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假政府) 조직설, 일간 국민대회를 개하고 가정부를 조직하며 가대통령을 선거하얏다더라.
안심안심 불구에 호소식이 유하리라." - 조선독립신문 3월 3일자
"13도 각 대표자를 선정하여 3월 6일 오전 11시 경성 종로에서 조선독립대회를 개최할 것이므로
신성한 아 형제자매는 일제히 회합하라. - 조선독립신문 3월 5일자
1919년 3월 어느날 <조선독립신문>이 전국 각지에 일제히 배포되었다.
천도교에서 은밀하게 준비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이다.
서울 종로구 수송동 수송공원에 있는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터임을 밝혀주는 기념물이다.
1919년 3월 3.1독립혁명 때 국내에서 나온 대표적인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이다.
<조선독립신문>은 3월부터 4월 말까지 27호까지 발행한 것으로 전한다. 이 신문은 많게는 1만부를 발행한다.
"박인호와 이종일은 독립선언의 취지를 조선 내에 보도하고 계속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
그 시위운동을 선동하기 위하여 천도교 월보 편집원 이종린 사립 보성상업전문학교장 윤익선과 공모하여
'독립신문'의 발간을 기도하고 대정 2월 28일 이종린은 경성부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 등의
독립선언 전말을 기술하고 또한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함으로써 조헌을 문란케 할 취지를 게재한 원고를 작성하였으며
박인호는 그 신문의 사장으로서 윤익선의 명의를 쓸 것을 종용하여 동인은 이를 승락하고 이종린은 3월 1일
동부 수송동에 있는 전기한 천도교 인쇄소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사장 윤익선의 이름을 게재한 전기의 취지를
쓴 '독립신문'을 인쇄케 했다."-한국학논총 제44집에서
"이종린은 천도교도로서 동교 월보 편집원인 바,동년 2월 28일 동교 월보과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내일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자기 및 손병희 외 31명은 파고다 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앞의 선언서를
배포할 것이니 경찰 관헌은 곧 체포 등의 수속을 할 것이므로 위의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취지의 문서를 작성하여
반포하고 널리 보도하라는 뜻의 위탁을 받아 전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던 이종린은 이를 승락하였다."
-한국학논총 제44집에서
민족의 열망이 결집된 3.1독립항쟁이었다. 손병희의 말처럼 이를 지휘할 조직이 없다 보니, 일제의 탄압앞에
독립이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손병희의 생각은 홍진과 이규갑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조직을 위해 각계각층 인사들과 접촉했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는 주로 내수동 64번지에
있는 한성오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격렬한 논의 끝에 1919년 3월 17일 홍진, 이규갑,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규, 김규, 한남수, 김사국, 이민태, 민강 등이 모여 한성정부 조직안을 만들었다. 이는 3.1운동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임시정부 수립이 계획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선언 만으로 우리가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전면 부정한 이상. 불의, 불법적으로 대한민국 영토를 침범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지휘할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3.1운동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미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 등장한 8개의 임시정부는 이러한 고민과 치밀한 준비의 결과물이었다.3.1운동에 경악한 일제가 광기어린 탄압을 하던 무렵이었다.
국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노력은 비밀리에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홍진과 이규갑이었다.
이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홍진에게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조언한 이는 손병희였다.
<조선독립신문> 제2호와 제3호에 심상치 않은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가정부(假政府)나 가대통령의 가(假)는 임시다.곧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는 것이다.
머지 않아 13도 대표가 모여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민족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정부의 형태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3.1독립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천도교측에서 임시정부 조직을
구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곧이어 임시정부안이 나온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만든 한성정부안이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외무총장 박용만 내무충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 총판 안창호 참모총장 유동일 등이다.
한성정부안을 수정해서 신한국정부안이 나온다.
집정관 총재 이동휘 국무총리 이승만으로 수정한다. 내무총장은 미정으로 하고 군무총장은 삭제한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안이 최종 발표된다.
한성정부안과 신한국정부안에서 수반으로 도입한 대통령과 집정관을 모두 폐지하고 새로운 수반을 국무총리로 정한다.
양쪽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정했다. 6부의 총장을 두었다.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군무 이동휘 교통 문창범 등을 뽑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안의 최대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가장 손해를 본 사람은 집정관에서 군무총장으로 떨어진 이동휘였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는 헌법인 '임시헌장'이 제정되고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된다.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마무리된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한다.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한다.
첫댓글 기해년 돼지해엔 더욱 소망하시는 일 모두 이루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