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삶과 출생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여러 고대 문헌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1300년 사이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조로아스터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란 동부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조로아스터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고대 페르시아어인 아베스타어로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라고 불린다. 이 이름은 '낙타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는 낙타를 잘 다루는 사람이 존경을 받았던 유목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조로아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 근거한다.
「가타스(Gathas)」(조로아스터가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찬양한 노래.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을 사산조 시대에 경전으로 편찬하였다.)와 『작은 아베스타(Young Avesta)』라는 경전에 조로아스터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신화 속에서도 조로아스터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는 최상위 사제 계급인 자오타르스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사제 교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인도, 이란 사제들은 7살 때부터 집을 떠나 종교 선생들에게 위탁 양육을 받는다. 조로아스터 역시 7살부터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사제 교육에서 주로 가르치는 내용들은 종교 의식과 관례, 각 의식의 중요성, 현재의 삶과 죽은 이후의 삶에 대한 이론과 관계 그리고 다신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신의 특징들이었다.
사제로 입문하는 기초 과정을 마친 조로아스터는 여러 학생들과 함께 종교학교에 들어가 심화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을 받으면서 다신 사회의 종교학에 대한 모순점들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토론을 벌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많은 신학적 영감을 얻어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고대 페르시아 사회에서는 15세가 되는 해부터 성인으로 간주하는데, 그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5년간 종교적 묵상과 수행을 계속하였던 것 같다.
가타스에 따르면 20살이 된 그는 종교인으로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한다. 조로아스터는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친구와 가족과도 멀어졌다. 이후에는 주로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며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농사법을 가르쳤다. 그는 오랜 기간의 수행을 통해서 욕구를 통제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30세 되던 해에 비로소 그가 가르쳐야 할 진리를 받게 된다.
보후마나(Vohumana, 선한 생각)라고 불리는 신성한 영에 의해 아후라 마즈다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조로아스터교에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는 이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조로아스터는 봄 축제에 참가하던 중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강가로 나오게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자신을 강가로 이끌었던 영의 힘에 의해서 다시 신성한 물이라고 불리는 강 깊은 곳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신성한 물은 그를 태고의 순수함으로 되돌려 놓았고 물 밖으로 나온 그를 감싼 옷은 빛처럼 밝아졌다. 강가로 그를 인도했던 신성한 힘은 자신을 아후라 마즈다를 보좌하는 '보후마나'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조로아스터를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에게로 안내하였고 조로아스터는 거기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포교자의 사명을 받은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은 저를 태초부터 당신의 창조물에서 구별하여 선택하셨습니다."(야스나, Yasna 44:11)
"저의 온 마음을 당신의 신성한 영 보후마나와 연합하기로 결정합니다. 저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행동에 복을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온 힘이 다할 때까지 당신의 가르침, 정의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입니다."(야스나 28:4)
포교의 사명을 받은 조로아스터는 이후 40세까지 여러 지역에서 설교를 하였지만 10년 동안 그를 믿고 따른 사람은 그의 사촌 한 사람뿐이었다. 40세부터는 본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교세의 확장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조로아스터가 포교 활동을 하던 당시 페르시아의 사회는 부패하였고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었으며 상황에 따라 여러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르치는 유일신 개념이나 정의와 진리에 대한 내용이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다. 그는 끊임없이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전파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사람들의 반발만 거세어졌다.
"아후라 마즈다여! 당신이 저에게 말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때문에 저는 저희 동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야스나 43:11)
조로아스터는 그의 민족에게 거부당한 뒤 크게 낙담하여 선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떠났던 여행에서 조로아스터는 포교의 대전환을 맞는다. 이란 동부 박트리아 제국의 전설적인 왕 비스타스파(Vistaspa)가 개종하면서 조로아스터교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비스타스파 왕은 다신교, 다민족 사회의 분열된 상태보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새로운 유일신 종교가 나라를 하나로 연합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비스타스파 왕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으로 마기(Magi)종족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조로아스터는 이를 거부하였으나 소마 혹은 하오마라는 식물 음료를 통해 환각상태에 빠지는 관습을 없애는 조건으로 비스타스파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나이 47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창시한 종교가 견고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 조로아스터는 세 번째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상대는 박트리아 제국의 장관이자 왕의 조언자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는 박트리아 제국 왕실과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로 조로아스터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박트리아 제국이 확장되면서 조로아스터교도 자연스럽게 확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50세가 될 즈음에는 박트리아 제국을 넘어 페르시아 전역과 주변 지역까지 교세가 확장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직접 계시를 들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계시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는 77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후에는 아후라 마즈다의 충실한 선지자로 임명되었다.
조로아스터는 창조 시대의 순수성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불은 신성한 것으로 여긴 반면 하오마를 마시는 관습이나 동물의 희생제와 같은 의식을 악으로 여겨 철저히 거부하였다. 또한 다신교 문화에 만연한 미신, 마법, 악마에게 기도하는 관습 등 모든 악한 것들을 배격하였다. 그의 교리는 이해하기 쉬웠다. 그것은 그가 이란의 고대 종교에서 사용하던 친숙한 신들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이름만 같을 뿐이지 교리와 종교 의례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었다. 조로아스터는 자신의 종교를 전하면서 점차로 페르시아인의 종교관, 세계관을 조로아스터교의 것으로 대체해 나갔다. 그 결과 페르시아인은 같은 아리안족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아리안족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조로아스터는 단순히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이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수용하지 않고 과감하게 변화시키려 했던 사회 개혁가였다. 조로아스터교의 특성에 나타나 있듯이 불을 숭상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교리는 다분히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의 오랜 관습을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고 현재까지도 이란인의 사상과 문화에 그 개혁의 영향이 남아 있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로아스터를 인류 역사상 위대한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다.
이러한 개혁적 성향은 그가 발전시킨 조로아스터교의 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교리는 선악의 투쟁을 다루는 이원론이다. 진실에 대한 갈망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적 전통이 만들어 낸 가장 기본적인 윤리 규범 중 하나이다. 조로아스터는 이에 더 나아가 거짓을 혐오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리로 삼았다. 그는 선한 생각과 선한 행위, 선한 말이 악한 생각, 행위, 말을 능가할 때 낙원에 갈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악에 굴하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여 선으로 바꾸어 놓으라는 교리에 조로아스터의 개혁의 메시지가 그대로 녹아 있다. 그는 구원을 위한 다른 어떤 조건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기득권층을 따로 대우하지도, 그 특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그의 교리는 사회 기득권층과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이란인의 정신 속에 뿌리박힌 악에 대한 투쟁 정신은 악한 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난 이슬람 혁명에도 투영되었을 것이다.
<출처 : 페르시아의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