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왜 열심히 기도하신 줄 아십니까?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하나님쪽에서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입장이 예수님 믿는 사람도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자신의 이익이나 생존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을 늘 염두에 두셨습니다. 평소에도 말이지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자기가 있다는 그 자체에서 찾지 않는 그런 가족을 창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가 관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과 뜻을 더 우선시 했습니다. 그 뜻과 사명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안식일도 바로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동시에 오늘날 진정 자신을 예수님의 한 가족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안식일에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획기적인 구분지음은, 오늘 본문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는데 바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면서 자기와 함께 다니시는 제자들의 행동을 자신의 강의 소재로 놓치지 않고 삼으셨습니다. 안식일날 남의 밀밭을 통과하면서 밀 이삭를 부벼서 까먹는 그 행위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됨을 증명하는 재료로 활용하시는 겁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이나 율법을 대하면, 그 정당함을 일단 인정하면서 그것을 지키는 본인도 같이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키는 법이 정당하고 선하니 그것을 지켜내는 나도 역시 정당할 것이 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등장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이나 그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안식일 준수 조항에서, '안식일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은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안식일 조항이 여기있고, 이것을 지켜내면 안식일 잘 지킨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흡족한 상태가 아닐까요? 그런데 왠 갑자기가 여기에 '안식일 주인'이라는 개념이 왜 불쑥 튀어나오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소개하며 나서시는 겁니까? 과연 안식일에 대해서 주인되시는 분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아무나 지키면 곧 '잘 지켰다'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선 '안식일 지킴'과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 어째서 다같이 하나님쪽에서 나와야 하는지를 살려 봅시다.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안식일 발생부터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안식일은 누가 지켜야 하느냐 하면 죄가 없는 피조물들과 하나님이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본인도 지키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완성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었습니다. 그 즐거움에 초대받은 자가 바로 죄없는 상태의 인간입니다. 이미 인간은 시간의 순환 속에 갖혀 있는 상태에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7번째 돌아오는 날이 보통 날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랬던 인간이 죄로 인해 죄인이 된 상태에 되어버리면, 이제는 안식일 지킬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박탈 당한 것입니다. 이제와서 안식일 지킨다고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에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받을 자격조차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 2장에 이상적인 가정이 나온다 할지라도 이미 죄를 짓고 난 이 후에는 이상적인 가정이 물건너 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이라는 규정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자가 지키라고 생겨난 것입니까? 그것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된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십계명 제4계명에 안식일 지키라는 규정이 들어 있지만 이것은 온 인류에게 아니라 바로 얼마전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된 그 집단에게만 주어진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 규정이 단순히 노동을 쉬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이 바로 제사하는 날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자비가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나오지요. 바로 안식일에 해야 되는 일에 대해서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안식일 지키라는 명령은 전 세계 사람에게 주신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준 명령입니다. 왜 그들에게만 주었을까요? 바로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토대 속에는 어린 양의 피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린 양'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란 모든 이야기가 그 분 중심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예수님을 겨냥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자, 주인공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예배란 바로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며 드린 예배임을 명심합시다. 그들은 모형을 만들고 그 모형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형의 주인이 되시는 실체가 따로 언제가는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모형됨은 다윗 시대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 다윗은 사울이라는 왕에게 쫓겨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쫓겨다니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점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굶주린 위기의 순간에 그는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제수용 떡을 먹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안식일 율법을 어긴거냐고 예수님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라는 모형은 점차 실내용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날만이 안식일이 아니라 제사하는 날은 전부 안식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가 가능하자면, 공간적으로 성전이 있어야하고, 시간적으로 안식일이어야 하고, 그밖에 기름부임을 입은 제사장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제물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등장한다면 그런 것들이 다 필요없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는 바가 이런 뜻입니다. 모형과 실체에 대해서 제가 한 예를 들면, 레위기 16장에 보면. 아사셀 염소가 나옵니다. 염소는 속죄를 위해 제물이 되기로 뽑힌 염소입니다.
이 염소에서 마음 사람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쫓아버립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염소가 광야에 정처없이 헤매고 다닐 때 마음은 하나님 보기시에 정화가 되고 거룩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을이 죄 지을 때마다 계속해서 양이나 이 염소를 잡기만하면 되는 겁니까? 안되겠지요, 수만 마리의 염소나 양을 이런 식으로 잡아 죽인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동을 쉬고 제사로 하루 종일 제사로 도배를 해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다 모형이기에 그렇습니다. 마치 돼지 저금통 수천개 모아놓아도 실제 돼지는 그 가운데 생겨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안식일 지키기 보다, 자비가 월등하게 낫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와 근거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일의 주인됨'에다 두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되시고, 성전이 되시고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그 희생당하시는 끝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다 이루심'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가 바로 사람을 구원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자만에 예수님의 한 가족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자비로 구원받았기에 과연 새삼스럽게 제대로 안식일을 지켜기 위해 '주일'이라는 특별한 날을 만들어 지켜야 합니까?
마치 옛날 어린 양 덕분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새삼스럽게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한 말씀의 최종 해답을 사도 바울의 답변에서 찾아보면 됩니다. 골로새서 2:13-17에 이런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폄론'이라는 말은 '비난'이라는 말입니다. 즉 누구든지 특정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았다고해서 비난받아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 즉 예수님의 참된 종인 사도 바울에게 아직도 특정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달리 여긴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아직도, 주일이라든지, 안식일을 못놓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자기가 한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어서 그것으로 구원과 하늘의 복을 얻을 볼까 하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불신자들이며 바로 이들의 이런 사도방식은 다 자존심에서 발생된 것입니다. 결코 수요 예배가 주일예배보다 더 가치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알았으면, 그리고 자비로 구원받았으면 그 자비에 감격하고 더 알고 싶어 마지막 때가 될수록 모이기에 힘쓰야 합니다.
이 '모이기에 힘씀'을 결코 한 주간 주일날 아침 예배 드리기에 떼울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면죄부처럼 사용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에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비를 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된 하나님 생각으로 안식일에 매달리지말고 예수님의 자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보다 많이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사 보다 자비
2003년 11월 9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9-13
12:9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안식일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 잘 지킴'이 아니라 '안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의 세상을 따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안식일만 죽자고 지키는 것은 안식의 세계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 뛰기에 해당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비록 안식의 세계가 있더라도 거기에 참여하지 못할 자들이 있기에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안식의 세계를 좋아들 할까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의 세계를 소개하고, 인도하기 위해서 그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 집어넣습니다. 이 광야에서 그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양식과 물을 다 끊어버리신 것입니다. 과거 애굽 때 살던 방식이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다.
이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간상을 요구하셨습니다. 즉 안식의 세계에 살만한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안식의 뜻을 제대로 아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는 것도 범죄 행위에 해당됩니다.
광야에서의 안식의 의미는, 만나라는 양식마저 끊어지는데서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데로 불구하고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세계, 이것이 바로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안식의 세계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 즉 젖과 굴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만나가 끊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과 더불어 안식을 이해하는 참 자기 백성 만들기를 병행해서 실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 짓고 난 뒤부터는, 인간들은 따로 안식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4장부터 나옵니다. 이미 땅으로 추방된 인간은 그 땅에서부터 자기 나름대로의 안식을 만들며 살게 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가진 힘으로 자기 만의 안식의 중심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이 죄악 된 세계의 성공의 기준입니다.
사람이 실망과 낙심을 하는 것은 바로 '성공의 기준'이라는 괴물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보조 맞추어 살려고 하니까 공통된 '성공의 기준'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성공의 기준에 의해서 실망과 낙심은 늘 되풀이 되면서 기나긴 인생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이란 풀에 꽃 같을 뿐입니다. 이사야 40: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란 결국 성경 말씀이 지정해 놓은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의 그물 밖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말씀대로 돌아가는데 그 본질의 끝은 '실패'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풀에 피어난 꽃이란 풀이 사그라지면 같이 사그라지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진실을 미리 앞당겨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그곳으로 인도받고 끌려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하기 위해 살지말고 아예 실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겁니다.
즉 자기 자리를 자진해서 찾아가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실패하기 위해서 설교하고, 실패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실패하기 위해서 운동하고, 실패하기 위해서 사업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인간의 풀의 본질을 거부하는 자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뭐든지 하려고 합니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자기 중심처를 만들어 두려고 합니다. 이게 세상적인 방식의 '안식'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계시는, 혹은 부모의 묘지가 있는 고향을 찾아 귀향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독자적으로 서울가서 성공했다치더라도 인간은 근본 중심지가 없이는 부평초와 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편히 쉼은 돈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자극성 있는 감각으로 다 메꿀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정적인 먼 과거의 고향에서 찾고자 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안식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안식의 유지와 지탱은 창세기 4장에서 보면, 도시와 도성과 음악과 기계와 많은 숫자의 아내를 거느리는 형식으로 드러나지만 이 모두가 힘 센 자의 몫이고 차지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안식과는 달리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라는 분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므로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돌입해 들어갔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안식이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인간들이 만든 안식의 도성들은 물 밑으로 수장되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이 약속에 의한 안식이 세계를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시작하십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는 대립되는 두 노선이 나란히 깔려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밀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오셨습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살펴 봐야 합니다.
로마서 4:4-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그는 알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이삭도 모리아산에서 바치고 아비멜렉 추장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롯을 위해 전쟁도 치르고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는 알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먼저 개시한 그 일이 갖는 의의와 의미에 대해서 인정하고 수긍했다는 점입니다.
즉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을 의롭다 하심'이 하나님이 개시하신 일인데, 그 일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나 불법이요 누구나 죄인입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힘을 길려서 자기 중심성 혹은 자기 안식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인간은 실패자입니다.
성공의 기준이란 모두 허망한 것들입니다. 전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바를, 인간들이 너무 허전하고 허무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허구와 망상을 뒤집어 쓰고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으로 '은혜'나 자비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자비란 반드시 죄와 자신의 무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자비'의 능력을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경건치 아니하는 자가 복을 받고, 죄를 가리움을 받은 자가 복이 주어지는 은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비'라는 양상으로 택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일방적인지는 안식일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에 장애가 있어 펴지도 못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라"고 명령했습니다. "손을 내밀라"라는 예수님의 본인의 명령과 "빛이 있으라"라든지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너라"라는 명령과 동일한 자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나타나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명령에 의해 초청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곧 자비의 능력으로 뒤덮이게 되어 있습니다. 미리 아신 자만을 부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믿으라!"는 명령조차 자비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요한 복음 14:1-6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술술 믿어지십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면 여러분의 겅건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오직 어린 양의 희생에 근거함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 때에는 안식일에 제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안식일의 주인공이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로 다 실체가 다 들어났습니다.
오로지 자비하심으로만 안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뭘 잘못한 게 있다고 죽일려고 합니까?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행함보다 교회 봉사보다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는 사람을 한국 교회는 심하게 핍박하고 미워하고 추방하고들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의 공로를 믿게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마음껏 증거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술술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상한 갈대
2003년 11월 16일
본문 말씀:마태복음 12:14-21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2: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바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저는 교회 올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교회를 꼭 다녀야 하느냐 말입니다. 교회 안 나오는 세상 사람들이 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더 밉습니다.
이런 교인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대단히 비웃습니다. "그래 너희 예수쟁이들아,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하나님께 빌어서 너희들 욕심을 더욱 많이 채워라. 입을 벌리면 더 벌린 분량만큼 채워준다면서? 나는 그냥 이대로 조용히 살래.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래 부처도 예수고 다 귀찮다.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다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예수님 믿어야지"라고 생각하지 말시고,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안믿어도 상관없지 않는가"하는 식으로 접근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42: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이 이사야 42;1-4에 나오는 말씀은 누가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그 자'만이 이 말씀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예언을 스스로 철회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인간의 방해나 나태로 인해 자신의 일이 미성취되는 것을 그냥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그 분'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겁니까?"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라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큰 연극 무대에 연극을 시작하셨습니다. 분주하고 열심히 중단없이 그 연극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앞 관람석에 앉아 있는 관객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실제 연극을 개시하셨습니다.
만약 이런 연극을 하고 있는 그 앞에 우리들이 앉아서 옆 사람하고 티격태격 다투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매우 격노하실 것입니다. 앞에서는 대단한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앞을 안보고, 우리들은 옆사람과 더불어, 그저 "누가 잘 사냐?" "누가 잘 났느냐?", "누가 더 자신의 비젼과 꿈을 달성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들을 두고 경쟁이나 비교를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한심스럽게 보시겠습니까!
그런 사소한 경쟁이나 비교의식을 접어두시고 앞만 보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연극이나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연극이 얼마나 실감이 나든지 그 연극 배우들의 던지는 소도구나 침 같은 것도 마구 관람석까지 떨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면, 철로가를 아무 생각없이 홀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고속 전철이 획하고 지나갑니다. 기차의 빠른 속력 때문에 그 철로가에 서 있는 인간이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결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흔들은 댄 것이 아닙니다. 기차의 활동 때문에 자신의 흔들린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선택 받았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선택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서 간청해서 획득한 신분이 아닙니다. 선택이나 구원이란 순전히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에게 던져주신 그 말씀대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효력이 곧 선택이요, 곧 '구원됨'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예수 믿어 천국에 가고 싶어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욕심쟁이라는 소리를 막들어도 마땅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며 마땅히 지옥을 가야지 천국 입성이 왠말입니까! 자기 분수를 모르고 단지 죽어서 좋은데 가보겠다는 탐욕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기차가 옆에 획 지나가면서 자신도 모르고 그 기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보니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던져놓으신 그 모든 말씀들을 열심히 성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여파와 과정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구원과 천국이 주어진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로 구원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통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택하신 분'인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말씀을 성취했기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는지를 같이 알아봅시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그동안 평신도로서 교회 다닐 때마다 장로들의 주일 낮 예배의 기도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들은 늘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언급하실 때마다 이 표현을 대단히 긍정적이고 좋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하나님 저희들은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 정도로 봐주셔서, 그저 꺽지 마시고, 그 심지를 꺼트려 버려서 지옥보내지 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라는 사정하는 표현을 쓸 때 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표현과는 정반대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사용하신 것은, 당장이라면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다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알 때까지 보류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꾸는 이렇습니다. "저 놈들을 당장이라고 처단해야 옳고 기정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이사야 42;1-4에 의하면 이들의 심판은 잠시 뒤로 늦추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아직 구원받을 이방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16과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미 심판의 기준은 외부에서 결정되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판이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기를 징게할 세칙이냐 규칙을 만드는 부담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심판의 기준을 믿는 자마다 심판, 그 자체에서 벗어나버렸다는 뜻도 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나름대로 징크스라는게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성경 귀절이나 교회 규칙을 가지고 그런 징크스의 토대들을 제발 만들지 마세요.
그런 세칙들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의(義)를 지키고 사수해야 하는 무담을 짊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겁니까?
로마서 9:27에 보면,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은 자'만 구원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남은 자'가 생성되는 겁니까?
로마서 11:3-7에 보면,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치지 자기와 같이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는 자가 자기 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행함의 면에서 보면 그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는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남은 자'가 되는 것은 굳건한 신앙심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행함으로 '남은 자'가 된다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린 말씀따라 실현된 그런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일로 구원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48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이방인들이 우리입니다. 목사가 심방 많이하고 기도 많이 한다고 그 사람이 '남은 자' 되는게 아닙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 인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일인 것을 인정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뭐든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긍휼을 가지고 일하시는 예수님 입장에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 나라
2003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22-29
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12:25 예수께서 저희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2: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성도가 성경을 보는 것하고 불신자가 성경을 보는 것하고 다릅니다. 성도는, 왜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며 왜 이 세상에서 나와야 하는가 라는 측면에서 보는 반면에, 불신자들은 이 땅에서 벗어날 필요없이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마저 감동시킬 수 있는 착한 일을 찾는 식으로 성경을 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자신의 선행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과연 빠져 나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겁니다.
매우 단단한 체계로 짜여져 있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나 자력으로 이 세상을 빠져 나간 위인이 없다는 겁니다. 즉 사단의 나라인 이 세상은 아주 안정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이 개인적으로 노력해 본들 구원에 성공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된다는 말입니까?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여기서 성령이란 곧 예수님의 영으로서, '살려 주는 영'입니다.
여러분 '살려준다'는 말을 들으면 느끼는 뉘앙스가 어떠합니까? 아마 누구가 들어도 대단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공원 벤치에 힘없이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하는 말이, "제가 당신을 살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대뜸 이렇게 톡 쏘아줍니다. "네나 잘해"라고 말입니다.
이 정도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 세상으로부터 교육을 단단히 받은 상태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너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너 밖게 없고, 믿을 것도 너의 노력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에 나와 있듯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영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선행이나 수고와 노력으로 구원이 가능할 것 같으면, 구태어 '살려 주시는 영'이신 성령께서 동원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을 성사하려고 할 때 무엇이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될까요? 그것은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상한 은혜의 모습을 악마도 그대로 흉내내어 그 사람의 신앙을 조작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즉 "내가 이 정도의 감정과 이 정도의 지식과 의지를 발휘하면 아마 하나님의 은총받은 자로서 손색이 없을꺼야"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반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악마의 종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14-15에 보면,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악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귀엽다, 혹은 이쁘장하게 생겼다'라는 정도로 보십니까 아니면, '흉칙하다, 엽기적이다, 혐오스럽다' 정도로 보십니까? 둘 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해서 조정받는 장난감도 아닐뿐더러 인간에 의해 기피되는 인물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본성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사랑과 친근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날부터 계속 세뇌 되어온 바가 있기에 악마의 생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동조하게 마련이고 우호적으로 접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악마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천사를 보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순한 어린 양의 모습을 한 그런 목자를 찾고 있다는 점을 악마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5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구를 장만하려고 한다면 어느새 여러분의 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여러분들이 설정해 놓은 그 계획대로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끄집어 낼 것입니다. 물론 도착해 보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이미 지옥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성경 지식으로도 구원에 실패합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벙어리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 벙어리를 낫게 했다는 겁니다. 그저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들을 보면, 대단히 큰 논쟁거리가 담긴 일입니다.
예수님의 병고치심을 놓고서,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들을 했습니다. 바로 이 표현으로해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과연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여러분 다윗이라고 했을 때 얼른 떠오르는 인상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싸움 잘하는 자'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백전 백승입니다. 전쟁을 했다하면 다 이겼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은연중에 지도자에게 기대를 하게 됩니다. "경제가 이토록 어려운데 대통령은 뭘하니?"라고 짜증을 냅니다. 모든 잘못된 것은 모두 현 지도자의 잘못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이 전쟁을 백 번해서 백 번 다 이기는 그런 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왕 제도란 이스라엘에게 있어 나중에 생긴 제도입니다. 그 전까지는 율법만 있었습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율법은 개별적인 거라서 누구든지 율법대로 살면, 그 개인이 복을 받되, 만약 율법대로 살지아니하면 그 본인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 율법 체제입니다. 그런데 왕 체제는 그런게 아닙니다. 왕 한 분이 잘하고 있으면, 온 나라와 백성들이 복을 받는 그런 체제입니다.
다윗은 그 공식적인 등장부터가 전쟁터입니다. 상대방이 대단히 힘이 센 골리앗 장군입니다. 그 장군 앞에, 이스라엘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대들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서 적군 장수를 이겼습니다.
사무엘상 17:4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여기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이 말과 오늘 본문, 29절을 상호 연결시켜 보세요. 오늘 본문 29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왜 인간이 이 단단한 인간 세상을 못 벗어나는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왜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을 찾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처럼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전쟁에 나갔다하면 백 전 백승하는 그런 왕을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그런 왕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윗 가문의 자손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곧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자손은 어떤 식으로 전쟁을 한다고요? 사람의 힘을 동원하지 않는 전쟁을 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또한 구원받을 자의 왕이 된다는 겁니다. 이 점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약조하신 바입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성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악마의 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시면서, 사단이 나가가 그렇게 호락호락 자체적으로 분열을 이르킬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살려주는 영'은 어김없이 일하십니다. 성도를 단 한 번만 '살려 주는 영'으로 작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쭉∼ 작렬하십니다. 처음도 끝에도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안정된 구조를 찾습니다.
그리고 찾아놓고서는 그것을 영구히 자기 소유화하려고 합니다. "그래 이것만 있으면 안심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사람은 마귀에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실종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성령 받은 사람은 옆에 예수님께서 늘 붙어 있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 온 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얼굴과 얼굴'을 맞닿은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의 숨소리까지, 그리고 내쉬는 숨까지 피부에 김이 서릴 정도로 가까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만큼 밀착되어 있는 분이기에 우리는 외부 환경에 구애 받지 않고 정말 자유함을 느낍니다. 번지 점프를 할 때 마음껏 두 팔 벌리고 온 몸을 푸른 창공에 맡기듯이, 앞으로도 예수님의 효과있는 다윗의 기능에 온 몸을 맡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부에서 그 어떤 식으로 흔들어도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의를 간직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흔들기에 구애 받기 않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인자와 성령
2003년 11월 3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30-32
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뭔가 자꾸 싸우시는 분입니다. 그 싸움의 여파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싸우시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2:14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21세기에 접어든 우리들 눈으로 볼 때, 이 둘 진영 가운데의 싸움은 다 사소하고 부질없는 자존심 전쟁처럼 보입니다. 차라리 예수님편에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그 모든 적들을 용납해 주어서 그 시대와 그 사회에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 더 선한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쟁을 그런 안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심판을 내리시기 이전에 먼저 심판의 기준부터 통보하려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하심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깜짝 놀란 이유는, 하나님쪽에서 먼저 '용서하심'을 제안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너무 죄가 많아 신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나님에게 집단적으로 하소연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못한 용서를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함을 얻되'라는 방침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그 무수한 지시와 거기에 따라 등장되는 형벌들은 다 무어란 말입니까?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저주를 퍼부어시는 그 하나님의 엄포는 그냥 무기력한 엄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면을 접하고서는 제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얼마나 무수한 죄를 짓습니까. 그런데 그 죄에 대해서 유일하게 심판 권한을 가지신 심판주의 입에서 '용서'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용서 방침'은 확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확정적인 것에다 남은 목숨을 섞어 넣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사람은 평소에 늘 흔들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흔들임이란 다름 아닌, '욕망이 요동침'입니다.
사람의 행동이란 욕망의 요동침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은 '욕망의 지형도'가 됩니다. 욕망은 밀림의 하이에나처럼 먹이감을 노리면서 덤벼듭니다.
욕망이란 물침대와 같은 한 쪽으로 누르면 다른 쪽으로 황급히 쏠리게 마련입니다. 욕망의 에너지가 어디론가 빠져나가지를 않고 늘 우리 안에서 춤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을 어떤 법칙에 준해서 조종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선악체제에 의해서 조정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판단해서 악한 욕망이라고 여기면 눌려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욕망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딴데로 그 에너지를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악한 욕망에서 선한 욕망에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조종술입니다. 하지만 뭐든지 과한 것은 아예 아니한만도 못하다는 상식처럼, 아무리 착한 일이라도 과도한 욕망이 집중되어 실시하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편해 합니다. 여기서 공자의 이론이 도입됩니다. 소위 '중용', 혹은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욕망이 아니지요.
가만히 있는 욕망은 욕망의 속성상 굶주림을 느끼게 됩니다. 새로운 먹이감을 찾아 욕망은 자체적으로 해소와 발산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불안정에서 오는 불편함을 겪습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의 싸움은 바로 이런 선악체제와의 싸움입니다. 즉 인간의 근본은 선악체제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이 주신 방석을 깔고 앉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총성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방주에 들어 있었던 정결한 제물을 받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이것은 인간들의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즉 노아 이후의 세상은, 인간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내려지는 은총 속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언약입니다. 무지개처럼 세상을 하나님이 은총으로 아우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악인이 횡행하고 설쳐서, 계절의 안정된 변화와 무상으로 주어지는 햇빛과 단비가 제공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도 이런 은총 안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도 모르고 은총이라는 방석 위에 앉아있으면서도 그 위에서 선악 체제에 준해서 자신의 올바름과 정당함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주로 오신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앞서서, 이런 세계에 향하여 바른 심판의 기준을 먼저 제시해 주시고자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22에 보면,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말하며 보게 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의 자질이나 인격을 아예 보시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귀신이 물러가게 하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충돌은 이런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방적인 '용서의 사건'이라는 발화지점으로 비롯됩니다.
그동안 바리새인들은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윤리와 도덕을 신봉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면 그것 외에 또다른 심판이 기준은 없을 거라고 확답하고 있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체제를 뭉개버리려고 이런 '용서' 사건을 우발적으로 일으키시는 겁니다. 천국의 기준은 이미 확정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님의 손에 달린 용서의 법칙입니다.
이 용서의 법칙은 기존의 선악 법칙을 축출해 버립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 먹고 난 뒤, 인간들의 욕망은 이 선악체제에 의해서 다스려 왔습니다. 욕망의 교통정리는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으로 분리시키도록 했습니다. 악마의 얼굴과 천사의 얼굴을 놓고서, 천사의 얼굴을 갖는 것이 심판에서 구원되는 길이라고 다들 그렇게 알고 삽니다. 왜냐하면 달리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이죠.
바리새인 뿐만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다 이런 선악체제에 준해서 그동안 자녀 교육과 공교육을 시켜왔습니다. 모든 교훈과 훈계도 이 차원에 준해서 실시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까지 이 법칙에 준해서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 체제는 용서체제의 원수입니다.
마태복음 8:11-12에 보면,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소위 '나라의 본 자손'들이 쫓겨나야 비로소 참되게 예수님의 용서체제 안에 있는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뭐든지 선악체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현 율법 준수 이외에 다른 용서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병고침은 약령이 저질른 일어야지만 앞 뒤 논리가 맞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그들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논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선악체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즉 이 땅에서의 사건은 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결과들입니다. 원인없이는 절대로 못일어나는 결과들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결과는 오직 하나이 전 단계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결과는 하나인데 그 결과를 낳게 하는 바로 전 단계의 원인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헷깔리게 하십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추방하는 일에 대한 원인을 둘도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과연 성령님이 하신 일까요 아니면 인자 되시는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일까요? 둘 중의 하나를 찝어야 할 판입니다.
'인자'란 다니엘 7장에 의하면 하늘에서 나타나시는 심판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심판주가 선악체제와는 다른 오직 '용서하심'이라는 방식으로 심판 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한 사태입니다.
왜 인자되시는 분이 이렇게 오셔야 합니까? 그것은 이사야 53:1-4에 의하면 인자되시는 분은 아무도 이해 못하는 못하는 식으로 오셔야지만 말씀이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인자의 이러한 고난성과 이해불가성은 모두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것을 용서하시겠다는 차원의 완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따라서 인자를 지금 이 시대에서 못알아보는 자는 용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님이 오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가 최종적으로 다 드러난 시기입니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성령이 하시는 일을 막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즉 예수님이 보시는 죄란,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시시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대신 선악체제에 의한 자기 정당성과 의로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자가 지옥하는 식의 심판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속아넘어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의 욕망의 교통정리를 정당화 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으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모든 기초는 무너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의 세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싸움을 우리도 하게 하옵소서.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그 사랑만이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예수님의 정죄
2003년 12월 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33-37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나무를 아느니라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든지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희생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될 수 밖에 없는 그 근거는 우리들의 능력에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에서 끌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체적인 능력은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빠져버리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이 맺어진 관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들'이 출현되는 겁니다. 만약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드리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히 기뻐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천사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유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결코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시선에 주눅든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 일로 인해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부터 난 신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도 같은 신분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이기에 세상이 주는 압력에 굴복당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껏 자유를 구가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은 자기 구원에서 자신이 빠져야 하는가 말입니다.
마태복음 3:17에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인정받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죄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에서 '종'이라는 신분이 어떤 신분인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종이란, 자기 주인을 골라잡을 그 어떤 자유도 없는 자입니다. 주인이 먼저 결정되고 난 뒤에 저절로 그 주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자들이 바로 '종'이라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종이 그 주인을 때려 눕히고 그 주인의 지배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진정한 종이 아니라 종으로 위장한 주인보다 더 강하고 높은 신분자일 뿐입니다. 정말로 종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오직 주인님이 시키시는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 빼놓고 전부 죄의 종입니다.
즉 죄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죄만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의 지적이 실제 생활에서 온 몸으로 잘 느껴지지 않지요. 마치 어떤 인간이든, 죄나 의로움은 자신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율법과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21-22에 보면,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으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죄의 종이 된 신세임을 확실히 규정할 수 있습니다. 율법, 즉 완전하고 너무나도 순결한 하늘의 법을 인간에게 던져 주므로서, 그 어떤 인간도 그 하나님의 순결한 법을 전부 구현해 내지 못한다면 저절로 저주의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런 심오한 하나님의 율법 주심의 취지는 모르는채, 율법을 붙들고 그것으로 자신을 죄에서 건져내는 의(義)를 생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알면 알수록 인자신이 수렁에 더 깊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수준을 알면서도 도리어 자신의 몸은 그 반대쪽, 악이 기다리는 쪽으로 미끌어내려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절규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하지만 로마서 8장에 들어가서 보니, 하나님께서 죄없는 육신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죄의 종이 된 육신을 대신해서 모든 율법을 다 완성케 하셨습니다. 바로 이 행위의 열매가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받은 성도가 갖게 된, 하나님의 자녀 되기입니다.
요한복음 15:1-4에 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14-15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렇지 않는 자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어느 누구도 진정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아들'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욕설하는 것은 누구를 보고 이야기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앞에 하신 말씀을 '독사의 자식'들보고 하신 말씀이요, 그 뒤에 나오는 말씀도 '독사의 자식'들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이 도리어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한다는 사실에 깜깜했습니다.
과연 죄의 종의 위치에 놓인 자들인 자체적인 '율법 지키기'로 죄에서부터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무가 나쁜데 어떻게 그 열매가 좋을 리가 있느냐?"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놓고서 예수님과의 경쟁관계에 돌입합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두고서 전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들 유대인들의 판단에 의하면 예수님은 진작 제거되어야 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율법에 철저한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고 되레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길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사울이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이 세상 전체를 다 알고 난 뒤에 사도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를 두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2장 3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당시 유대인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예수님을 얼마나 많은 미움을 보냈을까요!
너무나도 독단적인 발언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 발언을 통해 우리 자신들이 그동안 너무나도 철저하게 죄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매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는 희망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5-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라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좋은 나무이며, 참된 선지자이시기에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마치 이 땅에 있어 천사와 같은 자유를 갖습니다. 그런 신분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를 의식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알고, 이 은혜를 널리 전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요나의 표적
2003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38-42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다고하고 불신자는 하나님이란 애초부터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신자 입장에서보면, 불신자들이 대단히 불경스럽게 보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사건건 그 하나님으로부터 간섭과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큰 심점 부담을 같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했다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고 벌 내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이 있다고하지만 속으로 "실제로 하나님이 뭘 계셔?"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히브리서 11:5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분명 '옮기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옮겼다는 말은 이곳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동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에녹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쟁은 우스운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옛날 창세기 때 에녹을 옮기는 것처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데려가는 양상으로 구원하십니다. 만약 어떤 분이 "나는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외칠 때 여러분들의 소감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이 늘상 하늘에 그냥 계신 분이 아닙니까? 그거 하늘을 혼자 차지하고 계신분으로 인정해 드리면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신 그 분의 눈으로 보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믿는다고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서 활동하시면서 구원되어야만 하는 자를 직접 찾아내어 만나서 데려가는 식이 되어야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요한일서 1:6-7에 봐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구름쳐다 보듯이 보는 것으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적어도 사귐의 관계 속에 놓여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라는 고백은 하늘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사귀는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입장에 놓였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예수님을 거부할래야 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라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았고 남들에게 그 하나님을 소개하는 신분이 된 것을 제일 중요한 사항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공로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 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게 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외치는 식으로 자기 구원받았음의 감격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도 다른 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8: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이며,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그동안 학교에서 가정에서 친구들에게 배우고 듣었던 그 모든 것이 순전히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구조에 둘둘 말려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이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동굴에 막 들어서게 되면 어느새 자신의 어깨와 옷에는 거미줄이 가득 칭칭 감겨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죄와 사망의 법'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생을 온통 칭칭 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자신의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들어와 있기에 비로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인간이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에 열중하든, 그 어떤 가문이나 학력이나 학위를 소지하든, 재산이 얼마며 어떠한 품행과 인격을 지니고 있든 상관없이 모두 다 죄이며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와 죽음의 세계로 이끌게 되어있는 운명의 거미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겁니다. 벌써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떻게 했노라'고 나설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온통 자신을 휘감고 있는 신세였지만, 지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자신을 온통 휘감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성도란 현 인간들이 놓여 있는 세계의 속성과 현재 자신이 놓여 있는 세상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사실에 눈에 뜨여져 파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늘 영생의 따스함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바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따스함에서 나온 온기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둘러서서 예수님을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그들이 살아왔던 세계를 고집합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거부한 모든 이들이 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줄을 모릅니다.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죽치고 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고린도전서 1:22-24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상밖에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신과 접촉을 시도하려는 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원하고 있는 기적은 양적인 팽창을 의미하는 기적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이 모자라기에 그 모자라는 양만큼 양적으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기적을 베풀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입니다. 그 인간의 변화를 유발시키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칭 자기네들은 의인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질적인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런 맹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줄 기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너희들이 만나야 될 기적은,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절실하게 발견하는 기적이다"는 겁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신이 죽어야 될 자라는 것을 모르고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요나 선지자를 체포해서 죽음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고초를 격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흘을 밤 낮으로 땅 속에 묻혀있는 기적이야말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하며, 죄와 사망의 법으로 꽁꽁 묶여있는 가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고, 왜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그분이 어두운 땅속에 사흘씩이나 계시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실은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이렇게 묻혀야 될 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너를 대신하여 묻혀있다"고 말입니다. 물고기가 없었으면 요나는 그냥 죽은 목숨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에 한해서만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됩니다. 부활의 시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더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요나 표적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있었음을 안 사람 같으면 그 뒤로 반드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반드시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이나 42절에 봐도, 니느웨 사람들이 세상 사람을 정죄하고, 남방 여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열왕기상 10:7-8에 보면,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남방여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왔으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요나의 표적을 인정치 않습니다. 따라서 다급함과 답답함으로 이 세상 사람을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결코 완전하게 살기 때문에 전도하고, 실수없이 완벽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그 불신의 죄악이 가증스러워서 이 세상을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이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일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침없이 남은 생애를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가 제대로 하나님의 만남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마가 늘 시험하기를, 우리가 복음을 전할 자격자가 못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엄중한 일을 무엇이 막을 것입니까? 확신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더러운 귀신
2003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43-45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악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 악 때문에 평생을 시달리고 있습니다. 악으로 인해 이 땅에 저주가 왔고 우리 인간은 그 저주의 피해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악을 저질러라고 부축이는 것도 악마요, 그렇게해서 죄를 짓는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죄 지었으니까 너에게는 저주가 임하게 된다"고 쫓아다니면서 질책하는 것도 악마입니다. 이렇게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이 굴레에 묶이도록 조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어 이 악마의 술책 중에서 하나를 차단하고 끊어버리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타고난 근성이라서 죽을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 악마로부터 날라오는 저주와 하나님으로부터 처벌를 사전에 차단하는 조치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쉴사이없이 정죄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도중에 가로막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전에 이 땅에서 활동사항에 대해서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귀신이 나옵니다. 귀신의 존재부터도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의 근원에 대한 관심에서 아예 이탈되어 표면적으로만 설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8: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청년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무덤에서 살다가 예수님이 등장하자 먼저 말을 겁니다. 귀신과 예수님은 서로 세상의 근원적인 사실에 충실합니다. 모든 것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주고 받습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아직 때도 되지 않았는데 심판주되시는 분이 벌써 나를 찾아와서 멸망시키려 합니까?"라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마귀들이 다시 들어갈 적당한 자기네들이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돼지 떼입니다. 귀신이 들지 전에는 돼지들이 멀쩡합니다. 그러나 막상 귀신들이 들어가니까 돼지들이 정신 착란을 이르켜서 몽땅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 몰살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 돼지 치든 마을 사람들은, 세상은 근원적으로 볼 줄 모르고 단지 그 해 축산업 망했다고 실망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서 떠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심판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손익과 연관시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손익과 관련 짓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에 보면, 집을 깨끗하게 소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늘 자신을 깨끗이 소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소제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떠난 귀신이 다른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동반해서 다시 들어와 아예 합숙하겠다면 과연 집주인이 이 귀신의 등쌀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결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주도권이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청소해도 악한 귀신들이 들어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귀신의 출입을 저주할 방도가 없습니다. 귀신이 인간보다 더 강합니다.
마태복음 12:28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어떤 자를 구원할 때는, 먼저 그 강한 집 주인을 결박해 놓고나서 가구나 세간을 들러내는 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자신을 정화시키고 정결하게 순화시켜 놓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이런 양상은 유대인들 뿐아니라 동양의 종교에서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 자체를 아예 들어내는 수련을 말합니다. 하지만 귀신은 이런 수련법에 끄덕도 안합니다. 역시 자시 힘으로 자기 마음을 통제하는 식으로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학적 방식으로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즉 개인적인 방법의 또 다른 모습이지요. 마음이란 모두 두되 활동의 결실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악마나 귀신이니 하는 것으로 출발할 것이 아니라, 두뇌의 구조와 활동 사항을 체크해서 적절하고 손을 봐주면 마음의 번민과 고통도 사라진다는 겁니다.
두뇌는 약 1,000억의 세포로 되어 있고, 그 세포와 세포 사이에는 시냅스라고 하는 연결 장치로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화학 전달 물질이 흘러서 정보가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 옛날부터 사람들은 흔히 마약으로 불리는 몰핀 성분을 투여했습니다. 하지만 마약이 아니더라도 두뇌에는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는 자극과 흥분의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많아지면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즉 귀신들렸다고 환자를 교회 등쳐엎고 나와서 목사한테 안수기도 받을 일이 아니라 신경정신과에 가서 주사 한 대만 받으면 쉽게 나을 신체적 장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는 아예 산모 뱃속에 있는 아이의 DNA를 조사해서 나중에 문제가 소지가 될 유전인자를 건강하고 충실한 유전인자로 교체해 주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소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복음이나 귀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건강하고 유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세계로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악한 귀신이 노린 겁니다. 즉 하나의 귀신만 처리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 더욱 많은 숫자의 귀신들이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이 현 인간 세계의 체계를 아예 인정하고 문제 해결을 그 안에서만 해결할 수 밖에 없다고 자포자기 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란 단순히 인간들이 예수님을 활용해서 자기 구원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제시된 게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런 식으로 활용하려고 덤비는 것은 그 또한 악한 귀신들의 작동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자기 백성을 아예 덮어버리고 인도하시는 체제를 따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치 악한 귀신이 이미 인간들이 못빠져나올 체제를 덮어쒸우는 식으로 작용하듯이 예수님의 복음도 성도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체제의 틀로서 덮쳐지는 겁니다.
결코 성도와 흥정이나 거래를 터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의 세계에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항상 자기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케 하는 방식을 사용케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성도는 자기 자신의 누구의 주도권 속에 놓여 있느냐를 살피게 합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에 세리와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따로 서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이러합니다.
"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대단한 오기와 집념이 아니면 늘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십일조하기 힘듭니다. 날마다 자기를 치고, 정화하고 마음을 순수하고 유지하기 위한 단련하는 사람이 아니면 정기적인 종교 세칙을 지키기가 참 힘듭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이 지탱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봐도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생명입니다.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이미 죽은 자라는 말과 다를 바없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10%나 정기적으로 헌금한다는 것은 보통 자기를 비운 사람이 아니지요. 과연 이 사람이 의인일까요?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판정할까요? 또 한사람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은 결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현대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이 경쟁의 상대자들이기에 앞으로 잘할 생각을 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정반대의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즉 "즉 저는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일 뿐입니다. 당연히"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세리가 승자요 구원된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체제'을 은혜로 받은 자입니다. 우리과 과연 이 체제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평생을 두고 해야 될 고백은 이것 뿐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숱한 마귀에 들려놓고서도 마치 천하이 거룩한 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습니까.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예수님의 식구
2003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2:46-50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하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의 것을 탐을 내어 한뭉큼 집어내어 자기 그릇에 담는 식으로 다가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자기 것은 요지부동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간주되는 높은 경지의 지혜나 하늘의 정보나 지식과 놀라운 능력을 이만큼 집어와서 자기 것을 보다 넉넉하게 채워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자기 것이 남아 있다고 여기면서 애타게 하나님쪽으로 돌아보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사람과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몽땅 들어내어 아예 자기 사람으로 조립해 버리십니다. 마치 폐차장에서 강력한 가압기가 폐차를 납작하게 압축시켜버리듯이 말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뛰어드는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이 그 말씀 안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학력이든, 직업이든, 고상한 인품이든, 그동안 쌓아올린 선행이든 무엇이든지 그 속에는 해리되어 버립니다.
오늘 말씀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강의하고 계시는 좋은 분위기에 더 좋은 전갈을 누가 전합니다. "예수님은 저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왔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모욕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에게 용기를 북돋와주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일순간 좌중의 좋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오히여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요 내 동생들이란 말인가!" 참으로 인륜의 근본조차 부정하는 도발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어느 정도 자신의 인품에 대해서 자신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하늘 나라의 정보를 더 확보하려고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의 도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사람이 왜 예수님에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면박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지식을 더 확보하라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운다는 것은, 말씀의 폭풍우에 자신을 산산조각 나도록 내맡기는 식이 되어야 옳다는 겁니다. 인간이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날카롭게 돌아가는 분쇄기 톱니바뀌 안으로 당근이 들어가듯이 자신이 짓이겨지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6:15-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기적적인 고백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여기에 보면, 토를 다십니다. 즉 '혈육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혈육과 상관없는 가족을 애초부터 생각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염두에 둔 시점이 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가족이 완전히 마무리 되는 끝 시점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만이 구원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식구가 되지 못하는 자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이 식구가 되지 못하는 자입니까?
마태복음 13:53-58에 보면,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하 만민이 모두 하나님을 보낸 자를 존경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자기 집안 식구는 그 사람을 존경하는 않는 법이라는 속담을 인용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식구' 만들기에는 사람의 육적인 노력이 절대로 가미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식구가 되기를 자원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가상이 여겨 그래서 그 사람을 식구로 간주해주는 그런 식으로 식구가 되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육체와 혈육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식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태복음 16:17의 말씀처럼, 오직 '내' 아버지, 곧 예수님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다른 이는 못해내는 바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을 일체 인정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의 아버지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한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귀니라"고 요한복음 8:44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식구' 만들기는 오직 예수님만 손댈 수 있는 사항입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겁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는 점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마태복음 7장에도 나옵니다. 7:21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봐도,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고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평소에 알고 있는 하나님은 아예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파악되시는 그 하나님 이십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로서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을 숭배하고 고집하지 않는한 그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식구도 되지 못합니다.
식구란, 그 출처가 한 군데서 나온 무리들을 말합니다. 뿌리를 같은데 두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식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식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이미 출애굽기 4:22에 언급을 하셨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장자됨은 그냥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고 될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그 다음에 순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되살아나는 작업 속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와같은 법칙이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손에 의해 죽었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살아난 자입니다. 이 작업이 이제는 예수님에게 맡겨졌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죽게 되었다가 순전히 예수님의 행위로만 의해서 되살아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십니까? 그것은 살아야 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식구를 살리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다고해서 과거 어느 시점을 점찍어 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납니다. 마치 신생아를 간호사가 거꾸로 들고서 손바닥을 엉덩이를 치는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매일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은 거꾸로 들고 다니십니다. 그래야지만 쉴새없이 누적되고 쌓이는 우리의 자랑거리와 성경 지식 확보 같은 것이 후둑둑 다 떨어질 것이 아닙니까?
한 번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은 손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우리 뒤에 대고 묻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입니다. 교회 몇 십년 다닌 실적 같은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정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응답도 한결같습니다. "너를 나의 식구로 만든 것은 혈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 나 하나님이다"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흥정이나 타협하는 식으로 바라보지 말게 해주옵소서. 다 빼앗기고 전부가 다 하나님 차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예수님의 비유
2004년 1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9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나는 내가 지킨다"라는 방식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어느 인간치고 오기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심지어 노숙자들에게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일을 이런 오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실시 하십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인간들의 생각하는 바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각자 마음 속에 새로운 각오와 오기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그 말씀대로 잘 지켜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결심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엄청 오해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뒤에 긴긴 말씀의 내력과 배경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하십니다.
즉 마태복음 13장에 이를 때까지 그 전에 예레미야가 있었고, 이사야도 있었고. 다윗과 모세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창세기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지금 이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때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그 일관성에 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에, 이런 예수님 앞에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반드시 내가 지켜내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지"라고 마음 먹는 것은 너무나도 예수님의 마음과 다른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13:11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오기와 각오를 충족시키는 말씀이라면 결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과 오기를 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혀 그 장단에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여러분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과 빗물이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없이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성이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와의 맺은 약속으로 인해서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일방적 은혜성과 동일하게 마지막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도 오직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오기와 신념으로 뭉쳐져서 산다고해서 심판에서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예수님은 이런 은혜성 노선 밖으로 이탈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즉 누구나 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를 준 자에게만 은혜를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만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물론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본 선입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자기 잘못을 분명히 알았습니까 아니면 몰랐습니까?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안쫓겨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방되었습니다. 우리네 상식같으면, 하나님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뭐든지 원상회복시켜 주는 자비로운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가차없이 아담과 하와를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위주로 움직이지 결코 인간 위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위주로, 인간을 절대시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의의와 가치를 절대시하기 위한 조치로서 인간들 만드신 겁니다.
에덴동산은 결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혼수품이 아니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취지를 위하여 만든 동산이었기에 그 안에 죽음의 선악과도 함께 있었고 아예 동산 한가운데를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란 은혜없이는 존재할 가치가 아예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자에게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순수하게 은혜로만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의식은 도저히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의 책임감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인간이란 애초부터 '자기 것'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분이 저에게 이런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개척교회하는데 힘드시지요?"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전부를 다 얻은 것이고 그 즐거움과 행복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개척교회 때문에 힘든다고 느끼는 것은 곧,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내 것의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는 구원되지 못할 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시키십니다. 마치 비와 햇빛이 우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쏟아지듯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예상치도 않는 사고와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병실에서 저쪽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있노라면 은근히 화가 치밀게 마련입니다. 자기보다 더 나쁘고 악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저토록 건강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보려고 애쓰는 자기 자신은 왜 이처럼 악한 상황 속에서 헤매는지를 생각해 볼 때 부화가 치밀어오를 것입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줄기차게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광야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요. 텃밭도 없는 곳입니다. 짐승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 인간들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은 정말 쓸데없는 곳에 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허비하는 듯한 은혜, 즉 광야같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비내리는 심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광야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 우리 자신인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직 천국을 허락 받은 은혜받은 자를 골라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귀있는 자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만약 들을 귀없다고 여겨봅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일반적인 농사짓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비유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경우를 하나 그냥 채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농사에 대해서 상식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농사철에 어떤 결과들이 여러 가지로 나올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예수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 어떻게 하면 농사 잘지을 수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분명코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서 농사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불쑥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언급을 하셨다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천국에 대해서 먼저 물어볼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45:1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구원자'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숨어시는 형태로 구원을 하신다는 겁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에 환장해서 구원자나 하나님을 찾아다닌다 할지라고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귀도 없는데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따라서 비유 자체를 분해하면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결실이 맺혀야 될 자에게만 이해가 되는 식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전개되는 겁니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가미되지 않는 겁니다. 단순히 이미 옥토로 지정받았기에 그냥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서 열매가 맺힐 뿐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고 편하게 들리는 사람은 자기 오기를 포기한 사람이요 곧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은혜받은 자격이 애초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이런 본인에게 광야에 비내려주듯이 영생을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유에 대한 해석
2004년 1월 11일
마태복음 13:11-17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뭐가 나올까요? 옛말에, '한국사람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사람들은 잔뜩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나올 게 뭔가는 아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얻을 것은 일단 챙겨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원래 구경꾼들이 모여들 때는 이유없이 그냥 모여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한 소문이 들면, 그분이 직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감안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갖고 보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빼앗으려 오신 분입니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점검하려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믿음이 있는 자는 더욱 더 많이 받게 되고 천국에 대한 바른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이 있다고 우기는 자는 그 엉터리 믿음까지 도로 폐기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현대인들은 스스로 서려는 자들입니다. 교회와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워서는 그 배운 지식으로 이제는 자기 손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방도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저도 이제 복음에 대해서, 천국이 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관과 천국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바입니다.
지옥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지옥에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도 같은 원리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에 이끌리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린 아이의 경우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한테 장담합니다. "엄마, 나 저 신호등의 신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 알아.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고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신호래. 엄마 이제 나는 엄마 손목에 안잡혀도 나 힘으로 건너갈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갈 때까지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단단히 손목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립하려고 하고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인간이 독자적으로 봐서 얼마나 선한가 악한가를 가지고 그 인간의 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선함은 독자적인 자질이 아니라 누가 그 인간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가 여부와 그분과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붙잡힌 바가 되지 않는 천국과 신앙은 하늘에서 원하시는 그 천국과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천국의 비밀'입니다. 보통 천국이라고 우리가 연상하기에는 그냥 하늘에 존재해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제게 어릴 때 별명이 있습니다. '건들바위'입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건들건들 거린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집안 어른들 입장에서 저를 보기에 피곤했겠지요. 가만히 존재해 있어야지만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어 저를 관찰할 수 있는데, 자꾸 건들거리니까 정확하게 저를 관찰할 수가 없는거지요.
즉 변화나 운동이 없이 그냥 마냥 동일한 상태도 정지되어 있다면 정확히 그 내막과 실체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변화도중에 있는 사물은 뭐가 뭔지 정확하게 포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하늘에 그냥 고정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마치 마당에서 옥상에 있는 물탱크를 쳐다보듯이 쳐다 봄의 대상으로 고정되어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그 물탱크가 미쳐 환장을 해서 옥상에 가만히 있지않고 갑가지 마당으로 내려와서 개집에도 들어갔다가, 헛간에서 굴려다니면서 온갖 것에 다 받혀서 유리창도 깨고, 정원의 꽃나무 가지도 부러지게 만들고, 안방을 진흙 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혼잡을 한껏 떨고 난 뒤 물탱크가 옥상 위에 도로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네들이 물탱크를 알아?"라고 한다면 아마 기가 찰 것입니다. 고정된 물탱크가 아니라 움직이는 물탱크를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물탱크가 사납게 부산을 떨고 돌아다녔으니 사람들의 뇌리 속에 물탱크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천국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이 생각한 그 '좋은 나라 이미지'로서의 천국이 아니라 한참 활동 중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어떤 활동을 펼치는데요? 바로 사람들의 천국관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모조리 다 부숴놓는 그런 천국으로서의 활동을 뿜어내는 천국입니다.
즉 천국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의 완전품으로 다 만들어놓고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그 자체를 천국의 실상으로 받아줄 수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은 현재 인간들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치도 못하는 참으로 약하고 쓸모없고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왜 그 귀한 씨가 허비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즉 씨를 인간 세상의 죄악으로 인해 허비되고 손해보는 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점을 보여주면서 등장하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 소개하시는 겁니다. 천국이 마치 이 땅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모습으로 등장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천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악마로부터 사주를 받고 있다는 그 현실성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 활동을 저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당하고 있는 형편인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 세상 형편을 정죄하는 양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어 최종 목표는 엄청난 수확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에 있어 땅의 그 어떠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관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고 합니까?
인간들은 스스로의 귀와 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즉 악마의 시험과 유혹을 스스로 감시해 대처하고 천국의 씨앗을 안 빼앗기려고 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스스로의 인내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그 많은 유혹도 스스로의 절제력으로 뿌리 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에 의해서 제거당하고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는 엉터리 믿음입니다. 천국의 활약상은 곧 예수님 혼자만의 활약상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 엉터리 천국과 구원노력에 열중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의 헛된 노고에 대해서 사정없이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 손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들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들고 나왔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의 자신의 목숨이 십자가에서 없어지는 경우로서 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활동 전체가 곧 천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16-17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눈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보고자했으며 무엇을 듣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하나님의 참된 천국 활동을 보고자 했고 듣고자 했습니다. 인간들의 그동안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을 만들어 버리는 그런 관점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희생도 없이 순전히 천국 자체의 활동으로 인해 천국이 드러나고 나타내는 그 현장을 보고자 했으며 듣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인간이 구원받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하느냐?'에 초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인간들이 구원된다'는 식으로 나오면, 너도 나도 그 인간 흉내내기에 분주할 것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출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허락만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허락'이 유효하려면 인간들 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노력과 노고를 하나님께서 나서서 무(無로) 돌리고 차단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우리 인간이 죽든지 살든지 상관두지 않고 그저 옥토에 뿌리진 씨앗처럼 거대한 결실을 맺는 그러한 옥토의 위력을 볼 날을 선지자는 애타게 고대했습니다. 누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천국의 씨가 떨어져 봐야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누가 옥토가 아닌지도 씨를 던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넘어질 자는 넘어지고 반항하고 대들자는 대들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곧 천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을 언제나 느낄 수 있음을 절실하게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네 종류의 밭
2004년 1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18-23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합격이란 참 좋은 경우를 말합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합격입니다. 천국의 합격자는 어떻게해서 배출될까요?
우선 천국이 어떠하길래 모든 인간이 다 천국에 합격자가 될 수 없는가 하는 점부터 알아두셔야 합니다. 천국은 유대 나라가 먼저 학수고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옛날 다윗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왕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희망과 소망을 그들은 한시도 포기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명히 모르기에 그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웬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선지자의 외치는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태복음 3: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심인지 아니면 기대감인지 모르지만 세례 요한의 말에 일단 동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서 미리 죄까지 씻는 의식인 물세례를 선지자 세례 요한의 손에 맡겨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다는 메시야의 몰골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줄 선물 보따리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만 믿으라, 나만 따라오너라"라는 투였습니다. 물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소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러나 그런 스캔들을 이르킨 자가 한 둘이 아니기에 과연 참된 선지나냐 메시야냐 하는 바는 율법에 정통한 성직자들의 유권해석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권위는 역시 여전히 유대 성직자 그룹에다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린 평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유대 성직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배겨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당시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여지간 하면 예수라는 작자도 고집 그만 부리고 성직자들과 타협의 손을 잡아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그런 의사가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나섭니다. '당신네들은 마귀 자손이요"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그 이상의 내용을 본 비유는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약속되어진 구원될 자는 오직 '남은 자'에 국한된다는 이 원리를 예수님을 유감없이 그 시대에 적용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남은 자'란 이사야에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대부분이 구원의 자리에 탈락되어지는 현상을 두고 말합니다. 즉 천국문에서 서성이며 천국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려진 천국문에 도리어 깔려서 멸망당하는 경우을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남은 자'라는 그룹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자'란 심판이 맹렬하게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집단입니다. 세례요한 천국을 운운할 때도 필히 심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을 보고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 가느니 차라리 길에 돌멩이가 천국간다"는 폭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길에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존재하는 돌멩이를 통해서 현재 성직자들의 구원탈락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다소나마 성직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미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한 발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경우, 네 종류의 밭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므로서, 애초에 구원될 그 어떤 기미조차 허락된 적이 없음을 강하게 시시하시는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그 씨를 받는 4 종류의 밭은 참으로 무심하게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적극적 나설 하등의 여지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밭은, 자신이 어떤 밭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본인에게도 은폐되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천국의 씨앗이 떨어져봐야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속성이 지녔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밭의 특징입니다.
밭은 떨어진 씨에 의해서 그 결과를 그냥 보여주고 증거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밭의 성질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소개에 보면, 분명 밭은 나름대로 몸부림치고 애쓰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역한 인간의 본능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 이들은 누구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첫째 밭은, 악한 자가 방문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가 왜 이들을 찾아옵니까?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 것의 가치를 악한 자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들에게 뿌려진 것이 악한 자의 운명을 절단낼 힘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방문한 유형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비록 악한 자의 방문을 그들이 짐작들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밭'입니다. 밭은 타인에 의해서 유린 당하면 당하는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능력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둘째의 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 즐거웠으나 난데없이 그에게 환란과 핍박이 덮쳐지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환란을 이겨낼 만한 자력이 발동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그런 유형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 미리 환란이 쳐들어 온다든지 아니면, 아예 충분하게 즐거움의 시간을 가져서 그 즐거움을 나름대로 축적하려는 노력이 감행하려는 그런 시간적 여유도 없이 환란이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기어이 그 자를 탈락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굽힐 수 없는 애씀이 있었기에 생겨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잠시라도 말씀으로 인한 즐거움을 주지를 말든지 해야지만 왜 맛만 잠시 보이시고 잘라내기는 단호하게 잘라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천국의 씨란 인간들의 관리 수완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이런 분들 많이 생겨납니다. 복음에 대해 반응이 갖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지요, "됐구나 천국 고기 한 마리 낚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난데없이 본인이 감당 못할 환란과 핍박의 태풍과 지진이 덮쳐버리면, 언제 말씀이 남아 있었던가 하는 양으로 바짝 말라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주위에 보시거든 주께서 천국에 안넣어 주시려고 일부로 그런 일들을 실시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형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버려서 결실치 못하는 유형이라고 예수님은 평가내리십니다. 환란과 핍박과는 반대성향을 지닌 방해물이지요. 일단 기분좋은 방해물입니다.
말씀을 듣고 갖는 것보다 더 기분좋은 내용물이기에 '유혹'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 유혹은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어 보려는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를 유혹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연한 태도처럼 인식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십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합니까? 왜 꼭 살아남아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유도 없이, 목적도 없이 왜 살아남아야 합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우선입니다.
존재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은 거친 인생살이를 하면서 그저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기분 전환용에 불과합니다. 한 예를 들면, 살기에 바쁜 일과 속에서 야외로 드리이브하는 와중에 순간 청초롭게 피어있는 들국화를 보았다고 칩시다.
참 아름답지요. 그 청순한 아름다움에 흠뻑취하고 싶지요. 새로운 신선한 세계에 몰입하고 싶은 유혹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바이어로부터 물건 주문 전화를 받는다면 황급히 차를 다시 도시쪽으로 몰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여기고 꺾어놓은 들국화도 2Km도 못가서 창문 내리고 갈가에 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하고 심각스러운 문제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좋고, 교회도 좋고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은 인생이 한가로울 때나 찾는 멋진 장식거리에 불과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이요, 살아있기에 또 살아야 한다는 절갑함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기고 천국에 합격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는 말입니다.
특히 젊은 분들에게 있어 인생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인생의 맛도 못하고 꽃봉오리도 채 피지 못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나옵니다. 물론 연세많은 신 노인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이제 죽을 마당에 도달해서, 산다는 거 자체가 귀찮고 번거럽고, 시시하고, 부담이 되기에, 임종시에 자녀를 앉혀놓고 쉽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신앙생활 잘해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젊은 자식들은 은근히 불쾌하지요.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았지만 아직 저희들은 제대로 맛도 못보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생활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 정작 결실을 맺어야 될 씨는 그 밭에서는 죽어가게 됩니다. 외부에서 결실을 못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의 독한 생존 의지가 주어진 천국의 씨도 없어버리고 그 길도 지워버리고 뭉개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악마를 이기고, 환란과 핍박을 이기고, 재물의 유혹도 마다하고 생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자가 누가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남은 자'의 비밀이 나타나는 겁니다.
'남은 자'란 심판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게 하고, 환란이 들이닥치게 하고, 생활고로 인한 걱정과 돈의 유혹으로 심판을 감행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이런 것을 이길 위인이 없음을 확실히 해두는 겁니다.
남은 자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로 구원받을 자들입니다. 밭은 그 특성상 자력으로 자신의 성질과 속성을 수정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씨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를 보고 "자신이 옥토이구나" 라고 파악할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남게 되는 '남은 자' 가 따로 있다는 것이 이 비유를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1:5-7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심판 작업에 나서십니다. 이것이 곧 움직이는 천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이 심판의 원리가 곧 우리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는 원리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가라지 비유
2004년 1월 2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24-30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13: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일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면 그런데로 괜찮은 인간이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체를 다 내다 보십니다. 우주의 온 구석 구석을 다 보십니다.
그렇게 보면서, '천국'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 개인들 입장에서 천국을 보면, 내가 그냥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공이다고 보겠지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천국의 완성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세력까지로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원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천국의 원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자칫하면 개인적인 천국이 될 공산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여자가 울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동정을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처지는 아직 괜찮은데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처지는 형편없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네 자식을 위하여 울어라"고 말입니다. 즉 지금 우리는 우리 처지를 제대로 모르는채 천국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국을 제대로 알려면 왜 예수님께서 가라지 이야기를 꼭 하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고정적이지 않고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생리란, 좋은 것은 고정시켜서 그냥 따먹는 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마치 감나무에서 다 익은 감을 따기만 하듯이 말입니다. 천국도 그런 식으로 고정화시켜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천국의 원수가 갖고 있는 천국관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디있습니까? 성령은 바람같아서 어디 지정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났다가도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우발적으로 나타날 때만 등장되는 겁니다. 그 예가 베드로전서 4:12-14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성령이 계시기는 계시지요? 그런데 그 성령께서 등장할 때 어떤 현상을 동반하고 나타난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받고 욕 얻어 먹는 형식으로 등장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욕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마태복음 5:10-12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한 '의(義)'는 오직 예수님과 동일한데 그 예수님의 의 때문에 수모를 당하면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같은 천국 백성인 선지자들도 동일한 경우를 당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가라지가 어떤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하게 될 것 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람같은 성령 안에서만 천국이 들어있고, 그 천국이 이 현상 세계에 비칠 때는, 예수님의 의만을 믿기에 고난이 되는 형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고정적인 것을 추구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천국을 마치 교회처럼 고정적인 것으로 오인하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꼴이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은 부부로서, 헌금의 반을 속이고 교회에 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사이좋게(?) 한 날에 죽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라는 어른신네가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천국이란 성령 안에 있다고 했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눈에는 그저 고정적인 교회 조직책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속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교회를 세우면 가라지 같은 교회를 세우게 되고, 곧 천국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천국관을 소개할 사람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을 교회 중심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는 곧 천국이기에 만약 교회 운명과 그 방침에 대드는 자가 있으면 곧 가라지이다"고 말입니다.
교회의 순수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있게 치리를 하게 되는데, 이 치리하는 작업을 개시하면 반드시 권력의 중심축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이런 '가라지' 개념은 성령 안에 있는 천국과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예수님의 의만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 사람은 그 교회에서 권위에 도전하는 가라지로 판정을 받게 되어 버립니다. 즉 "우리 당회에서 결정한대로 입 다물라. 네가 그렇게 주장하면 같은 교회 내에서 말씀에 권위를 가진 자가 둘이 생겨버린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교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당회에서 싸잡을 수 없어 운영하기 곤란하다."고 나옵니다.
교회 내의 권위와 권력을 목사 중심으로 하기 위해 치리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과연 이런 곳이 천국일까요? 누가 가라지냐 하는 기준은 에베소서 4:5-6절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즉 이미 진정한 교회는 하나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누구 중심으로 하나인가가 하는 점입니다.
고린도전서 1:12-13절에 보면,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사도나 전도자에게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부부는 한 몸이다'라는 말은 다 압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계속해서 한 몸되기 위해 애쓰지 아니하면 한 몸이 깨어진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은 실천에 관한 문제나 행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아내가 남편보고 하는 말이 "여보, 우리가 한 몸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써왔는데 그래 당신은 날 실망시키냐? 우리 헤어져!"라고 나오는 식의 한 몸은 아닙니다.
'한 몸'되기 애쓴 것과 '한 몸'이다고 믿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내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15년째 한 몸으로 잘 살아왔다가 자부하더라도 내일 또 무슨 한 몸이 깨어지는 사태가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때 가서 갈라서 버리면 지금까지 15년째 한 몸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은 한 몸이 아니라 그저 한 몸처럼 유지되어 왔던 거지요. 한 몸됨이 깨어지는 요인이 발생되기 전까지에 유효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한 몸'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사에서 그 어떤 일이 발생되고, 우리 자신들에게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상관없이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뿐이기에 그 분으로 인해 이미 우리 '한 몸'인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성령 안에 있는데, 그 성령 안에 있는 천국은, 오직 한 분 중심으로 이미 확정된 천국이요 알곡들입니다.
따라서 가라지란 딴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 쳐다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천국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특정 조직체나 단체를 하나로 만들고 그것을 정화하고, 질서잡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즉 믿음의 단체가 아니라 행함의 단체가 가라지입니다.
만약 천국갈 때에, 하나님께서 물으시기를, "너 누구 때문에 천국에 왔느냐?" 할 때, "좋은 목사님 만나서 천국왔다"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옆에 온 사람이 우기기를 "네만 좋은 목사 만나느냐? 우리 목사님도 얼마나 좋은데"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가라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한 형제임을 인식하는 올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정적인 천국으로 교회를 싸고 돌 것이 아니라 늘 움직이는 주님과 함께 움직이는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겨자씨 비유
2004년 2월 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31-32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어떤 사람이 현실관을 알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즐거워하며, 또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슬퍼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신의 존재까지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하나님관은 자신의 현실관을 충족시키는 그런 하나님관이 되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 ......"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뒤에 요구하는 바가 따라 붙게 마련입니다. 그 요구사항은 곧 자신이 생각해 놓은 현실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우리 눈 앞에 있는 겁니까?
성경 안에는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제시하는 이 세상에 대한 현실관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인간들의 현실관의 상호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개개인의 잘못된 현실관에 대해서 그 개인의 자질이나 인품가지고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 인간들이라는 자들은 태어 날 때부터 잘못된 현실관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당연히 엉터리 현실관을 소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현실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현실관을 참 현실을 받아드릴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위기의 종말입니다. 그것도 전혀 해결책이 없는 종말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이란 끝장나 버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인간 세계에 천국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할 만한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씨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씨 뿌리는 농부에 비유하더니만, 그 다음에는 밭의 상태를 가지고 천국에 비유하셨고, 이제는 씨에 대해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경우 모두다 그 자체로서 순결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뭔가 악한 것이 섞여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 천국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 섞임으로 인해 천국을 만드시는 주인공에 대한 오해와 곡해가 이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즉 쉽게 결판내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야가 과연 당신 맞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들도 마음속으로 늘 하게 됩니다. 즉 "과연 예수 믿는다고해서 하늘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기는 받을까? 혹시 아무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엉뚱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게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혼란이 이런 것들입니다.
왜 예수 안믿는 자들이 세상 일이 술술 잘 풀리는가 하는 겁니다. 시편 73:1-11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절과 1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입니다. 분명히 신자는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신다는 점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요소는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전에는 선이라는 것이 2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고서 참된 선이란 11절과 같은 불신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 바로 그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세상이 타락하고 난 뒤에는 도리어 이런 당연함이 비난받을 짓이 되고 만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태에 이르면서도 인간들은 세상에 대해서 여전히 불만이 많아서 얼른 멋진 새 세상에 펼쳐지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참된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분은 이 땅에서 이 거짓된 천국관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한쪽으로는 왜 당장 하늘에서 불심판이 내려떨어지지 않느냐고 다구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행함으로 천국을 달성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누가복음 9:53-55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불의 심판주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실 능력도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천국은 그렇게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천국이 바로 불의 심판으로 시작해서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천국에 대해서 잘못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불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상을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천국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불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왜 사람들은 불심판을 받아 마땅한가를 뚜렷이 하시는 작업부터 시작을 하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남이 하는 것은 조그만한 실수도 참지 못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잘도 용납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여기면 갑자기 대단히 억울하다는 핑계를 댑니다. 강도가 강도짓해도 수십가지의 구실과 변명을 당장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못배워서 뭐가 죄인줄 몰랐다든지 혹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 도리가 없었다든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이 무시해서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무작위적으로 행동했다든지 하면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늘에서 불 심판이 떨어질 때에 이 핑계, 저 핑계 다 소용없이 마땅히 불심판 받아도 싸다는 근거를 마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하면서도 열심히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에게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에게 하늘에서 불심판 떨어졌을 때, 그 사람은 혹시 하나님께 항의하거나 핑계를 늘어놓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이럴 경우에 아예 핑계치도 못할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1:5-6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무상으로 은혜를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 자에게만 기사회생하듯이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즉 소경되었다가 눈 뜬 사람에게 다음과 물어보세요. 뭐라도 답변할까요? "당신은 어떻게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해 놓은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듣는 사람은 불심판 이상으로 큰 낙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올 대책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은 개별적인 자질 문제가 아니라 아담 노선 안에 들어있기에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과연 누구이며 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인간은 거기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죄인임을 안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인간쪽에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쪽에서 다가옵니다. 천국에 흡수, 통합되는 양식으로 구원이 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가오시는 천국의 모습이 인간들의 눈에서 참으로 무시할만하고 시시하게 보이는 양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치 겨자씨가 떨어진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겨자씨 안에 온 우주를 덮을 만큼 커대란 천국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1:18-20절에 보면,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는 온 우주보다 더 큰 '지극히 크신 천국'이 들어 있는 현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도 그러합니까?
이사야 50:5-6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란 누군가의 의로운 행위나 행함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신 행동자'로서 등장하신 분의 수난으로 인해 천국이 완성이 되었기에 이 천국에 포함된 오늘날 성도들도 이와같은 수모를 같이 당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천국은 여전히 겨자씨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수모는,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장차 천국의 영광된 상태에 다가오고 이 세상이 불로 파멸되고 나면, 천국이 바로 온 우주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비록 겨자씨만해도 그것이 귀한 생명덩어리 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누룩 비유
2004년 2월 8일
마태복음 13:33-35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뭘해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되는 인간이 구상하는 천국은 처음부터 천국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가짜 천국이 늘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쪽에서부터 천국을 출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은 '감추인 대상'이 아니라 '공개-공개'로 계속 이어질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천국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한 나름대로 선입견을 갖고 이 선입견을 가지고 자기만큼은 '들을 귀'를 가졌노라고 누구나 자신만만해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도 그 내용은 자기에게 정확하게 이해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즉 본래의 예수님의 뜻은 사라지고 자신이 납득하는 식으로 이해 해 놓고서는, "나는 들을 귀가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 말씀이 잘도 들리는구나"라고 오해할 소지가 넉넉히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순전히 예수님만이 수행해야 될 업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의 '드러내심'으로 인해, 소위 인간들이 '드러냄'의 능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으로 확실해져 버립니다.
인간들도 조금만 꼬투리만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드러냄의 흔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하여 천국에까지 이르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입견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의 경우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그 전에 여러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던지는 겁니다. 그랬더니만 배가 잠길 만큼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난 뒤에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 어떻게 베드로는 한 무더기 쌓여있는 고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인됨에 관심이 생길 수가 있었던 말입니까?
고기하고 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고기 잡힘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죄인됨까지 연장되어 꽂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자가 밀가루 반죽에다 이스트를 집어 넣었구나'를 먼저 생각하지 누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이 들겠냐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고기와 자기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이듯이,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도 이 본문과 우리의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고 있는 천국은 엉터리이고, 참된 천국은 감추어진 형태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도행전 9장에도 니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예수님도 인정해 주었듯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종교 행위를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고라고 하니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종교 순수성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장담할 만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메섹을 내려가면서 하늘에 계시는 그 누군가를 만나는 되는데 그 만나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참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참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경악스럽게도, 자신이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되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자신과 참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되게 아는 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우 즉사한다는 것은, 레위기 10장에도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일반 백성들보기에 참으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명자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레기 같은 자신들은 죽여도 설마 저토록 숭고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까워서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바치다가 그 향로불에서 폭발한 진노의 불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했느냐는 겁니다. 민수기 16장에 봐도, 레위지파에 속하는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기를, 왜 거룩한 제사장 직무를 너희들이 독점하고 있느냐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향로불에서 쏟아진 진노의 불에 의해서 25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천국이란 어떤 여자가 밀가룩 반죽에 섞어넣은 누룩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저를 죽이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구나 이 참에 잘 들어 놓았다가 나도 천국에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죄악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고기 잡음이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만남이나 고라자손들의 횡사나,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의 즉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의 죽음을 유발시키면서 진행됨을 보이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왜 천국은 감추진 모습으로 등장됩니까? 그것은 죄악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개성을 빌미로 해서 가짜 천국과 가짜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25-26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 바탕에서, 자신의 죽음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천국에 대한 달성은 자신 소관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위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곧 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의 만남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 "왜 너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가?"를 최초로 알려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천국 비유를 통해서 이런 취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천국가기 위하여 말씀을 대하는 그 자체가 죄이기에 시도를 피해서 숨어있는 모습으로 천국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그 작업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담당하시는 유일한 담당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소원 안에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특정인들이 반드시 구원되어야 될 요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우리 소원이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신의 소원이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즉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예수님은 일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죽은자로 계속 들추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과 부풀어오르는 밀가죽 반죽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밀가룩 반죽이 따로 손 쓸 빌미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밀가루 반죽은 계속 부풀어집니다.
결코 밀가루 반죽의 공로가 아닙니다. 단지 밀가루 반죽은 누룩의 능력을 외부로 발산시킬 뿐이지요.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는 자신의 욕망이 곧 죄인 것을 알게 해주옵시고, 이런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계속적인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라지 비유의 해석
2004년 2월 1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36-43
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13: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13: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창세기 1장에 보면, 천지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 뭔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 능력은 도무지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습니까?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공경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자연을 꾸며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지 마시오. 우리는 당신의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다구요"라는 투로 나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태어날부터 그런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 대해서 고마움과 사랑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단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을 자식된 자가 용납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왜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존재의 자기는 어쨌든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엘하 22:2-3절을 봅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의 자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기 존재의 자리를 박탈 당한 것입니다.
다윗이 일부로 스스로 자신을 갱신하기 위하여 노력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들을 계속 부여받게 됩니다. 마치 자기에게로 쏟아지는 화살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자기 딴에 분주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숙제들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항상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불실함과 죄악들입니다. 즉 자신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다윗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즉 아무리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죄인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다윗이 알았던 것은, 여호와께서 친히 자신의 반석이고 요새시오, 구원자이심으로 이미 등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는 구원된다는 사실을 그는 고백합니다. 제사나 번제나 화목제 드림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못난 다윗을 구원하시는 이 능력은 어디서 온 능력입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창조할 그 당시에만 적용되고 지금은 중단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능력은 지금도 여전하십니다. 이 능력 말고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천국의 아들'은 마땅히 자신이며, 자기처럼 믿지 않는다든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가라지인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딱 자신을 지칭해서 쓰여진 말씀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교단이나 종교 차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교인들은 전부다 '천국의 아들'들이요, 불교 신자들은 가라지라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은 모두 악마가 뿌려놓은 가라지로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해석 자체가 아직도 여전히 '자기 존재 바탕'을 계속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즉 여호와가 자신의 반석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반석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자기 존재의 자리를 압수당한 자만이 천국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자리가 사라질까봐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찾아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갖 신학적 지식과, 성경 지식으로 자기 머리 위에 뒤집어 씌우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 운명을 결정지우려고 합니다. 인간이 뭔가 미래에 대해서 기대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 있는 지금부터 초조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일을 기약하면 오늘부터 걱정이 늘어지게 됩니다. '내일 그 일이 안 이루어질까봐'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리모콘에 의해 순간적으로 눈 앞에서 사라지는 T.V 드라마로 간주합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을 때는 마치 현실처럼 배우들과 같이 울기도하고 같이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이 와서 막상 그 리모콘에 손가락을 눌리는 순간 그 허구적 상황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허구였던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모두들 자기 존재 바탕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드라마를 연출하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본위로 자기 위주로 만드는 그 드라마 안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기도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리모콘을 눌려는 순간, 그 모든 허구는 허구로서 막을 닫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라는 실제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나오는 천국의 아들이라든지, 가라지라는 대상은 순전히 예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일방적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우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달성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뿌려놓은 '의(義)의 씨앗'을 스스로 되찾아가는 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의 씨앗을 세상을 뿌려놓으니 옆에 있는 악한 천사도 자신의 씨앗을 세상에 뿌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의의 씨앗이고 악의 씨앗인지는 지상의 인간들은 알 길이 없는 거지요.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활동 여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창조 능력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없는데서 있게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행함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전혀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숙제를 자신이 행하시는 것 뿐입니다. 그 숙제가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5: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이 말씀을 누가 손수 이루어내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이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모든 가라지와 악마의 유혹을 뚫은 가운데 나온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존재의 반석이요 요새이며 구원자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을 뒤엎고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실천력 행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작업이 세상에 드러날 때는 반드시 '잃었다가 다시 얻은' 형식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양 100 마리가 있었는데 목자는 그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비유입니다.
그 다음 비유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단지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밤 새도록 찾으려고 했고 과연 찾아서 다음 날 친구들과 잔치를 벌렸다는 비유입니다.
마지막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사는, 늘 아버지 곁에 있어 아에 '잃어버렸음'이 성립할 수도 없는 아드렝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던 그 탕자가 되돌아 오기만을 고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천국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호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존재만 최종 고수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당연히 지옥가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결과로서 천지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서 구원된 자만이 천국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이미 믿고 난 뒤에서 영원토록 지속될 능력입니다. 일단 구원받았다고 그 다음 부터는 그 사람 행위의 소관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과학이란 그 출발점에 대해서 만큼은 인간들 사이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능력껏 솜씨를 부리기 따라서 본인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만약 출발점부터 차별을 두게되면 많은 사람들은 불공평함을 보고 그런 세계를 거부할 것이 뻔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세계란 능력에 의해 자기 장래를 결정되는 세계입니다. 만약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닌 채 성경을 보게 되면 구원받는 문제나 천국 가는 것도 자신의 능력 발휘에 달렸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라는 열쇠 없이는 전혀 그 비밀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성경을 보게 되면 여기서 인간적인 생각,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을 보고서도, 자신을 보물 찾아낸 농부로 착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남들이 못 찾아내는 보물을 저는 찾아내었습니다. 제가 바로 천국이라는 보물로 찾아낸 당사자입니다.'라는 의식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보물이라는 것은 자신의 최후 행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무수한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큰 횡재라도 한 듯이 예수님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출발해 능력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천국 가기'는 기껏 하늘에 향한 침 뱉기에 해당하는 바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늘을 향해 남들보다 높이 침을 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속도를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결국 떨어지는 장소는 침을 뱉은 자기 얼굴입니다. 딴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 내에 차별에 대해서 미리 언급하십니다. "아버지가 내게 넘겨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림이 없이 끝까지 책임지고 마지막까지 살려내시는 그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 비유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보물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관 속에 자신의 전부를 담아 넣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무리 사이가 나빴던 관계라도 너무나도 섭섭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지신 아버지에게는, 자식의 과거 추억과 기억과 정성이 다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죽으심은 곧 자신의 과거의 사라짐이요 곧 자신의 죽음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내세우는 보물이란 곧 자기 자신의 전부가 들어있기에 사람들마다 보물이 다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보물을 가지고 뭘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 하나님 믿기... 뭘 해도 그 안에는 자신의 행복추구가 목적으로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는 자들의 세계에서도 행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훈이나 비법 같은 것을 많이들 연구해 두고 있습니다.
즉 사물 자체에 행복이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큰 상인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먼 나라로 무역하면서 수출입 과정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챙겼습니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온갖 희귀한 외국 보물들을 수집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뭐든지 오래 보면 식상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가까이 있으면 시들하기 마련입니다. 좋고 나쁨이 그 사물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의해서 좋다, 나쁘다가 형성되는 겁니다.
먼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고아 보여도 막상 손아귀 안에 잡아놓고 보면 독한 냄새나 풍기는 그런 일상적인 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피부가 고운 미녀도 손바닥을 펴놓고 현미경 들이대고 보면, 땀샘과 털이 숭숭 있는 것이 확대되어 보일 것입니다. 본래의 가치가 사물 그 자체에게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큰 상인의 부인은 또 먼 나라로 장사를 떠나는 남편을 향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과연 그 남편은 배 가득 귀한 보물을 싣고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밀이었습니다. 더 희귀한 보석이라고 사올 줄 기대했던 아내는 화가 나서 그 밀을 넓은 갯벌에 다 내다 버리기를 하인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난 어느 날 남편은 먼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 배도 파산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투자자들이 그 남편의 모든 재산을 다 가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내의 보석까지도 채권자 손으로 다 넘어갔습니다. 남은 것은 거지꼴이 된 육신뿐이었습니다.
배가 곯아서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 여자는 갯벌에 나가 헤매다가 눈에 뭔가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 여인은 밀이 왜 보물인지를 알았습니다. 똑같은 밀이지만, 그것을 소유의 입장에서 보물이냐 아니냐를 결정 지울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 몸에 필수적인가 아닌가를 두고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마음이 행복해졌습니까? 이제 마음이 낮아졌으니 그만큼 정말로 무엇이 귀한 보물인지 눈에 들어왔습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마음 훈련이나 정신 차리기로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소개하는 보물의 진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의 진수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3:9-11절을 보겠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단어를 서로 이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비밀'이라는 단어요, 다른 하나는 '예정'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에게도 들통난 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감추어진 것입니다. 마치 밭 속에 들어 있는 보물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이란 바로, '예정해 놓으심'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무엇을 계획했으며 무엇을 예정하신 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보물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자기 행복과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지 달리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한계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뜻을 전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우리들은 무지합니다. 이점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되기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 즉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감추인 채로 제시하신 보물이란, 곧 '인간의 그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뜻에 의해 구원됨', 바로 이 자체입니다. 즉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진리는 모든 인간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자기의 행동에 토대를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성설교 중 하나인 마태복음 7:6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보물이란 거룩과 통합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행복보다 거룩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인간들의 이런 결정적 무지성이 드러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돌'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버려진 돌'을 가지고 비로소 천국을 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버려진 돌 앞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공로를 거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예정된 뜻에 따라서만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일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열매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있어 보물을 보고 좋아하시는 농부는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 앞장세우고 자랑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본분과 관련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주 장사 비유
2004년 2월 29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45-46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 '내가 죽는다'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죽을 즈음에 그 이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서 나름대로 마음을 정돈한다고 해서 천국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방식은 천국에서 제시된 바에 준해서 결정됩니다.
그 원칙은 구약에서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 그러합니다. 인간적인 편리라는 면에서 볼 때 사실 광야 생활이란 쓸데없는 중간 지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애굽이라는 나라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간편한 구원 구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구원 욕심의 발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구원의 경과는 광야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시간적인 경과를 통해 자동적으로 골인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전에 변화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마음의 변화, 곧 신앙심이 생겨야 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 안에서 진행시키십니다. 즉 애굽에 살면서 간직했던 기존 마음가짐이란 이런 겁니다. "죽은 다음에는 좋은 세계에서 살아야지"입니다.
사실 이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도무지 예외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죽어서 자진해서 최악의 세월을 보내겠다고 솔직하게 마음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장래의 좋은 복을 추구하는 본능, 그 자체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겨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한 채 험난한 광야 지역을 통과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평을 하나님에게 퍼붓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좋은 세상에 가서 한 번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십니까?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해보게 합니까?"라는 식의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마음가짐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살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미리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천국에서 가지고 살아야 될 마음가짐이라면 이 광야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에서 통하는 마음가짐이란, 자신의 생존 위주의 가짐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한결같은 마음가짐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아직 죽지 않고 이 시점에서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구원될 수 있는 겁니다.
젊을 때 온갖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연세가 많아져서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발길을 옮겨놓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가짐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최종적 욕망이란 천국에로의 염원과 그곳에 골인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이 욕망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의 이야기를 놓고서 인간이 보통 해석하는 것과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다른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하지만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인간들이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천국의 내막을 감추는 방식으로 비유를 들어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인간의 마지막 욕망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광야 지역이 왜 있는지는 안중에는 없고 바로 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곧바로 연결 지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됩니다. '어떤 보석장사치가 있었는데, 마침 우연히 천하 제일의 보석을 발견하고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이득이 줄 것인가를 짐작하기 때문에 그 장사치는 과감하게 자기 전 재산을 다 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될 사람은 천국이 얼마나 좋고 크고 이 세상보다 월등하게 좋은 세계인지를 충분히 알아서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쳐서 비록 남들에게는 손해보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천하 만국보다 더 확실한 것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 똑똑하고 지혜로운 참된 성도이다'라고 해석할 것입니다.
바로 이 해석이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을 최고의 보석으로 알아보는 인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야심이란 진정 좋은 것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것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의욕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을 미끼로 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바닷가에 사는 노 어부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이상한 고기를 낚아 올렸습니다. 물고기가 하는 말이 나를 살려두면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집에 물이 새는 물동이를 갖고 있었던 노부부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고 깨끗한 물동이만 요구했습니다. 물고기는 흔쾌히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부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이 상승되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계속 물고기를 불러내어서 소원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는 마지막을 입을 닫아버리고 노부부가 집에 와보니 그동안의 부귀영화는 다 없어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참 모습은 그냥 죽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불길이 맹렬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코스뿐입니다.
이것에서 더 지나치게 욕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우리는 이렇게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죽음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력하기에 우리들은 잠시 천국에 대한 꿈을 꾸는 겁니다.
인생이란, 죽음이 부풀어 오른 것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고무풍선에 바람 빠지는 날에는 원래대로 죽음에 합류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달성은 누구 소관입니까? 순전히 예수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서 천국을 만들어 내십니다. 어떻게 만드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구약 사무엘하 6장을 통해 알아봅시다. 거기에 보면 4명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웃사요 다른 한 사람은 오벧에돔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이요,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의 처인 왕비 미갈입니다.
웃사라는 사람은 손에다 언약궤를 실어가면서 자기 딴에 하나님께 잘해 보겠다는 뜻에서 언약궤가 떨어지는 것을 방비하고자 손을 대었다고, 감히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졌다는 죄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에벧오돔이라는 사람은, 감히 그 무시무시한 언약궤를 집에 모셨더니 그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하기 이상한 일입니다. 만지면 저주받고 모시면 복받는 언약궤의 조화가 말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궤 소유용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 용도로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바를 은혜로 덧입을 뿐임을 아는 자에게는 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다윗은 언약궤가 시온성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가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의 처인 미갈은 그 모습을 대단히 못마땅해했습니다. 왕의 체면과 체통을 망치는 짓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이보다 더한 천한 짓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궤의 취지를 다 보여줄 수 없을 정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왕의 가족이라는 직위를 수호하는데 관심이 있는 왕비는 평생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받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즉 성도에게 주실 은혜의 원천은 인간 쪽에 준비하거나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이 거저 주시면 거저 누릴 수밖에 없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양을 만들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석 장사치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볼품 없고 무가치한 자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자신의 모든 것, 즉 귀한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아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시선에서 이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 야심으로 긍정하는 쪽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또 다른 힘일 뿐입니다. 언약궤의 취지를 달성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시듯이 오늘은 우리에게 천국 영생의
복음 십자가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죽어 없어져도 할 말이 없는 저희들입니다. 하지만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은혜만 고마워하는 그런 마음씨로 바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그물 비유
2004년 3월 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13:47-50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구로부터 심판을 받고 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기분 상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에게 아예 자신을 점검할 그 어떤 장치가 없다면 우리의 가치성에 대해서 외부 용역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게 아니라 우리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작동하고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판에 또 외부에서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인간의 고유 가치성과 자립성이 침해받기 때문에 상당히 성질 건드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창조주께서 꼭 심판을 감행하겠다고 나선다면 그 심판 기준이라도 미리 알아내어서 그것을 준수함으로서 스스로 알아 자기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시켜 주는 방도를 고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세월에 떠내려가는 인간입니다. 자기 딴에 잘했다고 장담해도 돌아보면, 그것은 그 당시 그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즉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노고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굽힐 줄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인간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입니다.
즉 "과연 너희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보시기에 형편없는 인간인 줄을 알고있냐?"라고 묻으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을 정죄할 고유의 행함이 자기가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즉 자신에게는 남을 정죄 할 자기만의 의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열심히 자기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자기 의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부하고 나섭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자기 의를 위한 시도들입니다. 군대 조직에서 하급자를 괴롭히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공동체에서 기존 주민들이 새로 이사온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두 자기 의를 따로 장만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특히 교회에는 이 점이 더욱 노골적입니다. 교인들은 자기 의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가 행한 사항을 목사가 일일이 지시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은 목사나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목사의 말에 최선을 다해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의를 따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목사 말을 잘 들었으니 그 순종에서 의가 나올 것이고 그 의에 대해서 하늘의 축복을 쏟아 부어달라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겁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교인들에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함으로써 명령하는 당사자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그 반대급부로 그 교회에서 봉급받는 생활자로서 나름대로 정당함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조직체일수록 회칙과 규칙은 강화되어서 만약에 그 규칙에 어긋나는 자는 그 집단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있어 천국의 주인공은 그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일단 모든 인간들을 한 그물 안에 모아들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절에 다니든 알라신을 믿든 예수님을 믿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손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것부터 인간들은 아예 처음부터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가 전체 심판을 위한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무심코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도 전부 전체 심판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기가 자신를 심판하는 구실마저 박탈당하는 셈이 됩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겨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될 환경인양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제대로 지켜보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힘에 붙이네요"라고 변명을 널어놓게 됩니다. 사실은 이렇게 고백해서는 안될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 속에도 주님의 심판성을 잊지 않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역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구실이 된다는 점을 아시고 요한복음 3:16을 봐야합니다.
거기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임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3:18절에 보니 당연히 심판받아야 될 세상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독생자를 믿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봐서 이미 이 세상은 벌써 저주 안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세상 관을 오늘날 인간들이 지니고 있을까요? 아까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자기의 가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의를 만들어나는 방식을 가동하기 일 수입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기에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한 점수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선택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보이시는데 주안점을 둔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즉 은혜로 선택된 자만 필히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되지 못함을 보이시는 그런 심판을 감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으로 잘 살겠다는 자는 지옥을 가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됨을 믿는 자만 구원되는 결론으로 심판이 감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심판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한 그물 안에 거두시는 분께서 심판하실 때,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자만 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위인도 하나님에게 만족할 만한 의를 생산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심판 안 받을 자격도 없을 뿐더러 심판 주이신 예수님의 의향에 구원해 달라고 압력을 가할 권리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이런 절대적인 권한이 전부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5-26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의롭다, 의롭지 않다 의 결정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내세워서 검사 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기준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갖고 있는 기준으로 인해 예수님의 기준과 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의의 기준을 따로 갖고자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고자 벌리는 생존 경쟁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의해서 누가 희생을 당했느냐 하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마저 희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살벌하고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은혜로 분에 차지 않아서 거기에다 또 자신의 선행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믿음으로는 구원은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은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심판 주되시는 예수님을 몇 번이고 죽일 위인들입니다. 그런 위인들이 모여 교회를 만들고, 교단을 세우고 궁극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진정 심판을 제대로 안다면, 이런 심성으로 십자가만 바라 봐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타인의 기준에 준해서 남에게 정죄 당하지도 말고 목사로부터도 정죄 당하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거기서 제시한 기준과 은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오직 주님이 벌리시는 심판만을 겨냥해 간다는 점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새 것과 옛 것
2004년 3월 1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51-52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13: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제일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참된 신을 분간해서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되었든 다른 신이 되었든 아예 신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소의 귀에 경 읽기' 같은 소리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있어 참된 신과 가짜 신의 구분조차 하지 않고, 신 전체와 자기 자신을 놓고서 대결구조로 고정시켜 말았습니다. 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저항하겠다는 겁니다. 웃통 벗고 본격적으로 신과 시합에 나서겠다는 겁니다.
신이 대단한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대단한지를 견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속성은 본인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인류의 조상 대대로 물러 받은 겁니다.
한 쉬운 예로 제가 이 물 컵 하나만 가지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차례 차례로 전달을 시켰다고 칩시다. 도중에 제가 막 컵을 전달받은 사람에게 가서 그 컵을 확 빼앗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컵은 나의 것이 그 컵에 담긴 내용물도 원래 내 것이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 여러분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전달받은 속성이요 본성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선에 감당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넘어서 버립니다.
즉 아무리해도 우리 자신들의 노력으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억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부터 물러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물러 받은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전력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에게 대들게 합니다.
"하나님도 소용없고, 예수도 소용없다. 신을 믿지 말라, 예수도 믿지 말라. 믿을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다!"라고 과감하고 이 강단에서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쓴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성질조차 우리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 십자가 현장에서 넉넉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시점에, 십자가 밑에서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 지는 위인아,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겁니다. 십자가 진 당신과 옷을 갖고 싶어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거지요. 오늘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골적으로 십자가를 땅에 팽개치고 지근지근 밟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십자가 져라. 나는 돈이나 벌어 보련다"라고 나서는 그 행세가 곧 로마군병들과 같은 의식입니다.
옛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 땅에 오실 때는 초라하고 비천하고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예상한 호화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비참하게 나타나셨는가요? 그것은 그 어느 인간도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저로서는 저의 성격이나 본성조차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감당 못하겠습니다."라고 자포자기 할 때, 저 만치서 마중 나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 나무 위에서 줄줄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의미를 아느냐?" 하시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바로 구약에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고 당부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51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라고 물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을 다 읽어 가는 우리보고 시험을 치시는 취지로 물으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정리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마태복음 13:41-42에 보면, "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점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 심판을 누가 주도하느냐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 분은 바로 '인자'라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옛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일에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여호와의 자리에서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인자'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죽도록 그 분을 사랑하면서 자진해서 그 분과 한편 되기를 즐거워 할 때, 비로소 이런 사람에 한해서 '깨달았음'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을 주도하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점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반기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을 '깨달았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마음가짐의 깨달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것'과 '옛것'을 구분하는 눈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옛것은 무엇이며 새것은 무엇입니까? 새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리입니다. 새것도 없이 흥미 거리가 없으면 못 견디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사무엘하 13:14-15에 보면,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논은 다말을 너무너무 사모해서 저 연인을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막상 일이 저지르고 난 뒤에는 오히려 전에 사랑했던 정도보다 더 강하게 사랑했던 여자를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왜 갑자가 극도의 사랑이 극도의 미움으로 변했을까요?
그것은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 뒤에는 새로운 것이 사라지면 곧장 허탈감에 사로잡혀 사랑의 진면목이 유감 없이 드러나는 겁니다. 즉 "사랑한다"는 말 뒤쪽에는 조건 맞지 아니하면 "나는 너를 극도로 미워 할 꺼야"를 깔고 함께 제시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새롭지 않으면 살아 갈 맛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을 충분히 살았고, 그리고 인간 세계의 지혜에 대해서 통달한 솔로몬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도서 1:8-11에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즉 '만물의 피곤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째로 '옛 것'에 속한 것이라는 규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 아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자체로 거부당한 자입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야만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그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에덴동산과 상관없는 채 이 세상을 떠돌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가 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새로움이 아니기에 역시 우리 안에서 나올 것도 새로울 것이라고는 없는 겁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새로움'으로 등장하신 겁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옳고, 그름도 취사 선택 자체를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그 대신 금붕어처럼 날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사랑을 먹고 또 먹고살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인간의 의(義)가 쟁반처럼 동반해서 등장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백성은 옛것과 새것을 확실히 구분해 내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크게 바라보게 해 주옵소서. 날마다 예수님의 용서만 한 모금 두 모금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향 사람
2004년 3월 2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3:53-58
13: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13: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하고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13: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성경과 유교의 경전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공자는 모든 것이 가족 중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족 중심으로 종결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 중심으로 살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 식구로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노아 홍수 당시에 숱한 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아끼고 애정을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가족 중에서 오직 노아 가족만 살았고 나머지 모든 가족은 물 속으로 사장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몸에서 나온 가족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의 존속과 행복을 위하여 교회를 찾습니다.
왜 가족 중심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가족이 인간 행복의 최후의 보루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깨어지면 하나님이든, 예수든 다 소용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반면 가족이 정겹고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별반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보게 되면 가족 우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인간 사회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가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족이야 인간의 생식 능력이 발휘되어서 없던 식구가 새로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식구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육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 일하시는 데는 가족이라는 요건이 필요치 않습니다. 가족과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는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서로 타협하거나 화합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족 중심으로 돌아선다면 결국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를 무시해야 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면 가족에 최종 행복을 걸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족과 일가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배척'받았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고향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이해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메시아다움의 본질을 고향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황을 예수님은 그렇게 평가하신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영이 임한 선지자요 메시아 된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것이 곧 '육에 의한 영의 배척 상황'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이러한 현실성이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인간 사회의 가족의 본질을 '죽음의 세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미 죽었던 자가 때가 되매 자신의 본질대로 죽은 자로 등록될 뿐이라는 겁니다. 살아도 죽어도 생명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영으로 난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여행을 다닐 때는 그 지역이 늘 상 거기 있기에 다가가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지역 안에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땅이란 것은 어디 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제 불던 그 바람을 우리가 사로잡거나 포착해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제멋대로이지만 바람도 제멋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적이라는 것은 바람 같아서 늘 그 장소에 그 시간대에 정지하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으로 난 사람들도 다 이와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처럼 '바람, 바람,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가족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과 세상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우리는 육을 지닌 인간들이 자신의 행복을 최종적으로 가족 단위에 두면서 그런 관점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봅시다. 일단 우리가 이들처럼 매사에 자신의 가족을 최우선시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해 봅시다.
분명히 복음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예수님과 같은 편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성경에 나와있는 육의 사람들과 자신의 견해가 과연 동일한지 다른지를 먼저 검토해 보고 정리되어야 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예수님 평가는 당연히 상식적이고 옳아 보입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이 말에 어디 한군데 틀린 구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구원이 되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소위 진리라는 것, 참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거짓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이라는 것도 압니다. 거짓이란 있는 사실과는 틀리거나 반대로 알고 있고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진실 대신 거짓말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라는 제사장의 아들들이 다윗에게 가서 다윗왕의 신변상 위험을 전달하려 가는데 도중에 그 사실을 압살롬 측에 들키고 맙니다.
그 때는 다윗왕과 아들 압살롬이 서로 내전 중이었습니다. 압살롬 측의 종들이 와서 수색하려 왔을 때, 어느 여인이 제사장의 아들을 우물 안에 숨겨두고서는 자신은 그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합니다.
이로서 다윗 왕은 무사히 압살롬의 공격에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거짓말은 나쁜 것이고 진실만이 옳은 것이다'라는 주장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진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은 모든 것이 옳은 것이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을 모든 것이 거짓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관찰이 왜 거짓된 것이냐 하면, 고향 사람들이 자신들의 혈육적인 가족 중심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 가족이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필수가 아니라 선택사항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9:5에 보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라고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즉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더라도 결코 외롭고 홀로 지내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와 함께 있는 겁니까? 요한일서 4:13에 보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성령을 받게 되면 단지 한 순간의 체험으로만 나타난다고 여기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마치 부부가 같이 동거생활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부부가 오손도손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일이듯이 성도와 예수님 사이에도 마치 친한 부부같이 오순도순 주고받는 것이 실제 일어나게 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글픈 인생이 아닙니다. 가족도 없고 성령도 없는 자는 외롭고 서글픈 인생인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자는 성경 말씀대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그 사람 속에 계시기에 주님과 대화하고, 사귀고, 지시 받고, 명령받기에 분주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즐거움과 고마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가족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빙자해서 마음놓고 이혼하고 갈라서도 되는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5:8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신앙을 앞장세우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아예 그 신앙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도는 가족을 위해 죽고, 가족을 위해 사는 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실시되는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가족이라는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으로서 마음껏 영적 안목에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례 요한의 죽음
2004년 3월 2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4:1-12
14: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14: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14: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14: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14: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14: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14: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14: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4: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4: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하나님의 견해가 인간 세상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인간들에게는 거추장스럽고 공포로서 작용합니다. 그것은 숱한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이 이 세상을 방문해서 인간들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전혀 부합되지 못하는 발언들을 해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선지자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 공포와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죽음의 바탕 위에 수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은 걷어내고 존재만 따 가지고 살아갑니다. 즉 내가 살아 있으니 그것이 곧 진리답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선지자들은 인간의 뿌리를 소개하고 들추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선지자들을 거부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식으로 선지자에게 말을 하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만큼 인간 내부에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심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을 무시하거나 깔보거나 천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소외되고 어두운 구석구석에 이웃 사랑을 실천해 주기 때문에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선지자는 싫어합니다. 사람에게는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종교 생활에만 몰두하지 못합니다.
다른 취미생활을 해야하며 특히 자기 존재를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동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힘든 노동을 했다고 그것을 천국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본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 나라 가기 위해 종교 생활도 일부 이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어디까지나 자기 존재성을 기존 진리를 하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바가 곧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참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들이 현재 생각하는 신은 원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소식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는 나오고, 그 소식은 인간의 껍데기를 부추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뿌리를 들추어내신 소식입니다.
즉 왜 인간들은 종교는 존중하되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지는 그 본질을 들추어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특징은 '용감함'입니다. 주위에서 말릴 염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요소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왜 선지자들이 용감한가 하면 세상 전체의 흐름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적인 면에서 이 세상의 속성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식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세례요한과 상대해야 될 인물이 한 사람 나옵니다. 그는 헤롯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우리들의 정체를 들추어내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이라면 헤롯왕은 오늘날 우리를 대표한다고 보면 됩니다. 선지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헤롯왕의 죄도 아직 들추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등장하니까 비로소 헤롯왕의 죄가 들추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쪽에서만 일을 하신다고 보면 안됩니다. 선지자가 상대해야만 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부지런히 손길을 놀리십니다.
그렇게 해서 어떨 수 없이 자신의 죄가 들통나도록 조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헤롯왕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간주한 것은 세례 요한을 연구해서가 아닙니다. 대중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간주해주니 왕의 입장에서 백성들의 눈치를 안 살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왕의 임무는 나라의 번영과 질서유지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왕으로 군림하기 위함이요,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바를 실현시킬 책임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헤롯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즉 자기 존재의 뿌리가 죽음에 전부를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 이 인간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있습니다. 즉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자인지를 실감나게 하시는 겁니다. 헤롯의 죄를 발각되는 날은 그의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으로 나라를 잘 통치하는 왕으로 자부했지만, 자기 앞에서 예쁘게 춤을 잘 추는 자기 딸의 재능에 그만 그 자신도 감당 못할 맹세를 내뱉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력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실상은 감정과 기분 따라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는 객기를 부린 겁니다. 물론 사적인 가정에서 그런 약속을 했다면 그런 따위는 맹세는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만인과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 맹세를 했기에 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도에 넘치는 소원이라도 들어줄 판입니다.
이처럼 왕의 자리란 위험한 겁니다. 왕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엉뚱한 것을 요구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복수심과 앙심으로 뭉쳐진 그 딸의 어머니가 세례 요한 목숨을 요구한 것입니다.
헤롯이 다시 결혼하면서 동생의 아내와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비난했습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말 한마디가 왕권에 위협 될만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세례 요한의 목숨을 빼앗기에 그 전부터 노려왔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겁니까? 우리의 죽음이라는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당하게 살아갈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뿌리는 도리는 그 정체를 확연하게 폭로된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쟁반에 담기게 되고, 헤롯은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로서 그는 죄인으로 드러났습니다. 헤롯은 막연하게 자신의 왕이라는 사실과 나라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참 하나님을 모르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는 그 선지자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존재의 뿌리를 뒤집어 나타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선지자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헤롯왕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소위 "하나님께 버림받은 겁니다." '버림받았다'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 이전에 먼저 저네들 쪽에서 예수님을 배척해 버립니다. 즉 자신의 계속 살아남을 자격자라도 되는 것인 양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주장하다보면 결국 예수님도 밀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안되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모순성과 불성실과 성의 없음과 허점을 지적하는데 몰두합니다. 즉 자기 자신 쪽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온갖 궂은 일과 허드레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자기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이 잘못된 보상은 하나님에게 허점이 있어 생긴 일이라는 겁니다.
죄라는 딴 게 아니라 하나님의 허점과 실수한 점과 모자람을 발췌하려는 심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여전히 자신의 존재는 의롭고 살아남을 만한 이유가 되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을 늘어놓지만 나중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미움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 되셔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셔서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포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더 부족해서 모든 탓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까?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 충만해 있다가 기회를 봐서 불쑥 튀어나온 겁니까?
참으로 신자라면 자신이 거지 생활을 한다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죽을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않게 됩니다. 그 반대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제발 하나님에 대해서 욕하지 맙시다. 욕을 받을 사람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 존재의 뿌리를 바로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행세를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런 인간이 아직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병이어
2004년 4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4:13-21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14: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14: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4: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하나님의 모든 뜻은 전부 예수님을 통해서만 전달되지 다른 통로는 아예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의 땅에서의 생활과 말씀을 들으세요. 그 외에는 하나님의 뜻이란 없습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병들을 고쳐주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놓쳐서는 아니 될 인물로 여기고 추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빈들, 즉 광야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예수님에게 얻고자 하는 바를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슬슬 배가 고파오는 겁니다. 더구나 예수님 따라오다 보니 스스로 대책을 설 건더기도 없는 광야 들판 한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현실과 이론의 차이를 이들은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사항이고, 참으로 진저리나도록 현실적인 사항은 자신의 배고픔이라는 겁니다. 이 점을 명백하게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빈들로 유도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도 민중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그들은 자신의 문제점을 본인조차도 알 길이 없이 막막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불쌍히 여김'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인간들은 자신들이 결코 불쌍히 여김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게 마련입니다. 단지 배고픔만 해결한다면 그 차후에 예수님의 말씀까지 수용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장담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 예수님을 자기 바깥에 세워 두겠다는 조치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현장에서는 단 한번이라도 배고픔의 현상이 안 일어나도록 예수님이 조치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혹은 말씀을 듣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보니 예상치도 않는 재물들이 가득해서 모두 부자가 되었다는 즐거움을 주는 기적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독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에 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중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다가가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은 자기 바깥에 두는 식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추종한 결과 주어진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기 바깥에서 연설이나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전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이론에 머무는 바가 되고 맙니다.
설교 초두에 분명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모든 뜻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만 나타나고 다른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깥에 세워놓는 식이라면 천하의 하나님이라는 자신들에게 여전히 비현실적인 요소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인간들이 주창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현실은 더욱 현실 되게!'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이 무어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기적은 의미를 갖고 일어납니다. 즉 그 인간들 자체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다 포함시켜 버립니다.
제자들이 군중들의 음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군중들 각자가 마을로 내려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해결책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기적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도 당연한 상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들의 배고픔을 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기 따로, 배고픔 따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은 배고픔이란 곧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밖에 있는 예수님이 자신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배고픔과는 전혀 상관없는 연설에 불과한 것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그 한계를 들추어내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배고픔 속에다 제자들을 집어넣으려고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신체란 모두 개별적이고 개체적으로 구분 지어져 있습니다. 나의 가능이 그대로 상대방의 가능으로 상호 통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부가 한 몸이라도 할지라도 남편의 관절 아픈 것이 아내의 관절 아픔으로 자동 이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현재 자신들에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입장에서도 그냥 예수님에게 응수합니다. "우리에게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뿐이다"고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과연 여자와 아이 외에 5000명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자들은 '자기 할 도리는 다 했다는 식'으로 슬그머니 그 책임성을 예수님에게 미뤄버립니다.
이처럼 인간은 늘 '말씀 따로, 배고픔 따로'의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그런 입장에 있음을 제자들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능력은 전혀 군중들을 향하여 자동 이체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잘못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끔 예수님이 유도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잡음으로만 들릴 수밖에 없도록 지독한 현실성을 현실성대로 느끼도록 하십니다.
예수님 믿다가 자치하면 발등 찍히고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그러한 인간성 자체를 자신의 기적 베풂의 재료로 집어넣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 53:5를 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채찍에 맞으신 분은 그 분인데 나음을 입은 자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어째서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에게로 자동 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그냥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십니다.
즉 이 기적은 결코 예수님 단독으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내리신 그 능력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군중들에게 알려주는 광경입니다. 비록 제자들이나 군중들은 각자 따로 따로 살지만 예수님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4:10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기와 아버지를 별개로 여기지 아니 하십니다. 자신 안에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베푸시는 기적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이 '따로 바깥이 떨어져 있는 존재일 수 없다'는 그 사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더라도, 바깥에 계신 예수님에 해당된다면 결국에는 자신이 배고파할 때에 예수님의 모든 것을 현실성이 결여된 이론에 불과하다고 매도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영생이 없다"고 말입니다. 기적이란 딴 게 아니라 이러한 구획이 철폐되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들어오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그런 배부름은 집에 가서 라면 두 개 끓어먹으면 해결될 사항입니다. 만약 옆집 사람이 배고파한다 고요? 집에 있는 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갖다 주면 그 사람은 잠시 배고픔을 잊을 것입니다.
우리 자력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못합니다. 참 이런 면을 고려해 볼 때는 성도는 참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될 처지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바로 알도록 우리 안에 내주 하신 주님으로 찾아들어 오시는 것,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적은 꺾어주시고 예수님 자체가 유일한 기적인 점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 물 위를 걷다
2004년 4월 1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4:25-33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완전히 갈라서 있습니다. '구원'이라든지, '주'라든지, '믿음'이라는 용어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동네에서의 용어는 경제 용어들이요 정치 용어들이고 가정에 관한 개념들입니다. 사용하는 용어들이 다르면서 다른 계통을 가지고 의사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물 위를 걸으시고 베드로도 물 위를 걷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물 위를 못 걷는 것입니까? 이로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동네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늘 새롭고, 특수하게 나타나시는 이 예수님의 세계를 우리는 평소에 늘 가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의 세계를 가려서 못 보게 하는 겁니까? 교회나 성당에 대해서는 소위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 하나님의 세계에 닿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죠. 마치 보험하나 들여놓듯이 교회 안에 자신의 적을 둠으로서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성당과 교회가 예수님의 세계를 가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성당 안에는 인간들의 '행함'이 가득하고 그 행함의 결실로 출현된 단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다같이 철야기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행함의 뭉치인 이 교회를 의존한다는 것은 큰 낭패가 됩니다. 예수님에게 통하지 않는 행함 들을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즉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사실 베드로에게 정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차라리 바다 물 속으로 퐁당 빠지는 것이 베드로에게 정상입니다. 평소에 베드로가 늘 물만 보면 걸어다닌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물 위를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물에 빠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물에 안 빠지고 얼마를 걸었다는 사실이 이상한 사실입니다.
왜 베드로는 물에서 안 빠지고 걸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베드로에서 나온 행함의 업적으로 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베드로가 처해 있는 환경이 예수님의 주님의 능력이 작용하는 환경인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행함이 절대로 삽입될 수 없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힘만으로는 버티겠다는 자는 예수님의 세계에서 죽어야 될 자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행함이 통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그는 예수님의 주되심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과연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고 점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물 위에서는 자신을 점검하나 마나 입니다. 당연히 빠지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저 주님을 보자 반갑고 그립고 좋아서 주님과 합류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경제 문제나 가정문제나 사업문제나 건강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에 예수님을 끌어드릴 마음도 없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과 만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허락' 안에서 뿐입니다. 베드로의 자체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차이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기에 계속 가리워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도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바다에 풍랑이 이는 순간, 다시 본연의 자기 믿음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즉 살기 위한 신앙으로 되돌아 선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믿음으로 되돌아와 버리면 그 멀리 보이는 예수님과는 관계 역시 단절되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초청이 바다에 이는 풍랑으로 인하여 끊어질 수 있는 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참된 신앙이 이 세파에 부는 풍랑으로 끊어지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세계의 기적과 용어들, 즉 '주님'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믿음'이라 하는 것들이 인간 세계에 들어올 때는 '죽어라'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나 행함에도 우리를 물 위를 걷게 하는 힘과 정당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뭘 해도 죽은 시체에 해당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란 그 전에 반드시 깔리게 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5에 보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3:28에서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그 전에 깔고 딛고 서야 하는 발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 지킴으로'는 아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소위 '믿음' 안에는 그 '믿음'을 구성하는 구성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믿음의 구성물 속에는 인간의 행함이 가득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물에 빠지는 베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진 이유는 나름대로의 선입견으로 되돌아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버텨왔기에 앞으로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 계속 산 사람으로 지속될 것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계속 사느냐?'에 관심을 두게 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서 만들어낸 믿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죽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결코 자기 행함을 포기할 자가 아니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철저하게 죽이는 식으로 일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의 구성 문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계속 '물 위를 걷었음'으로 해야할까요?
이 본문 이후에 베드로와 예수님은 물만 보면 신나듯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물을 만났을 때는 도리어 배를 탔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를 타고 내려서 남기신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내 살은 곧 생명의 떡이니 누구든지 내 살과 나 피를 먹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하고 했습니다. 자... 물 위를 걷기가 어렵습니까 아니면 이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렵습니까? 둘 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거기에 신앙의 조상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믿음의 구성물 안에는 뭐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행입니까? 아브라함의 경건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습니다. 그 은혜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태가 죽었기에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입니다. 자, 물 위를 걷는 것이 어려울까요, 태가 죽은 여자가 아기를 가지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둘 다 인간의 범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그것이 단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뱉은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그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코 아브라함 자신의 행함을 거기에다 삽입시키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믿음의 구성물을 십자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최종적인 기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기적일까요? 십자가 속에만 영생이 있고 다른 곳은 일체 없습니다. 십자가는 제가 볼 때에 꼭 깔때기 같습니다. 물이 뱅뱅 돌다가 한 복판에 뚫린 좁은 구멍으로 쏙 빠지는 깔때기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위력과 능력은 성도로 하여금 늘 그 십자가 안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 예수님의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속에서는 나오는 흡입력으로 성도는 매일같이 끌려갑니다.
자기 행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믿음조차 버리게 해서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만 끌려 다니게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성도는 주님의 위대한 능력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경제적인 낭패와 가정적인 혼란, 정치적인 어수선함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꼭 쥐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이라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믿음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십자가 소식이 거추장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에 빠져 있는 상태인 것을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혀 영생의 나라와 상관없는 자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정말 은혜를 받은 자라면 세상 적으로 인해 주님의 은혜가 가리워 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뭘 골몰하게 생각합니까? 왜 무상으로 끌어 당겨주시는 사랑을 왜 우리 스스로가 무시하고자 하는 겁니까? 앞으로 주님의 은혜가 세상 것과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가리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장로들의 전통
2004년 4월 18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1-6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15: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15: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15: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예배 참석이란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기 위해서 예배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있는 데서 있게 하는 자일 뿐 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있는 것을 더 크고 길게 팽창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있음을 그 안에 오직 인간의 솜씨와 자랑거리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했기에 오늘날 이런 것이라고 건졌다"라는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드릴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아담의 시대에는 900세 이상까지 살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길게 잡아봤자 90세 삽니다. 90세 산 것도 대단히 복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아담이 볼 때는 90 평생은 너무나 짧게 보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산 것에 해당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90세를 산들, 900년을 산들 모두 죽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살아도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주신 것, 즉 '없는데서 있게 하신' 그 무엇이 들어있지 않는 한 멸망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무슨 업종에 종사하든지 간에 영생이 없는 자는 이미 죽어있는 채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없고 자기의 행함으로 만든 것만 쥐고 살아가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들어주신 것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누가복음 12:31-32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는 너무나도 소수라서 그 소수에 해당되는 사람은 사실상 무서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소수라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다수의 편을 손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으냐'라는 쪽을 손들어 주십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 사실화된 상태에서 심판을 유보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보기에 적어도 이 도성에 의인 50명은 있지 않겠나 해서 그 의인 50명을 봐서라도 도성이 심판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의인 50명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차츰 차츰 내려가서 결국 최소 단위인 10명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운 롯을 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눈초리가 누구를 향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영생이 없는 곳은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봤자 쓰레기 하치장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16:26의 말씀처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다수의 편에 설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소수자의 편이 되는 것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무엇이 옳으냐가 관권입니다.
거기에 비해 다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무서움을 가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현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그들은 법을 만듭니다. 그것이 관행이 되고 관례가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유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관례'라는 뜻입니다. 과거로부터 계속 진리처럼 수용되는 진리라는 겁니다.
만약이 이 관례를 거부하는 자가 나온다면 다수는 이런 소수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마저 이런 다수의 관례를 인정해 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도리어 이런 관례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관례를 거부하시는 이유는, 있는 데서 있게 하는 인간의 행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행함의 능력 밖에 없는 유대인들은 그 행함으로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행할 수 있는 규칙 제정으로 자기 행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용돈 드릴 돈으로 하나님에게 드리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가 된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같은 수입으로 하나님에 대한 헌금과 부모 공경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만족스럽게 충당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선 순위가 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령을 부리는 겁니다. 그리고 요령조차 관례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함에서는 그 정도밖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요령을 부려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혀 새로움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하나님께 대한 드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자기 행함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말씀을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마태복음 19:16-19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부족한 바에 대해서 자꾸만 자기 능력으로 채우고 또 채워야 영생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소위 '율법 행하기'란 결국 하나님이 것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바가 됩니다. 결국 그는 발길을 돌리고 예수님과 헤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행함의 한계에 대해서 공박하십니다. 그리고 그 행함이란 반드시 있는 것을 더 있게 함으로서 '있음'에 대해서 인정받겠다는 의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을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제공받게 되는 것일까요? 로마서 13:8-10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숱하게 많은 율법도 '사랑'이라는 매듭 하나로 다 묶여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함에서 나올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행위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 홀로 다 행하심으로만 나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그 목숨도 죄가 없는 목숨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냄으로서 얻어낸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라면 더 이상 법적인 인식 속으로 또다시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예를 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보고서 즉각적으로 그것을 법적인 요소로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법적인 요소로 만들어 버리면 다시 자신의 행함으로 들어서고 맙니다.
"내가 오늘은 몇 시간 동안 감사했을까?"하고 따져서 자신의 행함의 능력 측정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또다시 무시당하고 능멸을 당하게 되는 식입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소수의 사람에게 지금도 하나님은 주목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 내세우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겨주시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을 드러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간들의 위선
2004년 4월 25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6-11
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5: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면서 법도 같이 만드셨습니다. 그 법은 선과 악을 알지 말라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이 법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에 사람이 임의대로 폐기처분 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생각해 놓은 인간이란 이 법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즉 선과 악의 지식을 알지 못하는 자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법을 위반함으로서 하나님의 본래의 인간에서 벗어나서 다른 인간성으로 이 지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에 의하면 그 법에 위반하면 죽음이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인간이 아닌 것들은 폐기 처분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받고 난 뒤부터 인간 속에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그 자리에 선과 악의 원리가 지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법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지킬 가능성이 있는 내용으로 다듬어진 법입니다. 과연 인간들이 멋대로 법을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그들이 나름대로 선과 악의 지식에 준해서 만들어내는 법은, 반드시 진짜 하나님의 법을 짓밟고 모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적'이라는 말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수시로 하나님에게 대들게 되는 편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법을 만드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7절에 보니, "외식하는 자들이여"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위선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는 재미 중에 하나가 자기를 가리는데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다른 자아로 행세해서 타인 앞에 나서게 됩니다. 이러한 버릇은 하나님에게도 동일하게 재현됩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고 나갔습니다.
수치심이 일어났기에 수치심을 가림으로서 수치 될 것이 없는 상태로 변신을 시도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행하는 학문이나 사업이나 종교행위나 모든 일하시는 것이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한 노리개 제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았다는 것은 본인이 무엇이 선인 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악만 알고 있다는 '위선'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을 알지만 미처 인간의 본성이 선을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선한 것들을 앞장세우고 자신의 본질은 뒤로 감추는 두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위선으로 만든 상상 속의 자아상을 앞에다 내세우는 겁니다. "아직도 나는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울 존재가 아니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살은 왜 일어나는 겁니까?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을 가리워줄 멋진 자랑거리가 없어 살아가면 갈수록 자신의 수치가 더 노출될 때 차라리 죽음으로 존재 자체를 무효화시키려는 겁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마찬가지였다면 그렇다면 전에는 무슨 이유로 악착같이 살고자 했을까요? 애초부터 죽고 말지요. 따라서 수치를 가리는 위선이 하나님의 적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이란 자기를 안 도와주면 원한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계산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차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마음에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 행위라는 이름이 마음껏 위선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평생 추구하는 노리개입니다. 목사한테는 "목회에 대성공했다"라는 것이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속옷 노릇 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조치는 이런 인간들의 행동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보다 더 큰 수치심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즉 수치심을 가린 그 부분을 더욱 강조해야 될 인간들의 행위를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하시고 부각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위선이란 인간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볍게 지나갔으면 하고 바랄 일이지만 이제 하나님에게는 위선이 인간의 본질과 통하는 속성이라고 규정지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상에는 모든 인간의 본 모습을 백일하에 다 드러내신 겁니다. 십자가란, 더 이상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선과 죄악성을 노출되어 버린 마지막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수치심이 노출된 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도망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면 자신의 수치가 폭로될까봐 겁을 냅니다.
그래서 멀리 피해가서 여전히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기회를 찾고자 합니다. 이로서 평소에 하나님의 적이 되어 있음이 분명해지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 죄를 아는 자는 자신에게서는 오직 죄밖에 달리 나올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케 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라는 고백하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임금들은 옆에 반드시 율법 책을 펼쳐 놓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과연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날마다 묻기를, "하나님 진정 제가 정상적인 인간입니까?"하고 물어봅니까?
가정에 있는 자식들을 대하면서 그런 마음자세를 가지고 봅니까? 어쩌면 자식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가리개처럼 활용되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의 자식 사랑도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리개를 뚫고 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인간들의 위선적인 노고들을 까발릴 필요가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사야 29:13-14절의 말씀을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우선 인간들의 전체적인 위선에 대해서 양보 없이 다 폭로하고 그 다음에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기이한 일을 행사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상상도 못할 일이 바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 인간의 뿌리를 건드리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바는, 음식물에 대한 정결 의식입니다. 어떤 의식을 행사한다는 것은 모두 다 같은 의식 안에서 일체감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얻고자 합니다. 즉 의식에 동참하는 것은 이 의식을 유발한 선입견에 시비를 걸지 않겠다는 동의를 뜻합니다.
이러한 동참 의식은, 거룩에 대한 그 당시의 보편적 해석에 대해서 수용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만약에 어떤 식으로 이 정결 의식에 시비를 거는 것은 사회를 평화를 깨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회적 질서에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과연 거룩해지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당시 정결 의식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사람이 거룩해지고 깨끗해지려면 더러운 것이 접촉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외부의 때가 묻은 것은 물로 씻어서 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는 거지요. 거룩을 늘 생활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물질에 불과한 외부 음식물의 무엇이 인간 자체를 더럽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통적인 유대 신학에 의하면, 깨끗하고 더러움은 율법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물리적인 더러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부로 사물을 대하는 그 마음 상태가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속된 것이라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식 같으면 정결 의식의 건전한 취지를 어렵지 않고 용납해 줄만도 한데 예수님에게는 이런 정결 의식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발언을 하시는 겁니다.
취지는 이것입니다. 즉 유대신학에 의하면 이미 거룩해진 마음이기에 지속적으로 거룩을 유지하자는 주장이고 예수님은, 언제 인간들이 거룩한 적이 있었는가? 단지 거룩으로 위선을 띠고 살아갔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인간은 몸 자체가 더러움으로 완벽하게 뭉쳐져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따라서 거룩을 추구하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차라리 자신의 몸의 더러움을 주목하라는 겁니다. 몸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므로 서 인간의 처음부터 더럽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나오는 말씀, 즉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듣고 힘껏 하나님으로부터 내빼고자 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 쪽으로 귀환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의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이기를 고집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경의 정체
2004년 5월 9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12-20
15: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5: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을 들볶는 듯한 말씀을 대하게 되면, 왠지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말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그냥 곱게 십자가 피 흘리시면서, "날 믿으라 구원받는다"라고만 하시면 될 터인데 왜 인간의 취약점까지 들추어 내어 들볶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바는 이런 점에 있습니다. "내가 너의 모든 약점과 추악한 면을 들추어내어도 그래도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 안에서 우리 성도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매를 들고 자식의 잘못을 이것저것 따지시면서 꾸중하실 때, 자식의 입장에서 "어머니 잘할게요.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고치고 할게요. 그러면 됐지요?"라고 나온다면 이 아이는 어머니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자식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지적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행위를 스스로 수정하고 개선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하나님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드리면 드렸지 결코 자기보다 더 사랑하고 싶지는 않는 법입니다. 인간들은 매일같이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제대로 아끼고 사랑하지 못해서 분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 한이 마음 속에 맺혀 있습니다. 즉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없는가?"하고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뚱이에 대한 애정에 급급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을 제키고 다른 분의 사랑에 우선 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것도 우선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 구원을 위해 동원되는 방식에 해당됩니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예수님을 사랑하고 말고요. 그렇게 해서라도 궁극적으로 사랑의 대상인 나 자신을 건지고야 말리라"라는 의식으로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기 사랑을 극복한 채 '예수님에 대한 우선 사랑'으로 건너갈 위인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마태복음 19:16-22절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처신은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새사람 되는 것은 홀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능력뿐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해서 이 부자청년은 어둡습니다. 마치 소경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여러 마음으로 분할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흰 머리카락을 뽑으려면 옆에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뽑았다고 해서 다음 날이 되면 또 흰 머리카락이 올라옵니다. 자, 흰 머리카락이 아예 안나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예 두피, 즉 머리 껍질을 전부 다 벗겨야 할 것입니다. 희든 검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거하시는 죄악의 항목은 모두 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살인할 마음이 따로 있고, 간음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그토록 우선적으로 사수하고 지키고 사랑하고 싶은 내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내 마음'이 늘 사고치는 겁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마치 영토 분할과 같이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한 영토가 따로 악한 영토가 따로 있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긴장을 늦추게 되면 어느새 악한 죄악이 선한 영토를 침범하여 보다 땅을 많이 점령해있고, 정신을 차리고 바른 행동에 나서면 죄악을 주춤하면서 물러가서 저기 작은 한 구석만 차지해서 그 다음에 어떤 행동에 나서도 어지간해서 나쁜 짓은 안 할 것이라고 머리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조용히 착한 일에 열중하는 그 현장에 난데없이 자신의 선행보다 더 큰 깊이를 가진 죄악이 크게 자기를 엄습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번 체험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죄악의 덩치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온통 자신을 사로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죄는 짓고 싶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허락 없이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들의 마음의 실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나열하시는 것은 개선하고 고치고, 제거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저질인가를 알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열거한 죄악의 항목에 본인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안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악의 항목은 더욱 늘어납니다. 이것은 누가 누가 많이 저촉되느냐 비교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세워 저주하신다고 해도 우리 인간에게는 할말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란 완벽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부는 보고 일부는 안 보이는 것은 소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청소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철거하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청소한다면, 괜찮은 자질은 그냥 놔두고, 못된 자질만 처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내신 천사들은 철거반원입니다. 큰 방, 부엌, 화장실, 사랑방 할 것이 없이 구석구석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설치하려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설치해야 합니까? 어느 구석이든 모두 같은 저질의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아무 것도 모르는 소경인 채 말입니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인데 심판을 어떤 식으로 실행하십니까? 그것은 모든 자로 소경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칭 소경이라고 여기는 자는 스스로 소경이라고 자인했기에 소경에 해당되고, 그렇지 않고 자칭 소경이 아니라고 우기는 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소경 되게 해버리는 이로서 모든 이가 다 소경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건물 철거를 위해 폭파반원이 투입된 현상과 같습니다. 소위 '자기를 우선적으로 사랑해야겠다고 자기 사수'에 나서는 인간을 사정없이 폭파시켜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누구라도 구원될 자격이 아예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란 우리의 소원을 응답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 쪽에서 결정된 바에 따를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려내기 위해 사랑을 요청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자가 아예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를 우리 허락도 없이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사랑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을 새 사람되지도 못하는 하는 것들, 즉 재산이나 남들의 평판이나 평가 같은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그 어떤 위협도 무조건으로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십가가 사랑을 끊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제 우리가 남은 인생살이가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지는 뻔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세상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오직 저주받아 마땅한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 증거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십자가를 알지 못했을 때는 지독한 자기 사랑에만 묶여 사는 소경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소경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방 여인
2004년 5월 1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21-28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일관된 인식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언뜻 보면,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평소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정말 자비로운 분이라면 결코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우리가 갖게 마련인데, 24절에 보면, 의외에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마치 자신의 사랑을 다 내놓으시지 않고 아끼는 것 같습니다. 사람보고 차별대우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예수님'이라는 이미지에 잘 맞지 않아 보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생각의 일관성에 관한 겁니다. 애초부터 이방 민족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면 끝까지 구원을 베풀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째 몇 마디 오고간 뒤부터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 상을 정립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 빠트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보고 '개'라고 규정하신 취지입니다. 즉 사람을 향해 '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는 자신을 '개'라고 간주하지 않거든 감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신학이나 목회나 모두 '우리는 개다'라는 인식으로 출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개'라는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상대로 흥정하려는 태도로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이 가나안 민족의 여인은 자기 딸이 졸지에 귀신에 들려서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 여인의 입장이라면 자기에게 일어난 불행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화를 단단히 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책임져라. 원상 회복하라! 우리의 조그마한 행복마저 강탈해 가는 신은 참으로 무자비성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인간과 대화에 나서라. 교회에다 돈 바치고 시간 바칠 테니 빨리 우리 가정의 행복을 원상복귀 해놔라"라고 요구할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 목사들은 이런 민중들을 달래고 아부하는 식으로 목회 합니다. 즉 "여러분들이 화를 내시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의를 보이십시오.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롭고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여러분들이 그동안 하나님에게 나태했던 바를 반성하면서 다시금 성실한 자세로 하나님의 일에 협조하신다면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은 전보다 훨씬 더 차고 넘칠 것입니다. 그럴 경우도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할 만반의 자세가 되신 분입니다"고 중재에 나서는 짓을 합니다.
이것을 그들은 '목회'라고 부릅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 것을 따로 챙길 권리가 있다고 부추겨 주고 아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고 방식은 이방인이라면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꼬깃꼬깃 쥐고 있는 전형적인 엉터리 하나님 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개다'라는 인식이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해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믿음도 없는 것이 되고 결국 구원도 없습니다. '개'라는 표현은 사람 축에도 못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려고 계획했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존재라면 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요소가 빠져 있으면 사람이 아니고 개입니다. 개 같은 인간들은 자기 중심의 하나님 관을 따로 챙겨 가지고 다닙니다. 자신이 개일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시작한 신앙이고 사고방식이라면 그 사람은 여전히 개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이 개라는 기준은 어디서 제출된 것입니까? 여호수아 11:16-20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곧 세일로 올라가는 할락산에서부터 헤르몬산 아래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까지라 그 모든 왕을 잡아 쳐죽였으며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앞에 이방민족들이 추풍낙엽처럼 부스러지고 패배 당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수아가 전쟁 수행능력이 적들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전에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언질 해 주신 대로 이방민족은 이 약속의 땅에 살 수 없게 하기 위한 확고한 질서 구현 때문입니다. 즉 이방민족은 필히 '저주받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방민족이 철저하게 저주받지 아니하면 그 반대편에 포진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여호수아라고 해서 함부로 이방민족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저주받아야 하지만 유독 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언약을 통해서 긍휼 하심을 전달하셨습니다.
언약이라고 할 때는 항상 '노아 방주'를 염두에 두시면 쉽습니다. 직업과 재산과 상관없이 방주 없이는, 즉 언약 없이 다 저주받았다는 그 노아 홍수 때의 이야기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밖의 대상을 반드시 저주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언약 안에서 제공된 은혜가 은혜답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진노 받아야 될 자라는 인식이 있는 자 안에서만 은혜가 은혜답게 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말씀드린 여호수아 이야기는 것이 이스라엘 본 자손 같으면 신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현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방민족들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그 땅의 주인이란 말입니까? 애굽에서 학대받다가 구사일생해서 탈출해 온 그 민족이 어찌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본 주인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 이스라엘이 자신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거론하고 나서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네들의 하나님이지 현재 가나안 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있는 현지 주민이 동의할 수 있는 신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어떤 불신자가 성실하게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자칭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택한 민족의 지도자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이제부터 이 공장을 우리가 접수한다"라고 나선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깡패가 하는 짓일 뿐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깡패 같은 분이라서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을 인간 취급도 안 해주고 막무가내로 침범하는 폭력배 행세를 하시는 분입니다. 이럴 경우에 그 공장주인이, "예! 그러하십니까? 어서 이 공장을 인수해 가지고 가세요"라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건방지고 미친 작자들이 거지 생활을 면하기 위해서 생떼를 쓰느냐"라고 벌컥 화를 내면서 그 깡패 같은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이 이러하십니다.
다짜고짜 와서 다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키심으로 우리 이방민족들이 품고 있는 다른 신, 즉 우상에 대한 회개를 독촉하시는 겁니다. 신의 교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신에 대한 견해에 수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기초한 신에 대한 생각은 우상입니다. 그 우상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유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개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 신은 바른 하나님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 드신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런 반응을 기대하시면서 은혜의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른 반응이 개같은 이방여인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라는 겁니다. 이것은 전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으로 유지하는 원칙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불쌍히 여김을 받음'의 원칙으로만 수립됨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따라서 이 여인은 그 부스러기를 줍는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럼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아니면 신과 협상하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그마한 행복마저 다 빼앗아 가신다 할지라도 자신이 원래 개였음 고백하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2:12-13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 바른 하나님을 아시겠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언약 밖에 있는 존재인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칠병이어
2004년 5월 2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5:32-39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15: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1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15: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15: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15: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15: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15: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사람이 일관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면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불안심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방어하면서 살아가 봤자 천국에서는 안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될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행하심을 추적해 보면 되겠지요. 하늘에 계신 분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우리 곁에서 하시다가 다시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로를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경로의 의미를 알아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일관된 예수님의 경로를 놓치게 되면 남는 것은 다시 '자기 관심사'입니다. 즉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를 자꾸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체면과 위신과 자존심이 극대로 축적이 되고 부풀어지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일하시는 취지의 하나로 남기신 일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약 4000명이 넘는 군중들에게 떡을 주셔서 배불리 먹였다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이 좋아 예수님의 뒤를 계속 따라왔던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새 광야에 들어선 지 사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기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놀랍게 먹이셨다는 사실에 이르기 전에 먼저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광야로 유도하고 사흘 동안이나 굶게 하셨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 쪽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늘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죽은 길은 아예 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죽음 쪽으로 확 당겨버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요한계시록 3:1-2에 보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씀은,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라는 겁니다. 즉 죽어가는 그 남은 자들에게는 '네가 죽어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라'는 겁니다. 우리는 늘 살고자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1:5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관성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향하여 일을 개시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조치하시는 그 작업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고난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도 '넘치게' 안겨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입으로 기어이, "정말이지 예수님 없이는 나는 못살겠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꾸 살아보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기에 예수님도 이 점을 확실히 나타내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일하시는데도 말입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서의 배고픔이란 곧 죽음의 실제화를 뜻합니다. 배고픔이란 곧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서 피어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때 되면 먹어야 하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배고픔을 느낍니다. 곧 죽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죽음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의 깊이'를 맛보게 해주려는 의지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곧 자신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은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른 식으로 '넉넉함' 속에 놓이게 하시는데 까지가 일하심의 목표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사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원래의 목적한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9-10에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기어이 예수님 안에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1:15-16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본디 예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동안 자기를 위하여 살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런 목적이 함유된 자만이 참 성도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고 다시 승천하시는 경로를 밟으신 것입니다.
이 작업의 도중에서 "아, 나는 정말이지 예수님 없이는 못살겠다"라는 통렬한 자백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물론 스스로 자신을 살려보겠다는 인간이 고집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황소고집이라도 예수님의 열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예수님은 기어이 우리를 우리의 전부를 죽이는 쪽으로 이끄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우리들 자력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로마서 8:26-27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 하나를 놓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열성적으로 달라붙어서 기어이 미리 아신 자들을 불러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므로 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인간의 황소고집으로도 하나님의 이 지독한 열심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고린도후서 1:5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위로'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자신 이유가 있는 상황 안으로 끌려오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성도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의 열성적인 사랑에만 눈 돌리게 하시는 겁니다. 과연 이 사랑이 어느 정도로 대단할까요?
단순히 원상복귀 정도일까요? 아닙니다. 참으로 넉넉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7개의 보리떡으로 시작한 '배고픔 해결책'이 나중에는 '일곱 광주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곱 광주리'란 인간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입니다.
인간들은 기껏 해서 자신이 스스로 버틸만한 능력만 안겨주면 족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설 희망을 주게 되면 그 인간은 역시 옛날 자기에게 묶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를 늘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반대로 참으로 신자라면, 자신의 능력 챙기기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세계의 풍족성에 안도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위롭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 세계의 넉넉함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마태복음 6:31-33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맨 날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넉넉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부자청년이 돈 좀 가졌다고 해서 예수님이 주는 영생에서 돌아선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떡 7광주리의 풍족함은 우리에게 위기가 주어진 그 상황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의 뿌리는 원래 '죽음'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로서 다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 죽음 안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영생의 넉넉함에 위로 받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에게 그만 갇혀 있게 하옵소서. 자신에게 그만 속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 분별
2004년 5월 30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1-4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눈만 뜨면 보이는 세상, 그 세상과 더불어 우리는 매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기에 대해서도 제법 맞출 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대로 살려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즉 사람들이 도저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서 안목을 가진 자만이 신앙 인인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흔히 '나쁜 자'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솔직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세상이 마중 나와주게 됩니다.
그 보이는 세계 속으로 뛰어 열심히 살다가 해가 지면 집에 돌아 와서 씻고 자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라면 과연 이래도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나쁜 짓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줄기차게 살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보이는 것들은 기껏해야 같이 보이는 것들 안에서 조립된 것들입니다. 절간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 가봤자 보이는 대로 살고 잠시 움집한 자들을 보고되고 교회에 가봤자 평소에 보이는 대로 살다가 잠시 예배당으로 움집한 자들을 잠시 대면할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보이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그 외 다른 가치가 없다는 점에 다들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길 가다가 절이 보여도, 혹은 교회가 보여도 양심에 주눅드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이라도 그 종교 단체의 내막에 대해서 알고 다음과 같이 한 마디 하면서 쏘아붙이곤 합니다. "그래, 종교 사업 벌려서 연보 모아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종교 단체가 즐비한 것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그저 나름대로 생계와 생존을 목적으로 몸부림치는 일개 장사치로 간주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절이 아니고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계셨다는 점에 있습니다. 절에서 뭐 하는지, 교회에서 뭐 하는지는 하등 겁날 것이 없습니다만 예수님 입에서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로마서 9:33에 보면,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만인에 대해서 거추장스러운 돌로 등장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는 걸려 자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잘날 척 하는 자들은 자빠뜨리는 분이십니다. 마치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쳐서 땅 바닥에 "퍽!" 엎어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절도 무섭지 않고 교회도 무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눈에 보이는 대로 살고자 다짐한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오르게 된다면 왠지 우리의 일상적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쪽에서 볼 때, 적의 감을 지니고 달려드는 공격을 뜻합니다.
즉 시험을 실시하는 자신들은 정당하고 시험을 받아야 될 예수는 옳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실시하는 시험입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공개 테스트입니다. 그래서 '시험'이라는 말속에는 항상 정당성이 담겨 있습니다.
즉 "나는 옳고 당신은 옳지 못하니, 옳은 내가 그른 당신을 검사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시험은 결코 그 당시 유대인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소위 신자라는 작자들도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개시가 됩니다.
즉 "제가 기도한 대로 착착 이루어진다면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겠나이다"라는 의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자는, 이미 자기 존재는 어떻게 하든 너무나도 정당하니 손 댈 필요조차 없다고 장담하는 가운데 실시하게 됩니다.
계속 매일같이 하나님을 시험, 즉 공격하므로 서 자신의 정당함을 계속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기적의 혜택자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23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기적의 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심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시다→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시면 계신다→그 일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위한다는 무리에게만 제공된다→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시는 분이시다→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한계가 있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꼭 인간 한계를 넘어서시는 일로서 계시하신다→그 대표적인 예들은.
홍해의 갈라짐이요, 요단강의 갈라짐이요, 여리고성 무너짐 광야에서 '만나'라는 양식이 뿌려짐 등이다→진정한 메시야는 하나님이시다→이 땅에 오신다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적을 베풀 주어야 마땅하다→과연 예수라는 자에게 이런 기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사하겠다→이로소 예수를 검사하는 자신들은 정당하고 예수라는 자의 옳고 그름은 바리새인들이나 사도개인들의 심사하는 권위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의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꾸하셨습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나 예수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푼 기적 안에 놓여진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가 보여줄 기적이란 자신이 행한 기적이 아니라 자기에게 베풀어진 기적입니다. 거기서 요나는 무엇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참 죽음'을 체험했습니다. '참 죽음'이란 단순히 목숨이 멈추는 식이 아니라 '왜 나는 죽어야 하며 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당연한가?'를 파악하게 된 죽음을 말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아는 죽음이란 가짜 죽음입니다. 즉 힘 빠져서 심장 멈춰, 그래서 시신을 무덤 안으로 밀어 넣어 묻었더니만 나중에 흙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정도 죽음이라면 살만큼 살다가 힘 빠져서 흙으로 환원될 용기가 날 만도 한 죽음일 것입니다. "에이 세상 살기 싫은 그냥 팍 죽어버리지"라고 결심에 큰 결심이 필요치 않을 성 싶습니다. 그런 가짜 죽음은 인간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경험한 '참 죽음'은 그 누구도 자의에 의해서 경험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바로 이러한 '요나의 죽음' 속으로 예수님께서 뛰어 드시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만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참 기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참 생명을 얻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즉 참 생명은 참 죽음을 경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6:3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오직 자기 자녀에게 이 요나의 기적 속으로 초빙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왜 당연히 죽어야 하며 자신이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에만 근거함을 알게 하는 기적을 체험해 주고자 합니다.
마치 이사야가 경험했던 것과 같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망하는 백성들 중에 내가 속했구나!"라고 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면전에 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이사야는 제단에서 나오는 숯불로 용서함을 받는 참 생명도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참 죽음'을 경험한 진짜 신자라면 결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얼마나 큰 지옥인가를 알았기에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 고마워하고 반가워할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시험을 실시하는 자신을 정당하다고 여기고 실시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 봐도 늘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만큼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자들이 지옥백성들입니다.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것을 희망하는 기도보다는 예수님만으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룩 주의보
2004년 6월 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5-12
16: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16: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6: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은 이 사회의 사정을 훤히 다 아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은 이미 죽음의 바이러스에 의해서 감염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장차 시신이 될 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죽음의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우리 인간은 '예수님 관점'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었고, 그 관점에서 보아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남녀노소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품고 있는 '죽음의 바이러스'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룩'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누룩의 특징이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온 몸에 퍼진다는 겁니다. 마치 지독한 암 세포와 같습니다.
그리고 구석구석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누룩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즉 '그들의 가르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들 유대교 성직자들의 가르침이 결코 제자들은 용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진영'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한 진영은 '누룩' 같은 것들을 자랑삼아 진리라고 장려하는 진영이요 다른 진영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의 진영입니다. 저쪽 유대 성직자들의 교훈이 결코 이 쪽 예수님 진영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 성직자들의 교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우실 때, 그들의 대단한 자질을 염두에 두고 뽑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부들이요, 세리요, 별 볼일 없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체적인 의로움을 찾고자해서 제자로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제자들 무리 속에는 그저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하심과 인도하심만 그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 성직자들 진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은혜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보다는 자신들의 노고와 노력이 높이 부각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계속 다듬어 나가려고 합니다. 자기에게서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 출현되는 것을 목표로 말입니다. 없으면 만들려고 하고, 조금이라고 생겼다면 키우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자기 마음을 재구성하는 겁니까? 여기에 '자기 의'를 만드는 종교적인 기술과 윤리관인 수고가 동원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종교에는 신비감과 권위가 동원됩니다. 성직자들의 모든 일상용품이나 말씀이나 행동까지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둘러쳐져 있는 것으로 대중들에게 깊이 인상 남기기를 그들은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거룩을 짜내는 식으로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룩'이라는 말씀 하나로 그들의 위선을 여지없이 폭로시켜 버립니다.
즉 그들의 '누룩'은 죄가 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문제삼으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조립하고 재구성해 내는 '의로움'이지요.
마태복음 5:28-30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소위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유지하고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는 유대인들의 종교 권세자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죄지은 지체를 잘라내고 나머지로서 구원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과 선행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바이러스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자체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진영 안으로 유대 성직자들의 '누룩'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5:6-8에 보면,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이후에 나타나는 성도들은 묵은 누룩이 없는 떡이라는 겁니다. 누룩이 없는 떡이란 유월절 제사를 통해서 나옵니다. '누룩 없는 떡'이란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완치된 자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인간의 의'가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시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인식은 십자가 이후 성령님이 오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만
오늘 본문의 경우처럼,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의 제자들 상황에서는 이런 관점이 아직 무르익지 않을 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차원과 제자들이 알아듣는 차원이 같은 레벨에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룩'이라는 단어를 던지니까 제자들은, 자신이 챙겨야 될 업무중에 뭔가 빠진 것이 있기에 예수님께서 힌트를 주신 것으로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누룩→빵 같이 연관을 짓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제 때 빵 챙기는 것'을 소홀히 했다고 책망주시는 암시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도리어 답답해하십니다. 먹는 빵에 들어가는 누룩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십자가 지시기 전 까지 제자들은 은근히 출세욕을 가지고 예수님을 추종한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 누구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가지고 서로서로 견제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각자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들에게 돌아온 투자 몫의 소득을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을 보다 높고 넓은 취지에서 이해하지 아니하면 인간들은 항상 자기 울타리에 갇혀 있는 꼴이 됩니다. 만약에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면, 오늘 일진에 큰 영향이 있다 것을 미리 알려주는 힌트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였고, 보리떡 7개로 4000명을 먹인 것을 보고서는 못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생존과 생계에 몰두하면 예수님의 그 어떤 말씀은 이런 식으로 곡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 몸 속에는 죽음의 바이러스는 양식을 계속 충당시킨다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누룩 같은 의식'을 용납해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발가벗겨야 합니다. 얇은 껍데기처럼 걸치고 있는 자신의 권위나 신비감 같은 것도 다 철거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조직을 사조직으로 전환하는 방법으로 목사직에 힘을 실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용납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처럼 만 거룩하면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사기꾼이요 악마의 일을 돕는 일꾼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그런 성직자들은 세웠다고 고린도교회에다 호되게 꾸짖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서 신의 축복을 따낼 생각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유월절 희생의 떡처럼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은 예수님의 희생뿐입니다. 거기서는 오직 예수님의 의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남은 생애는 감사와 감사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은연중에 자신의 노고나 노력의 대가를 근거로 신의 축복을 따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누룩 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죽음의 병에서 치료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생명뿐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누구인가?
2004년 6월 1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13-17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하느냐
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천국이란 하나님의 영광만을 영원토록 높이고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온 사람도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가득 담겨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실상을 보게 되면 사람들 속에는 자신들의 영광이 우선입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은 뒷전입니다. 교회에 나가면서 매일 하나님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온 이득이 얼만가 계산기를 퉁기는 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는 새 생명수가 흐르는 강에서 살겠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영광 성으로 완전무장해서 살아가니 이것 보통 낭패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 물론 하나님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지은 후에 인간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명쾌하게 밝혔습니다.
즉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정도 사랑은 구태여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상식 선에서 아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욕심 때문에 죄가 생긴다고 하니, 그 죄를 안 생기도록 하기 위해 자기 욕심을 자기가 줄이고 끊어보겠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종교도 가져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도 해보고 머리 깎고 심산유곡으로 도피생활도 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온 발상에 해당됩니다. 인간은 자기 욕심조차도 이기지를 못합니다. 욕심이 우리 자신의 결심보다 더 셉니다. 즉 의로워지려는 의욕보다 우리 속의 죄가 더 세다 는 말입니다.
이런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누구를 보내셨는가 하면 '인자'되시는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인자'되시는 분이 꼭 자기 곁에 오셔야만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운동화 가게를 열었는데, 어느 손님이 들어옵니다. 속으로 "어떻게든 신발을 하나 팔아야지"라고 벼르면서 손님에게 묻습니다. "손님 발의 치수가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손님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너는 나 인자를 누구로 보느냐?"하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날 것입니다. 아침부터 재수 없다고 소금이라고 뿌리고 싶을 것입니다. 운동화 가게를 열어서 운동화 하나라도 더 팔겠다는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이요 그것은 곧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노동에는 자신의 영광 성을 내다보고 하는 몸짓들입니다. 그런데 운동화를 알 팔아주고 "인자라는 분을 아느냐?"고 나오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운동화 가게 주인의 영광 성을 방해놓았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이후의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곧 욕심의 지배를 받는 모습입니다.
이런 욕심으로 인해 죄가 계속 발생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자'라는 분이 왜 오셔야 하는 겁니까? 인자는 짧은 뜻을 지니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길고 긴 모든 뜻을 다 품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 창조되기 이전에도 인자 되시는 분은 계셨고, 이 세상이 완전히 끝난 그 이 후에는 인자라는 분은 우리를 반기려 천국에서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와 같이 인자처럼 세상을 길게 볼 줄 모릅니다. 매사를 짧게 보고 있습니다. 짧게 끊어서 보는데 그 끊는 기준이 오직 자신의 영광에 유리한 쪽에서 짧게 끊어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세상을 짧게 보는 것은 욕심이요. 세상을 길게 보면. '신앙'입니다. 인자 되시는 분에 관심을 그 분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길게 보겠다는 겁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간을 짧게 보기 때문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오늘 성급하게 자진해서 생을 마감시키려 합니다.
이 모든 행위는 곧 자기 영광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의 일종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선지자란,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영웅으로서의 선지자입니다. 즉 그 당시 유대나라는 오랫동안 외세의 압제에 시달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도 없을뿐더러 사상이나 종교의 자유마저 마음대로 누릴 수 없는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참담한 지경에서 그들이 하소연 할 데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는 관심 없고 어쨌든 힘든 상황을 속 시원히 해결해줄 영웅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도 '자기의 영광' 위주에서 나온 겁니다.
그들이 이처럼 선지자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남의 잘못을 속시원하게 나무래주는 선지자는 참 존경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화살을 자기를 향해 거누고 있는 선지자는 부담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진짜 선지자의 설교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사야 2:22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참다운 하나님을 직접 뵙던 선지자 이사야는 인간에게 전혀 가치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니엘의 경우에도 인자 되시는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도적으로 붙는 명칭은 그 안에 본인이 수행한 기능이 담겨 있습니다.
인자라는 명칭 속에는 반드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만 남기고 다른 이는 다 척결해 버린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은, 자신이 맹세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참으로 많습니다. 모세도 선지자요, 다윗도 선지자입니다. 시편에 보면 그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시편 104:29-30에 보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어떤 연기력을 동원해서 자기를 위장을 하든지 상관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이 수립하신 원리대로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십니다. 그 계획은 이러합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간은 어쨌든 흙으로 돌려버리는 원칙을 양보 없이 수행하십니다.
인간들은 짧게 세상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보지만 길게 보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냥 한 뭉치의 흙 일 뿐입니다. 흙 이상도 아니요 흙 이하도 아니고 그냥 흙덩어리에 해당됩니다.
열심히 많이 내었던 욕심을 열심히 줄어나가면서 부지런히 착한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없이 그냥 흙 일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두 번째 작전을 펼치십니다. 그것은 '주의 영'을 보내어 새롭게 새 인간을 창조하는 겁니다. 옛사람에게 있어 욕심이 그 사람의 그 어떤 선한 의지보다 더 셉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욕심보다 은혜와 의와 용서와 사랑이 더 셉니다. 마치 전에는 아무리 인간이 착하고 말씀대로 살고 싶더라도 보다 더 센 욕심한테는 당해낼 수가 없었듯이, 이 논리가 그대로 성도에게도 이어집니다.
아무리 욕심이 세다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당해 낼 수가 없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들 속에서 죄가 더해진 경우에 은혜가 더욱 더해지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바로 성령을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주실 때는 성령 안에 내용물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홀로 달성해 낸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대신 죽으심'입니다.
즉 마땅히 흙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주의 영이 임하게 되는데 그 '주의 영' 안에는 성도로 하여금 다시는 욕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게 하는 조치가 함께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소위 새사람 되었다고 주장하면 다시 욕심에 지배받는 경우가 생겨나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에 매진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 안에 뭔가 성도를 대신한 주님의 조치가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성도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모든 저주를 대신 받아서 다 해결해 버린 겁니다. 이러한 진리를 수용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일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란 원래 자기의 영광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기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선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내부에서는 '대신 희생하심'의 능력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진행된 일임을 우리가 의심치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
2004년 6월 20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18-20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일까요?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와서 날마다 자기를 개선하고 자신을 정진하고 향상시키려고 합니다. 즉 자기가 잘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는, 다시는 그런 나쁜 짓을 안 하겠다고 반성하므로 서 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 아니라 정신수련장에서 말하는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누구에게 감사하는 겁니다. "이같이 저의 부족함을 아시면 서도 주님께서 이처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시다니!"하고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것이 그저 사람들만의 집단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란 각자가 그 누구에 의해서 부름을 받았기에 성립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이게 된 자들은 오직 자신을 기적으로 불러주신 그 분 중심으로 지내게 됩니다.
마치 해바라기가 해만 쳐다보고 살 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교회는 결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움이나 협조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 봐서는 남의 일입니다. 인간들 자기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교회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뭔가 다른 흑심이 있기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남이 하는 일을 두고서 "잘됐다, 못됐다"하면서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교회를 만들고 교회를 키우고, 교회를 보존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혈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체는 모두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것에 관해서 사람들은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감각은 혈육을 지니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보는 것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2:14-15에서는 그 실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인간이든지 간에 혈육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의 속성은 한결같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 많이 배웠던, 많은 재산을 가졌던, 혹은 날 때부터 전혀 글자를 대하지 않았던 심산유곡에 거하는 일자무식의 할머니라 할지라도 그 혈육의 내부에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된다 말이야. 살아야 돼, 살아남아야 돼"라는 본성을 왕성하게 들끓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혈육을 지니고 있는 한 약점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가졌던, 무엇을 원하던, 무엇을 보면서 살던 실제적으로 그들의 심정을 장악하는 것은 악마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혈육을 지니고 있는 이상, 이 영역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16-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 보면, '혈육'이라는 말이 같이 등장되지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특이한 고백은 결코 혈육이 스스로 악마로부터 이긴다든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그런 고백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의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생각과는 별개로서, 순전히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해서 튀어나는 마음 적 고백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일로 마감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개시가 되고 기초가 되어 교회를 하나님께서 앞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로 만들어낸 교회는 반드시 혈육의 필요에 의해서 조성되고 세워지는 교회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사람들과 대중들의 혈육 적 요청에 의해서 목회를 하고자 하는 자들은 교회가 이 시대와 이 사회에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단체가 아니라 참으로 유익이 되는 좋은 단체라는 이미지를 심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중점을 두고 사업을 벌리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협조보다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혈육 적인 염려로 인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인증을 얻고 곧장 자기 사업에 열중하려고 머리를 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나 교회이나 둘 다 혈육 적인 사고방식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 없이는 구원이 가능치 않다'는 논리는 설사 교회를 백군데 다닌다 할지라도 교회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논리와 같은 취지에 불과합니다. 이미 교회가 아닌 자는 아무리 교회 되고 싶어 노력해도 교회 밖에 거합니다.
즉 교회의 존재가 사람들을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고백을 토하도록 권능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구원이 되고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교회라는 것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폐쇄'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교회 걱정'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고백이 나오도록 하고 교회를 세우시는 겁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입에서 내뱉은 고백, 즉 '주'라는 말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온 우주를 널리 전파하려 하십니다. 그저 주문 외우듯이 베드로의 고백을 되풀이하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교회요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주'라는 난데없는 고백을 토해내는 자는 이미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주님에게 포섭되어 사로잡힌 자가 됩니다.
즉 베드로의 운명은 이러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 그 자체로만 만족해야 되지 그 어떤 대가를 바랄 필요도 없는 사람으로 쓰임을 당하게 됩니다. 즉 혈육 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자아됨을 형성해야 될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된 사람으로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그의 입에서 나온 '주'라는 고백이 그냥 혈육 적으로 살기 위해 조작되고 연출된 행위가 아님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원리로 자리 잡히는 겁니다.
즉 주님이 직접 베드로의 일상성까지 침투해서 통제하고 다스리게 되는 그런 관계에 놓인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전도자는 앞으로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11장에서는 전도자의 운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예언한 대목입니다.
마태복음 10:28-31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또 예수님은 혈육으로 살려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참새를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지 않으면 그 참새의 혈육은 함부로 죽거나 사람 손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노선으로 하나님과 관계지어져야 사는 것이 전도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 속에 무슨 내용이 담기게 되며 하나님은 무슨 목표로 교회를 만드시는 겁니까? 요한복음 17:14-21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죽음의 세력이 교회 안으로 범람하지 못하는지 아시겠지요,
우리의 핵심부는 우리의 능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이 현실성을 널리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교회 되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교회를 위한 전도와 헌금과 봉사하는 자들과 주님을 위한 전도와 헌금과 봉사하는 자들과 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고난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살려고 하지말고 이미 살아난 자신의 토대와 무엇인지를 늘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악마의 반응
2004년 6월 2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21-23
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한 번쯤은 하나님이 아예 없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생활에 별반 달라질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아주 나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더 신사적이고 온순하고 성실하고 훌륭한 시민으로 거듭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인격이 잘 정돈된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아예 없다고 여기고 믿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리하냐 아니면 불리하냐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 믿고자 하고 교회 나온 사람이라면 차라리 하나님을 안 믿는 자와 하등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이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기쁘시게'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남을 기쁘시게 하려고 행동한 적이 있습니까? 남편이 기분 좋을 때 아내 앞에서 재롱을 부려서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의도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그런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거론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기는 것이 전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자신의 창조 주되심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피조물로만 간주하십니다. 피조물은 당연히 창조주의 기쁨을 위해 지어놓은 대상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확한 주제 파악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살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다 엉터리입니다.
반대로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이 일관되게 시행하는 그 작업을 보고 참여하면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데서 존재의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작업을 위해 우리들을 끌고 다니시면서 일생을 보내게 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흔히들 매우 당황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신 그 상대자가 딴 사람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 100점 짜리 신앙고백을 했던 그 수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수제자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을 똑같이 흉내내려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교회에 소속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참된 신앙 인이 그 베드로가 얼마 안 가서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라는 호칭을 받은 것에 대해서 황당해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해도 그것으로 영생이 보장되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걱정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걱정은 모두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죽어서도 좋은데 가려는 심보에서 비롯된 마음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지적 받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 자신의 미래를 기쁘게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사항은 딴 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악마'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참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게 된 그 배경에는, 자기 딴에 제대로 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전제로 인해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사회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데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 메시야, 즉 약속하신 대로 구세주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베드로의 같은 경우에,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메시야인 줄을 확고부동하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이 잘못된 하나님 상이라는 것은 아직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거론하고 구상한 하나님은 다 엉터리입니다. 이 엉터리 하나님 관은 인간들이 직접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접근하고 성의를 표하면 하나님께서도 적절하게 응답하신다는 그런 간편한 하나님 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뜻에 의하면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 관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을 불러오고, 빌려오는 식의 무당 식 하나님 관입니다. 그런 하나님 관이 실은 진짜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고 모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들에게 심어놓은 악마의 솜씨입니다.
악마 활동의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벌리신 모든 일이 십자가 안에 집약되어 있어 있다면 그 십자가를 감추는 것이 악마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에게 원하십니다. 십자가 고난으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참 하나님도 그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소식을 접한 베드로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이제 막 교회가 융성하게 잘 되려고 하는데 적대 세력에게 예수님일 먹혀버리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걱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조차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스스로 자기를 지켜내려는 심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로부터 '악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새롭게 알 수 있을까요? 우선 이 세상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을 고난에 몰아넣고 죽게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장로들이요 서기관들이요 대제사장들입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제 정세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참된 하나님을 구성하는데 있는 예수님을 고난을 집어넣고 죽이려고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일 중요한 점을 놓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목해야만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비켜 가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냥 하늘에서 낚시 대로 우리를 건져서 데려가시면 될 일을 왜 예수님께서 꼭 고난받으셔만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삼일'에 살아나심이 핵심입니다. 호세아 6:1-2에 보면, "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렇게 하신 조치 때문에 그러합니다.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결정은 결코 무효화되지를 않습니다. 이미 인간들은 죽어 가는 모습으로 그냥 하루하루 버틸 뿐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말하기를, "잘만 하면 신도 될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소리는 하나님의 결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6:2에 보니, 그런 인간들 중에서 오직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3일만에 다시 살리신다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호세아의 예언은 그 당시 유대인들도 알고 있는 바입니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집중하십니다. 바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그 첫 번째 인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자는 호세아 6:2의 말씀의 혜택을 입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막고 방해는 세력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악마입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은 이런 점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악마는 이왕지사 멸망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악마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악마가 받는 그 심판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0에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는 이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인간들로 하여 금 '스스로 살아가는 식'으로 살라고 부축이면서 이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지도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죽어 마땅함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도 노출시켰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45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은 진짜 예수님을 통해서 일관되게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악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살고자하는 자는 죽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만 산다는 이 생명의 원리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분주한 것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붙잡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에 대해서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 따르기
2004년 7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24-25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왕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된 우리들에게 요즈음 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예수님 따라 오너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현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자기 나름대로 현실이라는 것을 조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우 사육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현실이란 한우 값이 나아지는 그 경제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되고 채소를 키우는 사람은 채소 값이 오르는 현실을 고대하는 그런 현실관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밖에 그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바는, "예수님을 따라가거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사실은 자기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를 때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현실관보다 예수님이 소개하는 현실이 더 확실한 정확한 참 현실인 것을 인정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굴면 자기가 염두에 둔 현실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현실관 자체를 교체해 버리겠다는 다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정도까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뭔가 더 보태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슨 의미를 띠고 있을까요? 로마서 8:3를 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에 보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도대체 육신의 정체가 무어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육신의 속성은 그저 죄 덩어리 밖에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자는 의도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한 하나님의 아드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가차없는 형벌과 저주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로서 육신 그 자체인 인간의 정체는 드러났습니다. 인간은 곧 죄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연탄 덩어리 같은, 숯 덩어리 같은 죄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어떤 공직에 있든지 상관없이 진정 제대로 된 새 현실 세계에 들어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죄 덩어리인 채 어떤 일에 직업인으로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죄 덩어리입니다. 목사는 설교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구원받는 겁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육신의 죄를 확정지어진 바 됨' 그 자체를 자기 일로서 짊어지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영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과연 기독교나 천주교 내에서 과연 이 말씀이 제대로 통하게 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십자가'를 안 지면서도 구원이 되는 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나 천주교는 자신들의. 거대 교단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성시화 하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종교로 정복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기독교가 마치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스스로 천주교 신자라고 여기고 천주교 미사에 참여하고 막 성당 밖으로 나왔다고 칩시다. 무엇을 건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속되고 더러운 이 세상에 비해서 천주교 있음, 그리고 성당 있음을 얼마나 감사하고 그 존재를 긍정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덩달아 수녀나 신부의 활동도 좋게 볼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무엇이 빠져버리는가 하면, 바로 '자가 십자가 짐'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없는 교단의 활동을 마치 하나님의 활동인 양 제 마음대로 현실화시켰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한국 기독교의 비리와 존경스러운 목사들의 타락에 실망을 느끼고 자기만은 제대로 목회하겠다고 따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이 주는 현실은, 이제 '완전한 자기 교회'라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전에는 같은 기독교 교단에 속하여 불교 세력을 꺾어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가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썩었고 오직 자신의 교회만은 참으로 건전한 교회라고 여기는 그 현실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여전히 그 안에서 '자기 십자가 짐'이 빠져버리는 엉터리 현실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가 이번에서 자기 목회 교인들에게 실망을 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는 그만 자기 자아에게로 후퇴해버립니다. "에라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자아만 바르게 살면 그만이지"라는 투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 목회자란 애초에 '자아'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자아'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악마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살아가고 허구를 심어준 결과에 불과합니다.
자아는 마치 유령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대학교란 없습니다. 단지 총장이 있고 교직원이 있고 학생들이 있고 캠퍼스의 나무와 울타리와 잘 정돈된 잔디밭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대학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놓고 대학교라고 그저 이름 붙여주는 겁니다.
이처럼 '자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뇌와 사지가 있고 몸체가 있지 자아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아란 그런 것들이 모여놓은 가운데 생겨나는 겁니다. 따라서 자아가 자아를 관리하는 식의 자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은 충동까지 느낍니다. 애매하게 사지와 몸체와 두뇌는 덩달아 파괴되는 대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져보세요.
욕이라는 것은 보든지 듣든지 그저 잉크 자국이나 음파의 높낮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욕을 들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자기 사지 지체를 이동시켜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칼로서 죽인다든지 행동을 왜 하게 됩니까?
그것은 자신을 절대시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인간의 육신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이 모든 착시현상은 바로 인간의 배후를 조종하고 있는 악마의 활동으로서 인간의 자아를 신성시하고, 최고의 우상으로 신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욕망의 조종을 받는 자아로서 제멋대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을 때는 자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여긴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자아상에 의하면 예수님은 꼭 필요한 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데라면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자아상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고 단정했습니다.
즉 자신의 육신이 요구하는 그런 자아상을 갖고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자의 피를 마시고 인자의 살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6:60, 66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긍정해서 제자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와 그들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여전히 '자기 절대'라는 우상에 잠겨있게 마련이기에 그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세요.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자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아가 자아를 만들어내고 인도하고 유지하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고 제공되는 자아상을 두고 말입니다. 정말 이 은혜를 받은 자아상이라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코 제 힘으로 저는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고, 자기 십자가 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공하는 현실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아라는 허구에 속지 말게 하시고 날마다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온 천하보다 귀한 것
2004년 7월 1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26-28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의 평소의 생활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잘못되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절실하게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부터 관심 두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성품을 지닌 인간이 지신의 힘으로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리는 만무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이 좋으냐 싫으냐를 묻는 문제가 아니라 천국을 설사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들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 한결 같습니다. "제가 여기 들어오게 된 것은 오직 예수라는 분의 공로 덕분이지 제 힘씀이 아니올시다"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아무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부르짖고 달음박질하여도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은 그 전반에 걸쳐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다'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대로 된 천국을 천국답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함이 가미될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사야 6:9-10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이 보는 것으로 깨닫고, 듣는 것으로 알아채서 구원되는 경우를 철저하게 봉쇄하십니다. 인간들이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자력으로 구원되지 못함을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곧 평소에 인간들이 온 천하를 얻는 식으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을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즉 인간들은 기껏 자기 목숨을 부지한다는 방식이 온 천하를 긁어모으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방식으로 인해 '그 나라 의를 먼저 구하라'는 언명은 온데 간데 없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온 천하를 얻어서 지탱하는 목숨은 사실은 목숨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숨은 그런 식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꾸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목숨을 목숨이라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목숨이나 아니냐 하는 판정은 우리 인간 본인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목숨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정 관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로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이미 인간의 능력으로서 감당치 못할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의 주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의 자아의 허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유령과 같아서 자신을 허풍선이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그 자아를 신봉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웃고,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아라는 사실은 과거의 흔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겁니다.
즉 과거의 잔상이 지금의 자아하는 허상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지금의 나쁜 짓은 아닌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라는 말과 함께 현재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 있는 우리는 그저 현재 있게 된 몸이지 결코 과거의 그 몸이 아닙니다. 즉 꽃다운 나이 16세 때 토실토실한 피부를 기진 윤기 있는 그 육체는 지금 50세를 훌쩍 넘긴 아줌마에게는 없어져 버려서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겁니다.
지금의 50세 나이의 자기 자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과거의 자신을 재료로 삼아 현재의 자아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과거에 매이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과거의 잘 한 일에 매이는 것은 지금 신으로부터 행운이나 복을 따 낼 자격이라고 있는 것처럼 교만하기 쉬우니까 불행한 일이요. 과거의 잘못한 일에 매이는 것은, 지금의 고통을 지나간 과거 행위의 징벌이라고 간주해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사람의 존재라는 것은 매일 이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나를 있게 하는 원리와 원칙은 따로 있습니다. 그 방식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나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성도는 매일자아가 만들어지고 매일같이 허물이집니다.
결코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야 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지시하시는 그 분의 원리 원칙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여기 현재 존재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나를 나로 여기 있게 한 그 원리와 원칙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 한대로 갚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함에 대해서 주도권을 쥐고 심판을 행사하는 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어떤 식으로 주도권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은 28절에 나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왕권'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서 무한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누가 말입니까? 예수님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왕권을 적용할까요?
로마서 5:20-21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왕권 행사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들이 구원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작용되어야 할 권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죽은 시체를 놔두고 아무리 꼬집고 두들기고, 전기 자극을 주어도 죽은 자를 돌이키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죽은 친척을 되살릴 수 없는 것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본인도 본인의 힘으로 되돌릴 수가 없습니디. 인간은 결코 그 나라 의를 먼저 구하지 않게 되어 있고, 인간은 결코 온 천하를 얻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식으로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이 성사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왕권이 있다는 겁니다. 이 왕권을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날아갑니다.
그냥 가만 두고 있는 왕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나에게는 왕권이 있다. 인자가 천사들과 함께 구름 타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다"고 꼭 언급을 해주시는 이유는, 자신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가지신 왕권을 유감 없이 발휘하실 양으로 그런 언급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 발휘는, 죄에 대한 은혜의 정복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자는 모든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 어떤 한계나 한도도 두지 않고 말입니다. 무한대로 용서받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본인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바로 이점을 알리고 실제로 적용하기 위한 차원에서 은혜가 터져서 실시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나이대 별로 지은 죄들이 많습니다.
9 살 때 지은 죄, 28살 때 지은 죄, 45살 때 지은 죄, 92살 때 지은 죄, 각종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죄로 인해 시체가 된 사람을 보고서, 아무리 두들겨 가며 깨우면서 하는 말이, "너는 그 나이 대 빼놓고서는 비교적 죄를 덜 지었으니 그 의의 능력으로 제발 살아나 다오"라고 부탁해도 그 시체는 다시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천사를 대동하고 나타나실 때는 단단한 돌무덤조차 깨어지듯이 열린다는 겁니다. "아무개야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영생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능가하는 은혜의 위력입니다.
흔히들 죄, 죄 하지만 진짜 죄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익숙해져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즉 선과 악이라는 두 개념을 가지고 살면서, 과거에 선한 일로 현재 보상을 받고, 과거의 악한 일로 현재 내가 징벌 받는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앞에서 그것은 몽땅 엉터리 인생관을 철저하게 인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죄의식과 선한 의식을 자기고 자아를 재조립하라가 아니라 죄인의식과 의인의식을 가지라는 겁니다.
즉 죄인이었던 우리가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로만 이제 의인이 되었다는 의식 말입니다. 여러분, 그 어떤 시험이나 악마나 유혹이나 고난도 예수님의 은혜를 무효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만 뜨면 이 세상 것만 추구하는 저의 마음에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