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명자 산 성지)
전주 교구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
거룩한 순교자들로써 십자가의 신비를 기묘히 드러내시는 천주여, 찬미 받으소서. 주는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며, 우리에게는 믿음과 용기를 더 해주 시 나이다. 훌륭한 신앙의 선조들을 허락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간절히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틀별히 청하오니, 현세의 온갖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 나라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성체께 대한 사랑으로 신망애 삼 덕의 길을 항 구하게 걸은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교회를 위해자신과 가정을 오롯이 봉헌한 이 고장의 첫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천상 천하의 영광을 베푸시어
우리 모두 그들의신앙을 본받아 순교자의 삶을 이어가게 하소서,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순교자들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 프란치스코, 성녀 글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옵소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전동 성당; 성지)
(전주 숲정이)
치명자 산 성지.
산(山)으로만 치부한다면 악산이다. 돌이 많고 면마다 전부 가파르다. 전주천을 돌아 나가게 하려는 듯 버티고
있는 옛 산이름은 僧巖山이었다. 스님을 닮은 산이라 불렸던 산은 천주교를 믿다. 자신의 가문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멸문된 유항검 아우쿠시티노와 식구들이 산정에 묘택이 만들어 지면서 치명자산이라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호남 제일 관문인 전주 지역 성지순례, 전주교구 내에 있는 초남이 성지순례를 하고 이어서
2월은 전주숲정이, 서천교, 전동성당, 초록바위, 치명자산 성지 순으로 잡았었다. 그러나 주말 전주 내 교통 흐름이
한옥 마을과 경기전과 전동 성당을 찾는 수 많은 관광객의 영향으로 정체된다. 그런 현상이 빗어지는 것을 깨닫고 할
수 없이 순례 일정을 조정하고 전주를 접근하는 방법도 다른 방식을 선택하였다. 동전주 ic로 나온 후 치명자산 성지를
먼저 찾기로 하였다. 6시에 서울에서 출발한 차량은 08:30경 치명자산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날은 무척 찼다. -4도
정도의 찬 기운을 느끼며 오르기 시작하였다.
데레사 자매님은 이 성지를 여러 차례 찾도록 해 주시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오르고 다른 형제, 자매님들 조금 벅찬 모습으로 묵묵하게 올랐다. 가파른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좀 완만한 우측 길을 잡아 올랐다.
숨 고르기 목적으로 잠시 사진을 만드는 시간을 갖은 후 다시 올라 묘역에 섰다.
치명자산 성지 성당 위에 모셔진 묘택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가파른 산 정상에 그 옛날 어떻게 모셨을까? 하는 의문을 갖으며
전주천 부근과 저 멀리 전주 시내를 조망 해보았다. 높다!. 해발 300m지만 산이 가파르고 돌이 많아 그런지 더 높게 느껴진다.
그리고 산 자체가 험하다보니 순교자들이 겪은 갖은 고초를 닮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무리 험한 성지라도 오르는
불편과 힘이 순교자들이 겪은 고초와 같을 수 없지만 국내 성지 중 가장 험한 산정에 에 있는 성지는 치명자산 성지가 아닌가
한다.
이른 아침 겨울 숲,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곱다. 빛이 감도는 성지에 서서 일명 예수,마리아 바위라 부르는 정상 부근
바위와 기념 십자가를 바라본 후 순교자들의 일생을 살펴 보았다.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었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아무 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치명자산에는 신유박해(1801)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이 합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철도 포함되어 있다. 유항검 가족은 처음에 초남이 근처 바우배기에 매장 되었다가 1914년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유해를 모셔와 현재 자리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을 높이 기리고, 순교자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이후 1993년 유항검의 유해 확인을 위한 시굴 작업을 진행하여 유항검과 그 가족 6명 모두의 유해를 확인한 후 재안장했다.순교자 묘 밑에는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직자 묘지와 십자가의 길이 있다. 총무님 준비해 오신 참배물을 진설하는 체칠리아 자매님. 모든 준비가 끝나고 순례자 전원이 묘역 앞에 섰다. |
제주는 모처럼 참석하신 파스텔 형제님이 담당하셧고 첫 참례를 해주셨다.
이어서 요한형제님이 참례를 마친 후
모두 엎드려 절을 올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거룩하고 참된 신앙에 대하여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온전하게 하느님께 봉헌하신 유항검과 그 가족들의 성가정의 바른 뜻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이번 한라산 등정을 마친 세 자매님(데레사, 실비아, 마틸다)의 헌주와 더불어 참례가 별도로 있었다. 이룬 기상으로
신앙심과 더불어 더 아름다운 걸음 여행의 꽃을 피우라는 의미가 담긴 참례다. 모두 묘역 참례 의식을 마친 후 예수,마리아
형상의 바위가 있는 암벽에 올라 아침 햇살이 곱게 내리는 가운데 산 아래 정경을 보며 잠시 머물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이 자체로 보면 예수, 마리아 형상이다. 그런데 몇 발자국 오른쪽 옆으로 옮겨서 보면 영락 없이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 부부 모습이 오버랩 되어 다가 오고 오래토록 마음에 각인된다. 아멘!
그 옆에 십자가는 1949년 7월 17일 전동 성당 자모회에서 봉헌한 십자가 기념비다.
묘역을 내려 서기 전 모두 다시 모여 기념 사진을 찍으며 잠시 더 머물다 십자가의 길을 하기 위하여 내려왔다.
내려 오면서 극명하게 갈리는 수목의 모습을 보았다.좌측은 대나숲, 그리고 우측 언덕은 소나무가 많았다(서 계신 형제들의 방향)
곧은 절개와 드높은 낙락장송과 같은 기상이 느껴졌다.
다리가 불편한 순례자들은 쉬고, 건각들은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오늘 성지 순례의 의미를 더 새겼다.
성지 성당이다. 전주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축성 봉헌 된 성전이다. 1992년 시작하여 1994년 5월 9일 축성되었다.
제대 모자이크는 남종삼 후손 남용우 마리아 작품으로 성당 양 입구에는 이순이 루갈다 옥중서신이 새겨져 있고 정면에는 요셉의
성가정을 흠모하며 평생 동정녀를 고집한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의 모습이 요셉 성가정 모습과 함께 그려져 있다.
특히 동정과 순교의 상징인 쌍 백합과 빨마 모습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어 준다. 순례와 미사 참례를 모두 끝낸 후 치명자산 성지를 내려와 전동 성당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점심을 전주 비빔밥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풍남정을 찾았으나 만원 사례, 경기전 돌담을 끼고 돌아 종로 회관을 찾았다. 한 자리에
앉아 점심을 나눈 후 전동 성당 순례를 위하여 자리를 옮겼다.
전동성당: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 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성전 안으로 입당한 후 각자 묵상의 시간을 갖았다. 개인적으로 윤지충과 권상연 선조에게 받치는 기도를 드렸다. 당시 본인들은
순교의 시간을 맞으며 하느님의 영광과 함께 본인들의 순교 후의 거룩한 영광을 알았을까? 그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오로지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순교의 시간을 감당하던 사람들이 바로 순교자들이었기에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묵상을 마친 후
경기전으로 갔다가 포기한 후 걸어서 남문으로 나갔다. 형장에서 순교의 시간을 맞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문 문루에 메달아
드나 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도록 조치하였다. 천주교와 신자들에게 너그럽던 정조는 9일만에 칙령을 내려
가족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라 영을 내린다. 형장인 줄 모르고 성전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남문에서
전동 성당 앞부분과 종탑이 시야에 들어 온다. 그리고 다시 전주 숲정이, 성당, 성지를 향해 떠났다.
숲정이 성지를 찾기 전 숲정이 성당을 참례하기 위하여 찾았으나 어린이 미사 시간과 겹쳐 되돌아 나와 숲정이를 방문하였다.
숲정이이란 뜻은
한편으로 숲 머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칙칙하게 숲이 우거진 곳을 표현하는 말이다. 전주 숲정이는 현재 지방 기념물 제 71호로서
이조시대 군사훈련 지휘 본부 장대가 있던 곳이다. 신유박해(1801) 12월 28일, 이곳에서 전주 지방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 중 부인
신희,와 동생의 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당시 20세), 조카, 유중성이 순교한 장소다. 또한 기해박해(1839) 당시 5월 29일 13년 동안 옥고를 치룬 신태희 필립보,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정태봉 바오로가 순교하였고 이어서 병인박해(1866년) 12월 13일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살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순선지 베드로, 한재권 요셉, 소양면 성지동에 살던 조화서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정원지
베드로, 등 6명이 순교하였다. 이들 6명은 1968년10월 6일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오르셨다.
1867년에는 김사집 필립보와 무명 순교자 수명이 순교를 함께 한 장소다. 1960년 이 장소에 혜성,중,고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나
1992년 8월 삼천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게 되어 순교자 성 조윤호 요셉의 이름을 따서 성인을 기리는 윤호관을 짓고 숲정이 순교지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우선 4대박해에 의하여 순교하신 순교자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머릿돌을 찾아 순교자들이 남긴 유언의 복음을 읽었다. 읽고 또 읽어도
가슴 먹먹하고 감동을 받게 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들은 담담하고 강단 있게 그런 말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용기가 만들어낸 거룩함의 반석인가 보다. 제대 앞에 모여 앉아 각자 묵상의 시간을 갖었다. 나는 서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부르며 회개와 약속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만들어 보았다. 예수, 마리 ~~아.
단체 사진을 끝으로 오늘 순례 일정을 모두 마감하였다. 서울에서 왕복 5시간의 소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항상 자신에게 보내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 너는 무엇을 보았는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그리고 무엇을 얻고 깨달았는가? 이 세가지
질문이다. 그 답을 나는 메모 형식으로 적어 놓는 버릇이 있다. 그 글을 적기 위하여 잠시 오늘 일정을 시작과 중간 ,끝 부분으로
나누어 그 속으로 침잠하려고 한다. 사색은 우려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샬롬 수고 많으셨습니다. 꾸벅~~
첫댓글 몆년을 순교성인 묘역을 찾아 참배드리고....* *
순교로 모든것을 받치신 성인들에 하느님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릴수 있겠습니까
머리로 그러하셨구나,,생각 하면서,,
마음과 가슴으로 느껴지는것은 한계가 있는듯 합니다....
한번 가기도 어려운 치명자산,,,,,,
본당 순례를 계기로 세번을 오르면서,,,,
늘 사랑과 평화를 끝없이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깊은 뜻을
다시금 생각할수있는 ,,순례의 여정에 감사드립니다....
순례가 신앙의 본 뜻을 일깨우고 공동체로 나가는 길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또한 걸음 여행 안에서 겸손 된 마음으로 인간은 자연의 한 종(種)임을 자각한다면 창조적 질서 보존 실천가 가 될 것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