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역사 2009. 6월호 게재, 한국교회사연구회 발간>
강릉, 양양 일대 천주교 사적지 순례기
심교준 스테파노(가락2동 성당)
올해 첫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성지순례를 앞두고 그 전 날은 소풍가는 아이처럼 가슴이 설레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나이를 먹어도 설레는 느낌은 변함없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성지순례는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강릉은 내 고향이다. 그렇지만 일가친척이 안 계셔서
일 년에 두 차례 벌초와 기타 동창 친구들 관련 일 등 합해 4~5회 가면 많이 가는 편인데,
이번처럼 천주교 관련 사적지를 한 번에 훑어보면서 그리운 고향산천을 다시 볼 수 있는 덤까지 붙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의 기회를 얻었으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으랴.
4월 26일 아침 8시경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갔다. 아침의 다소 흐리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분이 나와 계셨고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의 신태봉 요셉 부회장님과 다른 임원 분들이 참가 인원을
체크하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잠시 기다리다가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이미 명동 등지에서
먼저 승차하신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8시 15분에 총인원 125분의 동인이 나눠 탄 버스는
동쪽으로 출발하였다.
한강을 따라 달리는 버스 속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며 성가를 합창하는 동안 스쳐가는 꽃들과 연록색의 나뭇잎,
푸르른 강물과 먼 산을 바라보는 사이 주님이 우리 순례단과 함께 계시다는 실감을 느끼며 마음은 감사로 충만해졌다.
저마다 이처럼 여행의 즐거움을 안고 옆자리의 부부, 가족 혹은 동인끼리 서로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1시간을 좀 지나
강원도 홍천을 눈앞에 둔 경기도 양평 용두리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였다.
이윽고 강원도에 접어들자 높은 산등성이에 아직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모습이 서늘하게 약간은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지만 마치 알프스 가는 길이 연상되었다. 인제를 지날 때 당초의 주행코스로 계획한
한계령(설악산 국립공원을 관통)은 꼬부랑길이 많아 어르신들에게는 어지러울 수가 있으니 약간 시간이 걸리더라도
터널을 통과하여 비교적 평탄하게 갈 수 있는 미시령(설악산 국립공원을 우회) 코스로 변경한다는 안내 멘트가 있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역시 동인회원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는 임원진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라고 여겨졌다.
드디어 백두정맥을 가로지르는 긴 미시령 터널을 지나 멀리 속초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고개에 이르렀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화창한 햇살이 설악산 일대의 산벚꽃이 수놓인 연푸른 숲과 주변의 신록위에서 춤추고,
멀리 보이는 동해를 환히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전날 기상예보에서는 영동지방은 오후에 비가 올 것이라고
했으니까... 이 또한 오늘 이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 덕분이 아닐까!
당신을 찾아 가는 길에 이처럼 축복을 내려주시는가 하고 생각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버스가 속초시 입구에서
양양 방향으로 접어들었을 때, 흰 포말을 날리며 푸른 파도가 힘차게 해안으로 밀려오며 부딪치는 광경이 전개되자
모두 이구동성으로 “야아-” 하는 탄성을 터뜨리기도 했다.
11시 50분 양양성당에 도착하자마자 곧 이어 조한건 신부님과 심욱 신부님의 공동집전으로 미사가 있었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야아-” 하는 탄성을 터뜨리게 한 동해의 푸른 파도, 흰 포말
보기 좋은 언덕 위의 양양성당
정원의 마리아상
강론은 엠마오 가는 길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부터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상징’이 부활이며
부활에 따르는 4가지 변화에 대한 해설과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자는 말씀으로 맺어졌다.
이어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양인성 대건안드레아 연구원으로부터 이 지역에 천주교가 정착하기까지의 역사와
양양본당의 변천사 그리고 이광재 신부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오직 신앙 하나에 의지하고 박해를 피해
당시로는 완전 첩첩산중이자 벽촌인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오신 우리 신앙 선조들의 험난한 가운데서도 숭고한 삶의 모습이
새삼스레 가슴에 새겨졌다. 밤하늘이 이름 없는 별들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그러한 분들의 이름 없는 들꽃 같은 삶이
오늘 이 땅에 신앙의 아름다운 커다란 꽃을 피우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상기하며 내 삶의 모습을 반성하였다.
성당에서 나오면서 이광재 신부님 기념관을 관람하였다. 당시 38선 이북이었던 양양에서 북한 공산정권에게
성당을 강제로 빼앗긴 이 신부님은 같은 강원도인 평강본당으로 가서 사목을 하셨는데 마침내는 공산군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학살당하셨다. 그때 같이 최후의 장면을 함께 했던 어느 개신교 목사(기적적으로 생환)가 증언한
이 신부님에 대한 최후의 목격담은 참으로 거룩한 사제의 면모를 확연히 드러내어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 후 1시 30분부터 약 1시간동안 임원진이 미리 예약해 둔 주전골산채마을 식당에서 정갈한 산채비빔밥
혹은 황태국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들었다. 100여명이 넘는 대식구가 질서 있게 그야말로 모범적으로 식사를 마치고
곧 바로 강릉으로 출발했다.
이광재신부 순교기념관 입구
이광재신부
<이상까지는 양양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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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강릉지역>
고향 나들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뛰었다. 3시 10분경 초당에 도착하여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하였다.
초당은 강릉시내의 교외로 내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건너다보이는 경포호수를 가운데 두고 경포대를 마주보는 곳에 있는데
그 너머에는 경포대해수욕장이 있다. 어릴 때 초등학교에서 소풍도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부끄럽게도 그때는 허난설헌 생가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넓게 펼쳐진 무성한 솔밭이나 잔잔한 경포호수는 여전해 보였다.
이곳에서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실장님의 설명이 있었는데 당연히 허난설헌보다는 그분의 동생인 허균에게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 설명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홍길동전의 작자로 유명한 허균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파격적 지식인이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불교, 도교사상은 물론 천주학까지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드나드는 기회에 천주교 서적 및 천주교와 접할 기회는 충분하였다. 더욱이 천주교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허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설을 유몽인, 이수광, 안정복, 박지원과 같은 동시대 선비들이나
후세의 이능화, 류홍열 씨 등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허균의 천주교는 신앙으로서라기 보다 하나의 지적 호기심 내지
탐구심에서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설혹 신앙으로 승화되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범위에 국한되었을 뿐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특히 아쉬운 점은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에 휩쓸려 그것이 뒤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인간평등사상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개연성은 크다고 하겠다.
초당 허난설헌 생가 입구
허난설헌 생가터 설명
4월의 담쟁이
제비꽃 무더기
꽃 핫도그
허난설헌 생가 건물
앞 뜰에서
생가와 기념관 사이의 나무
대문 입구 우물가
앞 밭의 화단
강릉을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
내 머리는 아직 희지는 않지만 내 맴 같군요...
다음 2탄으로~
첫댓글 제고향인 양양성당이군요..역사가깊은곳입니다.가끔씩고향에가면 미사참여하고. 내려다보이는초등학교도100주년이넘는역사를가지고있습니다.반갑군요.이렇게이곳에서성당을보니까요..감사합니다.
본 고향은 양양이지만 강릉에서도 많이 사셨나 보네요. 언제 시간나면 커피라도 한잔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