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리, 오얏나무의유래
자도(紫桃)를 자두로 부른다.
또 오얏나무라 하고 이(李)라고도 한다. 3월에 움이 트는 오얏꽃은 4월이면 절정을 이룬다. 제아무리 무신경인 사람도 오얏 꽃밭에 들어서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이(李) 또는 자도(紫桃)란 글자대로 복숭아 모양의 붉은 자줏빛 과일이다.
중국이 원산지로 대추, 밤, 감, 배와 함께 다섯 과일(五果) 중 하나로 무척이나 중히 여겼다.
《예기(禮記)》에 이미 “복숭아와 오얏, 살구, 매실을 임금께 진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의 재배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 때 벌써 가꾸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풍수의 대가 도선(道詵) 스님이 쓴 《비기(秘記)》에 “고려 왕(王)씨에 이어 이(李)씨가 한양에 도읍 한다.(繼王者李而都於漢陽)” 고 예언했다.
고려 조정은 예민한 반응을 보여 고려 중엽부터 한양에 벌리목사(伐李牧使)를 두었다.
백악(白岳 지금의 북한산)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할 때면 반드시 모두 찍어서 이 씨의 기운을 눌렀다.
500여 년 전에 이씨 왕조를 예견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예언이 무학대사(無學大師)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무릎을 친다. 무학이 도읍지를 정하려고 만경대의 맥을 밟아 남으로 가다가 비봉에 이르러
“무학은 이 곳에 잘못 이르렀다(無學誤尋到此)”라는 도선의 비석을 발견한다.
무학은 길을 잘못 잡았음을 알고 그 길을 되돌아가 만경대의 정남맥을 좇아 바로 백악에 이르니 삼맥이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명당이라 그 아래 궁성의 터를 잡았다.
그 곳이 바로 고려 조정이 신경을 쓰며 오얏나무를 베던 자리(伐李址)라는 전설이다. 고려 왕조는 해마다 자두나무를 찍으며 그 기를 눌렀으나 결국 이씨를 잡지 못해 나라를 빼앗긴 셈이다.
지난 70년대까지 바로 벌리를 하던 서울 자하문 밖은 자두나무 명산지였다.
고려 가요 〈동동(動動)〉에는 사랑하는 님을 보름달 아래 활짝 핀 오얏나무에 비유했다. 오얏나무가 풍요와 위엄의 상징이었던 때문이다.
三月 나며 開한
아으 滿春 달욋고지어
나매 브롤 즈음
디뎌 나샷다
아으 動動다리
삼월이 되어 활짝 핀 /
아아! 무르익은 봄 보름달 빛의 오얏꽃처럼 /
(님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화사한) 얼굴을 지니셨도다.
보름 달빛이 비친 하얀 오얏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까지 풍요로웠다.
오얏꽃이야말로 한 해의 풍년을 점치기에 아주 좋은 나무였던 까닭이다.
《신선록(神仙錄)》에는, “노자(老子)의 어머니는 노자를 가지고 오얏나무 밑에 있었다.” 하고 오얏나무의 기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성을 이(李)씨라 했다고 한다.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고려 고종 때의 학자 쌍명제(雙明齊) 이인로(李仁老)는 오얏나무 시를 남겼다.
일찍이 흰 사슴에 구름 멍에 채워서
들어간 간 곳에 열 여덞 아름다운 궁이라
나무 아래서 태어났기로 나무의 성을 따르니
그 때부터 이씨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네.
曾將玉鹿駕雲車
入處瓊宮十八餘
樹不初生因作姓
從玆仙李便扶疎
이(李) 왕가의 문장은 오얏나무꽃(李花)이다.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은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건물이다.
용마루에는 조선 황실의 문장인 청동제 자두꽃 다섯 송이가 박혀 있다.
넷은 왕을 말함이고 다섯은 황제를 상징한다.
고종황제 대에 와서 비로소 상국의 그늘을 벗어나 대한제국이라는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한 때 인정전의 오얏꽃을 왜인들이 설치한 벚꽃이라 하여 철거해야 한다고 헤프닝을 벌인 적도 있었다.
아직도 조선 황실의 문장을 배꽃(梨花)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발음이 같은 이화(李花)를 이화(梨花)로 착각한 때문이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는 오얏을 이렇게 노래했다.
꽃을 향한 마음은 은혜로운 바람에 놀라고
새 소리에 온화한 기운을 느낀다.
붉은 빛은 복숭아를 붉게 물들이고
희디흰 빛은 닦은 오얏을 찾는다.
花心驚惠風
鳥聲感和氣
朱朱上緋桃
白白尋鍊李
제사에 쓰이는 과일이어서 능묘나 사찰, 저택 주변에 심는 풍속이 있었다.
이하부정관(李下不正冠)이라 해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면 도둑으로 오해받기 쉽다고 했다.
오해받을 일을 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말도 오얏나무 때문에 생겼다.
전국 말기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 ? ~ BC 235)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 》 중춘기(仲春紀)에는
“2월은 우수절로서 복사꽃과 오얏꽃이 피는 때”라며 봄의 대표적인 꽃으로 복사꽃과 오얏을 꼽았다.
계절적으로 중국의 남쪽지방은 음력 2월이 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4월이 되어야만 비로소 오얏꽃을 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과일나무 가지에 돌을 끼워두면 과일이 많이 달린다. 이를 ‘과일나무 시집보내기(嫁樹)’라 한다. 섣달 그믐날, 설날, 정월 보름 어느 때 해도 좋다.”고 적었다.
오얏, 대추나무 시집보내기에 대한 내용이다.
유종본(愈宗本)의 《종과소(種果疏)》에 “오얏나무를 시집보낼 때는 정월 초하루 또는 보름이 좋다.”고 했다. 진호(陳淏)의 《화력신재(花曆新栽)》에도
“섣달 그믐날 장대로 오얏나무 가지를 때리면 결실이 좋으며, 설날 석류나무 가지에 돌을 끼우면 열매가 크다.”고 했다.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는 “오직 오얏나무에만 이 방법을 쓴다.” 고 했다. 자두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지만 흰 꽃인가 하면 녹색이 섞인 빛깔이다.
꽃이 필 때 어린 싹이 돋아나기 때문에 먼데서 보면 연한 백록색으로 보인다. 재래종 자두나무는 알이 작고 맛이 지극히 시기 때문에 오늘날 과일나무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시골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 뿐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신 농장에서는 신품종을 심어 재미를 보고 있다. 열매 빛깔이 짙은 자주색인 것, 연초록색 과일이 크고 과즙이 많은 것, 과육이 피처럼 붉은 것도 있다.
이러한 우수 신품종이 심어지면서 우리의 재래종 자두나무는 하나 둘 사라지게 되었다.
원로 식물학자 이창복(李昌福) 박사는 자두와 앵두를 교잡시켜 굵은 앵두를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이렇게 하면 앵두 열매가 훨씬 굵어져 대추알 정도나 된다고 했다.
교잡한 나무의 성장을 좋게 하기 위해 자두나무에 접을 붙여 키우는 것은 물론이다.
열매는 꿀에 재었다 먹기도 하고 말려서 건과를 만든다. 이것을 이건(李乾)이라 했다. 씨를 빼고 말린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의 높이 13m의 300년 된 오얏나무는 봄에 싹트는 모양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해의 농사를 점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