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음악 by Ken Hanko
번역 익산우리교회 이은중 목사
이 글은 종교개혁기념 주일에 블루벨에 있는 회중에게 연설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 예배 개혁에 기여한 중요한 한 가지는 회중 찬송의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새로운 음악과 노랫말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음악이 필요했던 이유는 기존 음악이 회중이 노래 부르기에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고, 새로운 노랫말은 기존의 노랫말이 모두 라틴어로 되었기 때문에 필요했습니다. 루터교회에서는 먼저 마틴 루터가 시작했고, 약 200년 후에 요한 세바스타안 바흐 시대까지 이어서 풍부하면서도 폭넓게 찬송가를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 가운데는 다른 방향으로 전향함으로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을 부른 것입니다. 우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리고 나서 제네바에서, 칼빈은 개혁교회에 운율을 붙인 시편을 소개하고 실제로 불렸습니다. 클레멘트 마롯과 테오도르 베자가 모든 시편을 운문으로 바꾸고, 여러 음악가들이 이 운문에 음악을 붙였습니다. 제네바 시편찬송가가 -1538년경에 시작해서 약 25년 후 인 1562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결과물입니다. 여러 가지로 고려한 가운데 제네바 시편찬송가 곡의 작곡을 지배한 것은 그 음악이 예배하기에 적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훈련받지 않고 노래하는 자라도 얼마든지 노래 할 수 있고, 가사는 예배에 적합하게 쓰여진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과 관련해서, 칼빈은 음악이 장중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그 용어를 정확히 정의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개혁자들은 모든 음악이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은 음악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한데, 그분의 위엄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요구하는 그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바보같이 까부는 경박스러움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네바 시편찬송가가 즐거움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찬송가는 즐거운 것이 적합할 때는 즐겁고, 어떤 때는 활기가 넘치기도 합니다. 시편 47편과 81편이 그런 예입니다.
훈련받지 않고 찬송하는 자들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음악은 훈련받지 않고 찬송하는 자들에게도 충분히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부르기에 변곡이 부족할 수 있지만, 쭉 노래하다 보면 우수할 뿐 만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작곡자들은 후기 교회음악에서조차도 보편화 돼 있는 다양한 음악적 기교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음악은 좁은 음성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데, 한 옥타브에서 한 음표 더 한 것이 전부입니다. 대부분의 멜로디는 중간 C에서 높은 D 까지 이고 간혹 가다가 D에서 E까지 있긴 합니다만 몇 곡 뿐입니다. 그러므로 회중은 한 곡을 하는 과정에서 9개의 다른 음표 이상으로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후기 교회 음악에서는 종종 10-11음표까지 확장되는데 시편찬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2) 모든 가락은 2분 음표와 4분 음표만을 사용합니다. 8분 음표, 16분 음표도 없고, 반 박자 음표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현대 교회음악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것들입니다. 3) 시편 2편과 6편 그리고 몇몇 다른 것들은 예외이긴 합니다만, 가락은 보편적으로 한 음절로 되었습니다. 가사는 한 음절에 한 음표입니다. 한 음표에서 다음 음표로 넘어갈 때 큰 폭으로 널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음표의 간격이 좁은 것은 넓은 것보다 부르기가 더 쉽습니다. 가장 어려운 큰 폭의 간격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마디는 긴 음표로 시작에서 긴 음표로 끝납니다. 회중은 같이 음성을 모아서 마디를 시작하고 마디 사이에서 숨을 쉬도록 시간을 줍니다. 6) 회중은 화음을 위해서 악기가 없어도 한 목소리로 찬송했습니다. 이제 이런 것은 아주 엄격한 요구입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큰 구두 가게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구두가 많아서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게에 가기 전에 30달러 이상을 쓰지 않겠다, 구두는 버클과 술 같은 장식이 없는 것, 가죽은 빛나는 것으로 결정해 둡니다. 이런 제한들을 두면, 여러분이 선택하는 것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제네바시편 찬송가의 작곡자는 이런 음악의 제한을 두어서 가능한 한 회중이 노래하도록 했습니다. 곡이 단순하지만, 곡은 놀라운 변주를 보여주는데,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 변주는 최근의 찬송가와 시편 곡의 변주와는 아주 다릅니다. 현대 교회 음악은 거의 장조와 단조로 쓰여집니다. 실제로 단조는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거의 모든 곡조는 장조입니다. 하지만 12개의 교회 선법이 있고 제네바 시편 찬송가는 그중 9개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선법은 각각 자신만의 구별되는 소리가 있고, 장조나 단조 가락보다 더 폭넓게 표현합니다.(시편찬송은 그 중 Ⅳ,Ⅴ,Ⅵ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역자 주)
제네바 찬송가의 곡은 다양하게 박자가 변합니다. 박자라 하면, 우리는 각 절의 음표 수 뿐만 아니라, 곡에서의 절 수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편은 6마디이고, 첫 번째 두 마디는 10개의 음표가 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마디는 11개의 음표가 있고, 마지막 두 개의 마디는 다시 각각 10개의 음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자는 10. 10.11.11.10.10입니다. 제네바 시편에는 125편의 곡조가 있고, 110개의 다른 박자와 곡조가 거의 1:1 비율입니다. 비교할 것이 있는데, 1912년 연합 장로교회에서 출판되었고 여전히 개혁장로교회와 네델란드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시편 찬송가는 약 450개의 곡조와 약 50개의 다른 박자, 그리고 매 9개의 곡조에 한 번 꼴의 박자 비율입니다. 북미 개혁장로교회의 시편찬송가 또한 450 곡조와 약 60개의 다른 박자가 있습니다. 7-8개에 하나 비율입니다. 스코틀랜드 시편찬송가(또는 박자를 붙인 다윗의 시편)은 모든 시편이 보편적 박자인 86.86이어서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한 곡조로 모든 시편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역사에서 보통 회중들은 전체 시편을 노래하기 위해서 약 10곡조만을 사용한 때가 있었습니다.
제네바 시편 찬송가의 박자는 종종 비대칭적(균형이 잡히지 않은)입니다. 이것 또한 낯섭니다. 대부분 현대 찬송가와 시편찬송가의 곡의 장조의 박자는 아주 대칭적(균형 잡힌)입니다. 86.86이나 88.88 이나 886.886 등입니다. 하지만 제네바 시편 찬송가는 89.889(시편15편) 10.8.8.10.776.666(시편40편) 11.11.11.11.667.667(시편79편) 또는 66.77.66.666(시편97편) 같은 박자입니다. 또한 많은 경우에 곡을 반절만 부를 수 있습니다. 시편 찬송 17편과 79편이 그런 경우이고, 다른 많은 곡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네바 시편찬송의 곡은 리듬이 매우 다양합니다. 리듬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디 마다 2분음표와 4분음표의 반복되는 패턴을 뜻합니다. 다시 이것은 대부분 최근의 교회음악과는 다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최상의 방식은 134편입니다. 시편 134편은 대칭적인 박자입니다.(88.88 소위 오늘날에 긴 박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첫 세 마디는 모두 똑같은 리듬이지만(1박이 길고 4박이 짧고, 3박이 긴) 4번째 마디는 다릅니다.(3박은 길고, 2박은 짧고, 3박은 짧고)이 곡은 오래된 10번째라는 이름으로 종교개혁 이후 편집된 모든 찬송가와 시편찬송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물게 비대칭 리듬이기도 합니다. 보통은 당신은 네 번째 마디가 첫 번째 3개와 짝을 이루든지 모든 마디들이 4분음표로 끝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다른 예는 시편 93편입니다. 박자는 대칭적입니다.(10.10.10.10) 하지만 리듬은 매 마디마다 바뀝니다. 그래서 두 절이 짝을 이루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리듬과 관련해서 어떤 절은 4분음표로 시작해서 4분음표로 끝납니다. 시편 1과 시편 8편이 그 예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당김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김음은 액센트의 변화를 줍니다. 그래서 액센트가 예상치 않은 곳에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보통 절의 끝이 가까워지면 일어납니다. 시편 16, 78편과 105편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첫 부분에서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 예가 시편 124편이 그렇습니다. 박자는 10.10.10.10.10입니다. 3번째를 제외하고 모든 절은 액센트 음표로 이어지는 액센트가 없는 음표라는 규칙적인 패턴입니다. / / / / /. 하지만 3 마디에서는 / / / / / /.입니다. 당김음은 이 곡의 약 3분의 2에서 일어납니다. 현대 찬송가곡에서 8분음표와 16분음표가 있는 것은 당김음을 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억지로 액센트에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의 매치와 가사
제내바 시편 찬송가의 작곡자가 세 번째 고려한 것은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특징과 시편의 말씀을 잘 매치시켰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아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칼빈이 말 한대로,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펴서 더욱더 열정적이게 합니다. 하지만 예배에서 그 힘은 우리가 부르는 말씀에 부차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입술의 제사이어야 합니다. 음악이 베토벤의 심포니 중에 하나처럼 홀로 설 수 없습니다. 음악은 말씀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예배하도록 그것은 우리가 말한 것에서 벗어나거나 반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말씀의 의미에 있어야 하고 시편의 시인이 수 천년 전에 경험한 똑같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고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슬프게 노래할 때, 음악은 슬퍼야 합니다. 그 예가 시편 6편과 51편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기쁘게 노래 할 때, 음악은 기뻐야 합니다. 그 예가 시편 97편과 150편입니다. 시편 84편은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시편인데, 음악에도 그 갈망이 표현되었습니다. 시편 121편의 고요함은 그 본문과 완벽하게 짝을 이룹니다. 그 시는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보호하신다는 고요한 확신찬 시입니다. 그 선법은 현대 음의 장조와 단조의 곡들보다 더 넓고 유연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음악을 매치하는 것은 때때로 훨씬 더 그 이상으로 정확합니다. 때때로 음악은 말씀이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당신은 소리치라는 말씀에 소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번째 마디의 시작의 높은 음표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은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이 시는 나라와 군왕들이 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반역하는 것에 대한 시입니다. 그러므로 작곡자는 반항적인 배역(그 반역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을 음악에 부여할 수 있었지만, 그는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3마디의 모든 음표가, 그 마디의 시작과 끝을 제외하고는 다 4분음표입니다. 제 생각에는 당신은 이런 경우를 전체 시편찬송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똑 같은 구조로 된 한 마디가 있습니다.(시편 104편 7마디) 내 생각엔 3 마디도 그렇습니다. 모든 4분음표는 곡이 더 활기차게 불려야 한다면, 조금 서두르는 감을 줍니다. 이런 서두르는 감은 그들이 일으킨 반역으로 나라가 불안하고 광란에 빠졌음을 드러냅니다. 음표에서 두 번째는 범위가 좁고 옥타브의 끝이 낮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4번째 마디 중간까지 A 코드보다 낮습니다. 이런 식으로 급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중얼거리면서 불평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반역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하나님께서 2절에 비웃으시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을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시편 130편은 깊은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편입니다. 그 곡의 처음부터 두 번째 까지 우리는 깊은 데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A down에서 D까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떨어진 후에 다시 깊은데서 빠져나와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올라갑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것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첫 마디에서 F 까지 올라갔다가 두 번째 마디에서는 A로 되돌아갑니다. 세 번째 마디에서는 C로 마지막 4번째 마디에서는 D에 이릅니다. 이것이 시편 자체의 움직임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에 우리는 그분이 그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와 악에서 구원하실 것을 노래합니다.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작곡한 몇 년 안에 유럽의 대다수 언어로(그러나 슬프게도 영어를 제외하고)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몇몇 개혁교회 내에서는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념비적인 업적이고 너무나도 풍부한 음악이며 전 세계에 걸쳐 개혁교회들의 진실한 회중들에게는 아름다운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