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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5) 대원경지(大圓鏡智)
크게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그 견성은 대원경지를 내용으로 합니다. 대원경지란 제8 아뢰야 무기식이 다 끊어지고 진여본성이 발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경각을 성취한 자리, 즉 자성을 깨친 그 자리는 교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선가에서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하는데 교리적 이론이나 실지 체험한 선(禪)에서나 구경이 대원경지에 있다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대원경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위산이 앙산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원경지를 종요로 삼아서 세 종류 생을 벗어나니 소위 상생(想生)과 상생(相生)과 유주생(流注生)이다. 상생(想生)은 생각하는 마음이 어지러움이요, 상생(相生)은 생각하는 바의 경계가 뚜렷하게 나타남이요, 미세한 유주생(流注生)은 함께 티끌 때가 되느니라.
潙山이 謂仰山曰吾以鏡智로 爲宗要하여 出三種生이니 所謂想生相生流注生이니라 想生은 卽能思之心이 雜亂이요 相生은 卽所思之境이 歷然이요 微細流注가 具爲塵垢니라. [人天眼目]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상생(想生)이고 객관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떨어지면 제8 아뢰야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미세유주(微細流注)라 합니다. 실지에 있어서 ‘생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바의 육진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대무심지에 들어가면, 그 작용[行相]이 미세해서 보통 중생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잘 모르니 그것을 미세유주라 합니다. 미세유주를 벗어나야만 대원경지가 드러나는 것이니, 설사 대무심지에 머물렀다 해도 미세유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니 산송장이며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부를 하려면 무분별심인 미세유주까지도 뿌리를 뽑아 버려야만 공부를 성취한 사람이고 대원경지를 성취한 사람이며 법을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견성하면, 마음을 깨치면 그만이라 하지 않고 ‘대원경지를 으뜸으로 삼는다’ 함은 대원경지는 과상(果相)이니 불과(佛果)를 증득해야 대원경지가 성립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으로도 견성이 과상(果上)의 불지(佛地)임이 분명합니다.
그 마음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제8 아뢰야의 미세유주인 마의 경계에 떨어진다.
未達其源하면 落在第八魔界니라. [洞山初]
제8 아뢰야 미세유주까지도 뛰어넘어야 깨친 것인데 제8 아뢰야 미세유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제8 마구니 경계라고 합니다. 실지로 정각을 이루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제8 아뢰야 미세유주가 큰 장애가 되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마구니 가운데 큰 마구니입니다.
갓난아기가 비록 육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아직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장단과 시비득실을 모두 알지 못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 갓난아기와 같아져서 영욕과 공명과 거슬리는 감정과 좋은 경계가 그를 동요시키지 못하며, 눈으로 색을 보되 맹인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으며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수미산과 같아야 한다. 지음과 인연의 생각이 없으며 푸른 하늘이 넓게 덮음과 같고 두터운 땅이 넓게 떠받치는 것과 같으니 무심인 까닭으로 만물을 잘 길러 이와 같이 공용이 없는 가운데 공용을 베푼다. 비록 이러하나 또다시 굴 속에서 뛰어나와야 옳다.
어찌 교가에서 말함을 보지 못하였는가? ‘제8 부동지 보살이 무공용의 지혜로 자재하게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나 납승은 여기에 도달하여도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ꡔ능가경ꡕ에서 말씀하되 ‘상생(相生)은 집애(執碍)요 상생(想生)은 망상이요 유주생(流注生)은 즉 헛된 인연을 뒤쫓아서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만약 무공용지에 도달하여도 오히려 유주생 가운데 있으니 제3의 유주생의 상(相)을 벗어나야 비로소 쾌활하고 자재하다. ꡔ능엄경ꡕ에 말씀하되 ‘빠르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고요하고 조용하다’ 하였다. 갓난아기의 육식이 비록 공용이 없으나 생각생각에 흐름을 그치지 못함이 빨리 흐르는 물과 같다.
初生孩兒가 雖具六識하야 眼能見하며 耳能聞하나 然未曾分別六塵하야 好惡長短과 是非得失을 總不知라 學道之人도 要復如嬰孩하야 榮辱功名과 逆情順境이 都他不得하야 眼見色하되 與盲等하며 耳聞聲하되 與聾等하야 如癡似兀하야 其心不動이 如須彌山이니라 …… 無造作無緣於慮하야 如天普蓋하며 似地普擎하나니 爲無心故로 所以長養萬物하야 如是於無功用中에 施功用하나니라 雖然恁麽나 更須跳出窠窟하야사 始得다 豈不見가 敎中에 道하되 第八不動地菩薩이 以無功用智로 任運流入薩婆若海라 하나니 衲僧家는 到這裏하야 亦不可執着이니라 …… 楞伽經에 云 相生은 執碍요 想生은 妄想이요 流注生則逐妄流轉이라 하니 若到無功用地하야도 猶在流注生中이니 須是出得第三流注生相하야사 方始快活自在니라 …… 楞嚴經에 云 如急流水望爲恬靜이라 하니 孩子六識이 雖然無功用이나 爭奈念念不停이 如密水流오 [碧岩錄 八]
갓난아기는 대무심지에 든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무심인 까닭에 공용을 베푼다 해도 그것은 아직 대무심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8지 부동지보살이 오매일여가 되어 대무심지에 들어 무공용지가 현전하였다 해도 아직 제8 아뢰야 미세유주에 있으니 모름지기 이것을 벗어나야 쾌활하고 자재하니 곧 죽어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조사의 공안도 모르는 것입니다.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고 아무리 무공용지에 들어가서 참말로 자기가 자재한 것 같지마는 여기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佛法)은 꿈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고인(古人)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 합니다.
맑고 공적하며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대원경지이니라.
湛然空寂하여 圓明不動이 卽大圓鏡智니라. [頓悟要門]
맑고 고요하여 공적한 여기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차(照而雙遮)해서 죽은 가운데 살고 산 가운데 죽은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서만은 이것을 대원경지라 합니다.
제8 이숙식이 금강도 위에서 공하면 인과를 초월하여 바야흐로 대원경지로 바뀐다. 무구가 동시에 나타난다 함은 불과위(佛果位) 가운데서는 대원경지를 무구라 하니 이것은 청정한 진여인 까닭이다. 만약 대원경지로 상응하면 법신이 명백하게 나타나서 둥글고 밝게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이(理)와 지(智)가 하나로 같아서 바야흐로 구경인 일심의 본체를 증득한다. 이것이 유식의 지극한 법칙이며 여래의 극과이다.
밝게 살펴보건대, 이 제8식이 깊이 잠겨서 깨뜨리기 어려우니 이 이숙식을 실끝이라도 투과하지 못하면 끝까지 생사의 언덕에 머무른다. 덕이 높은 옛 큰스님과 모든 조사들이 이 제8식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부처를 뛰어넘고 조사를 뛰어넘는 심오한 이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오늘의 사람들은 생멸심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여러 가지로 물든 번뇌의 종자를 털끝만큼도 정결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도를 깨쳤다고 사칭한다. 어찌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하지 못하고서 증했다고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고 두렵지 않은가.
異熟이 若空則超因果하야 方才轉成大圓鏡智니 言無垢가 同時發者는 以佛果位中을 名無垢니 乃淸淨眞如니라 謂鏡智로 相應하면 法身이 顯現하야 圓明普照十方塵刹하야 以理智가 一如하야 方證究竟一心之體니 此唯識之極則이며 乃如來之極果也라 諦觀하니 此識이 深潛難破하니 此識을 絲毫未透하면 終在生死岸頭事니라 古德諸祖가 未有不破此識而有超佛越祖之談이어늘 今人은 生滅도 未忘하야 心地에 雜染種子도 未淨纖毫하고 便稱悟道하니 豈非未得을 謂得하며 未證을 謂證이리오 可不懼哉아 可不懼哉아. [憨山 八識規矩通說]
이 법문은 감산 덕청스님이 지은 8식규거통설(八識規矩通說)의 끝에서 간결하게 하신 말씀입니다. 감산 덕청(憨山德淸:1546~1623)선사는 선°교에 모두 정통한 명(明)나라 말엽의 거장입니다. 제8 아뢰야 미세유주를 영영 떠나서 등각의 최후심인 금강도(金剛道) 이후에 이숙식이 공하여 여래의 극과인 대원경지를 증득하여야 오도(悟道)이며 견성임을 분명하고 널리 말하니 조계 정정을 서로 계승한 보기 드문 선지식입니다. 그리고 생멸의 망심도 아직 끊지 못하고 도를 깨쳤다고 사칭하는 것을 통탄함은 예나 지금이나 수도인의 공통된 병을 지적하여 부순 쾌론입니다. 그러니 거칠고 무거운 것과 미세한 일체 번뇌망상을 모두 없앤 구경무심인 대원경지를 실지로 증득하여 크게 쉬고 쉰 옛 사람의 마음자리에 도달하여야 합니다. 제8 아뢰야 미세념을 다 끊은 대원경지는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무심°무념°무생°무주이며 따라서 찰나간에 증하고 원만히 증한 구경정각인 돈오와 견성입니다.
생사의 언덕에 머무르는 일이라 함은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벗어났지만 변역생사(變易生死)에 머물러 있어서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완전히 벗어난 여래의 생사 자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6) 상적상조(常寂常照)
영락경에서 말씀하되 ‘등각은 조적이요 묘각은 적조니라’ 하였다. 지금 제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생도 또한 조적(照寂)이다. 그러므로 만약 적조를 증득하면 부처님 지위와 같다.
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니라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 若得寂照하면 卽同佛地故니라. [淸涼疏]
제8지 자재위보살 이상도 멸진정의 오매일여가 되어 무분별지를 체득하는데 어째서 이것을 조적(照寂)이라 하느냐 하면 이 무분별지에는 아직까지 조체(照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부처님 지위는 이 조체(照體)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무소득인데 적적하게 비치는 조체가 남아 있어서 적조라 하지 않고 조적이라고 합니다. 백장스님도 여기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속 2제(二諦)를 쌍조하는 번뇌중에 있는 것이 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경지인데, 이 경지를 타파하고 일체가 다 적적하여 무소득인 적조의 경지와 아직 무분별지가 남아 있어 무소득이 아니며 조체가 남아 있는 조적의 경지와는 구별해서 말합니다.
위없는 대열반이여 둥글고 밝아 항상 적조하니라.
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 [壇經]
사마타인 까닭에 비록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 비바사나인 까닭에 비록 비추나 항상 고요하며, 우필차인 까닭에 비침도 아니요 고요함도 아니니라. 비치나 항상 고요한 까닭에 속(俗)을 말하나 곧 진(眞)이요, 고요하나 항상 비치는 까닭에 진(眞)을 말하나 곧 속(俗)이며, 고요함도 아니요 비침도 아닌 까닭에 유마거사가 비야리에서 입을 다물었느니라.
以奢摩他(止°定)故로 雖寂而常照요 以毘娑舍那(觀慧)故로 雖照而常寂이요 以優鉢又(捨°平等)故로 非照而非寂이니라 照而常寂故로 說俗而卽眞이요 寂而常照故로 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로 杜口於毘耶니라. [永嘉集]
사마타는 죽은 가운데서 산 것이요 비바사나는 산 가운데서 죽은 것이니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하고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적(照而雙寂)하여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명과 암이 쌍쌍(雙雙)한 중도의 구경경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가 비추니 해탈의 깊고 깊은 법이로다. 법신의 적멸체에 셋과 하나의 이치가 원융하다. 공행이 같은 곳을 알고자 하면 이를 상․적․광이라 하느니라.
摩訶般若照하니 解脫甚深法이로다 法身寂滅體가 三一理圓常이니 欲識功齊處인댄 是名常寂光이니라. [長沙岑]
남전스님이 제자되는 장사 경잠(長沙景岑)선사가 과상열반(果上涅槃)에 대한 문답 끝에 답하신 게송입니다. 대개 상(常)은 법신이요, 적(寂)은 해탈이요, 광(光)은 반야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상°적°광이라 하면 법신과 해탈과 반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원융무애한 것을 말합니다. 적(寂)이라 하면 분별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 아뢰야 미세념까지도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 곳을 말하느니만큼 이것이 대원경지이니 상적광(常寂光)이 여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적멸정에 들어 본원(本源)으로 돌아가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법계에 상주하여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느니라.
我於雙樹間에 入大寂滅定하야 反本還源하여 與十方三世一切諸佛로 常住法界하여 常寂常照하느니라. [都序 下]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살았거나 열반하였거나를 막론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상적상조(常寂常照)한 이 경계 가운데에서 백억화신을 나투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상적상조하는 법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공부가 아니니까 상적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분별망상이 조금이라도 그대로 기멸하면 상적이 될 수 없고, 일체 분별망상이 다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간다 해도 무분별지라는 조체(照體)가 남아 있으면 상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상적은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나타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니 이 경계를 우리가 실지로 성취해야 됩니다. 그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체 중생 내지 무구지까지도 모두 정토가 아니며 과보에 머무르는 까닭이요, 오직 부처님만이 중도 제일인 법성의 땅에 사느니라.
一切衆生이 乃至無垢地 盡非淨土니 住果報故요 唯佛이 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 [瓔珞經;大正藏 24]
너희들 이치를 통한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방망이와 할은 때를 따라 쓸지니라. 만약에 근본 뜻을 밝게 알면 밤중에 태양이 빛나리라.
報汝通玄士하오니 棒喝을 要臨時라 若明端的旨하면 半夜에 太陽輝로다. [慈明三玄三要總頌;大正藏 48]
이것은 자명스님이 삼현삼요(三玄三要)의 총송(總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삼현삼요를 바로 알려면 상적상조한 구경법, 중도 제일 법성을 바로 깨쳐야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절대로 삼현삼요를 모릅니다.
이상으로 견성성불이라든지 무심무념이라든지 오매일여라든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대강 얘기한 것 같습니다.
이를 한 번 더 요약하면 교외별전에서는 견성성불을 표방하는데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해서 성불한다는 식으로 두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경향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견성은 구경각을 말하며 무생법인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벗어난 무심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한번 뛰어넘어 바로 여래지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중생이라는 것은 근기가 여러 가지가 있어 바로 들어가기 어려운 동시에 또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철저한 무심지에 들어가려면 오매일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설사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서 숙면일여의 무심지에 들어갔다 하여도 보통 중생이 생각하는 무심은 크게 죽었을 뿐이지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8 아뢰야 무기식, 미세유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살아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원오스님이 몽중일여에 들어간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여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화두를 자꾸 참구시켜 결국은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케 한 것처럼 우리도 무심지에 들었다 해도 부지런히 화두를 의심하여야 합니다. 대혜스님뿐만 아니라 설암스님이라든지 고봉스님이라든지 큰스님네들이 모두 다 같은 경로를 밟아서 오매일여한 데서 확철히 깨쳐서 공부를 성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보면 공부를 해나가다가 어떤 생각이 좀 나면 사량분별이나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여기서 뭐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고 하여 화두고 뭐고 다 내버리고 앉았는데 이것은 고불고조가 말씀하신 방법과는 십만팔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크게 죽은 데서, 대무심에서 깨쳐서 크게 살아나면 이것이 상적광이며 쌍차쌍조(雙遮雙照)한 것이며 중도 제일 법성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불고조가 밟아간 것, 경험한 것을 우리가 바로 성취해야지 이것을 바로 성취하지 않고서 어떤 다른 것을 법이라 도라 견성이라 하면 이것은 고불고조가 바로 전한 법이 아니고 일종의 외도적인 마구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생사를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인데 생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행상을 알아서 공부하는 데 귀감을 삼아야 합니다.
7) 아난의 득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이든지 교든지 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 이론은 중도(中道)에 서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는 부처님이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말씀하신 그 깨친다는 것, 즉 깨달음의 실천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론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수집한 것을 팔만대장경이라 해서 경전이 전해 내려왔지만 깨치는 실천에 있어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서 내려왔는데 제일 처음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섭존자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서 자기와 똑같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가섭이라고 여러 번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세존은 말할 수 없이 많은 대중 가운데서 마하가섭이 자기와 똑같은 광대한 승묘공덕이 있음을 칭찬해 마치시니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받들어 행하니라.
爾時에 世尊이 於無量大衆中에 稱歎摩訶迦葉의 同己廣大勝妙功德己하시니 諸比丘가 聞佛所說하고 歡喜奉行하니라. [雜阿含經;大正藏 2, p. 302上]
앞에서 더 자세한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섭존자가 갖추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친 자리에 있어서는 확철히 깨쳤으면 다 같겠지만 부처님께서 자기와 똑같다고 칭찬한 사람은 가섭존자뿐이며 그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해 준 것입니다.
다음은 『열반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려 하니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살 것인가 하면서 울고불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절대로 슬퍼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무상정법은 모두 마하가섭에게 전하였다. 가섭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큰 의지됨이니 마치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의지처가 되듯이 마하가섭도 또한 이와 같다.”
佛告諸比丘하사대 我今所有無上正法을 悉以付囑摩訶迦葉하니라 是迦葉者는 當爲汝等의 大依止함이 猶如如來爲諸衆生作依止處하야 摩訶迦葉도 亦復如是니라. [大般涅槃經;大正藏 12, p. 377下]
부처님의 법맥은 가섭존자에게서 아난존자로 이어지는데 이제부터는 아난존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경(經)을 결집하기 위하여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많은 제자들이 모였는데, 여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려고 했지만 가섭존자가 끝까지 반대하여 결집 장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난존자가 우여곡절을 거쳐 부처님 법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얘기하겠습니다.
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가라. 지금 훌륭한 대중이 너와 함께 결집할 수 없느니라” 하였다.
아난이 그 말을 들으니 화살로 심장을 쏘는 것과 같아서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멸도한 뒤에 너는 걱정하여 슬퍼하고 소리내어 울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를 대가섭에게 부탁한다.’ 부디 기쁘게 생각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소서.”
迦攝波이 卽於衆中에 喚阿難陀호 汝宜出去하라 今此勝衆에 不應共爾하야 同爲結集이니라 阿難陀가 聞是語已하고 如箭射心하야 擧身戰懼하야 白言호대 …… 佛世尊이 臨涅槃時에 作如是語하사대 阿難陀야 我滅道後에 汝勿憂惱悲啼號哭하라 我今以汝로 付大迦攝波이라 하시니 幸施歡喜하야 奉大師敎하소서. [根本毘奈耶雜事;大正藏 24, p. 404]
한 비구가 말하되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가까이서 법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니, 대가섭이 말하였다. “이런 학인이 배울 것이 없고 덕력이 자재한 대중 가운데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사자 무리 가운데 들어오는 것과 같다.”
比丘言호대 阿難은 是佛侍者니 親受法敎이니라 大迦葉이 言 如此學人이 入無學德力自在衆中은 猶如疥瘙野干이 入師子群中이니라 [摩訶僧祗律;大正藏 22, p. 491上]
‘학인(學人)’이란 공부를 다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중들은 아난이 부처님 시자로서 30년 이상 부처님을 모셨으니 누구보다도 부처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결집에 참여시키자고 주장하였으나, 가섭존자는 “여기는 지금 공부를 성취하여 실지로 깨친 사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찌 병든 여우 같고 배움을 성취하지 못한 아난을 참여시킬 수 있느냐”고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욕설 같지만 아난에게는 그렇게 충격을 주지 않으면 참으로 분심을 내서 용맹정진하여 대법을 얼른 깨칠 수 없으므로 자비로써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난보다 더 많이 부처님 법문을 기억하고 있다 하여도 스스로 대법을 깨치지 못하면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되고 설사 일자무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지로 중도를 깨치고 자성을 깨친 사람은 사자입니다.
대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손수 끌어내며 말하되 “지금 청정한 대중 가운데서 장경을 결집하려 하는데 너의 업결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니 여기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너의 번뇌를 다 끊은 후에 들어올 것이요, 업결이 남아 있으면 들어오지 말라” 하고는 손수 문을 닫아 버렸다.
大迦葉이 衆中에 手索阿難出하고 言호대 今淸淨衆中에 結集經藏하노니 汝結이 未盡하니 不應住此라 斷汝漏盡然後에 來入이요 殘結未盡이어든 汝勿來也라 如是語竟 便自閉門하니라. [大智度論;大正藏 25, p. 68上]
이렇게 쫓겨난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항상 대중을 위해 밤낮으로 설법함에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것이 부처님 계실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발기(跋耆)비구라는 이가 있어 누각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다가 이곳이 시끄러워서 모든 해탈삼매에 들 수가 없어서 아난 있는 곳에 가서 게송을 지어서 말하였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두고
너는 참선하며 방일하지 말라
많은 말 무슨 소용 있는가.
阿難이 在毘舍離하야 恒爲四衆 晝夜說法하니 衆人來往이 殆若佛在니라 有跋耆比丘하야 於彼閣上에 坐禪할새 以此鬧亂하야 不得遊諸解脫三昧라 便往阿難所하야 爲說偈言호대
靜處坐樹下하야 心趣於泥洹하야
汝禪莫放逸하라 多說何所爲오. [五分律;大正藏 22, p. 190下]
대부분의 경전을 보면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경전에서는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결집하는 대중 가운데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는 가섭존자의 통고만 받은 것으로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난이 대중 가운데서 쫓겨난 것이 지배적입니다. 어쨌든 결집할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한 것만이 분명합니다.
아난이 혼자 있으면서 정진하며 방일하지 않으니 고요하여 시끄러운 것이 없었다. 이것은 아난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있어 본 일이 없는 법이었다. 그때에 아난이 집밖에 있으면서 새끼로 만든 좌상에 앉아 참선하고 밤에는 많이 걸어다녔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려고 하는 새벽에 몸이 극히 피곤하여, ‘내가 지금 지극히 피로하니 좀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앉았다. 앉으니 이제는 눕고 싶어져서 누우려고 하여 머리가 미처 베개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무루 해탈함을 얻었다.
阿難이 卽便獨處하야 精進不放逸하야 寂然無亂하니 是阿難의 未曾有法이니라 時에 阿難이 在露地에 敷繩床하고 夜多經行이러니 夜過明相이 欲出時에 身疲極이라 念言호대 我今疲極하니 寧可小坐라 하고 念已卽坐하야 坐己方欲臥하야 頭未至枕頃에 於其中間 心得無漏解脫하니라. [四分律;大正藏 22, p. 967上]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난존자가 깨치지 못해서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난 후 용맹정진으로 공부하여 깨친 뒤에야 결집에 참여해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들을 결집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우리 불법은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많이 듣기로는 제일이지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가섭존자의 법제자가 됩니다. 아난존자가 3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모든 법문을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가섭존자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불법이란 근본이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입니다.
그 이후로 누구든지 불교역사를 쓸 때는 아난존자를 가섭존자의 법제자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난존자같이 용맹정진하여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디를 가도 쫓겨날 것입니다.
아난이 열반한 후에 모든 비구들이 각각 좌선만 익히고 다시는 경전 읽는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말하되 “부처님에게 3가지 일이 있으니 좌선이 제일이다” 하고 마침내 각각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폐지하였다.
阿難이 便般涅槃時에 諸比丘各習坐禪하고 不復誦習云 佛有三事하니 坐禪第一이라 하고 遂各廢諷誦하니라. [分別公德論 2;大正藏 25, p. 34上]
아난이 깨친 뒤에야 총명°지혜가 소용없음을 체험하고 제자들에게 좌선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아난존자가 열반한 뒤에도 제자들이 좌선에만 힘쓰고 경을 익히고 문자를 익히는 것은 폐지했다고 하듯이 인도에 있어서도 불법을 전함에 좌선하여 깨치는 것이 근본이 되어 있음을 인용했습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오직 돈교문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가서 삿된 종(宗)을 부수게 하니 미(迷)할 때에는 누겁을 지나고 깨친 즉 찰나간이로다.
唯傳頓敎門하야 出世破邪宗하노니 迷來엔 經累劫이오 悟則刹那間이로다. [六祖壇經]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말씀입니다.
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마에 박힌 구슬 얘기를 했는데 선종이란 그 이마에 있는 구슬을 바로 가리켜 주듯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 근본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하여 시간을 끌며 삥삥 둘러서 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頓)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漸)을 주장합니다. 즉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마음을 닦아 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시간적인 점차(漸次)를 둡니다. 선종에서는 단박 찰나[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見性成佛] 법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교문(敎門)에서는 일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다 해당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점차로 한 계단 한 계단 층층계 올라가듯이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어 점차(漸次)를 가지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방법도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열악(劣惡)하기 때문에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법(實法)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돈(頓)으로써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지 절대로 점차적인 공부를 가르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돈교문만을 전해 세상에 나가 삿된 견해를 부순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교문(頓敎門), 즉 견성법(見性法) 이외에 점차적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단계적으로 공부 길을 인도하는 것은 모두 다 방편인 동시에 삿된 종(宗)이라는 것입니다.
또 삿된 종[邪宗]이라 하지만 이것도 혹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어쩔 수 없어 말씀하신 방편의 길을 따라가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을 보내면서 헛고생할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直指人心]’ 돈교문(頓敎門)만을 주장하고 교가의 점차문(漸次門)은 삿된 종(宗)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종의 근본이 단박에 깨치는 데[頓悟] 있는 만큼 점차문은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조계정맥(曹溪正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육조스님의 법문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중심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次니라.
‘깨친다[悟]’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또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단박에 닦는다[頓修]’라고 합니다.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가 다 마쳐졌다는 뜻이니 등각(等覺)까지 넘어서 묘각(妙覺), 즉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문(頓悟門)에서는 한번 깨침에 있어 구경각을 성취하여 제8 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 버려서 그 뒤에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대사께서도 견성한 것을 돈오(頓悟)라고 말씀하시는만큼 견성(見性)해 가지고 점수(漸修)하여 성불(成佛)한다는 말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종의 근본 종취가 돈오돈수(頓悟頓修)이어서 점차를 세우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점차를 세운다면 그것은 선종이 아니며 육조정종(六祖正宗)이 아닙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고 사람에게 영리함과 둔함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法無頓漸이오 人有利鈍이니 迷則漸契오 悟人은 頓修니라.
그러면 돈(頓)과 점(漸)이 왜 생겼느냐, 본래 법에 돈(頓)과 점(漸)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육조스님의 말씀은 본래 법(法) 자체에 있어서는 돈(頓)이니 점(漸)이니 하는 것이 없고 오직 사람에게 있어서 근기가 수승하여 예리한 사람과 어리석어 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돈(頓)과 점(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도 기운이 있는 사람은 씩씩하게 빨리빨리 가는데 기운이 없는 사람은 비실비실 꾸무적거리며 빨리 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근기가 수승하고 예리한 사람은 돈문(頓門)으로 들어가서 지름길로 빨리 도를 성취하고, 근기가 하열하여 둔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편가설(方便假說)인 점문(漸門)으로 떨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문(漸門)을 방편인 줄 모르고 실법(實法)인 줄 알아서 그것을 참다운 선(禪)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삿된 종[邪宗]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지로 깨친 사람은 구경각을 증득하기 때문에 더 닦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돈수(頓修)라 하고, 더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은 미(迷)한 사람으로서 깨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육조스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에 만약 돈교문을 깨치면 깨친 즉 눈앞에 세존을 보는도다.
今生에 若悟頓敎門하면 悟則眼前에 見世尊이로다.
돈교문을 깨치면 찰나에 눈앞에 부처를 본다는 것이니 깨치면 곧 성불(成佛)한다는 말입니다. 견성(見性) 이대로가 성불(成佛)이고 돈오(頓悟) 이대로가 성불(成佛)이라는 것을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였지 점차(漸次)를 밟아서 닦으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돈교문(頓敎門)을 벗어나서 점차(漸次)를 세운다면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사종(邪宗)이라는 것입니다.
돈(頓)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앰이요, 오(悟)란 무소득을 깨치는 것이니라.
頓者는 頓除妄念이요 悟者는 悟無所得이니라.
망념(妄念)이란 제8 아뢰야 근본 망념을 말하니 제8 아뢰야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입니다. 깨치기는 깨쳤지만 소득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진짜로 깨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란 일체의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며 근본 미세망념인 제8 아뢰야까지도 완전히 끊어져서만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頓)이라 하는 것은 제8 아뢰야의 무기식(無記識)도 완전히 벗어나서 무소득(無所得)인 진여(眞如) 본성(本性)을 깨친 것, 불지(佛地)에 이른 것, 성불한 것, 묘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앞에서 육조스님이 말씀한 사종(邪宗)을 부순다는 것이 돈오(頓悟)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돈오문은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뜻으로 삼으며, 청정으로 본체를 삼고, 지혜로써 활용을 삼느니라.
此頓悟門은 …… 無念으로 爲宗이요 妄念不起도 爲旨며 以淸淨爲體요 以智爲用이니라.
무념(無念)이란 제8 아뢰야의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의 무념이요 불지(佛地)의 무념을 말합니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망념은 제6식의 분별 망념만이 아니고 근본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망념이 있는 이대로는 돈오(頓悟)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져서 완전한 무념(無念)을 성취하게 되면 무구식(無垢識)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하는 동시에 진여자성을 깨치게 되니 이것이 ‘청정(淸淨)으로 본체를 삼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청정하게 되면 거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성취되는데 그것을 활용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오(頓悟)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無記無念)까지도 완전히 끊어지고 참으로 청정무구한 대원경지를 성취하여 일체지가 완전히 현발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는 점차(漸次)가 있을 수 없고 다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다 공부를 해 마쳐 버린 뒤에 어떻게 닦을래야 닦을 것이 있겠습니까? 닦을 것이 있다 하는 것은 아직 병이 덜 나은 데서 하는 말입니다. 이 돈오(頓悟)란 완전히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경지를 말하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직까지 자기 업식(業識)이라든가 망념(妄念)이라든가가 남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있다면 육조스님이 말하는 조계정통의 선(禪)은 아닙니다. 요사이 선종(禪宗)을 보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방편이 있어 선계(禪界)를 지배하는데 그 내용이 어찌 되는지 자세히 검토를 하여 비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돈오점수(頓悟漸修)
⑴ 수심결(修心訣)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조스님의 사상변화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으로 대표되는 초년 시대인데 이때에는 선과 돈오점수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펴낸 절요(節要) 시기인데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나누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순과 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돌아가신 뒤의 유고(遺稿)에서 나왔다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의 시기인데 결의론에서는 선과 교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심결(修心訣)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야 因修乃證이니라. [修心訣]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누구나 먼저 깨쳐 신해하고 뒤에 닦아 결국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깨침의 모양을 밝히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해오(解悟)니 성품과 모양을 밝게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증오(證悟)니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若明悟相하면 不出二種이니 一者는 解悟니 謂明了性相이오 二者는 證悟니 謂心造玄極이니라. [節要]
해오(解悟)에서의 ‘해(解)’라 함은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佛法)의 성품 모양[性相]을 알긴 알았는데 그리하여 분별심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아는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이 해오(解悟)에 있어서는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증오(證悟)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구별이 전자는 구경각을 깨침을 말하고 후자는 사량분별로써 아는 것입니다. 심해(心解)니, 지해(知解)라 하기도 합니다. 해오에서는 구경각에 망상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지 실지는 자기 마음에 체험이 되지 못한 것이고, 증오(證悟)란 완전히 마음으로 체험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법문해 나가면서 이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관계가 번번이 나오는데 철저히 이해해야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선(六祖禪)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오(解悟)인 지해(知解)는 절대로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해(知解)라는 것, 해오(解悟)라는 것은 삿된 종[邪宗]인 것입니다.
다만 번뇌의 마음속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마치 거울에 밝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음을 신해하여 결정코 의심이 없음을 해오라고 한다.
但信解煩惱心中의 本有覺性이 如鏡有明性하야 決定無疑를 名爲解悟니라. [節要]
중생이 번뇌망상 그대로 있긴 있지만 번뇌망상 그 자체가 공(空)해서 모든 부처님의 불성(佛性)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이것을 믿고 알아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지로 깨쳐서 체득한 것이 아니고 분별심으로 믿고 안다[信解]는 것입니다.
규봉이 먼저 해오를 하고 뒤에 닦는다는 말의 뜻을 깊이 밝혀 말하였다. 얼음 못이 전부 물임을 아나 따뜻한 기운을 빌려 녹이고, 범부가 부처임을 해오하나 법력을 북돋우어 닦음을 돕는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씻는 공을 나타내고, 망상이 다하면 신령하게 통하여 빛에 통하는 작용이 나타난다.
圭峰이 深明先悟後修之義 曰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以鎔消하고 悟凡夫而卽佛하야 資法力以熏修라 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하고 妄盡則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
이 글은 『수심결』에 나오는 것인데,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先悟後修] 하는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못 전체에 얼음이 꽝꽝 얼어붙어 있는데,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이것을 신해(信解)니 해오(解悟)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인 중생 이대로가 본래 부처라는 것, 범부의 본래 성품이 천진해서 부처님의 성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해오(解悟)라는 것입니다. 알긴 알지만, 실지에 있어서 부처를 이룬 것은 아니고 범부 그대로 있습니다. 얼음 그대로가 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중생의 번뇌망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자주 닦아 가야 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곧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여기서 돈오(頓悟)라 하는 것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중생 그대로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돈오(頓悟)를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그러니만치 얼음이 그대로 있듯이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운을 빌려야 하고,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꾸자꾸 닦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육조스님의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습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 없습니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 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한편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깨달음[悟]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으니, 따뜻한 기운을 빌려 얼음을 녹이듯이 공부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망상을 다 끊어야 하니 거기에 점수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육조의 선종정맥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깨달음[悟]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돈오(頓悟)라는 말만으로 겉으로 볼 때는 다 같지만, 깨달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래서 닦아야 될 수 있는, 점수라야 될 수 있는 이것을 사종(邪宗)이라 하고 지해종(知解宗)이라고 했지 육조스님의 정전이라고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돈오점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하택 신회(荷澤神會)이며, 그 주장을 따르는 이가 규봉(圭峰)으로 규봉이 돈오점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규봉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 뜻을 총괄하여 결정하였다. 자성이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달아[頓悟] 이것에 의지하여 닦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하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능히 생각생각에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점 백천삼매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구르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이 선이다. 곧 돈오점수의 뜻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옳지 않다.
圭峰이 摠判先悟後修之義 云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에 轉展相傳者는 是此禪也라 하니 則頓悟漸修之義는 如車二輪하야 闕一不可니라. [修心訣]
방금 앞에서도 말했지만 돈오점수를 교가(敎家)에서만 말한 것이라 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달마문하에 굴리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돈오점수의 선(禪)이라고 선언하여 버렸으니, 이것이 큰 문제이며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선과는 정면 충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를 말하고 점차(漸次)가 없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돈오를 해서 점수를 한다 하였으니 육조정전(六祖正傳)의 선(禪)과는 근본적으로 반대입니다. 또 돈오점수를 달마의 선종이라고 말함으로써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니 이 자성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모든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라고 한다.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쳤다 할지라도 시작 없는 습기를 갑자기 단박 없애 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깨침을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하며 노력하여 오래 성태(聖胎)를 길러 마침내 성인을 이루는 까닭에 점수(漸修)라고 말한다.
一念廻光하야 見本自性하야 而此性地에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로 分毫不殊일새 故로 云頓悟也요 雖悟本性이 與佛無殊나 無始習氣를 難卒頓除故로 依悟而修하야 漸熏功成하야 長養聖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漸修也니라.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얼음이 본래 물인 것을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돈오니 견성(見性)이니 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했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마명보살이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것이나, 그 뒤에 원효나 현수 같은 대법사들이 말씀하신 것이나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가 말씀하신 것은 모두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하였다’,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여 대무심지에 있다 하여도 이것은 견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견성이라 해버렸으니 여기에도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돈오점수를 말할 때에 달마선이 돈오점수라 한 것도 선종정맥 사상과 정반대가 되어 있고, 이것을 또 견성이라 한 것도 정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문은 일천 성인의 가는 길이다.
此頓漸兩門은 千聖軌轍也니라.
일천 성인 일만 성인이 다 이 돈오․점수 두 가지 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돈오하였으나 이 옛날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운 까닭에 역순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거나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로 노력하고 힘쓰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쉰 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頓斷故로 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가 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中로 功中着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到大休歇之地리오.
돈오점수 사상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내용입니다. 즉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다 하였으니 중생 그대로입니다.
중생이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일체 망상이 다 끊어져서 실지로 본성을 바로 깨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닦아서[後修] 무명을 다스려서 구경에 이른다는 것이 점수(漸修)입니다. 돈오한 뒤에는 어떻게 점수(漸修)해야 되는가?
깨친 뒤에는 오랫동안 모름지기 비추어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결코 따라가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친 뒤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悟後에 長須照察하야 妄念이 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았지만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지해심으로써 자꾸 덜고 덜어서 망상이 다 끊어져야만 무위(無爲)에 들어가서 구경이 되며, 천하 선지식들도 망상이 있는 거기에서 자꾸자꾸 목우행을 하여 비로소 구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목우행(牧牛行)을 보림(保任)이라고도 하는데 점수설(漸修說)에서 말하는 것은 예전 큰스님들의 목우행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자명(慈明)스님이 지은 목동가(牧童歌)가 있는데 거기 보면 참으로 구경을 성취해서 호호탕탕히 자재하고 무애한 행을 목우행이라 하였지 망상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먼저 돈오하였으나 번뇌가 두텁고 익힌 업이 여물고 무거워 경계를 대함에 생각생각에 정을 낳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마음에 상대하여 혼침․산란에 시달려 항상한 적지(寂知)를 잃어버리는 자는 상(相)을 따르는 문인 정혜를 빌어서 다스림을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복하여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雖先頓悟나 煩惱濃厚하고 習業이 堅重하야 對境而念念生情하고 遇緣而心心作對하야 被他昏亂의 使殺하야 昧却寂知常然者는 卽借隨相門定慧하야 不忘對治하고 均調昏亂하야 以入無爲卽其宜矣라.
비록 깨치긴 깨쳤으나 번뇌가 많고 익힌 업이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거나 인연을 만나거나 하면 혼침과 산란이 그대로 있습니다. 망상이 그대로 있느니만치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산란이 되고 또 망상이 없을 때에는 혼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혼침 아니면 산란이고 산란 아니면 혼침이니 그렇기 때문에 ‘객진의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침°산란을 정혜(定慧)를 빌어서 다스리고 균등히 조절하여 구경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먼저 반드시 돈오하여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이는 해오이다. 장애를 없앰으로 말하면 해가 단박 떠오름에 서리와 이슬이 점점 사라지고, 덕을 이룸으로 말하면 어린아이를 낳음에 기운이 점점 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되,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루고 연후에 삼현․십성을 차례로 닦아 깨친다고 하였다.
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也니 約斷障說하면 如日頓出에 霜露漸消오 約成德說하면 如孩子頓生에 志氣漸立이니라 故로 華嚴에 說호대 初發心時卽成正覺然後에 三賢十聖을 次第修證이라 하니라. [節要]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룬다’ 함은 우리의 본성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지 깨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현(三賢)의 끝이 40위(位)이며 십지(十地)의 끝이 50위인데 자꾸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삼현․십성을 차례로 닦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말함이니 근기의 성품과 욕락이 모두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를 증득한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분명히 밝아서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장애를 끊음은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물드는 것과 같다. 하택이 말하였다. ‘한 생각에 본래 성품과 상응하여 팔만 바라밀행을 일시에 함께 쓴다.’ 또한 사적상에서 말하면 우두 융대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頓悟頓修者는 此說上上智니 根性樂欲이 俱勝하야 一聞千悟하고 得大摠持하야 一念不生하야 前後際斷이니 此人三業은 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及이니라 斷障은 如斬一綟絲에 萬條頓斷이오 修德은 如染一綟絲에 萬條頓色이니라 荷澤이 云一念에 與本性相應하야 八萬波羅蜜行을 一時齊用也라 하니 且就事迹而言之컨댄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으니까 차제로 삼현․십성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한칼에 한 뭉치 실을 다 베어 버리듯이, 또한 뭉치실을 다 물들여 버리듯이 하나 끊을 때 전체가 다 끊어지고 하나 물들일 때 전체가 다 물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一念不生 前後際斷]’고 하였는데 만약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도 육조스님이 말하는 돈오돈수는 아닙니다. 여기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제8 아뢰야식에 주저앉게 되어 실지 돈오돈수가 아닙니다.
만약 신해가 있으면 옛날 성인과 손을 잡고 같이 간다.
若有信解處하면 與古聖으로 把手共行이니라.
만약 믿음이 이룩되면 의정이 단박에 쉬어 올바른 견해가 나서 스스로 긍정하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해오이다. 믿음의 원인 속에서 모든 부처님 과덕에 계합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을 이룬다.
若信得及하면 疑情頓息하야 發眞正見解하야 自到自肯之地 則是解悟處也니 亦云於信因中에 契諸佛果德을 分毫不殊하야사 方成信也라 하니라. [節要]
믿음을 이룸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믿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믿어서 망분별의 의심이 없는 데 이르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생이 부처님 자성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확신해서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실질적인 믿음, 신해(信解)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해오(解悟)와 신해(信解)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하여 성품을 의지해 선(禪)을 닦는다. 이것이 예로부터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루는 긴요한 기술이다.
先須信解自身의 性淨妙心하야사 方能依性修禪이니 是乃從上己來로 自修佛心하야 自成佛道之要術也니라. [結社文]
보조스님이 『결사문』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한 말씀입니다. 신해(信解)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은 해오(解悟)와 똑같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신해에 의지하여 차차로 닦음이 무방하다.
先須信解心性이 本淨하고 煩惱本空하야 而不妨依解熏修者也니라.
신해, 즉 해오에 의지해서 차차로 닦는다는 것, 즉 점수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논하듯이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이치는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今之所論心性이 本淨하고 煩惱本空之義는 是當最上乘禪이니라. [結社文]
규봉의 도서(都序)에 있는 말을 보조스님이 인용하였는데 앞에서 ‘달마문하에서 굴리어 펴서 서로 전한 것은 이 선이다’고 말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결사문(結社文)에서도 신해(信解)가 곧 달마 최상승선이라고 해버렸습니다.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 이 최상승 법문에 의지하여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기의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결정코 신해하여 이 신해에 의지해서 닦는 이는 상근기이다.
若是大心衆生이 依此最上乘法門하야 決定信解自心이 是佛心이요 自性이 是法性하야 依解而修者는 爲上根也니라. [修心訣]
신해(信解)에 의지하여 점수를 하는 것을 상근기라 하고 결국 최상승법문이라 하고, 달마가 바로 전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오했다는 것, 신해하고 해오했다는 그 깨친 정도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나(처음 깨친 사람은 설법이나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모두 적확하지 않다) 점점 말을 하게 됨에 이르고(법을 해설한다), 점점 행동하여(십지의 십바라밀이다) 바로 평소같이 (성불)된다.
初未能言이나(初悟之人은 說法答他問難이 悉未的也니라) 乃至漸語하여(解說法也라) 漸漸行季하야(十地十婆羅蜜也라) 直至平復(成佛)하나니라. [節要]
보조스님이 말하는 돈오한 사람, 해오한 사람의 경지가 어찌 되느냐 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법문도 옳게 못하고 문답도 못 하지만 점점 닦아 가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선종정맥에서는 깨쳐서 법담을 잘한다 하여도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오스님 같은 이는 수좌를 저 폭포수에 집어넣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물어서 척척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옳게 알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그런데 규봉이나 보조스님은 아직까지 법문도 못 하고 문답도 못 하는 것을 돈오하고, 해오라고 하여 깨쳤다고 하니 이것을 어찌 선종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오(解悟)한 사람의 자리[位]는 어떻게 되느냐?
해오 후에 십신 처음 자리에 드느니라.
悟後에 入十信初位니라. [節要]
십신(十信)이라는 것은 삼현(三賢)의 앞입니다. 삼현의 앞인 십신위(十信位)를 오해(悟解)라 하고, 해오(解悟)라 하고, 신해(信解)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모두 다 십지°등각도 견성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십신위(十信位)를 견성위(見性位)라 했으니 문제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변명하기를 원교십신(圓敎十信)이라고 말합니다. 원교십신이란 원융무애하여 십신(十信)이 십지(十地)고 십지(十地)가 십신(十信)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변명하지만 그 실지의 경계는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어 번뇌망상은 그대로 있느니만치 십신(十信)은 어디까지나 십신(十信)이지 이것이 십지(十地)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성이 청정하고 자성이 해탈임을 돈오하여 점점 닦아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얻게 된다.
必須頓悟自性淸淨自性解脫하야 漸修令得離垢淸淨離垢解脫이니라. [圭峰]
‘때를 여읜 청정’, ‘때를 여읜 해탈’이란 말은 ꡔ섭대승론ꡕ에 나온 말입니다. 규봉이 돈오점수를 설명할 적에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안 것이 자성 청정과 자성 해탈을 깨친 것이라 하고, 그리고 점점 닦아서 망상을 제거하여 실지 때를 다 없애 버리면 때를 여읜 청정[離垢淸淨], 때를 여읜 해탈[離垢解脫]을 얻게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이 청정함과 자성이 해탈임을 먼저 깨달아서 다음에 점수해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정맥에서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이나 이구청정(離垢淸淨)이나 할 것 없이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해야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이외는 돈오라고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말씀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것이 전부 사종(邪宗)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세상에 나와 사종(邪宗)을 부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홍주는 돈오문엔 비록 가까우나 적중하지 못하고, 점수문엔 전연 어긋난다.
洪州는 於頓悟門엔 雖近而未的이오 於漸修門엔 而全乖니라. [圭峰―節要]
‘홍주(洪州)’는 홍주에 계신 마조(馬祖)스님을 말합니다. 마조는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확실히 바로 깨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는 돈오는 설사 십지°등각이라 해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견성한 것이 아니고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니, 제8 아뢰야 무심경계까지도 완전히 벗어난 참다운 무념의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봉스님은 번뇌망상이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였으니, 규봉이 볼 때는 마조스님이 말하는 견성이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틀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조(馬祖)는 점수문에 있어서는 도무지 맞는 것이 없어 잘못되어서 전부 어긋난다고 규봉도 주장합니다. 마조에게는 점수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조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한 데서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여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규봉 자기가 보는 것은 마조스님에게 점수문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조스님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고 규봉스님은 아직 병이 그대로 있어 약을 더 써야 할 입장입니다. 규봉스님 말대로 하자면 병 다 나은 사람도 생다리를 부러뜨리고, 생배를 째서 억지로 병원으로 가서 약을 써야 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을 가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병신을 따라가야 될 건가 아니면 성한 사람을 따라가야 될 건가,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자연히 알 걸로 생각됩니다. 도를 닦는 근본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쓸 필요 없이 참으로 자유자재한 근본 해탈이 목적이지, 실제로 병 그대로 가지고 약을 먹고 붕대를 첩첩이 감고 다니면서 내가 돈오했다, 견성했다는 길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규봉스님의 입장과 마조스님의 입장이 이렇게 틀려 있습니다.
선종에 있어서 누구든지 간에 마조가 정맥이냐 규봉이 정맥이냐 하면, 천하의 선종에서 규봉을 지해종(知解宗)이라 배격을 했지 마조를 틀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조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규봉 혼자만이고 그 규봉을 지지한 사람이 보조스님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망정의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면 곧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혹 마음을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아직 원만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 버려야 하니 다시 생애를 세워서 크게 깨침을 기약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혹 깨친 마음이 다하지 못함을 실천으로써 다하고자 하면 마치 섶을 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더욱 불타오를 뿐이다.
若有纖毫라도 情習이 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라 或心悟不圓하면 須是掃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이 可也오 其或謂悟心未盡을 以履踐으로 盡之라 하면 如抱薪救焚하야 益其熾矣니라. [中峰 山房夜話]
마음을 깨침이 원만치 못하다 함은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미세한 제8 아뢰야 근본 무명이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알 때는 다시 발심하여 크게 철저하게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천(履踐) 즉 보림(保任)한다, 점수(漸修)한다 하여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불은 끄지 못하고 불꽃만 더욱 사납게 타오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2) 마조스님 3) 백장스님 4) 대주스님 5) 교외별전
2. 견성의 본질
1) 견성성불(見性成佛) 2) 무념무심(無念無心) 3) 오매일여(寤寐一如) 4) 사중득활(死中得活)
5) 대원경지(大圓鏡智) 6) 상적상조(常寂常照) 7) 아난의 득도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頓悟頓修)
2) 돈오점수(頓悟漸修)
1) 수심결(修心訣) 2) 절요(節要)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⑵ 절요(節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은 교가(敎家)에서는 혹 방편적으로 용납이 되지만 조계 선종정맥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것을 대중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해동(海東)으로 와서 보조스님은 그런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든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오점수사상은 보조스님 저술에 있어서 수심결(修心訣)과 결사문(結社文)의 두 저술에서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결사문』은 보조스님 서른세 살에 팔공산 거조암(居祖菴)에 계실 때 지은 글입니다. 『수심결』은 지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상적으로 봐서 『결사문』 이후에 된 저술은 사상의 전환이 많은데 그 전환점을 기준하여 보면 수심결이 『결사문』 지을 때와 같은 보조스님 초기의 저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서른세 살에 거조암(居祖庵)에 계시면서 『결사문』을 짓고 약 십 년 후인 마흔한 살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대혜어록』을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전에는 돈오해서 점수한다는 그 사상의 범위 안에 있었는데 상무주암으로 가서 ‘얻은 바가 있고’부터는 정해(情解) 즉 지해분별을 원수와 같이 여기고 번뇌망상을 벗어나서 바로 안락하여 지해가 조금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무주암에 몇 해 계시다가 송광사로 가서 한 십 년 계시다 5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반년 전 52세 되시던 겨울에 완성한 책이 절요(節要)인데, 여기에서는 『수심결』이나 ꡔ결사문ꡕ과는 달리 사상적 전환이 있습니다. 즉 절요(節要)에 있어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교종(敎宗)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禪宗)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하택 신회는 지해종사(知解宗師)다. 비록 조계의 정통은 아니나 오해(悟解)가 높고 밝아서 결택이 밝으니 종밀스님이 그 종의 뜻을 이은 까닭으로 이 책에서 그것을 펴서 활연히 볼 수 있게 한다. 지금 교를 인해서 마음을 깨친 이를 위하여 번거로운 말을 제거하고 요점을 드러내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는다.
荷澤神會는 是知解宗師라 雖未爲曹溪嫡子나 然이나 悟解高明하야 決澤이 了然하니 密師宗承其旨故로 於此錄中에 伸而明之하야 豁然可見이라 今爲因敎悟心之者하야 除去繁事하고 鈔出網要하야 以爲觀行龜鑑하노라.
『수심결』이나 『결사문』의 시절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20년 후에 지은 ꡔ절요ꡕ에 와서는 돈오점수는 지해종사(知解宗師)인 하택의 사상인데 그것을 규봉이 이었다고 선언하고 이것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한다는 조건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를 보다가 마음을 깨쳤다 함은 해오(解悟)이고 신해(信解)를 말합니다. 해오를 성취하여 깨쳤다고 하지만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는 사람들, 즉 교가를 위해서 돈오점수를 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규봉(圭峰)스님은 어떤 분인가? 규봉스님은 처음에는 하택의 법을 이어받아 선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청량국사의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보고 완전히 화엄종으로 가버린 스님, 즉 선을 버리고 교에 들어간[捨禪入敎] 스님입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살펴서 소(疏)로써 경(經)을 통하고 초(鈔)로써 소를 해석하니 일생의 남은 의심이 모두 다 없어져 버리고, 바깥 경계와 안의 마음이 활연히 간격이 없어졌나이다. 서원컨대 세세생생토록 목숨이 다하도록 널리 펴게 하여 주소서.
忘飧輟寢하고 夙夜披尋하야 以疏通經하고 以鈔釋疏하니 一生餘疑가 蕩如瑕翳하야 外境內心이 豁然無隔하니 誓願生生에 盡命弘闡하야지이다. [圭峰 上淸涼書]
이것은 규봉스님이 청량국사에게 한 편지입니다.
규봉이 참선을 닦았지만 의심도 많고 경계에 통하지 못하였는데 청량국사의『화엄소초』를 보고 침식을 잊고 연구하여 의심을 완전히 풀고 자기 경계도 완전히 통하게 되었으니 이 『화엄소초』를 목숨이 다하도록 받들고 펴겠다고 서원하고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에 능히 나를 따라 노니는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毘盧華藏에 能隨我以遊者其汝乎인저. [淸涼 印可圭峰]
규봉의 편지에 대한 청량국사가 답한 부분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 즉 화엄경 4법계(四法界)에서 능히 나를 따라서 같이 놀 사람은 바로 너라고 청량국사가 규봉스님을 아주 원만하게 인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규봉스님은 실질적으로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어 화엄오조(華嚴五祖)가 되었습니다. 규봉스님은 교가의 입장에서 선(禪)을 취급하다 보니 선(禪)과 교(敎)를 혼동하여 돈오점수가 달마선이라고 끝끝내 평생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초년에는 자기가 잘 몰라서 돈오점수가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말년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이것이 또 규봉스님과 보조스님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규봉스님은 어째서 평생을 돈오점수를 주장했는가?
좋아하는 생각은 막기 어렵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아 생각 쉬기를 모두 10년을 하였다. 그랬더니 창틈에 햇빛이 비치면 티끌먼지가 요란하듯, 맑은 물 속에 그림자가 두렷이 비치듯, 미세한 습정이 기멸하면 고요한 지혜에 비춰지고 차별된 법의(法義)가 늘어서면 빈 마음에 드러났다.
自慮愛見을 難防하야 遂捨衆入山하야 習定均慧하야 前後息慮를 相計十年하니 微細習情이 起滅하야 彰於靜慧하고 差別法義羅列하야 見於空心하야 虛隙日光에 纖塵이 擾擾하고 淸潭水底에 影像이 昭昭하니라. [都序]
규봉스님이 평생토록 돈오점수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이 확실합니다. 한 십 년 동안 정(定)과 혜(慧)를 닦으니 고요한 지혜가 조금 있기는 있으나 그 가운데 망상이 먼지 일어나듯 하니 마치 아침에 해가 뜰 때 창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면 거기에 먼지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듯 하고 맑은 못에 그림자 모양이 환하게 밝으나 모든 차별법과 망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는 경계입니다. 규봉스님이 만약 이 경계를 벗어났다면 완전히 병이 다 나은 얘기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 언제든지 병신의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이 다 낫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보게 되니까 달마선이 돈오점수라고 주장하게 되고 돈오점수사상이 규봉의 근본사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조스님은 초년에 잘 모르고 『수심결』이나 『결사문』을 지을 때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절요』에서는 분명히 바로잡았습니다.
그 본체를 몸소 증득한 후에 그를 인가하여 남은 의심을 다 끊게 한 까닭에 묵묵히 심인을 전했다고 한다. 여섯 대까지 서로 전한 것이 모두 이와 같다.
是親證其體 然後에 印之하야 令絶餘疑故로 云黙傳心印이라 하니 六代相傳이 皆如此也니라. [節要]
이것은 『절요』의 말씀인데 6대, 즉 달마스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이 모두 다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심결』에 있어서는 달마스님이 전한 법이 모두 해오(解悟)라 하였는데 그후 한 십 년 지난 뒤인 『절요(節要)』 와서는 선(禪)은 해오가 아니고 증오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으니 마침내 보조스님이 사상을 전환한 것이 됩니다.
먼저 모름지기 돈오하고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해오(解悟)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니라. 지금 또 원돈신해자가 말함이요,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有云先須頓悟하고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也라 今且約圓頓信解者信之爾오 若敎外別傳은 不在此限이니라. [節要]
앞 구절은 규봉스님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절요(節要) 목판본에는 ‘此約解言也’라 되어 있는데 중국판이나 일본판에서 보면 ‘此約解悟也’라고 분명히 나와 있느니만치 한국판이 잘못되었습니다. 처음 규봉스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말씀을 해놓고 끝머리에 가서 결론으로 이것은 원돈신해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 하고서 교외별전은 돈오점수가 아니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보조스님이 말년에 가서는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년뿐 아니라 초년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사문하에서 이심전심으로 비밀한 뜻을 지적해 전해 주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琪)화상이 “조상의 도를 깨쳐서 반야를 펼쳐 낼 이가 말세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권수정혜결사문』에서 대승 경론의 이치를 들어 명확한 논거를 삼고, 현전문(現傳門)에서 신해(信解)가 틔워지는 실마리(동기°이치)를 간단히 판별하였다.
若是祖宗門下에 以心傳心하야 密意指授之處는 不在此限이니라 琪和尙이 云能悟祖道하야 發揮般若者는 末季에 未之有也라 故로 此勸修文中에 皆依大乘經論之義하야 爲明證하고 略辨現傳門信解發明之由致하노라. [結社文]
이것을 보면 초년에 있어서도 돈오점수가 조종문하의 근본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실지로 철두철미하게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사상이 들어 있었다면 ‘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이 돈오점수의 선’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초년에는 확실한 견해가 없고 분명히 몰랐기 때문에, 즉 선과 교를 혼동해서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절요』에서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원돈신해의 교가(敎家)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교외별전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말한만치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법문은 또한 말을 의지해서 해오를 일으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법에는 수연과 불변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그러나 만약 오직 말에 의지하여 지해만 내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면 비록 종일 관찰하나 도리어 지해에 얽매이는 바 되어 쉴 때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지금 납승문하에서 말을 떠나 들어가서 단박에 지해를 잊는 사람을 위함이니 비록 규봉스님이 좋아하는 바는 아니나 조사 선지식이 경절의 방편으로 배우는 이를 제접하는 언구를 간략히 이끌어서 이 뒤에 부쳐 놓아 참선하는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몸 살아나는 한 가닥 활로를 알게 한다.
上來所擧法門은 並是爲依言生解悟入者하야 委辨法有隨緣不變二義하고 人有頓悟漸修兩門이라 然이나 若若一向依言生解하야 不知轉身之路하면 雖終日觀察이나 轉爲知解所縛하야 未有休歇時일새 故로 更爲今時衲僧門下에 離言得入하야 頓亡知解之者하노니 雖非密師所尙이나 略引祖師善知識이 以徑截方便으로 提接學者의 所有言句하야 係於此後하야 今參禪峻流로 知有出身 條活路耳로다. [節要]
이것은 절요(節要)의 결론 부분입니다. 돈오점수는 말을 의지해 알음알이를 내는[知解] 자들을 위해서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원토록 그 지해(知解)에 얽매여서는 참으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납승문하 곧 선종을 의지해 일체 언구를 떠나야만 깨친다는 것입니다. ‘단박에 지해를 잊어버리는’ 선종은 규봉스님이 좋아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규봉이 반대한다고 선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보조스님의 입장입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선(禪)과 교(敎)를 혼동해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돌아가시기 반년 전 이 절요(節要)를 낼 때에는 사상이 전환된 것이 확실합니다.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교가(敎家)의 지해종(知解宗)을 위한 것이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했으니만큼 참선을 한다는 사람이면 지해종(知解宗)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선종정맥(禪宗正脈)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사이 우리나라의 선방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젊은 날 행각할 때나 늙은 지금이나,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초년에 잘못된 『수심결』만 보고 자꾸 돈오점수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팔백 년 후인 지금에 돈오점수가 선종사상(禪宗思想)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스님이 살아계셔도 웃을 일입니다. 거듭하는 말입니다만 규봉스님은 평생 동안 교(敎)와 선(禪)을 완전히 구별하지 못하고 돈오점수를 끝끝내 달마선종이라고 고집해서 중대한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지만, 보조스님은 말년에 가서 돈오점수가 선(禪)이 아님을 밝혔으니 허물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ꡔ절요(節要)ꡕ에 있어서도 자가당착의 모순점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만법을 꿰뚫으니 뜻의 맛이 가이없다. 모든 교(敎)는 벌려 놓음이요, 선종은 간략함이다. 간략함이란 법에는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으니, 두 가지 뜻이 나타나면 모든 경론의 뜻을 다 알 수 있고, 두 문이 열리면 일체 현성의 가는 길을 볼 것이니 달마의 깊은 뜻은 여기[돈오점수]에 있다.
心貫萬法이라 義味無邊하니 諸敎는 開張이오 禪宗은 撮略이니라 撮略者는 就法하야 有不變隨緣二義하고 就人하야 有頓悟漸修兩門하니 二義現하면 卽知一藏經論之指皎요 兩門이 開하면 卽見一切賢聖之軌轍이니 達磨深旨意在斯焉이니라. [節要]
분명히 보조스님 자신이 달마스님의 깊은 뜻이 돈오점수에 있다고 해놓고, 다시 그 뒤에서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敎外別傳者 不在此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전한 것 외의 교외별전이 따로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마가 두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돈오점수를 전한 달마가 있고, 교외별전을 전한 달마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상으로 볼 때 달마가 두 사람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면 으레 달마선종을 말하는 것이고, 달마(達磨)란 한 사람뿐이지 두 사람이 없으니 그러면 이 문제는 분명히 자기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이 『절요』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수심결』과 『결사문』에도 있어서 달마선종을 혼동시켜 놓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심결』에서 ‘먼저 깨치고 뒤에 닦으니 …… 이것이 최상승선이며 …… 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것이다’ 하고, 『정혜결사문』에서는 ‘지금 논한 바는 …… 최상승선이니 …… 조종문하에 있어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홍주종은 돈오문에 비록 가깝기는 하나 적중하지 않음이요, 점수문에 있어서는 모두가 어긋난다. 무릇 마음 닦는 사람은 오직 하택스님을 믿고 따를 뿐이요 다른 종은 믿고 가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彼宗(洪州)은 於頓悟門에 雖近而未的이오 於漸修門에 而全乖라 하니 凡修心人이 唯取信於荷澤이오 不取信於餘宗이 必矣라.
이 부분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앞의 말을 끌어 놓고서 오직 돈오점수의 하택스님을 따라갈 것이지 마조스님이나 우두스님 같은 분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참 곤란한 말입니다. 마조스님은 조계정전(曹溪正傳)으로서 천하가 다 공인하는 사실인데 자기 입으로 하택은 지해종사라 하고 조계적자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야 되겠느냐 하면 지해종[荷澤神會 是知解宗師 …… 爲因敎悟心之者]인 하택과 규봉을 따라가야 된다 하니 이것도 모순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냉정히 비판적 입장에 서서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보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6년 후에 수제자되는 진각(眞覺)스님이 간행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라는 두 가지 책입니다.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유고 속에서 발견되어서 출판했는데 거기에 와서는 완전히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간화결의론』에서는 ‘선이란 화두를 해서 깨친 증오(證悟)다’라고 철두철미하게 주장하여, 해오(解悟)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돌아가시기 반년 전에 『절요』에 그런 모순과 혼란이 있었는데 반년 뒤에 과연 명백하게 ‘증오(證悟)만이 선이고 해오(解悟)는 선이 아니다’고 하여 평생에 주장해 온 사상의 대전환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보조스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뒤에 수제자인 진각스님이 지었다고 혹 추측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책이 생전에 나오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뒤에 곧 출판한 것도 아니고 6년 뒤에나 나왔으니 6년이란 세월을 왜 그냥 흘러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든가 저렇든가 『간화결의론』이 ꡔ절요ꡕ보다 그 사상이 한 걸음 나아간 것만은 사실이며, 또 그것이 보조스님의 친저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보조스님 돌아가신 뒤에 조계산 송광사 문하에서 ‘돈오점수는 교종이며 선종은 아니다’고 분명히 표시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진각스님이 스스로 발문도 짓고 여러 가지 설명을 붙여서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팔백여 년 후 오늘날 선방에서는 어째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이 판을 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보조스님을 몰라도 너무들 모르고 있습니다.
보조스님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원돈신해(圓頓信解),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사구(死句)라 하고, 경절문(徑截門) 즉 선종의 화두를 깨치는 증오문(證悟門)을 활구(活句)라 하고서 사구(死句)를 근본으로 하는 원돈신해․돈오점수의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활구(活句)를 근본으로 하는 증오문으로 들어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돈신해문은 말 길과 뜻 길이 있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이어서 초심학자들도 믿고 받들어 가질 수 있다. 경절문은 비밀히 계합함을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어서 말 길과 뜻 길이 없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상근기의 큰 지혜가 아니면 어찌 밝게 얻을 수 있으며 어찌 뚫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통의 배우는 무리가 의심하고 비방함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다.
圓頓信解門有語路義路하며 聞解思想故로 初心學者亦可信受奉持나 徑截門則當於親證密契하야 無有語路義路하며 未容聞解思想故로 若非上根大智면 焉能明得이며 焉能透得耶아 以故汎學輩가 飜成疑謗이 理固然矣이라.
돈오점수를 근본으로 삼는 원돈신해, 즉 해오라는 것은 말 길도 있고 뜻 길도 있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있어서 누구든지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절문의 선종은 최후의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없어서 참으로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꾸 의심을 하고 비방을 하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돈의 이치가 비록 가장 원묘하나 모두 식정(識情)이 듣고 알며 생각하는 헤아림이므로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경절의 깨쳐 들어가는 문에서는 하나하나 모두가 불법에서 지해 병을 구별한다.
此(圓頓)義理가 雖最圓妙나 總是識情聞解思想邊量故로 於禪門話頭參詳徑截悟入로는 門에 一一全揀佛法知解之病也니라.
원돈신해의 이치가 원묘해서 들어보면 그럴 듯하지만 전체가 분별망상 속에서 하는 말이지 실지의 공부가 아니며 불법에 있어서 지해(知解)의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원돈사상은 불법에 있어 지해의 병이며 참된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돈신해의 여실한 말과 가르침을 사구(死句)라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만 낳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심학자로서는 경절문의 활구(活句)에 자세히 참구하기 어려우므로 법계 원융사상을 말하여 그것을 신해하게 하여 물러가지 않게 한다. 만약 상근기의 사람이 비밀히 전한 것을 감당하여 과굴을 벗어난 사람인댄 잠깐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듣자마자 지해의 병에 막히지 아니하고 곧 떨어지는 곳을 안다. 이는 한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대총지를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圓頓信解如實言敎를 謂之死句니 以令人生解碍故라 並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에 未能參詳故로 示以稱性圓談하야 令其信解하야 不退轉故니 若是上根之土 堪任密傳하야 脫略窠臼者인댄 纔聞徑截門의 無味之談하면 不帶知解之病하고 便知落處하나니 是謂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者也니라.
원돈신해, 돈오점수는 죽은 말[死句]이다. 왜냐하면 지해만 늘어가서 근본적으로 해탈할 길이 없으니 이 길을 가지 마십시오. 초심학자들은 경절문의 산 말[活句]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엄의 법계원융사상을 신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혹 죽은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만약 여기에 집착하면 결국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이니, 실지로 살아남는 길, 활구, 경절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근의 사람이 교외별전을 감당하여 지해사상을 다 벗어 버리면 한번 깨칠 때 전체를 깨치고 한번 끊을 때 전체를 끊어서 돈오돈수의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경절문의 화두를 자꾸 참구할 것 같으면 즉 누구든지 활구(活句)를 의지해서 공부할 것 같으면 확철히 깨치고 대총지를 얻어서 구경을 완전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 길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릇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라. 활구 끝에서 깨치면 영원토록 잊지 않고, 사구 끝에 깨치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夫參學者는 須參活句하고 莫參死句니 活句下에 薦得하면 永劫不忘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가적(敎家的)인 원돈신해(圓頓信解),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구(死句)로는 들어가지 말고 경절문(徑閒門)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화두(話頭)를 참구해야 합니다.
활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여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지만, 사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자기의 번뇌망상도 없애지 못하여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분명히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는 보조스님이 활구와 사구로 나누어서 말씀했습니다.
홀연히 재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화두 위에서 확철히 깨치면 일심의 법계가 통연히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심성이 갖춘 백천삼매와 무량묘의의 문을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는다. 종전 치우친 의리와 문해로써 얻은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증입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忽然 於沒滋味無摸索底話頭上에 噴地一發則一心法界가 洞然明白故로 心性所具百千三昧와 無量義門을 不求而圓得也니 以無從前一偏義理聞解所得故로 是謂禪宗徑截門 話頭參詳證入之秘訣也니라.
화두 참선하여 깨친 경계는 해오(解悟),신해(信解)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간화결의론』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증오(證悟)로써 근본을 삼아 말하였지 해오(解悟)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보조스님이 임종에 가서는 선(禪)과 교(敎)를 분명히 알아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교가의 방편설이지 교외별전의 선종정맥사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확철히 깨친 사람은 무장애법계를 몸소 증득한다.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는 乃能親證無障碍法界矣라.
선종의 경절문을 확철히 깨친 이는 법계 일심을 몸소 증득한다.
禪宗徑截門 噴地一發者는 親證法界一心이라.
여기에서 ‘증득한다[證]’ 함은 최후 구경각을 깨친 것을 말하며,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나 법계일심(法界一心)은 같은 내용으로서 불지(佛地)를 말합니다.
홀연 확철히 깨치면 법계가 통연히 명백하여 자연히 원융하여 일체 덕을 갖춘다. 육조조사가 말씀하듯 자성이 삼신을 갖추고 사지를 밝혀서 성취하니 보고 듣는 인연을 떠나지 않고서 초연히 불지에 오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忽然噴地一發則 法界洞明하야 自然圓融具德하나니 如曹溪祖師所謂自性이 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가 是也니라.
화두를 깨쳐서 자성을 밝힌 사람, 곧 견성(見性)한 사람은 삼신(三身),사지(四智)가 원만히 구족한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니 이것이 증(證)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이로써 선문에서 생각을 떠나 서로 전한 것은 법계를 돈증하는 곳임을 알라.
是知禪門離念相傳은 是頓證法界處也라. [圓頓成佛論]
이 말씀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 있습니다. ꡔ원돈성불론ꡕ도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발견된다는 책으로서, 그 내용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해오(解悟)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외별전인 선종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니,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리면 도를 친하기 쉽다’고 하니 이것은 법계처를 돈증하는 곳을 말한다.
故로 云得意忘言道易親이라 하니 是謂頓證法界處也라.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분양(汾陽)스님의 말씀입니다. ‘법계를 돈증한다’ 함은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한 구경각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종(禪宗)에서 깨친다 함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 또 견성이란 초발심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경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선종(禪宗)을 위해서 지은 『간화결의론』에서뿐만 아니라 교가(敎家)를 위해서 지은 『원돈성불론』에 있어서도 선종(禪宗)이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간화결의론』에서는 선(禪)과 교(敎)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처음부터 법의 이치와 들어 이해하는 생각이 없이 바로 재미없는 화두로 드러내고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심식으로 생각할 곳이 없고 또한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등 시간의 앞뒤가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 일심법계가 통연히 두루 밝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이와 선문의 깨친 사람과 비교하면, 교내․교외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고 시간의 느리고 빠름이 또한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이 교승보다 훨씬 뛰어나니 천박한 식견의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니다.
禪門徑截得入者는 初無法義聞解當情하고 直以無滋味話頭로 但提撕擧覺而已라 故無語路義路心識思惟之處하며 亦無見聞解行生等時分前後라가 忽然話頭墳地一發則一心法界洞然圓明故로 與圓敎觀行者로 比於釋門一發者컨대 敎內敎外逈然不同故로 時分遲速이 亦不同을 居然可知矣니 故云敎外別傳이 逈出敎乘이라 非淺識者외 能所堪任이라 하니라.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면 법의 이치나 들어 알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말 길과 뜻 길이 끊어집니다. 원돈신해문으로 들어갈 것 같으면 말 길과 뜻 길이 있어서 사구(死句)에 떨어져 돈오점수가 되고 맙니다. ‘재미가 없는 화두’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고 사량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오직 그 화두만 참구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견문이나 해행 등을 생각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일체 말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화두를 깨치면 교가와 전혀 틀립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교(敎)로 나아가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불하지만, 선문의 경절문 활구로 들어가면 바로 깨쳐 버립니다. 교의 원돈신해문으로 나갈 것 같으면 돈오해서 점수하니까 말 길이 있고 뜻 길이 있어 듣고 이해하는 것, 즉 지해(知解)가 근본이 되어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불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의 내용을 모를 때는 선교일치를 부르짖었지만 알고 보니 선°교가 틀리므로 돌아가실 때에는 『간화결의론』에서 바른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선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와 같지 않고 또 원교에 들어가는 것과는 교를 의지하고 떠남에 느리고 빠름이 전혀 다름을 알게 하겠다.
知有禪門徑截門得入이 不同頓敎하며 亦與圓敎得入者로 依敎離敎에 遲速이 逈異也라.
선종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頓敎)와 다르고 또 일승원교와도 근본으로 틀립니다.
선종의 교외별전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격식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교(敎)를 배우는 이는 믿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종의 낮은 근기가 천박하게 아는 자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
禪宗敎外別傳徑截得入之門은 超越格量故로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오 亦乃當宗下根淺識도 罔然不知矣라. [節要]
이것은 선(禪)과 교(敎)가 다른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선종의 참선하는 사람도 근기가 하열하고 머리가 밝지 못한 사람은 도로 비방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출세간 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를 자세히 참구하여 속히 보리를 증득하면 다행하고 다행하다.
伏望觀行出世之人은 參詳禪門活句하야 速證菩提하면 幸甚幸甚이로다. [看話決疑論]
바로 깨치는 최상승의 길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 들어가서 깨쳐야지 원돈신해인 사구(死句)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화결의(看話決疑)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말세에는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하므로 조사도리를 깨쳐서 공부를 성취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조스님의 수심결에 그 당시에도 말세에는 조사도리를 깨친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본시 말세니 하는 것은 중생에게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 법(法)에서는 해당이 안 됩니다. 800년 전 보조스님이 당시 기화상(琪和尙)의 말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정법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대혜스님 돌아가시기 5년 전인 1158년에 보조스님이 태어났는데 대혜스님을 전후한 100~200년 동안은 임제종 양기파의 전성시대로 많은 도인이 났습니다. 또 임제정맥으로 봐서 화선사°중봉고불 등 보조스님 후 200년 뒤에도 확철대오한 대 도인이 무수히 났으며, 송°원°명 그리고 청나라 초까지 연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조스님 당시 기화상이 말세에는 확철히 깨쳐 종사 노릇할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빨간 거짓말입니다. 대혜스님 이후에도 송나라에는 일등 조사가 많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800년 전 보조스님 당시 대 조사가 없다고 하면서 지금의 말세에 경이나 보고 염불이나 하지 참선하지 말자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입니다. 자성은 본시 고금도 없고 말세도 없어서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여 오직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달마경전을 깨치는가?
경산 대혜화상이 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보살이 이 부사의 경계에 머무르니 이 가운데에서는 생각은 끝이 없느니라.’ 이 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생각과 생각 아님이 모두 적멸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적멸한 곳에 머물러서도 되지 않는다.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법계의 헤아림에 포섭되니, 교중에서 법진번뇌(法塵煩惱)라 하느니라.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갖가지 수승한 것을 일시에 모두 없애 버려야만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나 마삼근, 마른 똥막대기, 개에게 불성이 없음,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킴, 동산이 물 위로 간다는 등의 것을 볼 수 있느니라. 홀연히 한마디 끝에서 뚫어 지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하느니라. 여실하게 보고 여실하게 행하고 여실하게 사용하여 한 터럭 끝에서 보배왕 세계를 드러낼 수 있고 미진 가운데 앉아서 대 법륜을 돌려 갖가지 법을 성취하고 갖가지 법을 파괴함은 모두 나로 말미암음이다. 마치 장사가 팔을 펼침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사자가 나다님에 동행을 찾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으로 추측하건대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는 자는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갖가지 수승함도 모두 없애 버리고 그 후에 뜰 앞의 잣나무 등 화두를 살펴봄이 좋으리라. 홀연히 한마디에 뚫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말하느니라.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한 소리를 내는 자는 장애 없는 법계를 직접 증득함이니라.
徑山大慧和尙이 引經偈云菩薩이 住是不思議하니 於中思議不可盡이라 入此不可思議處하야는 思與非思 皆寂滅이라 하니 然이나 亦不得住在寂滅處니라 若住在寂滅處하면 卽被法界量之所管攝이니 敎中에 謂之法塵煩惱라 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을 一時蕩盡了코사 方始好看庭前栢樹子와 麻三斤․乾屎橛․狗子無佛性과 一口吸盡西江水․東山水上行之類하야 忽然一句下에 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라 如實而見하며 如實而行하며 如實而用하야 便能於一毛端에 現寶王刹하며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하야 成就種種法하며 破壞種種法을 一切由我홈이 如壯士展臂에 不借他力하며 師子遊行에 不求伴侶라 하니라 以此而推컨댄 禪門話頭參詳者는 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을 亦蕩盡了然後에 方始好看庭前栢樹子等話頭하야 忽然一句下에 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니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는 乃親證無障碍法界矣로다. [看話決疑]
보살의 부사의한 도리는 다함이 없어서 일념불생 전후제단(一念不生 前後際斷)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면 이것이 대적멸지입니다. 이것을 부사의라고 대혜스님이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적멸처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선 오매가 일여하여 모든 것이 멸진되어서 대적멸지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치 않으면 깨어나지 못합니다.
만약 적멸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실지 견성이 아니고 구경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니 다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원오스님도 대혜스님에게 대적멸처에 있어도 거기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적멸처인 오매일여에서도 크게 화두를 참구해서 살아나야만 비로소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선문에서 화두 참구하는 사람은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일체를 모두 없애야 합니다. 오매일여한 대무심지라 해서 화두 참구 안 하면 외도입니다. 하물며 적멸처도 아닌 사량분별이 남아 있는 곳에서 보림한다, 목우자한다고 화두를 버리면 자기가 망하고 천하사람이 다 망합니다. 대적멸지, 오매일여에서도 화두 참구해서 확철히 깨친 사람은 증(證)한 것이지 해오(解悟)가 아닙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선입니다.
지금까지 약 100일 동안에 말한 것을 요약합시다.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 입장입니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입니다. 이론은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지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 됩니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게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입니다.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입니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입니다.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라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는 것입니다.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8 아뢰야의 무기식을 확철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입니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 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몽중에도 완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8 아뢰야 경지입니다.
조사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되어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하였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 아뢰야 마계(魔界)입니다. 언구를 의심해서 제8 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춥니다. 무심경계가 되어도 깨친 경계가 아닙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됩니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습니다.
선종정맥사상은 육조스님 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습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하여 화엄 5조가 되었습니다. 규봉이 돈오점수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 보았는데 보조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의거해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습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하여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되어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합니다.
백일 법문 하권 끝
첫댓글...정말 대단하십니다...백일법문 상(331페이지), 하(367페이지)를 모두다 타이핑 하셨군요...특히 한자 입력시 들어가는 노력은 ...가히 상상이 갑니다...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책을 사서 동시에 같이 보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할 엄두는 못낼 것 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 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