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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떽쥐뻬리의 문학세계
1. 비행사가 되기까지 쌩떽쥐베리(Saint-Exupery, Antoine de. 1900. 6.29-1944. 7.31)는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우연히 리용에서 태어났다." 보험업에 종사하던 다른 지역(Limousin) 출신의 아버지와 프로방스 출신의 어머니가 어쩌다 리용에 흘러들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고 떠돌이 처지는 아닌 유서 깊은 귀족 집안으로 아버지가 백작 칭호와 그 특권을 누렸다고 전한다. 쌩떽쥐뻬리가 네 살 때(1904) 위로는 7세부터 아래로는 1세짜리 아들 다섯을 남겨두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는 친정 숙모의 대저택으로 이사,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성(Saint-Maurice de Remens)은 동화같은 대자연 속에 묻혀있어 이 미래의 작가에게 풍부한 감수성을 심어주었는데, 거기에다 어머니의 전설 구술과 피아노 연주, 티롤 출신의여가정교사, 따스한 난로 등이 곁들여 문학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9세 때(1909) 르 망(Le Mans)으로 이사, 학교에 들어갔으나 모범생은 아닌데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구겨진 넥타이를 매고 다닌, 한마디로 말하면 다른 애들처럼 손가락에 잉크나 잔뜩 묻히고 다닌 주의를 끈 학생은 아니었다"고 친구들은 말한다. 채벌도 예사여서 귀가길에 혼자 울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키스 한 번으로 모든 슬픔을 달래는 보통 아이였다. 그에게 어머니는 가히 절대적인 존재였는데, 사실 그녀는 혈기 왕성한 체질에다 그림, 글쓰기, 음악 등에 천부적 재능을 지녀서 유독 자신에게 민감한 이 아들에게 그림을 보며 명상하기, 좋은 책 읽기, 훌륭한 음악 듣기 등을 어렸을 때부터 은연중 길러줬다. 이 시절에 그의 생애를 결정 짓는 중요한 경험이 또 하나 있다. 12세 때 성 부근의 비행장에서 첫 비행을 해본 것이었다. 한 파일롯과 가까이 지내던 중 재미로 한 번 얻어 타본이 비행의 감격으로 그는 자전거 대신 비행기를 동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자기 인생의 목표 로 정해 버렸다. 제쉬트 학교(Villefrnche)에 동생(프랑수와)과 함께 입교(1914)했으나 여전히 규률과 학업에 염증만 느끼다가, 이듬해에 스위스 프리부르의 성요하네 학원 기숙생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시 읽기나 즐기던 중 동생이 죽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대학 자격 시험에 합격(1917)했다. 해군사관학교 입교를 위해 파리 보쉬에(Baussuet)로 옮겼지만, 엉뚱하게도 천문학과 문학에 몰두하다가 필기에는 합격했으나 구술에 낙방, 파리미술학교 건축과에 입학(1919)했다. 비록 학적은 뒀지만 그에게 이 시기는 대학로(Latin Quarter) 카페와 루이지아나 호텔의 작은 방에 딩굴며 건달생활을 했던 분방한 때였다. 모든 게 심드렁하던 터에 입대(1921), 스트라스부르 제2전투기 연대에 배속, 비행의 꿈을 이룩하는가 싶었으나 영 규률을 지키지 못해 좌절, 고작 수리공으로 불만을 달래야 했다. 이좌절감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한 덕분에 그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민간 조종사 훈련을 거쳐 그 자격증을 취득, 파일롯에다 예비역 중위(1922)가 되어 파리 부르제 비행장에 근무 중 두개골 상을 입고 주변의 권유로 제대(1923), 약혼을 했지만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보알롱 타일제조회사의 제품 검사원, 솔레 자동차 회사에 입사하여 그 판매원 등을 지내면서도 꿈은 하늘에서 떠날 줄 모르던 중 약혼녀가 떠나버렸다(1924). 마침 먼 친척 누이가 경영하는 살롱에서 지드, 갈리마르(나중 그의 소설 출판), 프레보 (잡지사 사장 비서) 등 저명인사를 만나 작품 <비행사>를 발표(1926), 이 분야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문학적 행운은 조종사로서의 행운을 동반했다. 작가적 명성 때문에 그는 라떼꾀르 항공사에 입사, 오매불망의 꿈인 조종사가 되었다. 2. 하늘의 서정시인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민간항공사에 소개해준 것은 보쉬에 시절의 스승인 한 신부(Sudour)였다. 당시 프랑스는 세 명(Beppo de Massimi와 Didier Daurat는 조종사이며 Pierre Latecoere는 비행기 제조업자)의 모험가에 의하여 하늘의 정복이 진행되고 있었다. 뚤루즈와 라바트 사이의 첫 비행이 성공한 게 1919년, 이후 위험하고 조잡하지만 다카르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을 때(1926) 쌩떽쥐뻬리가 마시미를 만났다. 이 모험심 많은 작가는 곧 뚤루즈-다카르 노선 담당인 도라에게 인계, 임무를 맡았는데, 첫 면접을 도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다 뭔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풍기는 열정을 가진 얼굴의 사나이. 대화가 오가면서 점점 활기를 띈 그는 내 질문에 진짜 파일롯 기질을 가진 젊은이에다 풍부한 상상력의 창조자임을 알게 했다." 그는 까다로운 시험에 통과, 첫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바로 수리소였다. 인생과 하늘에서 대선배인 도라는 용의주도한 책임 수행자적 인간상으로 <<야간비행>>(아르헨티나 근무시절에 쓴 이 소설은 1931년 출간하여 페미나상 수상)의 주인공 모델이 되었다. 이런 인물 밑에서 수련을 거친 뒤 그는 뚤루즈- 라바트, 다카르-카사블랑카 우편항공노선을 운항하다가, 스페인령 사하라 중계기지 까쁘 쥐비 비행장 책임을 맡았다(1927). 8일만에 비행기 한 대를 구경할 수 있는 이 황량한 곳에서 그는 스페인인과 현지 아랍인을 사귀어 구조활동 때는 도움을 받기도 했다. 사고로 어느 때는 이틀 새에 8천 킬로미터를 돌파하며 3백 여명의 아리인에게 토끼처럼 좇기기도 했던 이 쥐비 기지에서의 생활 중 그는 <<남방 우편기>>(1928년 간행)를 썼고, 여기서의 근무로 표창을 받았다. "위대한 용감성을 지닌 파일롯으로, 가장 전문적인 품성을 갖춘 데다, 극단적인 냉혹성, 그리고 예외적인 감각을 지닌 드문 미덕"의 소유자라는 게 표창의 이유인 걸 보노라면 이 작가의 문학을 이해하는 바탕이 될법 하다. 브레스뜨에서 해군고등항공 과정을 마친 뒤(1928) 그는 아르헨티나 우편항공회사 영업주임으로 전임(1929), 옛 동료 메르모즈와 기요메를 만나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기요메가 조난으로 안데스 산맥을 8일간이나 헤매며 생존한 사건(1930. 이를 모델 삼아 <<인간의 대지>>를 1939년에 간행)은 유명하다. 과연 모험에 찬 비행이 쌩떽쥐뻬리의 소설처럼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낭만적일까. 아르헨티나 시절을 경으로 쓴 <<야간비행>>이 대중적 갈채를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동료친구들은 파일롯의 실생활과 다른 거짓말을 썼다고 심한 비난과 함께 절교 당할 지경이었 다. 산살바도르 출신의 언론인 미앙인(꼰수엘로 순신)과 결혼(1931)하는 등 현실적인 위로가 없진 않았으나 회사가 망해버려 그는 해고, 귀국하여 정직 없이 카사블랑카-다카르, 마르세이유-아르제 등 노선을 탔다. 이무렵 항공업은 위기의 연속이었는데 모든 민간항공사를 통폐합하여 에어 프랑스가 탄생(1933)하게 되어 그는 다시 한심하게 라떼꾀르 항공사의 시험비행사가 되었으나, 그 모험심과 걸맞지 않은 일이라 생명을 잃을 뻔한 결정적인 사골ㄹ 치고는 해직 당했다(1933). 빈둥거리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져 자존심을 꾸 채 에어 프랑스의 홍보과에 들어가(1934) 유럽, 북아프리카, 중근동, 사이공, 모스크바 등으로 선전 강연(1934-5)을 다녔다. 돈이 좀 모이자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빨랐던 소망의 비행기를 구입(1935)하여 파리-사이공의 기록 갱신에 나섰다가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5일간 방황하던 중 베두인족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졌는데, 이때의 외로움 속에서 <<어린 왕자>>(1943년 간행) 같은 아름다운 환상적인 작품이 잉태하게 되었다. 물론 <<인간의 대지>>에도 이 체험은 그대로 재현된다.
3. 만년의 모험 모험심은 연령을 잊게한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파리 수아르>>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바르셀로나로 달려가(1936) 활약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언제나 하늘에 있다. 파리-사이공 노선 기록 돌파에 실패한 그는 1938년 뉴욕-떼라 델 퓌에고(Tjerra del Fuego) 간의 기록을 위해 나섰지만 역시 행운은 그를 외면했다. 운전 잘못으로 잠시 머물렀던 과테말라에서 그는 생애에서 가장 끔찍한 사고를 일으켜 며칠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회복했으나 일생 동안 완전하 회복을 못 시킬 정도의 부상을 당했다. 뉴욕에서 치유를 받은 뒤 귀국하여 스위스 등지로 요양하느라 아내와도 사이가 벌어졌다. 이 불행 속에서 <<인간의 대지>>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수상한 그는 2차대전 발발로 대위로 임관, 뚤루즈에 근무했느데, 상관들은 한결같이 그 신체적 조건으로는 무리라고 만류했지만 한 장군의 배려로 알라스 지역 정찰 어무를 맡았다(1940). 이 때의 경험이 <<알라스 전선비행>>(1942년간)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낼 수 있었는데, 1940년 6월 22일 프랑스 항복으로 임무가 중단되자 미국에 망명(1941)했다. 1942년 11월,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서 이 노 파일롯은 알지에로 가서 다시 공군에 합류했다. 프랑스공군은 미군의 장비와 명령으로 운용되었는데, 특히 신형 비행기(Lightning P. 38) 조종사는 만 35세 이하로 한정하고 있었다. 이미 42세인 그는 연령초과에 다 부상으로 어깨 마비증세 등 여러 이유로 비행이 금지되었는데 워낙 본인의 완강한 투지와 그 명성 때문에 7주 동안의 특별훈련을 거친 뒤에 비행이 허락되었다. 소령으로 승진, 활동했으나 두 번째 비행 후 착륙에 문제가 발생, 결국 그는 예편 당했다(1943). 그러나 노장은 포근한 침상에서의 죽음을 수치로 여기는 것일까. 그는 끈질기게 미 장군에게 간청, 꼭 5회만 정찰비행에 출격하라는 조건부 임용으로 사르디니아 섬의 아르케르 기지 2-33 정찰대대에 배치, 프랑스 본토 고공정찰 비행을 맡게 되었다(1944.5). 쌩떽스(동료들이 그를 부르던 호칭)가 어디 그 조건을 지킬 사람인가. 그는 틈만 나면 자원하여 벌써 8회가 되었다. 7월 31일 8시 45분, 그는 꼬르시까 섬 보르고 기지에서 9회째 정찰비행에 나섰다. 그르노블- 안스 방면 정찰 예정이었다. 그는 사막의 어린 왕자처럼 그 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4. 행동주의 문학 몽테르랑, 말로와 함께 쌩떽쥐뻬리를 흔히 행동주의 문학으로 묶어 논하는데, G. 랑송/P. 튀프로 <<푸랑스 문학사>>는 이들을 이렇게 비교한다. "몽테를랑과 말로가 전쟁 속에서 추구하는 위험과의 대결, 사나이다운 동지애를, 생떽쥐뻬리는 더 순수하게 자기늬 직업의 탐구 속에서 찾아냈다. 이 직업이 당시 --지금도 역시 그러하지만-- 전쟁과 같이 위험한 것이었음은 사실이다." 이어 그는 생떽스에 대해 평한다.
그는 균형 잡힌 성질의 소우자이고, 허식 없는 서정가이고, 일정한 신앙심 없는 신비가기이, 무엇보다도 낙천적이고 관대한 인간이었다. 그는 행동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오직 행동만이 우리들 자신에게 우리들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세계에 관해서 책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산 지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정기수 역 <<프랑스 문학사>>, 을유문화사,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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