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가는 노동운동
ILO(국제노동기구) 부산총회가 끝내 무산될 모양이다. 국제노동기구는 오는 10월 부산에서 제14차 국제노동기구아시아태평양총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위 총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함에 따라 개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부와 재계에서는 양 노총을 설득하여 위 총회가 무산되지 않도록, 국제적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지만 양 노총은 막무가내인 모양이다.
불과 10여년전까지만 해도 아이엘오, 국제노동기구에 우리 노동계가 얼마나 가입하고 싶어 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국제연합 기구 중 우리가 가장 늦게 가입한 기구가 바로 국제노동기구이다. 이는 박정희 3공화국 시절 및 전두환 5공화국 시절, 장시간 노동과 임금착취 등으로 유엔이 요구하는 근로조건 등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노동기구의 가입요건에 부합하지 못해 가입을 못했던 국제연합기구가 지금 우리 노동계가 과감하게 그 총회를 보이콧 하고 있는 아이엘오(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이다. 우리 노동계가 아이엘오 가입을 위해 가두투쟁에 나서고, 단식투쟁을 하고, 삭발을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총회가 열릴 수 있을 정도로 국력, 아니 노동조합의 힘이 막강해진 현시점에서 양대 노총은 위 국제총회 참석을 거부하여 버린 것이다. 외국의 수많은 노동계 인사들이 몇 달 전부터 아니 몇 해 전부터 총회 개최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했을 그 회의를 순간에 무산시켜 버리는 한국 노총의 결단력은 위대하다. 정말 위대하다. 기가 막힐 일이다. 잔치한다고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문전박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러한 후안무치한 결정을 접하는 외국의 노동계 인사들이 바라볼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추락, 추락 중이다. 회복할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일부 노동계는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도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실직 상태에 있는 잠재적 근로자들의 배고픔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얼마 전 귀족노조로 불리던 아시아나 노조의 파업이 결국 노사간의 합의도출에 실패하고 정부의 직권중재에 의해 사태가 봉합되더니, 국내 최고평균 연봉을 자랑하는 현대자동차 노조가 1조 5천억원의 회사 수익금을 노조원들에게 나누어 달라며 부분 파업을 시작한 것에 이어 기아자동차 노조도 부분 파업에 들어갔다. 물론 노조의 주장 중에는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당위와 필요성이 인정되는 근로조건개선 및 근로자에 대한 복지대책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평균 소득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는 그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수출계획에 차질이 오든, 국내 경제계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오든 고려치 않고 무조건 파업부터 벌리고, 국내의 노동문제 해결을 조건으로 국제회의마저 무산시켜 버리는 것은 철면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도덕적 해이의 극치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잘못된 문화 풍조가 생겼다. 나는 그 폭력문화의 뿌리가 일제시대의 식민통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울던 아이조차 울음을 멈추게 했다는 칼 찬 일본 순사의 상징성은 우리 국민들을 폭력에 굴종하도록 강요하는 잠재적 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 후 6.25전쟁과 4.19 의거, 5.16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4.13 호헌선언에 대한 6.29 선언이 있기까지 시위로 점철되어 온 데모문화는 모든 것이 집단화되면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식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지금 한참 방영 중인 드라마, 문화방송의 제5공화국을 보면 얼마나 많은 고문이 국가권력에 의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전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국민은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시위로 맞섰고, 불의한 정권은 이를 탄압하기 위해 안기부의 고문과 전경의 최루탄으로 맞섰다. 그 사이에 정의와 불의라는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폭력에 대한 폭력의 대응만이 정당화되는 몰가치의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안기부 요원들도 우리 국민이고, 전경도 우리 국민이며, 시위대도 우리 국민이다. 이를 지켜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이 군복무를 통해 폭력의 정당성을 배우고, 이러한 몸에 밴 폭력문화가 가정과 사회로 재투영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사회와 국가 전반에 걸쳐 폭력문화가 팽배하게 된 것이다. 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지도 모른다. 일대 일의 대화는 실종되어 버렸다. 오직 떼거리 문화만이 판을 친다. 재개발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주부들의 집단아우성, 노사현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노사의 악다구니, 국회에서의 여야의원들의 멱살잡이, 학교에서의 체벌의 일상화, 가정폭력의 보편화, 종교집단내에서조차 심심찮게 되어 버린 집단패싸움 등등 사소한 이해관계에 모두들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 모두가 폭력문화에 은연중 젖어있기 때문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옛말이 하나 그르지 않다. 이러한 폭력문화, 어거지 문화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일대 의식개혁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어폭력에 대한 과감한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부당한 폭력을 용인하지 않도록 가정교육, 학교교육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영구히 이 사회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없다는 문화의식이 정립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노력해야 한다. 아, 어쩌나, 지금 내가 강변하고 있는 이 말도 언어폭력일 수도 있으려니. 그대여 마음상해 하지 마시게나. 국가 형벌권에 태형을 부활시켜 폭력을 좋아하는 친구들 엉덩이에 곤장 열대쯤 어떻겠나? 참 좋은 생각 아닌가?
시사법률신문 121호 게재
첫댓글 어록121. 폭력문화, 어거지 문화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일대 의식개혁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막 가는 노동운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