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행정선생은 명예와
이욕에 뜻을 두지 않고 한동안 두문불출 (杜門不出)하며 학문에 전심하다가, 40세가 되던 1347 (충목왕 3) 년에야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려는 뜻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의 상황이 동문선 (東文選) 에 실린 목은 선조님의 “최씨전 (崔氏傳)”에 실려있습니다. 최씨전에 의하면 행정선생은 위에 언급되었듯이
40세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응하려 하였는데, 마침 그때 가정 선조님께서 허백 (許伯) 가
더불어 지공거 (知貢擧 = 고시관, 考試官) 가 되시어 과거시험을 주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행정 선생이,
“내가 가정 (稼亭) 과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하였으니, 비록 요행 (僥倖) 으로 합격한다 할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그가 나를 보아준
것이라 할 것이다. 가정이 나로 인해 그런 오명 (汚名)을 얻는다면 내가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결국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참고적으로 이때 가정선조님과 허백이 주관한 과거 (=대과) 에 뽑힌 급제자 33인 중에는 김인관 (金仁琯), 한수 (韓脩), 이강 (李岡), 이무방 (李茂芳) 등이 있었는데,
이무방은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 배위 정경부인 (貞敬夫人) 무송윤씨 (茂松尹氏) 편에서 광양이씨 (光陽李氏)의 시조가 되는 분으로 정경부인 윤씨의 외조부님되시는 분이라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자제들이 어렸을 적부터 글을 깨우치고 학문에 힘쏫는 제일 큰 궁극적 이유는 나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는데에 있었습니다. 벼슬길에
나아가야지만 일단 그동안 뒷바라지를 하여준 부모-형제-처자식 등
가족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었고, 또한 결과적으로 온 가문을 빛낼 수 있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선 곤경 (困境)에 처한 불쌍한 백성들을 어루 살피며 어진 목민관 (牧民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사내대장부의 높고 넓은 꿈과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방편 (方便)이 되어 주었던 것이 과거급제 (科擧及第) 였던 것입니다. 물론 현실은 꿈과 매우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선 과거급제의 명예는 사대부 (士大夫)란 특별 신분을 계속 이어가며 대대로 양반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방편이 되었기도 하였는데,
벼슬길에 나중에 들어서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일단
소과 (小科)에 급제하여 생원 (生員)-진사 (進士)의 자격만 취득하더라도 그 위상이 상당 하였습니다. 소과급제만 하여도 큰 소리 떵떵치고 몇대동안 양반행세 하는데
아무 문제 없었으며, 이렇게 생원-진사는
학식있는 사람으로 지역사회 (地域社會)에서 인정받고 좋은 대우 받았던 것입니다.
하늘의 별따기
같은 대과 (大科) 급제를 떠나서, 실상은
소과의 제일 첫 관문 (關門)인 초시 (初試)에만 합격하여도 “이초시 (李初試)”, “김초시 (金初試)”, “박초시 (朴初試)” 등등 불리면서 글을 어느 정도 깨우친 선비로 인정받았습니다. 초시합격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서 “서운길상 (瑞雲吉相)” 이란 글이 쓰인 부채전같은 선물도 곧잘 오고 가며
행운을 빌었다 합니다. 초시합격을
꼭 해야만 나중 복시 (覆試)에도 응할 수 있었고, 또 복시에 합격하면 대과에 응할 수 있었던 만큼, 초시합격은 상당히 중요하였습니다. 초시에 한 번 낙방 (落第) 하면 알성시 (謁聖試), 증광시 (增廣試),
별시 (別試) 등 같은 특별한 시험이 치뤄지지 않는 이상 보통 다음 식년시 (式年試)까지 장장 3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록 과거시스템의 제일 낮은 초보단계가
초시였으나, 초시는 이모저모로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으며, 초시합격이 가지는 위상 (位相 )은 시험의 수준을 떠나서 의외로 컸던 것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소과 초시에 전국에서 보통 평균 6만 3천명 정도가 응시하였고, 이중 소과 초시급제자
1,400명을 선발하였으니, 45:1의 높은 경쟁율을 뚫어야 초시에 급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과 초시합격에서
소과 복시 (覆試) 합격까진 7:1의
경쟁율이었으니, 초시 합격을 한 700명의 생원과 응시자와
700명 진사과 응시자 총 1,400명 중에서 최종 합격자 생원-진사 각각 100명씩 도합 200명만 엄선 (嚴選)하여
급제시켰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첫 관문 (關門)인 소과 초시 응시에서 소과 복시 급제하여 생원-진사되기까지는 315:1의 살벌한 경쟁률을 뛰어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생원-진사 되기가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한
소과급제에서 대과급제까지는
6:1의 경쟁율이었으니, 소과 복시 합격자 생원-진사 도합 200명중에서 최종33명만 엄선하여 대과 급제자로 발탁 (拔擢) 하였습니다. 대과에는 초시, 복시
말고도 소과에는 없던 세번째 최종시험인 전시 (殿試) 가 추가되었는데, 원칙적으로 대과에 급제하려면 소과의 초시-복시 및 대과의 초시-복시-전시의 총 다섯단계를 거쳐
합격해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10대 진사”란 쾌거 (快擧) 이룬 만석군 집안 경주최씨
(慶州崔氏) 가문처럼 소과합격에 만족하고
당쟁 (黨爭) 이나 매관매직 (賣官賣職) 등의 불합리 (不合理)
하고 모순 (矛盾) 적인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과 응시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통계를 다시 살펴보면 평균적으로 6만 3천명의 응시자가 처음에 과거시험을 시작해 마지막 단계인 대과전시에서 최종정예인원인
33인만 선발 (選拔) 되었던 바, 소과
초시응시에서 문과 전시 급제까지는 무려 1,890:1의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글공부한 선비가 거의 2000대 1의 경쟁율을 뚫어야 영광의 대과급제를 거머 쥐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러 이유로 과거에 아예 응시하지 않거나 못한 유생들도
적잖았으니, 대과급제자는 선비 수천명중 한명밖에 안되는 꼴로 굉장히 얻기 힘든 소중한 큰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과에 합격하는 것이 힘들었고 한 번
합격만 하면 대대로 온 가문의 영광 (榮光)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과-소과 합격자들이 3-5일동안 유가 (遊街)를 받아 풍악 (風樂)을 울리는 악대 (樂隊) 및 온갖 재주와 묘기를 부리는
광대들과 재인 (才人)들을 앞세우고 친척집들과 스승집,
고시관 집 등등을
찾아다니며 자축했던 것은 그만큼 과거급제가 인생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급제 특히, 대과급제는 출세길을 달릴 수 있는 인맥 (人脈) 네트워크의 형성 및 어떤 특정한 학맥 (學脈)의 학문적 계승과 정치적 당색 (黨色) 또한 의미할 때도 적잖았습니다.
봉건시대
(封建時代) 였던 조선왕조 500년때의 소과/대과 급제, 특히 대과급제를 오늘날
20-21세기 현 민주국가 (民主國家) 의 어떤 학문적 성취에 견주기가 마땅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혹자는
고시합격 (考試合格) 이라고도 말하고 혹자는 해외유명대학에 유학 (留學)하여 알아주는 분야에서 박사학위 (博士 學位)를 취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일단 조선시대는 신분제약 (身分制約) 이 엄했던 관계로 아무나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실정이었습니다. 조정 (朝廷) 의 6조판서(六曹判書) 같은
재상직을 떠나서라도 보통 사또라고 익히 불리던 현감 (縣監), 현령 (縣令), 군수 (郡守) 같은 일개 지방 수령
(守令)들 마저도 아무나
될 수 없었고, 사회구성원 중 극소수를
이루던 사대부가문 출신의 양반 (兩班) 들이 거의 다 독점 (獨占) 하였습니다. .
지방 수령들은 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그 권력과 위엄이
백성들에게 절대적이었는데,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생사 (生死) 문제까지 사또들 손안에 달려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또들이 아무나 될 수 없었던 것이니,
양반 자제중 과거나 음보 (蔭補)
혹은 학행의 추천길을 통한 자라야 사또 벼슬에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나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던 형편이었고,
조선시대를 살았던 15-20명의 선조님들 중 대여섯명정도가 벼슬길에 올랐다는 것은 현 후손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적은 양반숫자에
비해서 관직은 훨씬 더 택없이 부족했었던 탓에 있습니다. 벼슬길도 귀했던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소과급제나 대과급제 또한 사회구성원 중 극소수를 이루었던 양반의 전유물 (專有物 )이었으니, 오늘날 그 아무나 자신의 능력, 의지, 경제적 사정에 따라 SKY 같은 명문대에 입학하거나
혹 나중 해외에 유학해 해외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리는
것 등등과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글자를 아예 모르는 뭇백성들이 사방에 깔려 문맹율이 상당히 높았던 그 당시에 소과나 대과급제자들은 소수의 최지식층 엘리트 집단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 조선시대를 사셨던 선조 15-20명 중에서 과거급제자를 두-세명이라도 두었다는 것은 현 후손에게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데, 현 대한민국에서 그런 자랑을 할 수 있는
국민들은 실제로 따지면 절대 많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백성의 대다수가 소외된 상태에서 치뤄진 과거시험이라는데에 있어서 급제라는 것은 그 희귀성 뿐아니라 사회적 부당성-모순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같은 전란 (戰亂) 을
겪는 가운데서도 조선왕조 전반을 걸쳐 인구수는 계속 꾸준히 증가 하였고, 이에 반에 과거 합격자수는 줄곳 일정한 숫자에 제한되어
있었던 까닭에 조선후기에 들어설수록 경쟁률이 굉장히 높아지며 과거급제하기가 정말 하늘에 별따기 만큼 어려워졌다는 말도 됩니다;
예를 들어 1404년의 조선인구는 불과 3십만명을 좀 넘었는데 253년 후인 1657년엔 여덟배
정도되는 2백3십만명, 500년후인 1904년의 조선 인구수는 1404년 것의 거의 20배인
6백만명 가깝게 추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조선후기의 과거급제 경쟁율이 조선초기에 비해 거의 스무배 정도 더 뛰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소과 급제하여 받는 백패 (白牌), 대과 급제하여 받는 홍패 (紅牌) 를 양반집에서 보기가 조선후기에 들어서서는 엄청 더 힘들어졌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대과급제자의 평균나이가
35세였다고 합니다; 보통 다섯살부터 글 공부를 시작하였다면 대과 급제 할 때까지
글 공부를 30년간 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기본적인 머리가 뒷바침 되어야 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유생 (儒生)의 노력과 인내심, 셀프 컨트롤 및 배후에서 도와준 가족의 상당한 경제적 뒷바침/희생 또한 동반 (同伴) 됐음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과거에 등제 (登第)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던 한 여인의 절절 (切切) 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녀는 18세기 말기
여류시인 (女流詩人) 으로 잘 알려진 삼의당 김해김씨 (三宜堂 金海金氏) 입니다. 그녀의 헌신 (獻身) 적인 희생은, 어쩌면 너무 맹목적으로도 느껴져 가련하기까지 한데,
김씨는 궁핍 (窮乏)한 살림때문에 밤에는 길쌈질, 낮에는 힘든 농사일도 마다 하지 않으며 남편의 과거공부를 도왔고, 또한 자신의 비녀 및
머리털 까지 잘라 팔기까지 하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재주가 어느 정도 있었던 동갑내기 남편 담락당 (湛樂堂) 하립 (河𣸭) 은
번번히 과거에 떨어지며 급제를 못하고 맙니다. 결국 나이 서른을 넘어서야
과거를 완전 포기하고 부부는 낙향 (落鄕) 하여 초야 (草野)에 뭍혀 살며 농사를 짓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냅니다.
이렇게 중요하였던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행정 진중길
선생은 자신의 어릴적 벗인 가정선조님의 명성 (名聲) 에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나이 40세에 이르러서야 큰 마음 먹고 응시하려 했던 과거시험을 포기 하였던 것입니다. 원래 벼슬길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선생이였기에, 과거포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왠만한 사람같으면 쉽게 기회주의자로 (機會主義者) 돌변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행정선생의 의리 (義理)와 우정 (友情) 을 명예보다 더 앞 세웠던 결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잖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거응시 포기는 전화위복 (轉禍爲福)이 되어 행정선생의 명예를 실추 (失墜)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귀영달 (富貴榮達)에 초연 (超然)하며 인간관계의 의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던 선생의 고매한 인품이 만 천하에 드러나는 획기적인 사건이였으며, 선생의 행동은 후세에 만인 (萬人) 으로 부터 칭찬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행정 선생은 풍기군 남쪽 봉황대 (鳳凰臺)의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소요 (逍遙) 하며 선생의 호를 “행정 (杏亭)” 이라 하였다 하고, 이리하여서 선생이 “행정”으로 칭하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아 경전 (經典)과 역사를 강론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나중 선생의 문하에서 여말선초의 많은 고관대작 (高官大爵)들이 다수 배출되었다고 목은선조님의 최씨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다음엔 휘 계원 감찰공 배위 여흥민씨와 순흥안씨편이 실리겠습니다.
감찰공 선조님 배위편은 한 편에 묶어서 정리할까 합니다. 장문의 글이 또 될 수도 있으니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주원(周遠) 아마도 중종반정을 둘러싼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등의 이야기들이 조명될 것 같습니다..
@주원(周遠) 원고탈고가 약간 지연되고 있는 점 양해구합니다;
휘 계원 감찰공 배위 의인 여흥민씨/순흥안씨편은 1월26일 탈고 예정이며
휘 계정 집의공 배위 숙인 죽산박씨편은 2월 2일 탈고 예정이며
위 연기 감사공 배위 정부인 순흥안씨편은 2월 9일 탈고 예정입니다.
본인의 개인적인 사정에 위해 원고탈고가 며칠에서 1주일정도 늦어질 수 있으니 양지바랍니다..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에 의하면 과거제도가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노비-범죄인을 제외한 일반 평민들도 대거 과거에 응시하였고, 결과적으로 과거합격자의 30%넘게가 평민이었다고 하네요. 장원급제하고 판서급 이상의 재상직에 오른 평민들도 많다고 한교수는 주장합니다. 한교수의 연구가 맞다면 조선시대는 전체적으로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더 역동적인 사회였을수도 있겠습니다.
소중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혹 풍기 진씨 유탄선생의 후손들 현황을 알 수 있을가요? 찾고있던 차라서요.
노고가 많으십니다~ 글쎄요, 유탄선생의 후손이라...풍기진씨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살고 있고, 후손들이 만천명정도라는 것 이외에는 저도 특별한 것은 찾지 못했네요. 아마 지역사회나 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후손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농촌에서 농사 짓고 과수원등을 경영하는 후손들이 좀 있다고 읽은 것 같네요. 유탄선생의 후손들에 관해선 더 세밀하게 특별한 리서치가 필요하겠군요. ^^
주원님의 해박한 연구로 많은 걸 배웁니다. 조카님의 글을 청주사랑방 카페로 모셔 갑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청주사랑방 "하늘감사 승복"
그동안 수개월 쉬었는데 이제 다시 부족한 재주로 연작물을 이어갈까 합니다. 그동안 올렸던 글들 중 몇편을 읽어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너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관심있는 일가님들의 계속적인 지도와 충고 아울러 부탁드립니다.
본문에 실린 한산이씨의 문과급제자수는 출처에 따라 195명에서 206명까지 다양합니다. 본인이 글을 썼을때 인용한 문과방목에 기재된 숫자가 재검사후 정확치 않아 이제는 200여명으로 정정되었습니다. 나중 정확한 수치가 집계되면 최종정정해 올리겠습니다.
제가 새로 시작한 연재물이 있어서 그것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면 그때 이 시리즈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양지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