한적으로 출간되어 있다.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과 예술 분야를 체계적으로 다루되 연령별 난이도와 접근방식을 달리한다면 논픽션 영역에서는 시도해볼 만한 분야가 많다.
논픽션 부분에서는 어떻게 지식을 효과적으로 재미있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으로 『우리 몸의 구멍』이나 『신기한 스쿨버스』에서 보듯 논픽션에 픽션적 기법을 가미한 창의적 논픽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고전적 접근 방식을 탈피하면 내용에 따라 형식을 넘나들며 지식을 쉽게 풀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위인전에서 벗어나 비주얼과 당대의 생활상이나 문화를 가미할 수도 있고, 모험과 추리적 기법을 이용해 논픽션적 주제를 다뤄볼 수도 있다. 요즘 인기를 누리는 신화라는 주제도 학습만화의 형태가 아니라 예술적 측면에서 또는 문화적 측면에서 비주얼을 통해 접근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1) 문학영역은 포화상태라 오히려 논픽션에는 미개척지가 많다.
2) 논픽션적 주제를 레퍼런스북, 드릴북, 액티비티북, 만화책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풀어내는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3) 문학영역보다 시장 규모가 경미하고 아직 시장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현실적 문제가 남아 있지만, 요즘 목록에서 논픽션 영역의 주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접근한 책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4) 스토리텔링을 추구하고 있다.
5) 어린이 교양서는 “어린이문학과 그림책이라는 기름진 토양위에 자란 나무”라 할 수 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편지』(박은봉, 웅진)는 120만 부나 판매됐다.
6) 픽션으로 시장진입이 어려운 신생출판사나 이미 픽션영역의 책들이 갖춰진 기존 어린이 출판사들이 외연 확장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7) 문학은 작가적 역량이 중요하지만 논픽션은 출판사와 편집자의 능력이 요구되는 분야라 그나마 신인 저자나 신생 출판사가 등장하기 쉬운 분야다.
8) 학계의 성과를 어린이책에서 소화하고 있다.
9)『한국생활사박물관』(사계절)처럼 학계의 연구를 추동하는 경우도 있다.
10) 다큐멘터리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었다.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아동시장은 스테디셀러의 아성이 되면서 신간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이 힘들어졌다. 유망 신인의 등장도 어려워졌다. 이제 출판사들은 신간의 손익분기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아우성이다. 아동출판시장에서 ‘바로 이것’이라 할 만한 신간의 출현이나 새로운 트렌드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다만 요즘 아동출판시장에서 포착되는 분명한 ‘트렌드’는 홈쇼핑 등을 겨냥한 대형 전집이 졸속으로 생산되는 일이 늘었다는 점이다. 또 단 권으로 펴내도 될 책을 10여 권으로 늘려 세트의 정가의 올린 다음 대거 할인해서 판매하는 일이 일반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유망신인도, 트렌드도 모두 사라진 아동출판시장
지금 아동출판시장에서는 아동독자의 영양불균형이 갈수록 심해지고, 화제작이 나오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성장하던 유명 출판사들마저 정체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동출판시장에서도 철저하게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편없는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대형서점 쏠림현상이 빚은 과당경쟁과 저가정책, 대형서점의 부도덕한 추천도서 양산 등이 낳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결론적으로 지난 10년 동안 우리 출판의 질적 도약을 상징하던 아동출판시장은 도덕성 있는 단체들이 추천도서만 선정하고 그 이상의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에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로지 대형서점이나 독서상업주의 단체가 이익추구라는 속마음을 감춘 채 추천한 추천도서뿐이다. 그 책들은 학교현장과 할인 업체의 기형적인 결합을 통해 건전한 생산구조를 파괴해 불건전한 시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국민체조’하듯이 일제히 추천도서를 읽게 만들어 창조적 독서의 파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아동출판의 질적 저하는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모습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대안마련이 매우 시급하다 하겠다.
기사게재 : <기획회의> 211호 특집 - 2007 출판계 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