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필름 대표로,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상업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경계에서 혼신의 열정을 불 사르는 남자. 제작자·프로듀서·감독 이 모 든 일을 아우르는 ‘문화인’ 이은을 만났다.
코르셋’ ‘접속’ ‘조용한 가족’ ‘공동경비구역 JSA’ ‘해가 서쪽 에서 뜬다면’ ‘해피엔드’ ‘섬’ 모두 이은이라는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그가 제작자로, 프로듀서로, 아예 메가폰을 잡고 진두지휘를 한 경우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 은 그의 손을 거쳐간 영화들은 영락없이 ‘성공’이라는 훈장을 달았다 는 것이다.
미국과 인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들고 흥행시키는 나라 한국 . 문화적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프랑스도 그 추격을 대놓고 두려워 하고 이미 일본은 한국 영화수준에 추월당했음을 시인해 버릴 정도. 이 처럼 무서운(?) 한국 영화판에서 이은은 ‘마케팅의 귀재’라는 닉네임 을 수식어처럼 붙이고 사는 심재명이라는 평생 동료(그들은 실제로 한방 을 쓰는 부부사이)와 손잡고 ‘명필름’이라는 영화사를 통해 괄목할 만 한 기록들을 연신 갱신하고 있는 영화인이다.
특히 프로듀서 부문에서 이은과 심재명은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단 한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영화지 ‘버라이어티’는 그들을 ‘주목 할 만한 10대 프로듀서’로 뽑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시네마서비스나 싸이더스 우노필름, 강제규 필름 못지 않은 영향력 있는 영화사로 손꼽 히기도 했다.
이러한 명성을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물론 ‘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 그러나 ‘공동경비구역 JSA’와 ‘섬’이 각기 베를린과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는 등의 결과물을 감안한 다면 그들의 작업은 상업영화로 돈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예술적 문화적 기능에 충실했음을 대변하고 있다.
<> 영화집단 장산곶매 시절 광주민중항쟁과 노동자 문제를 주로 다루었 고 특히 ‘파업전야’라는 영화는 이감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다 따라 다닌다.
장산곶매 활동은 이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난 81학번이다.
내가 대학생활을 시작했을 즈음 우리에겐 광주항쟁과 노동문제가 전부였다.
그 아무리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그땐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사회발전과 민주화에 동참해야 한다 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영화로 이런 얘기들을 나누려 했던 게 사실이다.
처음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뭉치게 되었다.
그러다 장윤현 장동홍 감독과 내가 공동연출로 90분짜리 ‘오 꿈의 나라 ’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우리에겐 하나의 문화운동적 성격의 것이었는 데 뜻하지 않게 너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마지막 장면 을 광화문에 성조기가 걸리는 것으로 처리해 5.18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장산곶매는 공권력의 상영정지 방침에 굴 하지 않고 대학가를 돌며 상영을 강행해 5.18을 사회문제화 하는 데 기 여했다.
그때의 정신적 충격은 우리에겐 벅찬 것이었고 ‘영화란 결코 자기 맘대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됐다.
그래서 만든 게 ‘파업전야’(91년), ‘닫힌 교문을 열며’ (92년)이다.
다른 생각 없이 한 4년을 열심히 일만 했다.
그때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배웠던 것 같다.
그후 장동홍은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의 연출을 맡았고, 장윤현은 ‘접속’ 에 이어 ‘텔미썸딩’을 내놓았다.
“감독이라 불러주는 게 제일 좋아요” 이은 감독을 보며 기자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키드’일 거라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평범한 이유로 영화와 연을 맺었고, 너무도 평범했기에 대중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전 참 공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제 예비고사 점수로는 서울하늘 아래 있는 대 학에 가기가 힘들 정도였죠. 한참 체육학과 같은 곳을 가서 몸으로 때울 까 하고 있을 때였어요. 친구 녀석 한 놈이 ‘넌 웃기는 놈이니까 연극 영화과에나 가라’고 하더군요.” 95년 명필름을 차리고 난 후 7년이라는 세월동안 이은이 지치지 않고 꾸 준히 그렇게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저력은 바로 이런 차분하고 유 한 성격 때문이다.
누구나 동경하는 작업이지만 아무나 도전할 수 없었 던 장르에 대해 그 누구보다 부담감이 없이 덤벼들 수 있는 냉정과 열정 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요즘만큼이나 영화 만드는 환경이 좋았던 적이 있었 느냐. 힘들기보다는 늘 재밌다”고 말할 줄 아는 제작자, 거창하고 어려 운 예술영화를 들먹이기보다는 ‘허공의 질주’ 같은 영화를 보며 “저 정도 영화는 만들 줄 알아야 할텐데”라고 느끼는 감독, ‘꼬마돼지 베 이브’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면 우리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프로듀서가 될 수 있을 텐데”라고 느끼는 사람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세계를 창출하 려고 하고 또 그걸 본 사람들은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흥과 작자의 인간미에 자극받는다.
결코 일방적인 감정의 흐름이 아니다.
영화를 통 한 사람들과 대화, 거기서 이은은 설득력 있게 다가선 것이다.
무엇이든 어렵지 않게 쉽고 유하게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는 늘 친숙하게 느껴지 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가끔은 아이 같은 모습이 있다.
영화하는 사람에게 있 어서는 감독이라는 명칭이 갖는 묘한 감정을 그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생애 단 한편의 영화만 만들어도 영화판에서는 죽을 때까지 감독이 라는 칭호를 붙여주죠. 왠지 아이러니컬하긴 한데요. 그렇지만 제게도 그 미묘한 차이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웃음)” <> 청소년 영화, 저예산 영화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 고 있다.
영화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 만 상업영화만으로도 연일 히트작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비인기 종 목에까지 손댈 필요가 있는가, 혹 상업영화로는 부족한 예술적 취향을 과시하기 위함은 아닌가? “내가 상업영화를 하면서 저예산 영화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박하 사탕’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 때문이다.
물론 난 스스로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을 내 예술적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난 예술성만 강조한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주변 대중들이 상업영화만큼이나 기대하고 반가워하는 반응을 봤을 때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21세기에는 정형화된 상업영화만 으로는 관객의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다.
굳이 예술영화를 하고 싶어서 가 아니라 대중들이 원하고 나도 좋아해서 하는 일이다.
결코 희생을 감 수하고 만드는 예술영화와는 차이가 있다.
? = 제작, 마케팅+투자, 합작… 영화 팔방미인 = 양적, 질적으로 안정된 콘텐츠 공급(연간 8편의 영화에 대한 제작 및 투 자계획)을 목표로 명필름은 최근 조직 개편에 들어갔다.
그간은 제작과 마케팅에 주력해 왔던 것에서 앞으로는 투자 및 해외마케팅, 합작 등의 업무로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업 몸집 불리기 차원 같?보이지는 않는다.
명필름은 지금처럼 년간 3편의 영화 를 만들어 내고 자회사인 이픽처스와 디엔딩닷컴이 각각 한편씩 그리고 나머지는 투자를 주목적으로 하겠다는 의도다.
또한 유통에 직접 참여하 지 않음으로써 다작보다는 각 영화의 전문성과 완성도를 높이는 데 주력 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사 일 외에도 그는 상당히 다양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영 화인회의의 주축으로 비상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그간의 소극적 융자방식 대신 투자조합을 형성해 제작자 본을 풍성하게 하고 예술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시에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때 문에 혹자는 이은을 ‘정치적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 적’이라는 표현을 쓴 만큼 그 의미는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개인의 이권, 즉 자신의 이익을 위 해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이 영진위 소속이기 때문 에 응모하기만 하면 지원 받았을 ‘와이키키 브러더스’를 영진위 사전 제작지원 공모에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말이다.
물론 그라고 왜 그런 기 회가 왜 아깝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간 제작지원제도가 실효를 거두 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투명하지 않은 운영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 기에 설령 “명필름이 영진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임기 동안 은 꾸욱 참을”심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임기 만료일인 20 02년 5월 27일을 기억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스타시스템, 영화 만들기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우리 현실은 영화사든 감독이든 배우든 스태프든 스타시스템이 아니면 살아 남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명필름에서 만든 대다 수의 영화들도 그러하다.
때문에 그가 저예산영화에 그다지도 사력을 다 하는 것은 ‘사서하는 고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아무리 명필 름이라 해도. 제 아무리 이은이라 해도 ‘버스 정류장’ ‘후 아 유’ ‘욕망’ 등 그가 제작하고 있는 저예산 영화는 정말로 캐스팅이 잘 안 된다.
? 하지만 그는 결코 “스타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인데 그보다는 이미지에 맞는 연기자를 찾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완벽한 신인 혹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과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마음을 비워서라기 보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가능 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접속’에서 전도연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해 일약 스타덤에 올린 전력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엔 “일부러 그 배우가 알려질 때까지 영화 개봉을 미루는” 영특한 생 각까지도 해낸 전략가가 아닌가. <> 이제 명필름은 명실공히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메이저 영화사다.
그 위치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도 많겠지만 반면 책임감이나 소명의식 도 적잖다고 본다.
진정 메이저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일까? “회사라는 게 언제나 배우와 스태프가 신뢰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 중요 하다.
그런 신뢰도를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고 싶다.
이젠 명필름이 라는 브랜드를 형성해 나가고 싶고 그 회사에서 제작 혹은 투자하는 영 화는 괜찮다는 평을 받고 싶다.
특히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는 몇몇 회사에 낄 수 있을 정도로 거듭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 “심 대표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지요” 7년 동안 그는 명필름을 통해 100억이라는 순이익을 올렸고, 현재 명필 름은 최소 300억이라는 자산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법인으로 운영 되고 있어 그 전액이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분의 50% 를 갖고 있고 그의 부인 심재명 씨 것까지 합친다면 200억대를 넘어서는 갑부가 된 것임이 분명하다.
“제 통장 잔액은 3,000만원 정도가 다예요. 법인체제이기 때문에 월급 이상을 받은 적은 없으니까요.” 그는 개인적으로 2억 정도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오히려 “돈 벌어서 뭐 할거라는 생각 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냥 회사 잘 다니고 문화생활 좀 하고 그러면 되 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에겐 분명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똑똑한 부인을 만나 산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지난 세월 우리네 가치관으로는 골치 아프고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일 테지만 최근의 정황으로 본다면 ‘똑똑한 부 인과 살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라는 얘기는 가히 최고의 찬사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전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심재명을 늘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좀 둔하고 이성적인 자신에 반해 타고난 복이라고 할 만큼 창의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라고 한다.
“제가 사람 하나를 아는데 한달이 걸린다면 그녀는 탁 보면 알아요. 그리고 보수적인 편이죠. 정말 집하고 일밖에 몰라요.”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성격인 것, 그리고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화를 표출해 버리는 못된 성미는 남편에겐 부담스럽다 며 웃어버리는 그. 하지만 심재명 씨의 성격을 두고 ‘정말 매력적’이 라는 찬사를 잊지 않았다.
<> 유인촌 → 문성근 → 이은 → 김동원 <> 김동원 씨는 독립영화협회 회장으로 일평생을 다큐멘터리 만들기에 전 념해 온 인물이다.
특히 삶의 일관성을 아는 사람으로 늘 존경해 온 선배다.
젊은 시절 그다지도 열심히 놀던 사람이 어느날 상계동 철거민 비디오를 찍으러 갔다 자신의 소명을 알게 되었고 그 일에 전념해 평생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