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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에 가시기전 한번 보시면 도움이 될듯 싶네요^^
영광 불갑산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불교적 색채가 짙은 산이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불교의 도래지란 의미의 불(佛)자와 육갑(六甲)의 천간(天干)인 갑(甲)자를 따서 불갑사라 했고 이 절의 영험한 효험이 불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서 마라난타가 바다를 건너 맨 처음 당도한 곳이 법성포이고 그곳에서 가장 가깝고 신령스런 산인 모악산(현 불갑산)에 절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불교적 유래 때문인지 몰라도 크지 않은 산의 규모임에도 숨어있는 암자가 7~8개나 될정도다. 원래 이 산을 모악산이라 불렀던 것은 산세의 수려함과 신령스러움이 마치 산들의 어머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 한다. 산이름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이유인 불갑사의 건립은 정확히 언제라고 그 시기가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백제 무왕 때 창건하여 1938년까지 아홉 차례 중수한 것으로 되어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침류완 원년(384년)대일 것이라는 두 가지 성이 있다.
영광은 예로부터 쌀, 누에고치, 소금, 눈 등 4가지 햐얀 것이 많다고 하여 사백(四白)의 고장이라 했다. 특히 이 가운데 눈이 많은 것은 불갑산과 고성산, 문주산 등 500m 이상 성벽처럼 줄지은 산들 덕분이다. 겨울철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다습한 공기가 산맥에 부딪히며 냉각되고 눈을 뿌리게 된다. 따라서 도로 사정이 좋은 지금도 영광과 문장을 잇는 밀재는 겨울철이면 가끔 눈으로 도로가 통제되기도 한다.
불갑산은 수림이 울창하다. 겨울에 눈이 많기는 하지만 따뜻한 기후 때문이다. 비록 6.25때 공비 토벌 과정에서 산림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등산로가 아니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잡목과 넝쿨이 우거져 있다. 불갑산에는 상사초라는 꽃이 대표적인 명물이다. 보기에도 매우 탐스러운 상사초는 특이하게도 꽃잎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 눈 속에서 봄까지 그 자태를 지닌다. 이처럼 한번도 꽃과 잎이 함께 필 수 없다하여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相思草)라고 부른다. 늦여름 온 산을 뒤덮는 상사초 군락은 불갑산만의 독특한 향기다. 산세는 바위와 돌이 많아 꽤 거친 편이다.
특히 연꽃 열매를 닮았다는 불갑산의 정상 연실봉(蓮實峰)은 커다란 암괴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넓은 바위지대라 조망이 뛰어나다. 맑은 날 동쪽으로 무등산을 볼 수 있고 해질녘 서해 칠산 앞바다의 낙조 또한 일품이다. 봄철 붉은 하늘과 돌과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선경을 보는 것 같다. 6.25때 아 산은 빨치산의 본거지로 많은 양민이 토벌작전에 희생된 아픈 역사를 지닌 무대다. 인민군 전남유격사령부는 한때 광주, 노령, 유치, 보성, 불갑지구 등 5개의 지구대로 편성하여 활동했는데 이곳 불갑산은 주로 노령지구와 연계하여 작전을 작전을 펼치곤 했다. 이때 이 주변마을의 선량한 양민 5.6백명이 학살당하여 규명을 해야할 역사적인 소명을 간직한 산이다. 육군 전사를 보면 1951년 2월 20일 실시된 대규모 작전으로 전남의 다른 지구사령부에 비해 가장 빨리 진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3. 산행길잡이 불갑산은 구수재를 기점으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달리 불리기도 하지만, 산세도 전혀 다르다. 불갑산은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연실봉을 비롯한 기암괴봉이 곳곳에 솟아 암팡진 모습이라면, 모악산은 산 어느쪽을 보든 부드럽고 아늑하기 그지없는 산세를 지니고 있다. 불갑산 산행은 대개 백제 고찰 불갑사를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함평 쪽으로도 등로가 여럿 나 있기는 하지만, 함평과 광주권 등산인 외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불갑사 기점 코스를 따를 때는 경사가 완만한 동백골을 등로로 삼고 상대적으로 경사가 가파른 사면길이나 능선길을 하산로로 잡는게 바람직하다. 함평쪽 코스로는 금계리 금계저수지 기점 코스가 대표적이다. 남릉을 따라 오르막길로 줄곧 이어지는 이 코스는 1시간30분 정도 잡아야 한다. 정상에 오른 다음, 함평쪽 하산로로는 정상 북쪽 삼거리 - 용운사 - 용문사 코스나, 북릉 - 노루목 - 임도 - 용문사 길을 따라 밀재 북서쪽 22번 국도로 내려서는 코스가 있다. 원점회귀 산행의 경우에는 용문사에서 금산제와 금산 마을까지 오솔길을 따른 다음 포장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접근한다. 용천사 버스시각에 맞춰 서릉을 따라 구수재를 거쳐 용천사로 내려서는 것도 좋다. 불갑산과 모악산에는 산행 안내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산세가 한눈에 들어와 특별하게 길을 잃을 만한 곳은 없다. 단지 모악산 일원의 봉우리 지명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정확한 지점에 서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위치가 부정확하다. 그러나 갈림목이 정확하게 표시돼 있어 산행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불갑사 - 동백골 - 구수재 ( 해불암 조망 만끽하는 숲 짙은 계곡길 ) 연실봉을 주봉으로 하여 동과 서로 연결된 불갑산 능선은 덫고개와 구수재에서 고도를 낮춘다. 두 고개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만나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와 같이 감사 안긴 곳에 불갑사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히 산행들머리도 이 계곡에서 고개를 따른다. 증축 공사가 한창인 사찰을 벗어나면 불갑사저수지가 나타난다. 숲그늘이 늘 드리워져 짙푸른 물빛을 잃지 않는 인공 저수지다. 단풍나무 숲그늘과 수면을 타고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도솔봉을 거쳐 용천봉으로 연결되는 길이 갈라진다. 이 길은 동백골과 도솔봉에서 내려오는 실계곡 사이의 능선길로 초반부터 급경사 오르막을 한동안 올라야 하기에 등로보다는 하산로로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계곡 물소리를 벗삼아 완만한 산책로를 25분쯤 오르면 해불암 갈림목(구수재 0.95km, 해불암 0.88km)에 다다른다. 여기서 왼쪽 실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닿는 해불암(海不庵)은 중국에서 서해바다로 떠내려온 불상을 모셨기 때문에 '海佛'을 이름으로 삼은 암자로, 서해바다까지 펼쳐지는 풍광이 일품이다. 암자에서 정상까지는 약 300m 거리에 불과하지만, 줄곧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제법 땀을 빼야 한다. 구수재로 가려면 동백골 해불암 갈림목에서 계속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한다. 경사가 워낙 완만해 노약자도 산보삼아 걸을 만한 구간이다. 구수재(연실봉 1.3km, 용천봉 0.7km)는 불갑산 정상인 연실봉과 모악산 사이의 고개로, 금계리쪽 능선 언저리에 두 개의 묘가 있다. 구수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모악산, 왼쪽으로 가면 연실봉으로 오른다. 불갑사 주차장에서 구수재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 구수재 - 연실봉 - 덫고개 - 불갑사 구수재 갈림목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길만 좇으면 연실봉 정상에 올라선다. 초반에는 완만하게 능선이 이어지다 묘 2기를 지나치면서 경사가 급해지다 기암인 부처바위를 오른쪽에 끼고 조금 더 오르면 갈림목(구수재 1.1km, 용천사 2.2km)을 만난다. 목적지 표시가 없는 왼쪽 길은 동백골로 곧바로 내려서는 길이지만, 중간에 길이 희미해지니 들어서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갈림목에서 200m쯤 더 오르면 정상 직전 갈림목(구수재 1.3km, 용천사 2.4km, 연실봉 50m)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올라서면 연실봉 정상이다. 연꽃 열매처럼 생겨 '연실봉' 이라 이름 지어진 정상은 봉우리가 높아야 조망이 좋다는 고정관점을 깰 정도로 조망이 뛰어나다. 수십 명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정상은 사방팔방 터지며 남서쪽으로 야트막한 산릉이 겹을 이룬 모습은 정겨운 산야의 전형을 보여주고, 동으로 펼쳐지는 널찍한 벌판은 시원스러움의 극치를 이룬다. 반면 서쪽으로 산릉이 높이를 점차 낮추다 바다와 높이를 같이하면서 마음마저 편안하게 해준다. 정상에서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는 지점으로 급경사 서릉을 따르면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 금계저수지 부근의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약 30분 거리로 시종일관 내리막이다. 장군봉을 거쳐 덫고개로 가려면 정상 직전 갈림목으로 다시 내려선 다음 북서릉을 따른다. 갈림목에서 로프가 설치된 급경사 내리막을 100m쯤 내려가면 능선 갈림목이 나온다. 여기서 능선을 넘어 오른쪽 사면길로 접어들면 용운사를 거쳐 용문사로 내려선다. 용문사에서 영광 - 함평 간 22번 국도까지는 약 1km 거리다. ) 용운사 갈림목에서 다시 능선 왼쪽 길을 따라 또다시 100m쯤 내려가면 해불암 갈림목(해불암 0.2km, 노루목 0.4km)에 이른다. 여기서 왼쪽 내리막길을 따르면 불갑산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앉아 있다는 해불암에 이른다. 해불암에서 동백골까지는 0.88km, 약 20분 거리로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등로다. 장군봉으로 가려면 해불암 갈림목에서 오른쪽 사면 길을 따른다. 사면길은 곧 험로와 우회로 갈라지는데, 왼쪽 우회로보다는 험로를 따르는 게 조망이 좋다. 까다로운 바위 구간에는 철계단이 설치돼 있어 안전하게 넘어설 수 있다. 다시 험로와 우회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50m쯤 나아가면 노루목 사거리에 다다른다. 군시설물과 무선전화 중계탑 등이 서 있는 노루목에서는 연실봉(0.53km), 장군봉(0.3km), 밀재(2.2km), 해불암(0.15km) 내 가닥으로 산길이 갈라진다. 덫고개는 계속 능선길을 따라 장군봉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루목에서 장군봉까지는 완경사 능선 구간으로 장군봉 직전에 통나무를 이용한 쉼터가 조성돼 있다. 쉼터 조금 못미처 바위지대는 크게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데도 두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장군봉에서 덫고개까지 1.1km 능선 구간에는 투구봉, 법성봉, 노적봉 등의 지명을 가진 봉우리들이 있으나, 투구봉 외에는 능선 상의 바위지대에 불과하다. 봉우리다운 맛은 없지만 조망은 뛰어나다. 덕고개로도 불리는 덫고개(불갑사 0.8km, 노적봉 0.4km)에서 오른쪽 길을 따르면 묘량면 삼학리 신성 마을로 내려서고, 왼쪽 길로 내려서면 불갑사 경내로 들어선다. 계속 능선을 따르면 불갑사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구수재 - 연실봉 - 덫고개 - 불갑사 산행은 2시간 정도 걸린다. ▶ 구수재 - 용봉 - 모악산 - 불갑사(수도암) (곳곳에 정자, 의자, 체력단련시설 마련해 놓은 산책로) 동백골에서 구수재 안부에 오른 다음 오른쪽 능선길로 접어들면 용봉(0.2km)을 거쳐 모악산 정상으로 올라선다. 숲그늘 드리운 급경사 능선길을 올라서면 잠시 완만해지는 지점에서 갈림목이 나타난다. 왼쪽 길은 용봉 남쪽 사면을 가로질러서 용천사(0.7km)로 내려가는 길이다. 구수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평평한 능선 상에 나무의자가 마련된 쉼터가 나타난다. '용봉' 이란 안내판이 서 있는 둔덕 같은 갈림목에서 왼쪽 능선길을 따르면 극기훈련 시설물이 들어선 '힘 기르는 숲'으로 내려선다. 용봉 직전 갈림목에서 사면 횡단길과 만나는 이 지점에서 오른쪽 사면으로 내려서면 용천사 탐방로로 내려선다. 탐방로 삼거리에서는 어느쪽 길을 따르든 용천사 내려선다. 용봉에서 용천봉(0.35km, 10분)으로 가는 길은 경운기도 다닐 만큼 넓다. 능선 상에 쉬어갈 수 있게 정자(전망대)와 벤치가 있고, 유연한 곡선의 나무침대도 있다. 용천봉 역시 용봉과 마찬가지로 봉우리라기보다는 능선 위에 약간 두드러진 곳이다. 모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은 용천봉에서 곧장 진행하다 첫 번째로 만나는 팔각정 쉼터 지점이다. 용천봉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모악산 도솔봉(0.25km)을 거쳐 불갑사(1.35km)로 내려서는 지능선길로 접어든다. 도솔봉까지는 5분 정도의 완만한 길로 봉우리를 오르기 전에 초가 원두막이 한 채 있다. 도솔봉에서 능선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북쪽으로 흐른다. 왼쪽 길은 수도암(0.4km)으로 연결되고, 오른쪽 길은 불갑사(1.1km)로 내려가는 길이다. 수도암에서 불갑사 주차장까지는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도솔봉 갈림목에서 오른쪽 급경사 능선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평평한 언덕이 나타난다. 산행안내 표지도 없는 이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산길은 동백골로 떨어지지만, 경사가 너무 급하므로 따르지 말고, 불갑사저수지로 내려서는 왼쪽 길을 따르는 게 바람직하다. 왼쪽 길 역시 계곡까지 곤두박질치듯 이어진다. 잔돌이 깔려 있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무숲에 조망이 가린 산길을 10여 분 내려가면 바위 언덕 위에 올라서면서 앞이 탁 트인다. 불갑산 능선이 테를 두르고 골짜기 깊숙이 불갑사와 푸른 연못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이다. 바위 언덕에서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서면 불갑사저수지 위의 쉼터 삼거리가 나타난다. 불갑사 - 구수재 - 모악산 - 불갑사(수도암) 산행은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 금계저수지, 용천사 기점 ( 산책로 수준의 함평쪽 코스 ) 함평 방면에서는 금계저수지와 용문사 기점 코스가 대표적이다. 용문사 - 용운사 - 연실봉 코스나, 용문사 - 임도 - 노루목 - 정상 코스는 경사가 급하고 임도 구간이 길어 등로보다는 하산로로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금계저수지 코스는 남릉을 따라 오르막길로 줄곧 이어진다. 잡목에 가린 데다 대부분 구간에 크게 필요하지도 않은 안전로프까지 설치돼 있어 지루함이 가중되는 코스다. 이 코스는 등행에 1시간30분, 하산에 4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 오른 다음 함평쪽으로 다시 내려서는 코스로는 정상 북쪽 삼거리 - 용운사 - 용문사 코스나, 북릉 - 노루목 - 임도 - 용문사 길 - 밀재 북서쪽 22번 국도 코스가 있다. 원점회귀 산행의 경우 용문사에서 금산제와 금산 마을까지 오솔길을 따른 다음 포장도로를 따라 금산제 부근의 주차장으로 접근한다. 용천사 버스시각에 맞춰 서릉을 따라 구수재를 거쳐 용천사로 내려서는 것도 좋은 코스다. 용천사 출발 문장행 버스는 1일 3회(11:00, 14:50, 19:00) 있다. 용천사 기점 코스는 등산코스라기 보다 산책로라 표현하는 게 나을 정도로 산길이 부드럽다. 산행은 용천사 - 모악산 남서릉 - 정상 - 남동릉 - 용봉 삼거리 - 힘 기르는 숲 - 용천사로 이어지는 원점회귀형이 가장 바람직하다. 버스종점이 바로 위의 꽃무릇공원에서 용천사로 향하다 첫번째 갈림목에서 왼쪽 탐방로를 따르노라면 곧 팔각정 쉼터가 나타난다. 여기서 계속 탐방로를 따르면 꽃무릇 자생지와 자생녹차밭을 거쳐 용천사나 꽃무릇공원으로 되돌아오고, 쉼터 뒤편의 산길로 접어들면 모악산 남서릉 능선 삼거리로 올라선다. 잠시 가파른 구간이 있지만 짤막한 오르막이다. 나무의자가 마련된 능선 삼거리에서 모악산으로 가려면 오른쪽 길을 따라야 한다. 이후 잡목숲 우거진 능선을 따라 정자가 마련된 쉼터 2개소를 지나면 용천봉 삼거리에 다다른다. 용천봉에서 용봉까지는 0.35km로, 용봉 삼거리에서 용천사로 내려서려면 오른쪽 능선길을 따라야 한다. 오른쪽 능선을 따르다 '힘 기르는 숲'에서 오른쪽 사면길로 내려서면 용천사 순환탐방로 삼거리에 닿는다. 용천사 원점회귀 산행은 1시간30분 정도면 충분하다. 4. 주변의 명소 (1) 불갑사(佛甲寺)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심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 는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불갑사 대웅전(佛甲寺 大雄殿) - 보물 제830호(1985.1.8.지정)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법당인 대웅전은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 가운데 건륭 29년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으며,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위부분에서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또한 가운데 칸에 달린 문은 연꽃과 국화모양으로 꾸며 뛰어난 창살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정자모양으로 꾸몄으며 화려한 무늬와 조각을 새긴 조선후기 목조 불전 건축으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佛甲寺 大雄殿 木組三世佛坐像) - 보물 제1377호(2003.6.26.지정) 불갑사의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 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1635년 불갑사에서 만든 것이며 주존불은 높이 1.43m 좌우보살은 높이 1.25m이다. 조선시대 많은 불상들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 불상은 만든 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17세기 전반의 불상양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불갑사 불복장전적(佛腹藏典籍) - 보물 제1470호(2006.4.28.지정) 영광 불갑사의 명부전과 팔상전 그리고 사천왕상에서 나온 복장전적은 몇 권의 고려본을 포함하여 대부분 조선조 전기에 간행된 것으로 법화경, 금강경 등 당시 널리 유통된 대승경전들과 불교 전문강원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를 비롯한 선종관련 이론서, 수륙재 관련문헌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조선전기 한국불교신앙 형태를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함께 나온 31건의 나한상과 시한상 등의 조상 발원문, 중국에서 수입한 만력년간의 불교문헌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등 한국불교사상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다.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 - 천연기념물 제112호(1962.12.3.지정) 참식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대만, 중국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남쪽의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고 있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불갑사 뒤편 산 중턱쯤에 있다. 나무들의 높이는 대략 6m내외이며 군데군데 모여서 자란다. 주변에는 동백나무, 서어나무, 느티나무 등이 자란다.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이 절에 있던 정운이라는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던 중 인도의 공주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정운스님과의 이별을 슬퍼한 공주는 두 사람이 만나던 곳의 나무 열매를 따서 주었고, 스님이 그 열매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것이 자라서 참식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자생지의 나무들은 그 나무의 씨앗들이 퍼져 자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영광 불갑면의 참식나무 자생 북한지대는 참식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지역으로 식물분포학적 연구가치가 높고, 인도와 우리나라의 교류관계를 알려주는 문화적 가치도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ㆍ보호하고 있다. (2) 백제불교최초도래지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곳으로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뜻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용루, 탑원, 간다라 유물전시관, 4면 대불상을 건립하였고 특히 부용루의 벽면에 석가모니의 출생에서 고행까지의 전 과정을 23개의 원석에 간다라 조각기법으로 음각 되어 있는 등 관광명소로 개발하였다. (3) 백수해안도로 국도 77호선을 연결하는 군도14호선에 위치한 영광 백수해안도로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중 전국에서 9번째로 아름다운 도로에 선정되었다. 건설교통부(한국도로교통협회)가 2005년 10월 전국의 모든 도로를 대상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을 공모해 영광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라 할 수 있는 백수해안도로를 출품해 2006년 6월15일 우수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영광 백수해안도로는 전남의 명 드라이브 코스중 하나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갓봉 줄기가 서해바다를 향해 내달리며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에 맞추어 조성한 급경사지대에 닦여진 도로라서 동해안을 뺨치는 풍경들이 전개된다. 금방이라도 바닷물이 넘실거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구불구불 조성된 아름 다운 길로 때로는 물이 빠져 나가 헐벗은 갯벌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때로 맑고 푸른 물이 출렁거릴 때도 있다. 영광 백수읍 백암리 석구미 마을에서 대신리를 거쳐 원불교 성지가 있는 길용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총 16.5㎞에 이르며 해안절벽과 만나는 해안에는 거북바위, 모자바위 등의 멋진 바위들이 솟아 있는가 하면 고두섬을 비롯 여기저기에 암초들이 자리를 잡아 풍경에 변화를 주기도 하며 멀리 칠산도, 안마도, 송이도 등 여러 섬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가 있고 서해낙조를 감상하기에 최적지로 오뉴월에는 해당화가 해안도로변에 가득 피어나 시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국도77호선은 신비로운 문화답사와 경이로운 남도의 자연여행이 시작되는 서남해안 도로이며 군도14호선이 이를 연결해 주고 있어 영광의 대표적인 관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에, 영광군에서는 백수해안도로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하여 해수온천탕을 비롯한 농어촌관광휴양단지와 노을전시관을 2008년 개관 예정으로 조성 중에 있으며, 인근에 2007년부터는 어촌복합 생활단지를 신규 조성하게 되고 종교를 테마로 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불갑사지구 관광지, 기독교인 순교지, 원불교성지 등을 연계한 관광벨트를 조성하여 관광상품으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금년말 광주~영광간 4차선 국도 전면 개통과 홍농과 백수를 잇는 칠산대교와 영광 염산과 무안 해제를 연결하는 영광대교가 2012년에 완공이 되면 영광은 전국 제일의 관광 허브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한편, 백수해안도로는 지난 2002년 전라남도로부터 “경치 좋은 길”과 “전망 좋은 곳”으로 선정되었으며 한국관광공사에서는 2005년 5월 “이달의 가볼만 한 곳”으로 추천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명소이다. (4) 원불교영산성지 원불교 발상지인 이곳은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탄생하여 성장과 구도의 과정을 거쳐 대각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이룬 곳으로 매년 수만명의 순례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원불교는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태어난 소태산 박중빈 (1891-1943)이 창시한 종교로 세계에 500여개의 교당과 100만 신도가 있다고 한다. 원불교에서 일컫는 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하여 개교한 영광의 영산성지인 이곳과, 교화의 장을 연 익산성지(익산시 신룡동), 교리를 초안하고 교강을 발표한 벽산성지 등이 있다. 개법 성지인 이곳에는 대종사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이룬 정관평 방언답 등이 있어 성지 순례차 전국의 많은 교도뿐만 아니라 관광객이 많이 찾아 온다. (5) 영광굴비 굴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조기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말린 것이기 때문이다. 조기류는 모두 민어과에 속하며 한국 연안에서 잡히는 것은 5속(屬) 12종(種)에 달한다고 하지만 영광굴비는 신선한 참조기로만 가공한다. 이 참조기는 석수어(石首魚) : 머리속에 단단한 뼈가 있기 때문이다. 산란을 위해 동지나 해역에서부터 추자도와 흑산도 해역을 거쳐 서해안으로 회유를 하는 참조기가 3월(음력)중순 곡우 사리경 칠산 앞바다를 지날 때 가장 알이 충실하고 황금빛 윤기가 있어 이 때 잡은 참조기를 가공 건조한 것을 영광굴비라 한다. “밥 도둑님”이란 별명이 붙은 영광굴비가 유명해진 이유는 타지방의 것에 비해 유별나게 맛이 좋기 때문이다. 그처럼 독특한 진미를 내는 비결로써 영광지역의 자연 지리적 요인(기온 10.5도씨, 습도 75.5%, 풍속 4.8m/sec)이 월등하고 예부터 전래되어온 천일염으로 염장하는 제조기법이 특이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고려때부터 유래되어 온 것으로 동지나 해역에서 월동한 조기가 해빙기가 되면 산란하기 위하여 연평도까지 북상하는 도중 영광법성포 근해인 칠산앞바다에서 4월10일부터 30일 사이에 산란하기 때문에 알이 들어 맛이 좋고 대량으로 잡혀 이때의 조기가 영광굴비의 진맛을 나타냅니다. 영광굴비는 옛부터 임금님의 수랏상에 으뜸으로 오르는 법성포 생산의 특산품이다.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고려 16대 예종때 이자겸은 그의 딸 순덕을 왕비로 들여 그 소생인 인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그리고 인종에게도 3녀와 4녀를 시집보내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독차지하고 은근히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그 뒤 최사전이 이자겸 일당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체포한 후 영광 법성포로 유배시켰다. 그는 유배지에서 굴비를 먹게 되었고, 마침내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진상하고 결코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한 아부가 아니고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굴비라 명명하였다. 그때부터 영광굴비는 임금님의 수랏상에 진상되고 궁궐에서부터 영광굴비가 명물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게 되었다. (6) 기독교순교지 6.25 당시 북한군의 교회 탄압에 항거하며 신앙을 지키려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염산교회:77명, 야월교회: 65명)한 곳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름없이 사라져간 순교자들의 깊은 신앙심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
첫댓글 상사화 필때면 꼭 들렀던 산인데 이번에는 단체로 갈 기회가 주어질려나 모르겠습니다.
함께 산행 하세나^^ ㅎㅎㅎ
상사화가 필때면 꼭 가볼려구 노력했는데 한번두 못가본곳 옛날 백세주때 거래처가 있었던곳 입니다
지금이 상사화 피는 시기인가요?
에긍~~~~ 우리 접때...제작년인가? 그때 추석무렵에 거기 갔다 왔잖어...상상화핀데...그때 쫌 늦긴 했지만..아마도 상상화개화시기는 8월~9월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