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2003. 1. 22(수) 오후 2시-4시
장소 : 대구시 수성구 이종하 박사 자택
대담·기록 : 김용락
이종하 박사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 쯤 이었던 것 같다. 한창 민주화, 민중운동이 기세를 올리고 사회나 민족현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혁명'에 대한 어떤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민중당이 창당되고 학생운동권에서는 NL과 PD, 제헌의회파 등이 분화되면서 사상적으로 성숙되기 시작했고 아울러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공장으로 숨어들어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혁명인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분주하던 시기였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이 시기를 '불의 연대'라고 부를 만큼 사회 전반에 민주화와 민중혁명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끓어 올랐다.
당시에는 나도 비합법 지하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대구시 서구 비산동 일대에 중심을 두고 있던 노동자 출신 문인들과 결합하여 공개적인 노동자문학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당시 비합멤버 가운데 비구니 스님이었던 분은 다시 산으로 돌아갔고, 서울서 내려온 지도자(?)는 안기부의 추적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여 현재 그리스에서 유력지 기자를 지내는 등 문필활동을 하기도 하고 나머지는 각자 자신의 생계터로 돌아갔다. 노동자 문학운동을 하던 이들 가운데는 시인으로 입신하여 시집을 낸 이도 있고, 여전히 현장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내는 등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아마 지난 16대 대선을 깃점으로해서 소위 개혁세력 우리 사회에서 힘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바탕이 된 때문일 것이다. 유별나게 나서지는 않지만 자신의 터전에서 묵묵히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워온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피와 땀을 기반으로 성립한 YS, DJ 정부의 참담한 실패는(물론 부분적인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무렵 누군가에게 들어은 이야기인데 비산동 로타리 부근에 있던 4층짜리 건물에 세들어 있던 노동자단체 사무실을 영남대 이종하 박사라는 분이 그냥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건물 전체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주었는지 임대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전두환 정권 아래서 다들 몸을 사릴 때 인데 대학 학장까지 한 분이공공연히 노동자를 돕다니 꽤 용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분이 누구일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사실 당시 몇몇 해직 교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수들이 거의 침묵하고 있을 때라서 이 정도의 마음을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후 1989년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국내에도 소위 김영삼 문민 정부가 출발하면서 재야운동권 형태도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민운동가들이 생겨나고 운동가 일부에선 청산주의적인 경향까지 무분별적으로 창궐한 어지러운 시기였다. 80년대 중반부터 지역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교수들과 민중당 운동을 하던 교수들이 나서서 연구소를 만들었다. 지역사회연구소로 출발한 이 연구소는 이후 대구사회연구소로 발전하면서 지역 대학의 젊은 교수와 연구자들을 대거 포함하여서 중요한 학문적 사회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90년대 한 때 나는 이 대구사회연구소에서 펴내던 기관지 『월간 지역동향』이라는 잡지 편집주간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연구소에는 경제학도들이 주로 많이 드나들었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큰 키에 흰 피부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문학에 대한 교양이 꽤 있어 보였다. 누군가 물었더니 경북대 경제과 교수이고 하버드에서 박사를 했다는 것이다. 학벌 좋구나 하면서 그냥 흘려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이 분이 이종하 박사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동운동를 지원했던 노학자와 미국가서 공부한 귀티나게 생긴 젊은 교수, 외형은 어찌 좀 덜 어울릴 것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두 사람의 인품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생각들기도 했다. 이후 <한겨레 21> 같은 잡지에서 그 젊은 교수가 쓴 글을 가끔 읽으면서 경제관련 공부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인생살이라는 게 묘한 것인지 대구가 좁아서 그런지 내가 신문사 기자할 때 모셨던 편집국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노의사 한 분이 계시는 데 이 분이 알고보니 이종하 박사의 사위였다. 이 분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혀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한 분인데 이 때의 체험을 책으로 써서 시중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소탈하고 인품이 높은 분이어서 평소 내가 의사들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인상을 많이 씻어준 분이기도 하다.
그런 차에 이종하 박사가 지난해 가을쯤 6백쪽 분량의『우리 민중의 노동사』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민중의 생활사, 민중의 항쟁사 3부작 가운데 첫 번째 권이라고 했다. 내가 80년대에 이 분에게 갖고 있던 어떤 막연한 동경같은 게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이 참에 이 분을『대구사회비평』인물대담에 한번 모실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배상(喪配)를 당해 일정이 늦어졌다. 그러던 중에 이 분의 둘째 아들인 경북대 이정우 교수가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 경제 1분과 간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언론에는 그가 분배를 중시여기는 학자라는 식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최준영 경북일보 전편집국장과 사위인 박진홍 원장의 도움을 받아 이종하 박사를 만났다.
이종하 박사는 아흔의 나이답지 않게 건강해 보였다. 약간 거동이 불편한 듯도 했지만 그렇게 문제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되레 개구장이(?)같은 분위기를 느낄 정도로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우선 나는 지난 80년대의 내 기억을 끄집어 내어 비산로타리 부근의 노동자사무실을 무상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준 것인지 그냥 무상 임대해 준 것인지 확인했다. 당시 그냥 돈 안 받고 빌려줬는데 평수는 38평이었다고 대답했다. 어려운 시기에 왜 노동자를 도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었다.
선생은 1913년 6월 18일(양력) 외가인 군위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외가의 성은 박씨. 부친은 당시 경북대 법대 이정규 교수였다. 선생의 말로는 아버지는 사상적으로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아마 선생의 부친은 특정 사상이나 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뜻일 게다. 대신 아나키스트였던 삼촌 이규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숙부는 신채호와 교분이 있었지만 선생 자신은 신채호를 본 적이 없다.
대구고보(경북고 전신)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다녔다. 고보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훈도(교사)를 4년 지냈다. 당시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소작쟁의 지도차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 부임해 갔는 데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소작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은 일본 유학으로 진로를 바꿨는데 선생이 일본 유학을 할 무렵 일본내 대학의 입시가 끝난 상태라 명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중앙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교수들이 신통치 않았다. 이 무렵이 시기적으로는 1937년 경으로 막 중일전쟁이 시작할 즈음이었다.
6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입사한 곳이 일종의 보험회사인 제일상호였다. 여기서 해방 대 가지 쭉 근무했다. 선생은 이 회사를 좋은 회사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봉급 외에 일본인 직원에게는 60%의 수당을 주었는데 자신이 조선인인데도 40%의 수당을 주었다고 한다. 아마 일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조선(한국)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게 참작됐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회사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치룰 때 도쿄 궁성 앞 마루우찌가 불탔지만 제일상호 빌딩만은 불타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점령 후 이 건물을 맥아더 사령부로 쓸 만큼 좋은 건물이었다고 회고 했다.
해방 후 대구사범 전문부(당시 심상과와 전문부로 나눠져 있었다)의 법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지금의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으로 옮겨 30년을 영남대교수, 법대 학장을 지냈다. 영남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 후 부산 경성대 초빙교수로 10년을 재직하면서 그 기간을 부산에서 살았다. 여기까지가 선생이 공적으로 살아온 삶의 이력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보적인 학자로 살아왔고 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아온 삶이기 때문에 1946년 10월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사건'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내가 10. 1사건에 대해 남로당 배후 조종술을 이야기하자 선생은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10. 1 사건의 진상은 틀렸다. 그 사건은 공산당의 지시로 일어난 게 아니다. 내가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됐나하면 황태성이 조직의 책임자이고 가장 중요하다. 황태성이 공산당 세포회의에 나와서 지시했다. 대구역전에서 경찰이 파업 노동자를 향해 발포해 사람을 죽이고 있다. 이것을 막아야한다. 중지 시켜야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대구경찰청은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 고문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 고문이 장악하고 있는 대구경찰서를 상대로 대학생을 동원해 미군 고문을 상대로 항의를 해다오. 그래야만 경찰 발포를 막고 죽어가는 노동자를 살릴 수 있다. 그것은 미군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대학생 수천 명이 대구경찰서 앞에 모여서 시위를 했다. 당시 대구에는 3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의과대, 사범대전문부, 농대가 있었다. 나는 사범대 전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말을 이었다.
"10. 1사건의 성격을 드러내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신재호라는 나와 국민학교 동기가 있는데 이 친구는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한 사람이다. 그러나 경찰에서 일제 앞잡이 경찰에게 서름을 많이 받았다. 친일파가 다시 친미파가 되어 득세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반미(反美)가 없었다. 신재호가 일제 앞잡이의 등살에 못이겨 모자를 벗어 팽개쳤다고 한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당시 민중들도 친일파가 친미파에 붙는다고 했다. 그게 여론이었다. 그런던 중 식량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사건이 터졌다. 배급을 제대로 못했다. 쌀을 다오라고 민중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민중들이 쌀을 달라고 모여들자 좌·우 정치인들이 민중을 무마하기 위해 연설을 했지만 우익 정치인이 올라오면 야유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이때 황태성 씨가 시청 발코니(현재 대구시의회 건물)에 올라가 연설하니 민중들이 조용해 졌다."
선생은 당시 전문부 교수로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같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그게 의도적인지 아니면 고령의 나이에서 오는 기억력 때문인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황태성은 경북 선산 사람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였다. 북에서 밀사로 남쪽에 파견됐다가 친구 동생인 박 정권에 의해 처형된 비운의 혁명가이다.
선생이 영향받은 책에 대해 여쭤보았다. 크로포트킨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이다.대구지역에서 아나키스트로 유명한 하기락 박사(작고, 전 경북대 철학과 교수)와는 해방 후 대구대학에 재직할 무렵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또 강단에서도 뜻을 펼치려고 하면 어려움이많았을 텐데 혹시 해직이나 구속된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여러차례 귀찮기는 했지만 구속되거나 해직 된 적은 없다."고 했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박정권 때 내무장관을 하던 엄민영 씨가 고등학교 동기인데 덕을 좀 봤다. 그래서 66세 대 정년퇴직을 할 수 있었다." 고 했다. 친구에 대해 묻자 하기락, 백남억(전 공화당 의장), 김성곤 씨(쌍용 창업자)가 친구인데 뒤의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기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정치인으로 일세를 풍미했는데 선생님은 혹시 정치할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느냐고 묻자 정치할 생각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고 했다.
자녀 교육에 대해 여쭤보았다. 둘째 아드님이 정권 인수위 간사로 들어갔다는 것은 사실 경사에 속한다.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사회적 직책 높이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타인을 위해, 사회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출세해봤자 자기 자신과 그 가족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해악인 경우가 허다하다. 단순히 인수위 간사라는 직책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사자인 이정우 교수가 그간 언론 기고 등을 통해 펼쳐보인 학문적 입장과 경륜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선생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영남대 교수이고 둘째가 이정우 교수이다. 딸 세 분은 음악가, 의사, 전문대 교수라고 한다.
자식 교육은 어떻게 했길래 훌륭한 아드님을 두게 됐느냐고 묻자 자기들 하느대로 맡겨 뒀더니 다 공부 잘하고 대학 교수도 되고 했다. 기습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었느냐고 물었다.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고 했다. 노무현 후보와는 그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정우만 최근에 알게 되었다고 밝히면서 근래 작고한 사모님은 노무현이 무명일 때부터 그를 알아보고 띄웠다고 했다. 이야기 도중 사모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유별난 것 같아 처가에 대해 물었다.
"처가는 청도이고 성은 권씨인데 평범한 집안이다. 내가 초등학교 교원 때 혼인을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장인이 부잣집의 청혼은 다 거절하고 선친이 교육자라고 나와 혼인을 시켰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이 부분에서 조금만 더 살아 계셨더라도 아드님 장관되는 걸 보셨을텐데...하는 등의 덕담을 주고 받았다.
이야기를 현실문제로 옮겼다. 연세 때문에 요즘도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 묻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하시면서 현실이 어렵다, 상당히 어렵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이었다. 이어 노 정권의 브렌드는 '개혁'인 것 같다면서, 인터뷰 당시 노당선자가 야당을 방문한 것을 예로 들면서 노 당선자가 겸허한 자세를 위하는 게 보기 좋다고 했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 정부가 초석을 넓혔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앞으로도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노당선자가 김정일 만나면 아마 김정일이 설득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노 당선자가 핵문제도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적극 평가했다.
고건 총리 지명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고건은 나도 그래, 좀더 개혁적인 사람 없나?"고 대답했다.
대구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수구적으로 비쳐지기도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됐나 안타깝다.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고, 점차 깨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대구가 보수적으로 된 이유에 대해서 묻자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 등 30년 장기 집권의 그늘 아래서 보수화되고 패배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대구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 달라고 하자 "내가 부산에 한 10년 살아보니 대구와는 전혀 달라. 대구가 부산 시민정도라도 됐으면 해. 부산은 개방적인데 대구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야.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나고, 학게를 봐도 영남대 교수는 대개 대구 출신이야. 그러나 부산은 그렇지 않아. 부산은 부산 출신이 많지 않아. 타지역 사람이 대구 살기가 어려워"라고 했다.
올 해 아흔 한 살의 나이에도 정정한 비결을 묻자, 건강은 비결이 없다. 술 담배는 젊어서부터 안했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해, 금욕심이 최고야라고 파안대소를 했다. 그러나 요즘은 건강 때문에 주로 누워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하자 나도 문학 청년이었다. 문학이 법학보다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아마 이것은 시인인 나를 배려한 듯한 발언인 것 같았다.
선생은 앞에서 밝힌 바도 있지만 『우리 민중의 노동사』(주류성 2001)를 내 바 있는데 이 책은 '200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은 나도 진작에 읽었다. 인터뷰를 할 당시 두 번째 책인『우리 민중의 생활사』(주류성 2003)이 나왔다. 책에 저자 싸인을 한 후 한 권을 주었다. 앞의 책으로 인세를 230만원 받았는데 그걸로 뭘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갖고 있다고만 말했다.
『우리 민중의 노동사』머리말에는 선생의 사상을 간명하게 드러내 주는 부분이 있다. 그걸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나는 일제 때 무정부주의자로서 단재 선생과는 동지적 교분을 가졌던 나의 숙부 이규옥 님의 훈도를 받으면서 나 역시 무정부주의를 신봉하였고, 역사를 보는 안목 또한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민중적 관점'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나이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민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고동침을 느낀다. 이 저술은 말하자면 내 젊었던 시절의 숙원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이란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민중은 이름도 명예도 없기에 아무런 기록도 남긴 것 없이 이 땅에서 살다 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목숨바쳐 이 나라 강토를 지켜온 '지킴이' 였으며, 그들이 전담한 생산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오늘이 있기까지 발전시켜온 진정한 주체들이다. 또한 역사의 표면무대에서는 영웅이니 위인들이 어떤 거창한 노릇을 하든, 역대왕조의 흥망성쇠야 어지 되었건, 우리 민중이 말없이 묵묵히 이끌어 온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이 나라의 농경문화야말로 우리 역사의 저류에 흐르는 도도한 물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은 평생을 땀 흘려 노동하는 데 몸바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