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가 특기적성으로 과탐을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은 올챙이 3마리를 갖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올챙이 아빠’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밥도 주고 가르쳐주면 물도 갈아준다고 말이죠.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 제차지가 되었습니다. 그 녀석 말이 ‘올챙이 할아버지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올챙이 3마리가 한 가족이 된지 얼마후에 가장 큰 놈에게 뒷발이 나왔습니다. 꼬리는 짧아졌고요 더 지나서 그놈의 앞다리가 나왔고 꼬리는 정말이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한 이틀 지났더니 그 개구리가 어느새 죽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개구리를 그 작은 물통안에 그대로 올챙이처럼 넣어두는 것이 그 개구리에게는 더 이상 안정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올챙이에게는 가장 안전한 보호처였지만 개구리가 된 그에게 필요했던 환경은 물과 흙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개구리가 그 물통을 빠져 나오는 순간부터 많은 환경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험 때문에 물통에 그대로 두는 것도 역시 안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개구리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언제까지나 올챙이처럼 안전한 물통안에만 살아간다면 사실 그것은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성숙한 사람에게는 그 성숙을 증명할 수 있는 그래서 세상의 위기와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언제까지나 물통안에서 헤엄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올챙이가 아닌 세상으로 나와 살아야 할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중학교때 줄넘기 광풍이 분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체욱시간에 시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종목이 생겼습니다. 한번에 죽지 않고 오래하기, 각기, 깽깽이, 거기에 X자까지, 쌩쌩이 이 모든 종목을 연습하면서 기술이 늘어날때마다 참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최종시험에서 쌩쌩이를 한번에 80개를 넘게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실력이 늘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기쁨 그리고 우리의 기쁨도 신앙의 성숙에 있습니다.
오늘 가정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의 가정안에 서로의 성숙함으로 인하여 놀라운 기쁨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정- 연합의 시험장소입니다.
통일이 되고 난 다음에 남북의 연합이 잘 될까? 염려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서로 다른 체제와 가치관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북의 차이, 세대간의 차이, 인종간의 차이보다 더 뿌리깊고 오래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 차이는 아마 이 세상 끝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차이 때문에 고통중에 계신 분이 있을 줄 압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떤 착실하고 신앙좋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한결같은 믿음에 감동하신 하나님이 어느 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얘야 네가 무엇을 구하던지 내가 들어주마’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이럴때 아멘 안해서 유익한게 뭐가 있다고 아멘 안합니까? 좀 하세요!
이 남자가 하와이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하와이를 가려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것이 너무나 번거로워서 기도하기를 ‘주님! 이 바닷가에서 하와이까지 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시면 좋겠습니다.’하나님이 고민을 하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얘 내가 할 수없는 일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겠니? 좀 더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내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다른 일은 없겠니?’물으시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그러면, 제가 여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알수 있도록 지혜와 분별력을 주세요. 여자들이 ’모든다‘고 할때 정말 모르는건지? 알고도 모른다고 하는건지? 싫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토라져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아니 신경 쓰지마‘라고 할때 그게 진짜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신경을 쓰라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그러자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하와이로 가는 다리를 6차선으로 해줄까? 8차선으로 할까?’하나님도 골치 아픈 것이 여자의 마음이란 조큽니다.
그래서 존 그레이는 이 남녀가 얼마나 다른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만큼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것이 가정의 기초가 되는 결혼이라는 연합입니다.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가정은 연합을 훈련하고 실천하는 첫 번째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창2: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결혼이라는 측면을 넘어서 인간이란 서로 공동체, 지체를 이루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것은 18절 말씀후에 바로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고 짐승들을 데리고 오십니다. 아담이 다 이름을 지어주거든요. 그리고 20절 모든 짐승의 이름을 다 지은 후에 여자를 짓습니다. 처음에는 아담의 배필로 짐승을 생각하신 것 같아요. 하지만 아담이 짐승들이 이름을 지어 자기 밑에 두는 겁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아담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피조물을 생각하신 겁니다. 그래서 아담이 마취되서 자는 동안 뼈를 하나 뽑아서 살을 채우고 아담에게 데리고 오신 겁니다. 22절에 보면 결혼식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신랑에게 가는 신부처럼 하나님이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마취가 깨서 죽도록 아팠을텐데 자기앞에 선 사람을 보는 순간 뿅 가서 다시 마취가 된거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뼈중의 뼈 왕뼈라는 말이 아니고 살중의 살 갈비살? 안창살 이런 말이 아니고, ‘최고다. 가장 소중하다.’이런 감탄삽니다. 인류 최초의 가장 멋진 프로포즈입니다. 그렇다고 청년들! 이런 프로포즈 했다가는 정육점 집 아들인줄 압니다. ^^*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학생때 많이 외우셨지요?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이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시를 참 좋아하던 느끼하게 생긴 제 친구하나가 와이프가 배구선수였습니다. 결혼 초기에 싸움을 하는데 불쑥 손이 올라가는 순간 저편에서 뭔가 안면에 퍽 하더니 별이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편하게 푹 잤대요. 아내가 자기 얼굴을 배구공으로 삼은 거죠. 프로포즈할 때 그 시로 꼬셔 놓고는 그게 뭡니까? 서로를 배구공 취급한 거죠. 이게 가정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몸짓에 지나지 않던 어떤 존재가 이름을 불러 줄때 내게로 와서 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여자들이 있고, 남자들이 있지만 서로의 이름을 불러 줌으로서 몸짓이 아닌 꽃이 된 것이 결혼을 통해 이룬 가정 아닙니까? 세상에 많은 아이들이 있고 부모가 있지만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때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녀와 부모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 꽃이란 시가 무엇을 말합니까? 의미부여의 소중함을 가르쳐줍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뭐가 달라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의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그 사람의 가치’,‘그 일’의 가치가 달라지는 겁니다. 또한 그 사람을 대하고 그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대할 때 여러분의 태도는 가족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가치를 결정하는 겁니다. 과연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로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가 바로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인 그렇게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막 대할 수 있는 아무렇게나 취급할 수 있는 그런 하찮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은 이 친밀한 연합의 시험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화성에서 오고 금성에서 온 것으로 착각하니까 결혼하는 순간에는 뼈중의 뼈고 살중의 살이지만 좀 살면 금방 웬수가 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할 일이 친밀한 연합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연합이 회복되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용납함입니다. 존 그레이가 그 책에서 결혼을 이렇게 정의내립니다. ‘화성인인 남자와 금성인인 여자가 지구에서 만나 함께 지구인이 되는 것이다.’자기가 살던 별에 대한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지구라는 이 생소한 환경에서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서로에게 생소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니 자기 살아온 환경에 대한 것을 다 잊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려놓아져야 함께 연합하여 살수 있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함께 지구인으로 살 수 없듯이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자기 입장(자기 별)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을 용납하고 이해함으로 연합을 가정에서부터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가정들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가 공동책임을 주셨습니다.
가정의 파괴는 책임공방에서 대부분 이루어집니다. 화목한 가정의 특징은 상대방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지 않는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을 살피기 때문입니다. 콩가루 집안의 특징은 전부 네 탓입니다. ‘네가 좀 잘했으면 이런 일 없잖아.’이런 소리가 가정에서 들리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위기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누구 한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시죠? 이 아담 형님 가정의 위기는 뱀의 유혹에서 찾아왔습니다. 뱀은 아주 달콤한 말로 하와누님을 속입니다. 그래서 그만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런 분들 계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고생하며 사는 것이‘여자때문이라고’그것이 사실이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책임문제를 갖고 여자와 말다툼을 할때 이길 생각을 하는 남자는 두가지 중의 하납니다. 아주 머리가 나쁘던가? 제정신이 아닌거죠. 이건 분명합니다. 책임소재를 가리는 말다툼에서 남자가 모든 증거와 객관적인 사실을 다 갖고 있어도 결론은 항상 ‘내가 잘못했어’입니다. 그래놓고 생각해보면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지 미치겠어요.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듣고 종이었던 애굽처자 하갈을 첩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첩이 아들을 낳았으면 대부분 자기 아들로 삼고 본 부인이 키우는데 사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나서 돌잔치를 하는 기쁜 날 남편을 불러 닦달을 합니다. ‘둘 다 내쫓아라!’와 미치고 팔짝 뛰는 거죠. 내가 뭐 하갈이 천하 절색이라 첩으로 맞은 것도 아닌데 지가 하라고 해서 아들까지 낳았는데 내보내라니 미치는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사래를 붙들고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러니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내 책임이냐? 난 못한다.”이렇게 했다면 우리가 말다툼을 해야 하지만 아브라함은 말다툼을 하지 않았습니다. 창21: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잔뜩 근심을 했습니다. 라아라는 이 말은 몹시도 괴로웠단 말입니다. 12절에 하나님이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결론입니다. 아멘!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어라’이런데서 아멘 안하는 여자들은 뭡니까? 결혼하면 액자를 창21:12절로 만들어서 안방에 붙여놔요!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에서 우리는 책임공방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3:11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내가 아니고 내게 주신 여자의 책임입니다. 이 한마디로 남자 망신 다 시켰습니다.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할때는 언제고 ‘저 여자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남자를 다 믿지 마십시오. 지 급할땐 마누라도 팔아먹는 게 남잡니다. 사람의 이기적인 본심은 이렇게 비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넌 왜 이렇게 했냐? 그러자 여자가 말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뱀 그 놈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불똥은 뱀에게 튀었습니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하나님이 이 장면에서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느냐고 따져 묻지 않으셨습니다. 여자가 더 잘못했다고 하지 않으신 겁니다. 이 상황과 결과는 너의 두 사람 모두의 책임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얼마나 자신이 비겁한지를 드러냈고 여자는 유혹 앞에 얼마나 연약한지를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공방에 휩싸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은 책임의 비중을 따지게 함으로서 서로를 갈라놓고 다투게 합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에 대한 책임은 두 사람에게 모두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비겁한 태도에 대해서 책망 대신에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워주셨습니다. ‘땀흘려 일하여 먹여 살리는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이미 가르쳐주셨습니다. 너는 쐬빠지게 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날까지 얼굴에서 땀이 흘러야 하는 것이 남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유혹에 약한 여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원한다는 말이 손을 뻗치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꽉 붙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분 나빠도 들으세요! 남자들은 창3:16절을 액자로 만들어 붙여 놓기 바랍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떻게 됩니까? 20절에 비로서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지배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드런데 착각하지 않아야 할 한가지 사실이 무엇입니까? 이건은 죄를 짓고 난 뒤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뜻은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정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있음을 기억하고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항상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이야’이 고백이 위기의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 어떤 모습입니까? 그렇게 서로가 뼈중의 뼈로 살중의 살로 대하고 살아가십니까? 가정의 모든 불화와 불편함의 원인을 자기안에서 먼저 발견하고 연약함을 서로 보듬어 나가십니까? 창조의 가정으로 회복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