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 시단의 대표적 시인으로 손꼽히는 정지용(鄭芝溶 : 1902∼?)은 겨우 두 권의 시집을 남겨놓고 있다. 『정지용시집』(시문학사, 1935)과 『백록담』(문장사, 1941)이다. 이 두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특성을 중심으로 그의 시 경향을 살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전기는 동적 소재인 '물'을 즐겨 다루었는데 후기는 정적 소재인 '산'을 즐겨 다루고 있다. 또한 이미지와 기교에 치중했던 전기와는 달리 후기에 오면 관념과 정신에 기운다. 그러한 경향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이 분행자유시로부터 산문시에로의 이동이다. 전기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후기는 동양적인 정관의 세계에 눈을 돌린 것 같다. 『백록담』에 수록된 작품은 총 33편이지만 산문으로 평가된 제5부의 8편을 제외하면 겨우 25편에 불과하다. 그 중 산문시가 10편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가 후기에 산문시에 얼마나 경도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장수산(長壽山)·1, 2」는 『문장』제2호(1939.3.)에 발표된 그의 후기 작품이다. 의고풍(擬古風)의 어투며, 유장한 템포가 여유로운 동양적 정조를 느끼게 한다.
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 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1」전문
화자는 지금 겨울밤 깊은 장수산 속에 갇혀 있다. 산은 온통 흰 눈에 싸여 있는데 보름달이 온 산천을 환하게 비치고 있다. 설백(雪白)에 월백(月白)하니 밤은 종이보다 더 하얗고 깊은 산 적요가 뼈에 스미어 마음이 시리다. 그래서 화자는 그 적막을 깨뜨리는 사건(?)이라도 벌어졌으면 하고 생각한다. 시경(詩經)에 '벌목정정(伐木丁丁: 나무를 도끼로 찍을 때 울리는 소리)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깊은 산골에 나무 찍는 소리라도 들렸으면 싶다. 큰 소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이 골짜기를 울리면 내 마음의 고독이 좀 가실 것도 같다. 그러나 다람쥐 한 놈 움직이지 않고 멧새 한 마리 울지 않는 고요가 지속될 뿐이다.
그래서 화자는 밖으로 나가 달밤을 걷는다. 그러면서 생각기를 달도 보름 동안 점점 차올라 드디어 저렇게 만월이 된 것은 오늘밤 나로 하여금 이 골짜기를 걷게 하려 그랬던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이윽고 화자는 다시 방안으로 돌아와 한 사나이가 남기고 간 체취를 맞는다. 조금 전에 자신과 함께 바둑(?)을 두었던 웃절의 늙은 중이다. 여섯 판을 다 지고도 웃고 올라간, 승부에는 아예 초탈한 그 노승이 화자의 마음을 놓지 않고 있다. 만월이 보름을 걸려 차오르듯 노승이 초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평생의 수련이 필요했으리라. 천상의 달과 지상의 노승이 상대적으로 화자를 이끄는 매체로 설정된 것이 조화롭다. 이 두 대상은 화자가 지향하고자 하는 원숙의 경지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끝은 화자의 내면세계에 대한 진술이다. 주위의 고요가 오히려 자신의 번뇌를 일깨운다. 그러나 화자는 꿋꿋이 그리고 담담히 그 번뇌를 응시하며 이겨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풀도 떨지 않는 돌산이오 돌도 한덩이로 열두골을 고비고비 돌았세라 찬 하늘이 골마다 따로 씨우었고 어름이 굳이 얼어 드딤돌이 미듬직 하이 꿩이 긔고 곰이 밟은 자옥에 나의 발도 노히노니 물소리 귀또리처럼 즉즉( )하놋다 피락마락하는 햇살에 눈우에 눈이 가리어 앉다 흰시울 알에 흰시울이 눌리워 숨쉬는다 온산중 내려앉는 휙진 시울들이 다치지 안히! 나도 내더져 앉다 일즉이 진달래 꽃그림자에 붉었던 絶壁 보이한 자리 우에! ------―「장수산·2」전문
「장수산·1」과는 달리 「장수산·2」는 낮이 배경이 된다. 작품(1)에서의 불안과 시름 대신에 작품(2)에서는 평안과 자족의 정조가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 작품은 장수산의 묘사로 시작된다. 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석산인데 열두 골 산 전체가 한 덩이 큰 돌로 이루어졌다. 골짜기의 구비를 돌 때마다 새로운 하늘이 펼쳐지고 개울은 얼음이 굳게 얼어 발디딤돌이 믿음직하다. 꿩과 곰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도 놓으며 얼음장 밑으로 귀뚜라미 울음처럼 흐르는 물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햇살을 받으며 쌓인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린다. 추녀처럼 돋아나온 벼랑의 돌기들 위에 흰 눈이 층층이 쌓여 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도 같다. 그것이 온 산중에 겹겹이 돋아났는데 서로 다치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나도 내 몸뚱이 내 던져 지난봄 진달래 꽃그림자 붉었던 절벽 밑 뽀얀 자리에 앉는다.
화자는 짐승들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놓으며 자연과의 동행에 접근한다. 그는 이미 문명인이 아니라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자신의 몸을 자연에 던지면서 자연과의 합일을 성취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갈등도 번뇌도 없다.
작품 (1)에서 화자는 밤을 통한 내적 수련을 겪은 다음, 작품 (2)에서 자연합일로 탈속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 양분되어 있는 재미있는 연작이다. 정지용은 이러한 산문시들을 끝으로 거의 시작(詩作)을 멈추게 된다. 왜 그랬을까.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