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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e Things That Make Us Catholic
By Thomas H. Groome, Catholic Update, St. Anthony Messenger Press(Cincinnati, OH), July 19 2004.
지금은 무엇이 가톨릭 신자이게 하는가 한번쯤 의심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범죄로 드러났든, 은닉되었든 최근의 사건들은 우리의 신앙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고통스러운 속죄의 시간을 던져주시고, 우리의 신앙의 깊은 뿌리로부터 회개하도록 초대하는 하느님의 우회적인 축복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치 처음처럼 다시 가톨릭의 아름다운 진리와 윤리적 신념과 영적인 보화들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우리와 세상에게 강력한 생명을 선사할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설명하고, 후에 제자들에게 설명한대로 “살아있는 생명수”로 오셨다(요한 4, 4-42). 분명히 이 시기에 우리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선한 강으로부터 이를 마셔야 한다. 어떠한 사건들과 위기 때문만 아니라, 가톨릭 뿌리를 보다 더 깊이 바라보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된 지 40년이 되었다.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 현재화 bringing up to date)의 탁월한 계획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에 임하심으로써 옛 방식에 변화의 떨림과 아픔을 가져왔다. 사랑하올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기 위해 창문을 열자고 말씀하셨다. 40년이 지나,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오래도록 숨쉬기 위해 휴식이 필요하다.
신앙의 단편모음(A collage of convictions)
우리는 가톨릭 정체성을 가져야 하나, 개별적 정체성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인지, 우리의 프로테스탄트 형제 자매들과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성경도, 성사도, 신경도, 교회도 아니라, “한 인물, 성부의 외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가톨릭 교회교리서, 426). 세례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공통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 죽음과 부활을 모범으로 보다 더 닮으려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 2)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가족과 우리의 가정을 구별하여 잘 살펴 보아야 한다. 물론 고정된 가톨릭 정체성은 없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에 합치된 신앙과 진술의 단편모음들이다. 가톨릭 신앙 퍼즐의 아홉 개 조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인간에 대한 긍정적 이해 Positive understanding of the person
가톨릭시즘은 인간 인격을 죄스러움보다는 더 은총스럽기에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한다. 진실로, 우리는 무서운 죄와 파멸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첫째로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자연법”을 심어 주셨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은총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불려졌다.
진보적 개혁론자들이 인간 상황은 완전히 무너졌다고(루터뿐 만 아니라 칼뱅도) 주장할 때, 가톨릭 교회는, 특히 트렌트 공의회(1545-63)에서 신적 이미지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강생에 의해 새롭게 되었음을 천명하였다. 하느님의 이미지와 모상을 성찰하는 모든 백성은 모든 인격의 존엄성과 인간 생명의 가치-요람에서 무덤까지-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기초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평등하게 기본적인 인간 권리와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초 세기 그리스도교 교부이자 순교자인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 인격을 온전히 살리는 것이다”고 하였다.
2. 공동체에의 헌신/참여 Committed to community
왜 가톨릭은 교회에 가고 교회에 머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과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래적으로 공동체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일관되게 하느님은 우리를 각자를 위해, 각자에게 책임성을 갖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였다고 가르쳐왔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세상에 생명을 주는”(요한 6, 5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체의 한 부분인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일치할 것을 요청한다. 그 특성상, 그리고 신앙 상으로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우리는 서로 관계적이다.
가톨릭은 무덤을 넘어 도달할 것임을 믿으며 진지하게 공동체를 형성한다. 죽음은 더 이상 각자에 대한 근심의 장벽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례의 끈은 결코 끊어지지 않으며, 우리는 성인들에게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톨릭의 공동체 강조는 또한 각각의 시민의 전체 사회에 관한 공동선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교리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공동 참살이 common well-being 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와 사회에서 가톨릭은 일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일치 “all for one, and one for all.”
3. 성사관 Sacramental outlook
“God never makes junk” 하느님께서는 결코 싸구려를 창조하지 않으신다. 인격과 관련해서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을 기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성에 참여자로서 창조하고 있다, 비록 파괴의 오용도 있지만, 이는 결코 악을 물려주는 것은 아니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파티를 여는 것, 심지어 알코올 등, 중독 가능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은 우선 하느님의 선물(gratia)이다. 인간은 이 지상에서 의미가 충만하고, 값어치 있게 살아 간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에. 이러한 지상 삶의 은혜로움은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사적 원칙의 최고점에서 발견하게 한다. 이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는 삶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창조된 질서를 통해, 우리의 관계들을 통해, 우리의 모든 선한 노력들과 우리 방식의 훈련을 통해 응답한다. 교회에서 거행되는 칠성사의 절정인 것은 성사적 원칙이 가톨릭 신자들을 “to see God in all things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St. Ignatius of Loyola) 격려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성사적 삶은 세상을 향한 가장 탁월한 성사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높여졌다. 그리고 교회인 우리는 “signs and instruments by which the Holy Spirit spreads the grace of Christ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선사하시는 (일곱 개의) 기호이자 도구”(Catechism #774)를 “sacrament of sacraments 성사들 중의 성사”인 성찬식과 함께 거행한다. 그러나 칠성사는 “to more in the midst of the ordinary 일상의 중심에서 더 중요한 것”을 인식하기 위해 삶의 성사적 견해는 가톨릭 안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4. 가톨릭은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한다 Catholic cherish Scripture and Tradition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scriptura sola 성서 만으로”는 하느님의 계시의 자료이다. 개혁자들에 대한 대답으로, 트렌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the norm of norms 규범중의 규범”으로서 성경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Tradition 전통은 - 교회의 역사를 넘어 도출되는 time-tested 역사적 경험에 의해 검증된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 신적 계시의 “fountain 원천”임을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지혜와 함께 하는 새로운 질문과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성령은 교회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것이 가톨리적 방법의 주장이다.
솔직히 개신교 형제 자매들은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대한 헌신은 보다 충실하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또 다른 선물은 가톨릭 신자로 하여금 성경에로 돌아가고,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새롭게 정치하는 것이다. 공의회는 또한 성경과 전통이 신앙의 공동체, 곧 교회 안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실, 성경, 전통, 교회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도 빠져있으면 제대로 설 수 없을 정도로 함께 관련되어 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성령의 활동 아래 함께 상호 작용한다”(Divine Revelation #9 and 10).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는 교황과 교황에게 일치되어 있는 주교들의 교도권의 가르침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 안에서 성경과 전통을 해석한다.
5. 가톨릭은 전인적 신앙을 받아들인다 Catholic embrace holistic faith
예수는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 쏟는 전인격적 존재를 요청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설교하셨다. 옛 Baltimore Catechism은 “Why did God make you 왜 하느님을 당신을 창조하셨나?”라는 질문의 응답으로, “지금의 삶과 내세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적 전인적 신앙을 성찰하였다. 우리의 신앙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배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신앙은 구석구석, 월요일에서 주일까지 스며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신앙은 존재의 모든 차원 – 개인적, 상호간, 정치적 – 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환경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야 한다.
다시, 개신교 개혁자들이 “신앙 만으로”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가톨릭의 불필요한 어떤 특정한 신심 행위를 강요하는 것을 고치려고 애썼다. 그러나, 트렌트는 하느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구원된다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신앙은 그 자체로 선한 행위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님으로서 예수를 고백 confessing 하는 것 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함 doing 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see Matthew 7:21). 또는 야고보서를 인용하면, “행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2:17).
6. 정의에 대한 참여 Commitment to justice
현대 성서학자들은 예수의 설교의 중심 주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다는 것에 동의한다. 야훼 신앙을 유지하면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인격적이고 사회적으로, 영성적이고 정치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 인류의 평화와 정의, 삶의 충만(John 10:10)과 피조물의 존중을 원하신다. 예수는 이사야 61장 1절-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셨다. (루가복음 4장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곤궁 속의 이웃을 돌보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19세기 말 교회는 우리 신앙은 외형적으로 사회 정의의 소임을 다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제자들이 불의한 사회 구조와 모든 이의 정의를 확보하는데 힘쓸 것을 요청한다. 하느님과 같이, 하느님의 백성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 곁에 있어야 한다.
7. 전우주적 영성 Universal spirituality
영성은 오늘날 유행어 중 하나다. 심지어 신앙을 모르는 이들도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가톨릭 태도는 모든 이들은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살아가기에(Genesis 2:7),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원 original” 은총이 부여되었다. 철학자 Blaise Pascal은 우리의 결정적 희망을 잘 요약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인간 마음의 공허는 하느님이 만드셨기에 채워질 것이다.”
가톨릭의 가치는 영성과 탁월한 영적 카리스마의 다양성에 있다. 비교컨대, 오늘날 “new age” 영성 – 신과의 매우 개별적인 관계에 대한 따뜻하고, 불명확한 감정-이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가톨릭 영성은 한마디로 “행하기 위한 신앙”이다. 즉 일상의 모든 상황에 침투하기 위한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활동적인 신자들과 기도, 예배, 대화의 제자들을 통해 지탱되었다. 이 신앙은 우리와 세상을 위한 연민 compassion, 정의, 평화의 열매를 낳았다.
8. 가톨릭은 보편적 Catholics are ‘catholic’
가톨릭의 의미는 ‘보편적’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호한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어 katha holos 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구적으로 “모두에게 포함 to include everyone”이다.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사용하였다. James Joyce는 “가톨릭의 의미는 ‘여기 모든 이가 온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in Finnegan’s Wake). 가톨릭이라 불리는 것은 어떤 인간 조건과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이웃뿐 아니라, 경계선 없이 세상 저편의 모든 이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술처럼, 대화하기 위해 개방하고 배움을 얻기 위해서라도 타 종교인들을 존경한다는 것이다(Vat II, on non-Christian religions, #2).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가톨릭은 “어디서든 발견되는 진리에 열려있다”는 것이다. 소지역주의 parochialism 와 닫힌 마음 closed-mindedness 는 가톨릭 신앙에 위배된다.
9. 마리아에 대한 신심 Devotion to Mary
교회의 시초로부터 마리아는 성인들의 통공 the communion of saints 안에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조 요한 19:26-27).
초세기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가 아닌가에 대한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 일 뿐이라고 하지만, 공통의 신자들의 신앙은 마리아가 자궁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인 하느님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천주의 모친”이라 불러야 한다.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매우 인간적인 경향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가나 혼인 잔치에서 주선한지를 안다. 비록 예수는 공적 전도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어머니의 요청을 존중한다. 분명히 착한 아들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영원토록 지속된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우리를 위해 주선한다면, 예수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2천년 대희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우리 신앙을 키우기 위해 놓쳐버린 많은 방법과 시간에 대해 용서를 청하자고 거듭 요청하였다. 우리는 신앙의 핵심을 준수하기보다는 종종 파손한 것에 대해 한탄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희망, 즉 가톨릭 신앙과 함께 도전해 온다. 우리가 가톨릭이게 하는 것은 탁월한 진리와 가치보다 사는 것처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2007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
한국 주교들이 “가계 치유”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어긋날 뿐더러 건전한 신앙도 해친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10월 15-18일 서울 중곡동에서 열린 한국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는 이외에도 여러 문제를 다뤘다.
총회 끝에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주교들은 이른바 “가계 치유”는 가톨릭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밝히고, 이의 근본적 오류는
1. 원죄 교리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2. 무속신앙과 습합된 그릇된 내세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 가계 치유론자들은 “주님은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을 거쳐 삼대 사대까지 벌한다” (민수기 14, 18)는 구약을 근거로 들며 죄가 크면 그 죄에 대한 벌이 그 후손에게 까지 미치기 때문에 그 후손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다고 설파한다.
2.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성경 구절의 앞뒤 맥락을 보면, 백성이 반란을 일으킨 행위로 하느님께서 백성을 모두 없애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백성을 대신해 용서를 청한다. 이때 백성의 죄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는 과장법을 사용해 조상의 죄악이 삼대 사대의 후손에게까지 미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큰 죄에 대해서도 모세가 용서를 청하자, 그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당신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또한 가계 치유론은 영성적으로 이단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교리상으로 세례를 받으면 개인의 죄는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사함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신앙인데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가톨릭적이 아닌 것이다.
4. 모든 인간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죄는 유전되지 않는다
5.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육적인 유전인자를 받지만 부모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체이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각자에게 고유하고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삶을 각자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조상들의 삶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다.
6. 죄라는 유전인자는 없다.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적인 결단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조상들의 죄가 후손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은 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흐리는 것이다.
7. 가계치유는 또한 기복적인 신심을 조장하고 기도와 미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한다. 가계치유는 미사 예물과 미사 횟수를 강조함으로써 거룩한 예물의 의미를 속화시킨다. 올바른 신앙은 미사의 횟수와 예물의 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마음자세와 태도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계저주론 비판 특집
<목회와 신학> 3월호
2000년 03월 02일 (목) 12:00:00 김은홍
한국인은 유난히 조상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부모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자식에게 더 큰 힘을 행사한다. 조상은 자손에게 신력을 행사할 수 있다. 갖가지 귀신이 현실에 개입한다. 부모 살아 생전 천하에 망나니 소리를 듣던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 제사에는 극진하다. 한마디로, 두렵기 때문이다. ‘조상 묘를 잘못 써서’는 가족 불상사의 제일 원인으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인도 이 조상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가 보다. 귀신론이 한국 교계 틈새에 파고들어 기생하는 것도, 이른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들먹이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 가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는 현상이 이를 보여 준다.
<목회와신학>은 한국 교계 일각에서 음성적으로, 대중적으로 가속도가 붙어 확산되고 있는 가계저주·가계치유론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들을 이번 3월호 특집으로 실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라는 특집 주제에 논객으로 참여한 이들은 성경신학자, 목회상담신학자, 정신과전문의, 그리고 목회자. 가계저주론을 각 방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해보겠다는 뜻이다.
김은홍 기자 amos@kidok.co.kr
1. “하나님 절대주권 고백해야” 정훈택 교수 <총신대신대원·신약학> <하나님의 사역인 축복과 저주>라는 글에서 정 교수는 가계저주론은
A. “성경으로 포장돼 있으나 그 내용물은 복음적 메시지와 무관하다”
B. 가계저주론대로라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가계저주가 지배하는 영적 질서에 내 맡기신 채 방관하고 계셔야 한다. 이 세상은 온갖 잡신과 온갖 혼령과 온갖 물신의 놀이터가 되고 인간은 그 노리개가 되며 그것들을 피하거나 쫓아내는 식으로 일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C. 가계저주론과 같은 사상에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라고 조언한다.
2. “언약의 구조적 관점에서 저주·축복 봐야” 김정우 교수 <총신대신대원·구약학> <언약의 저주에서 본 소위 ‘가계에 흐르는 저주’ 신학의 문제점>
A. 저주와 축복을 구약성경의 언약의 구조적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B. 저주와 축복은 독자적인 주술적 능력으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속에서 언약을 유지하는 ‘채찍과 당근’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C.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저주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주시고 생명과 복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3. “가계치유론은 임상경험 일부” 이관직 교수 <총신대신대원·목회상담학> <가계저주론에 대한 목회상담학적 이해와 비평>
A. “가계저주론은 저주의 원인을 찾아내어 구마(축사)하며 회개하면 그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확신있게 말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신비성을 축소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B.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의 저자 이윤호 목사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치유하고자 애쓰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싶지만, 임상 경험을 토대로 현상학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내세우며 가계치유론을 마치 최고의 이론인 양 주장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4. “말씀안의 일상적 치유역사가 중요” 이성훈 박사 <연정신경정신과의원 원장> <복음의 능력을 재발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A. “사람을 상대로 내적 치유 사역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가계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가계와 관련된 문제를 제쳐놓고는 보다 깊은 상담이나 치유로 나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가계의 저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라며 가계저주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 잡는 까닭을 분석한다.
B. 가계 저주 이야기에 사람들이 쏠리는 것은 “말씀 안에서 일어나야 할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치유 역사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5. “원죄는 저주가 전수된 것 아니다” 송제근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교·구약학> <모세오경에 나타난 저주에 대한 주해적 접근>
A. 창세기 2, 3장에 나오는 원죄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정당화되는 것에 대해, “아담 이하의 자손들은 이미 지어진 죄, 죄성, 죄의 결과, 죄의 영향 아래 살뿐이지 이것을 저주가 전수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한다.
B.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신화적이고 신비적인 삶이 아니라 영적이고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삶이라고 강조한다.
6. “‘조상탓 신앙’ 염려스런 징후 많다” 이문식 목사 <남서울산본교회> <가계치유에서의 ‘조상탓 신앙’의 문제점>
A. 목회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는 ‘염려스러운 징후들’을 지적한다.
B. ‘조상탓 신앙’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회심 이전의 저주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비정상적인 영적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C. 가계치유자들의 권면은 신앙생활 중 ‘사죄의 확신’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게 하여 십자가의 은혜의 ‘인격적 만남’보다는 ‘신비적 만남’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갖게 하며,
D.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저주상태로 파악하는 신학적 오해와 신앙적 오류를 범하고 있어 거듭난 이후에도 부정적인 자아상을 계속 강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Nine Things That Make Us Catholic-토마스 그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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