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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명: |
시리아 아랍 공화국(Syria Arab Republic) |
국가원수: |
대통령, 정치체제는 공화제, 의회 형태는 단원제 |
인구: |
총 16,673,282 명(1998년 6월 현재)- 골란 고원 거주자(35,150명) 제외 |
인구 분포도: |
0-14세: 46%(남자:3,937,575 명, 여자:3,748,881 명) 15-64세: 51%(남자:4,342,022 명, 여자:4,157,268 명) 65세 이상: 3%(남자:240,603 명, 여자:246,933 명) |
인구 성장률: |
3.23%(1998년) |
종족 분포: |
주민의 대부분이 아랍인이며, 소수의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이 있다, 쿠르드인이 폐쇄적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아랍인 90.3%, 쿠르드인(약 2-300만명), 키르카시안(Circassian), 알메니아인 외 기타 9.7%) |
종교: |
이슬람교- 순니파(派)가 74%, 쉬아파 14%, 알라위파 등 기타 이슬람교가 16% 기독교 - 10%(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등이 주류이며 개신교인은 약1만 5천명 정도이다.) 현재 다마스커스 내에는 5개의 개신 교회가 있다. 교단은 장로교, 나사렛, 침례교, 연합교단 등이다. |
언어: |
공용어는 아랍어이고, 외국어의 경우 프랑스어가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영어가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문맹률은 22%이다. |
직업종사분포도(1996년): |
농업 40%, 제조업 20%, 서비스업 40% 실업률 12%(1997년) |
1인당 국민 소득: |
$ 929(1999년-미국 C.I.A 통계) |
현재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와 제 2의 도시인 알렙포(할렙)에 거의 대부분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고 있으며 북부 자지라(Jazirah)에도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시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1943년에는 약 29,000 명의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거주하였었고, 1986년에는 약 3,000명 정도 남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리아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인한 신변의 안전 문제로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정착촌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중재가 있어왔는데 그것을 통해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알렙포에 그런 대로 잘 정착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도시내의 상업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in the Bab al Faraj section(밥 알 파라지-도시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아주 황폐하고 남루한 곳)에 정착을 하고 있다. 수도인 다마스커스에는 알렙포에 있는 유대인들처럼 아직 잘 정착을 하지 못한 형편이지만, 이들은 in the Hayy al Yahud (Quarter of the Jews- 하이 알 야후드)라는 곳에 정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상점을 운영하거나, 환전상 그리고 장인(기술공)으로서 살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교수로 그리고 의사로서 활약을 하고있다. 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시오니즘'과 무관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곳 시리아 인들은 이들이 언제든지 배신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나머지 이들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예전부터 성경을 보더라도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급속도로 양국간의 관계가 냉각 된 이유는, 1920년을 전후에서 아랍지역에 불어닥친 내셔날리즘(nationalism-민족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아랍지역에 두 나라(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함으로써 비로소 아랍 민족주의 그리고 아랍 민족 연맹이 창출되게 되었다. 이렇게 아랍 민족주의가 불일 듯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제 1차 대전 당시 영국측의 "맥마흔 선언"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중동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 결과, 아랍 민족주의를 자극하게 되어 급기야 4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이 야기되었다.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르는 중에 제 3차 전쟁 67년 당시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측에 빼앗김으로서 반 이스라엘 감정은 극도로 고조되게 되었고 이러한 감정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맥마흔 선언(McMahon Agreement):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과 메카(사우디)의 샤리프인 후세인과의 왕복 서신 중에서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아랍인 거주의 오스만 제국령에 전쟁 종료 후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지지할 것을 약속한 선언인데, 후세인맥마흔 협정이라고도 한다. 대영제국 시대의 편의주의적인 외교의 전형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 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중동문제를 초래한 근본원인이 되었다.
골란고원(Golan Heights):
이스라엘 북서쪽에 위치하는 시리아의 고원으로 면적 1,150㎢이다. 이스라엘의 여러 키부츠와 상(上)요단강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였고 81년 그 중 약 510㎢가 군사 목적상 이스라엘로 병합되었다. 91년 11월에는 소련으로부터 이주한 유대인들을 위한 입주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스라엘 군의 점령으로 말미암아 골란고원은 요단강 서안지구의 반환과 함께 중동평화회의의 최대과제로 남게 되었다. 92년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정부간에 골란고원 반환문제로 인해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섭이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2. 지형 및 기후
시리아의 지형은 서부로는 헤르몬 (Hermon) 산맥과 베카(Bekka) 계곡
및 골란고원에 의해 레바논, 이스라엘과 접경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이라크와 접경하며, 북부지역은 타우로스(Tauros)
산맥에 의해 터키 와 접경한다. 또한 야르부크 (Yarmuk) 강에 의해 요르단과 접경 하고
있다.
국토의 중앙과 남동부 지역은 사막 지대이다. 북동부 지역은 유프라테스 계곡과 대지가 펼쳐지고, 남서부는 안티레바논 산맥이 레바논과의 국경을 형성하고 있다.
지중해 변에 위치한 해안평야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비교적 춥다. 수량이 풍부하며 오론테스(Orontes) 강 유역에 비옥한 농경지대(초승달 지대)가 펼쳐져 있다. 다마스커스 동부지역은 전형적인 열대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중앙부가 건조한 대륙성 기후로 밤낮의 온도차가 크고, 지중해 연안은 여름에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겨울에는 강수량이 많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강우량은 사막 지대를 제외하고는 년 평균 250mm이하이며 서부 지역의 경우 750mm에서 최고 1,000mm로 "비옥한 반월지대(Fertile Crescent)"를 형성한다. 내륙지방은 건조하고 겨울에는 추운데, 다마스커스 평균기온은 1월 섭씨 2-12℃, 8월은 섭씨 18-37℃이다.
3. 기독교 운동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를 계기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사도 바울의 활동 무대였던 안디옥(현재의 안타키아)을 중심으로 다시금 활동을 공개적으로 재개하였다. 로마의 다른 종교들처럼 건물을 세우고, 예전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또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기독교의 공인(4세기)되기 전에도 교회는 가정교회(house-church:Dura Europos 지역에 있는 것과 같은)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인 St. Helen 은 324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이집트를 시작으로 시리아에 있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다. 5-6세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육체적인 쾌락이나 기쁨 등을 피하고 고행을 추구하는 교회나 수도자(예를 들어 38년간을 기둥 위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주상 성자 St. Simeon과 St. Sergius 등)그리고 마을들이 시리아의 북부 지역에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리아 교회는 교회사에 있어서 참으로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되는데 당시 시리아의 교계 지도자들(예, 네스토리우스-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고, 네스토리우스파(派)의 창시자였다.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루스에 반대하여 마리아 신모설(神母說)을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거부하고 신성(神性)만을 주장하여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에서 이단 선고를 받고 436년 지금 요르단에 있는 페트라로 추방되었다. 이 파는 489년 페르시아로 옮겨 아라비아, 인도, 등으로 퍼지고, 635년 중국에 들어가 경교(景敎)가 되어 우리 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시리아 교회는 적지 않은 진통을 겪게 되었고, 교회사에 있어서 비주류로 밀려남으로써 후에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함마드에게 이슬람교를 창시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적인 개념과 교리들을 제공하게 되었다.
4. 이슬람 시대
7세기 무렵 이슬람교를 받드는 아랍인이 서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여 이슬람제국을 건설하였다. 다마스쿠스는 움마이야 왕조시대에 수도가 되었으며, 압바스 왕조시대에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정하였다.
* 움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서아시아 및 북아프리카, 에스파니야(스페인)를 지배한 이슬람 왕조를 말한다. 그 시기는 서기 661년에서 750년까지이다. 움미아드 왕조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수도는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였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시자는 무아위야 1세 였는데 아랍의 크라이시 부족(이슬람의 창시자인 모함마드의 부족)의 상인 가문(하쉼가) 출신이었다. 그는 661년 시리아 총독 당시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를 타도하고, 세습제 칼리프 정권을 수립하였다. 뒤에 에스파냐(스페인)에 수립된 '후(後)움마이야 왕조'와 구별하여 이것을 '전(前)움마이야 왕조'라고 한다. 정치 형태는 차츰 전제주의 색체가 짙어지고 종교적인 경건이 희박해졌다.
이 왕국의 전성기는 8세기 5대 칼리프 아브드 알말리크의 전후 수대에 걸쳐 맞이하였다. 칼리프의 독재 군주권을 강화하고 713년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북서인도를 정복하였다. 해륙(海陸)으로 지중해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711년에는 심지어 현재의 스페인인 에스파니야에 상륙하여 '서(西)고트'왕국을 정복한 이후에 서 유럽 쪽으로 정복을 시도 프랑스 각지에 원정하였으나 732년 투르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유럽 쪽으로의 진출을 실패하였다. 움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근본 원인은 징세(徵稅)문제 때문에 궁핍화한 피정복민의 울분과 호라산의 반란을 이용한 압바스가(家)의 흥기(興起)때문이었다.
이슬람의 법학, 자연신학, 문법학, 전승학(傳承學)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아랍 부족간의 내분과 마왈리 비아랍계 이슬람교도의 불만이 원인이 되어 압바스 왕조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움마이야 왕조의 일족인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에스파니야에 건설한 왕조를 후(後)움마이야 왕조(756년-1031년)라고 한다. 수도는 코르도바였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재위 912년-961년) 때가 최성기로 아바스 왕조 문화의 수입에 노력하였으며 자흐라 궁전을 지었다.
*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년 - 1258년)
서아시아의 이슬람 왕조를 말하며 수도는 하시미야, 바그다드, 사마라 이었다. 압바스 왕조는 압바스 왕조의 혁명으로 성립되었다. 움마이야 왕조의 반대파들 사이에서 이슬람 교단 국가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자는 '예언자 모함마드의 가족' 출신자라야 된다는 사상이 차차 퍼졌는데, 그 가족의 일원에 속하는 압바스 가는 이 사상을 이용 움마이야 왕조를 타도하기 위한 지하운동을 일으켰다. 747년 마침내 마르우에서 무장봉기하고, 749년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하였다. 이듬해 움마이야 왕조 최후 칼리프가 피살됨으로써 과격 시아파의 지지를 받은 압사스 가(家-마호메트의 자손)는 750년 움마이야 왕조를 물리치고 압바스 왕조를 세웠다.
제2대 칼리프에서 제5대 하룬알 라시드까지 전성기였는데 다음의 칼리프 '무타심'이 군대에 투르크 용병(傭兵)을 채용하면서부터 분란이 야기되었다. 다른 이슬람 왕조의 독립으로 서방 영토를 잃었으나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었다. 칼리프는 수니파 신앙을 옹호하였고, 칼리프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관념이 확립되어 있었다. 움마이야 왕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하는 형태였으나, 압바스 왕조 때는 아랍인들의 특권적 지위는 상실되고 대신 비(非)아랍계의 개종자들이 국가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동시에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층과 나란히 관리, 상인, 지주 등의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비(非)이슬람교도들에게 '인두세(人頭稅-지즈야)'를 부과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이슬람교와 아라비아어를 기조로 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융합시킴으로서 다채로운 이슬람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코란' 연구와 법학, 철학, 수학 등의 여러 학문이 발달하였고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식무늬를 낳았다. 과학 및 산업 그리고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으나 궁정에 있어서의 사치와 지나치게 팽창한 관료기구, 군사비의 증대 등이 겹쳐 국가제정은 만성적인 적자에 빠지고 10세기 전반에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다. 사마라기(期)에 맘루크(용병들) 군벌이 칼리프의 자리를 좌우한 후에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945년 부와이 왕조 그리고 이후 일어난 셀주크 투르크(터어키) 왕조가 사실상의 지배권을 잡았다. 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써 멸망하였다.
* 파티마 왕조(Fatima dynasty 909년-1171년)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시리아까지 지배한 '시아파'이슬람 왕조를 말한다. 창시자인 이스마일파의 비밀운동원 우바이드 알라 알마흐디는 튀니지에 건국한 당초부터 마디(구세주:재위 909년-934년)인 동시에 칼리프라고 자칭하여 동방의 압바스 왕조, 서방의 후 움마이야 왕조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카이로를 건설하고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부터는 시리아에도 지배력을 넓혀갔으나 십자군에 패하여 점차 쇠퇴하여갔다. 정치적으로 불안하였으나 푸스타드, 카이로 등은 이슬람 세계의 경제,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1171년 '살라딘'에게 멸망하였다.
*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1169년-1250년)
살라딘이 건설한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를 말한다. 이름은 살라딘의 부친 아이유브 이븐 샤디에서 유래되었다. 1169년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의 재상으로서 이집트의 실권을 잡고, 1171년 칼리프 아디드가 죽자 시아파에 반기를 들고 수니파의 교리를 부활시켜 신왕조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카이로를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예멘 등을 지배하였다.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1174년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한 십자군을 격퇴한 다음 시리아의 십자군 도시를 차례로 빼앗고 1187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살라딘이 죽자 그 영토는 일족들에 의해 이집트, 다마스커스, 알렙포, 하마단 등으로 분할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집트, 다마스커스는 얼마 후 살라딘의 아우 '야딜'의 계통으로 귀속되었다. 1250년 술탄 사리프가 고용한 '맘루크' 군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 맘룩 왕조(Mamluk dynasty-1250년-1517년)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점령한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를 말한다. '맘루크'란 주로 백인 노예를 뜻하는 아랍어로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령관을 지내다가 이 왕조를 창건한 아이베크가 노예용병 출신인 데서 생긴 명칭이다. 바하리 맘루크 왕조(1250년-1390년)와 부르지 맘루크 왕조(1382년-1517년)의 전후 2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나일강의 로다섬에 있는 바하리 맘루크군이 중심이었고, 후기는 카이로 성채에 본거지를 둔 부르지 맘루크군 중에서 역대 술탄(왕)이 선출되었다. 이 왕조의 기초를 굳건히 다진 것은 제 4대 술탄인 바이마르스 1세 (1260년-1277년)이다. 그는 살라딘의 뒤를 이어 대십자군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동시에 국내 질서의 재편성에도 힘써 교통, 통신망의 정비와 군사력의 증강을 꾀하였다. 1260년에는 그의 숙부를 압바스 왕조의 최후 칼리프로 옹립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대한 맘루크 왕조의 종주권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칼리운, 안나시르, 모함마드(1340년까지) 등의 술탄들의 통치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후기 왕조인 부르지 맘루크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 맘루크 군단 내부의 세력 다툼이 격화된 데다 흑사병의 유행에 따른 농촌 인구의 감소, 해외 무역의 쇠퇴 등이 겹침으로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1517년 셀림 1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 오스만 투르크 제국(Osman Empire1453년-1922년)
오스만 투르크족은 셀주크의 투르크를 대신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족의 이슬람 국가(1453년 - 1922년)를 말한다. 제국의 명칭은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지게 되었다. 원래, 오스만 투르크족은 유목민 이였는데 몽골(원나라)에 쫓겨서 중앙 아시아로부터 소아시아(현 터어키)로 옮겨와 1300년경 왕조를 창건하였다.
그 뒤에 확장을 거듭하여 1402년경에는 지금의 터어키 전역을 거의 정복하였다. 1346년경에는 유럽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1389년에는 발칸 반도의 동맹군을 무찔렀다. 1402년 앙카라에서 티무르군에게 패배하였지만 전열을 정비한 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 수도를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하였다.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를 정복하였다. 이집트를 제압하여, 마지막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물려받아 이슬람교의 종주권을 장학함으로써 술탄 칼리프 제도(1517년)가 성립되었다.
술레이만 1세 때가 전성기로 영토가 가장 넓었다. 영토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개 대륙에 걸쳤으며, 그 군대는 한 때 '빈'(오스트리아)까지 이르렀다. 궁정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17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의 억압을 받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입 후에는 그 동안 식민 통치하였던 민족들의 반란이 속출하여 19세기에는 러시아 -투르크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1908년 청년 투르크당(黨) 혁명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측과 연합하여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게 되었다. 술탄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노출되면서 '케멜 아타튀르크'의 주도하에 국민의 혁명(대국민의회 소집)으로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이슬람 시대는 나폴레옹(프랑스)의 등장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근대사
19 세기 말 아랍 독립 운동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과 협력하여 터키세력을 일소했으나 전후 프랑스군이 진주(進駐)하여 위임 통치하였다. 격렬한 저항 운동이 있었지만 프랑스 통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1946년 4월에 독립을 달성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아랍민족주의 운동이 대두되었고 영국의 군사적 지원 하에 시리아에서 오스만투르크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이 시기에 다른 구라파 강대국들도 개입함으로써 1916년 영, 프, 러 3국은 Sykes-Picot협정에 의거 시리아를 프랑스의 세력 범위권으로 포함시키고 1918년 1차 대전 종식 후 시리아를 신탁 통치하였다. 1920년 3월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현재의 레바논 및 Palestine, 요르단 지역을 포함하는 소위 "Greater Syria왕국(대시리아 왕국)"을 선포하였으나 동년 4월 San Remo회의에서 프랑스의 위임 통치를 결정함으로써 좌절되었고 이어 1920년 7월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시작되었다
1925년 프랑스는 모슬렘(Moslem) 인구의 분산을 통하여 그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자 그 위임 통치 지역을 다마스커스, 알레포, 알라위 및 Druse의 4개 자치 지역으로 나누어 분할통치(Divide & Rule)를 실시하였다.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저항하여 1925년 및 1926년 2차에 걸쳐 반란을 시도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2차 대전 발발이후 연합군이 시리아를 점령하자, De Gaulle(드골) 망명정부는 프랑스 위임 통치의 종식과 시리아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6. 오늘날의 시리아
1990년 이후 시리아는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붕괴와 걸프전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걸프전 당시 다국적 연합군 측에 가담함으로써 서방측과는 물론, 미국측과의 관계 개선에 물꼬를 텄고, 아라크의 적대국이었던 이란 측으로부터 많은 물질과 원유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중동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 협상에 응함으로써 그 동안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안보였던 이스라엘과의 문제에 대해 대화의 초석을 마련하였다.(그러나 아직까지도 평화 협상을 위한 골란고원의 반환 문제에 대한 시리아의 입장은 강경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리아는 터어키 측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댐 건설 문제와 관련해 내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군사적인 우위를 앞세워 터어키 측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함으로써 유프라테스 강 유역 하류에 위치한 시리아와 이라크간에 물 문제가 야기된 것이다. 이 문제 대한 시리아와 이라크의 대응은 강경하였다. 즉시, U.N에 이 문제를 제소함과 동시에 두 나라는 공동의 대응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리고 시리아는 쿠르드족을 간접 지원함으로써 물 문제뿐만 아니라 지난 프랑스의 식민 통치 당시 터어키 측에 양도된 땅을 되돌려 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시리아는 1998년 터키와 이스라엘이 전략적인 동맹을 맺은 데 맞서 이라크와 군사적인 유대를 확고히 하는 등 관계 강화로써 대처했다. 시리아의 보건 장관이 3월말 장관급으로서는 20년만에 처음으로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공식 방문했다. 1개월 뒤 양국은 무역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 자유무역 지대를 설치했다. 또 양국은 7월 1982년이래 16년간 폐쇄되었던 이라크 북부 유전 지대와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 항구 바니야스를 연결하는 송유관을 재 개통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시리아 관리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이라크 상업 장관과 회담한 뒤 설탕과 의약품, 비누를 비롯한 주요 상품의 대(對)이라크 수출 물량 증가 계획을 발표했다. 양국 정부는 또한 상대국 수도에 1970년대이래 폐쇄했던 무역센터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2000년 6월 10일 그 동안 30년간의 철권 통치를 해 왔던 아사드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의 둘째 아들인 바샤르가 8월에 대통령직을 이어 수행하고 있다.
故 아사드(Hafiz al-Assad) 대통령:
1930년 시리아 카르다하에서 태어났다 . 이슬람교 소수 교파인 알라위테파(派)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5년 홈스 육군사관학교의 전투비행 과정을 수료한 뒤 소련으로 유학해 야간 전투를 배웠다. 그 뒤, 비행 중대장으로 승진했으나, 1961년 정부가 이집트와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해임되었다. 그 뒤, 학생 신분으로 바트당에 들어가 사회 개혁을 역설하면서 당내 군부 세력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1965년 3월 8일 바트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아사드는 공군 참모총장에 올랐고, 1966년 2월 시리아의 급진 바트당 당원들이 '국제 바트당'의 지도를 거부한 뒤 국방 장관에 취임했다. 1969 - 70년 자신이 반대했던 시리아의 요르단 내전 개입이 실패한 뒤, 당내 민간 세력이 득세하자 군부 실력자로서 이들과의 권력 쟁탈을 시작했다. 민간 출신의 바트당 당원들이 협력을 거부하자 아사드는 자신의 측근들로 신 정부를 구성하고, 1971년 3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집권 초기에 아사드는 행정부를 민주화하고 아랍 세계에서 시리아가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했으나, 이라크의 바트 정권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집트와의 새로운 동맹은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 전쟁에서 최고조에 달했으나 전쟁의 결과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자 동맹 관계는 곧 붕괴되었다.
1976년 아사드는 레바논에 대한 대규모 군사 개입을 감행, 레바논이 대(大)시리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시리아 군대는 그 뒤, 6년간 레바논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다가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레바논 북부 및 북동부로 후퇴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요르단의 화해를 반대해 왔다. 1979년 이라크와 동맹을 체결했으나, 1982년 이라크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시리아를 경유하는 이라크의 송유관을 단절시킴으로써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동시에 그는 혁명적 이슬람교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이란과 가까워졌고, 이란은 시리아에 원유와 물자를 제공했다.
1980년 시리아와 소련은 향후 20년간의 상호 우호조약에 서명했다. 국내에서 아사드 정권은 반대 세력, 특히 '이슬람 동맹'의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하마 시를 거의 다 파괴하고 약 10만 명에 이르는 반란군을 살상했다. 1984년 2번째 소련을 방문했고, 그의 형제 리파트가 다마스쿠스에서 벌인 무력 시위로 조성된 일시적인 위기를 극복했다.
1995년 갑작스런 큰아들의 죽음(교통사고)으로 권력 승계에 이상이 생기자 영국에서 유학 중이던 둘째아들을 급거 귀국시킨 후 후계자 교육을 시키고 권력 이양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지병인 심장병, 백혈병, 당뇨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2000년 6월 10일 레바논 대통령과 전화 통화중 사망하였다.
고 아사드 대통령의 집권의 성공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그의 집권 당시, 소수의 집단과 자신이 속한 소수의 이슬람 종파인 알라위파 사람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내적인 안정의 기반을 조성했다고 하는 점과 동맹국인 북한과 쿠바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치적인 시스템 등을 잘 도입하고 활용했다고 하는 점이다.
7. 기도제목
시리아 국민들 대부분은 비교적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든 삶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리아 사람들은 상당히 소박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때묻지 않고 순박한 삶을 살아가는 몇 안되는 사람들을 꼽으면 그중에 시리아 사람들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쓰신 분께서 사용하셨던 주요 무대들이 시리아의 여기 저기에 널려져 있습니다. 기독교 최초 선교사 사도 바울이 말에서 떨어진 곳이 다마스커스 근교에 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았던 곳, 바구니를 타고 피신해 나갔다는 성곽,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아라비아>사도바울 공동체등등의 주요 성지들이 바로 이곳 시리아에 있습니다.
시리아는 지난 수년간 외부에 비쳐졌던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새롭게 태어나려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교가없는 남한 방문객의 시리아 입국에 상당히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2004년 말 현재 육로를 통해 접근한 남한 방문객들에게 개별 입국비자를 발급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하는 시리아의 문 안에는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1) "시리아여! 기뻐 외치라!!" 의 기도운동 안내문
지금 당신이 읽고 계시는 글은 한 나라와 20여 개의 미전도 종족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어 놓게 될 기도제목에 대한 것입니다. 시리아여! 기뻐 외치라!! 기도 운동은 시리아와 그 국민들이 복을 받아서 기뻐 외치게 될 수 있기 위한 글로벌 기도 제목입니다. 이 기도운동의 목표는 시리아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께 예배드리게 될 수 있도록 여러분과 기도제목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서방 매스컴에 알려진 시리아에 대한 기사들은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리아의 외적인 단면만 보지 말고 우리의 시각을 돌려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백성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시리아의 대다수 국민들은 미전도 종족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서도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영적인 돌파구가 요구되고 있으며 그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보다 더 많은 주의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아랍국적의 사역자들과 우국지사출신의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시리아의 대다수 국민들은 모슬렘 교도들이며 이들에 대한 복음의 전달은 거의 안되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복음이 시리아의 각 도시와 마을과 촌락과 모든 시리아의 소수민족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시리아와 그 수도인 다메섹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는 예수에 대한 소문이 시리아와 모든 지역에 퍼졌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49장 25절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도성에 대해 이르시기를 "나의 기쁨과 찬미의 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복음은 시리아와 전역에 전파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마스커스는 아직 하나님의 기쁨이나 찬미의 대상이 아직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국가와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며 기도하십시다. 예수의 복음이 온 시리아 방방곳곳에 전파되고 다메섹 도성이 진실로 하나님의 기쁨과 찬미의 도시로 변화 될 수 있도록 기도 하십시다.
2) 다메섹 도성을 위한 기도제목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다마스커스)에는 약 600만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다메섹 도시는 인간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살고 있는 도시들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성경 창세기 14장 15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지나갔던 곳으로서 그 당시조차도 다메섹은 이미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이 나라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됨으로서 진정 다메섹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메섹 인구 90%가량이 모슬렘(회교도)들입니다. 다메섹에는 “우마야드(우마위)”라는 모스크(회교 사원)가 있는데 이 모스크는 전 세계에서 제일 큰 회교 사원이고 4대(메카, 예루살렘, 이스탄불, 다메섹) 주요 사원 중에 하나입니다(주후 705년). 이 우마야드 모스크는 한때 세례요한을 기념하기 위한 교회당이었으며, 로마의 최고의 신이었던 주피트 신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훨씬 이전에는 그것은 림몬(일종의 바알신) 신전이기도 했습니다. (왕하 5:18)
오늘날 다메섹은 수도로서 시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입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다메섹으로 이주해 오지만 이주하자마자 그들 스스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다메섹은 시리아 미디아의 중심지입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독창적인 창의성 때문에 시리아 말(방언)과 문화는 위성 방송을 통해 아랍세계 전역에 소개되고 있고 다메섹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과 미디아의 영향으로 다메섹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시리아 전체의 차원을 넘어서 다른 지역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시로 믿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내주시기를.
2. 시민들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되기를.
3. 그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4.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5.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6. 그들도 예수를 믿으므로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마치 사도행전 26:17-18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3) 기독교 문서 선교를 위하여
기독교 문서들은 아랍어로 되어있으며 대부분은 이름만이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약5%) 그것은 전적으로 형식적 기독교 교리적인 것이어서 회교도들에게는 이해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습니다. 근래에 새로운 문서들이 출판되어 특히 대다수 회교도들을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성경번역과 성경의 일부분을. 시리아 당국은 이런 친절한 복음 서적들을 전달하는 것을 정식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쇄를 위한 재정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더욱 이런 자료들을 만드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습니다. 기독교 서적들이 있긴 해도 시리아의 대다수 회교도들에게는 그것들을 읽을 수 있는 실제적 기회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한다고 해서 어디 가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고 있으며, 알 수 있다고 해도 몇 시간을 여행해서 가야 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복음이 전해져야할 소수파는 많이 있습니다. 즉, 알라와이트족, 드르족, 시아파, 그리고 야지디스족들 (사탄숭배자들), 이런 소수 종파 사람들을 위해 좋은 기독교 서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들이 앞날과 필요를 위해 특별히 채우기 위한 것이 요구됩니다. (각별한 판단과 이해가 요구됨) 특히 크루드족과 터키족, 써카시안족들을 위한 기독교문서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기도제목:
1. 합당한 부흥서적들을 출판하기 위한 자금 지원이 가능하기 위해.
2. 시리아의 소수계 사람들도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수 있도록.
3. 회교도의 다수파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된 기독교 문서가 더 많이
만들어지기 위하여.
4.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전 시리아 땅에 뿌려질 수 있고 빈껍데기로
돌아오지 않기 위하여.
4) 시리아의 기독교를 위하여
시리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슬렘 이나 기독교인든가 혹은 유대교 신자로 운명이 정해집니다. 시리아 사람들은 태어날 때의 종교가 죽을 때까지 그들의 종교가 되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집단에서 태어나느냐? 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과 양육 방법 등 장래에 대한 전망(예측) 등과 같은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집단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슬렘이나 기독교인 된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문화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으로 결정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시리아는 많은 기독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처음으로 전도(설교)한 곳 또한 “다메섹 도성(다마스커스- 현재 수도)” 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국민의 약 10(번역-5% ?)%가 기독교인들이라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곧, 그들이 기독교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 희랍정교회, 희랍 카톨릭 교회와 마로나이트 등은 전통적 교회의 고백인 “Pethora(암송 기도문 ?)”이 있습니다. 약간의 개신교 교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문화적인 정체성을 배경으로 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신앙과는 무관한 대물림, 양육 그리고 공동체적인 배경 등에 의해 결정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신실한 성도들이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9페이지에 소개). 불행하게도, 최상의 교회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교회 정치 싸움, 시기, 두려움 등과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 기도제목:
1. 시리아에 성경을 믿는 교회들 가운데 겸손과 연합과 은혜의 정신이 충만하도록.
2. 특별히 전통적인 교회들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도록.
3. 시리아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5) 국제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내 영혼이 여호와로 인하여 자랑하리니! 왜?
하나님이 나의 분복이며 나를 기쁨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자가 이 자랑을 듣고 기뻐하리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의 분복이며 그들을 기쁨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음을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를 기뻐하는 종들을 일으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기쁨으로 넘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위대하심에 대해 말해주며 그만을 자랑할 때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리아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나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우리모두 다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만약 시리아에서 주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는 주의 종들이 없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할 수가 있겠습니까?
국제 사역자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복음을 외치는 종들이 많지 않다면 시리아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를 기뻐할 수 있는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시리아인 신자들로서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그들은 자주 어려운 역경 속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둬들이기 위한 국제 사역자들이 많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들은 훌타인 교역자들이 시리아 전체에서 사역하는 국제선교사님의 숫자보다 많은 교회들도 많습니다.(시리아에 있는 국제선교사의 수는 시리아인 백만명에 한사람 꼴입니다.)
♣기도제목:
1. 하나님께서 더 많은 국제선교사님들을 불러 시리아로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하여(특별히 아시아선교사님과 아프리카 선교사님과 히스피닉
선교사님들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께서 중동에서 선교사로 사역할 것을 고려하고 있는 종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내쫓아 주시도록.
3. 하나님께서 국제 선교사님들에게 시리아에서 기거하며 직장을 얻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