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기사 김정철씨(55·왼쪽)가 7일 오전 서울 길동사거리 인근 유흥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김종길 기자
아시아투데이 김종길 기자 = “오늘도 참는다….”
낮과 밤이 바뀐 삶. 6일 오후 8시 30분 서울 곳곳 유흥가 한편에 모여 손님을 기다리는 대리기사들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2~3개의 스마트폰 화면을 번갈아 주시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5년차 대리기사 김정철씨(55)의 하루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부는 거리가 바로 김씨의 직장이다.
“일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콜 애플리케이션(앱)을 켜야 해요. 저는 2개의 스마트폰의 총 5개의 콜 앱을 깔아놨어요. 이것들을 다 켜면 그때부터 제 주변에 어떤 손님들이 대리기사를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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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기사 김정철씨(55)의 스마트폰에는 총 5개의 콜 앱이 설치돼 있다. 대리기사들은 콜 앱을 보고 주변에 손님을 찾는다. 콜을 누르면 고객과의 거리, 전화번호, 출발지, 도착지 등이 표시된다. / 사진=김종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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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콜 매너’라는 앱을 켜자마자 쉴 새 없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가 앱에 뜬 콜 정보 하나를 누르자 해당 콜의 요금을 비롯한 고객과의 거리·전화번호·출발지·도착지 등이 상세히 정리돼 나타났다.
“손님이 많고 대리기사가 적은 자정부터 오전 1~2시까지는 콜을 골라서 갈 수 있지만 그 시간대 전후로는 웬만하면 빨리 콜을 잡아야 해요. 잠깐 방심하면 다른 기사들이 이를 채가기 때문이죠.”
대리기사들은 거의 술에 취한 손님을 상대하기 때문에 택시기사와 달리 일할 수 있는 시간대가 오후 8시 30분부터 길어야 이튿날 오전 4~5시까지로 한정적이다. 낮에도 대리기사를 찾는 손님들이 있다지만 이는 특별한 경우일 뿐, 일반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보통 오후 8시 30부터 일을 시작해 이튿날 오전 3시까지 5~7콜을 뛴다. 오전 4시쯤 귀가해 오후 2~3시까지는 자야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 근무 강도는 센 편이다.
올해 초 출범한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에 따르면 전국대리기사 수는 20만명, 하루 평균 이용자 수는 50만명에 달한다. 시장 규모는 연간 4조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게 협회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 달 평균 수입은 160~180만원 수준으로 보건복지부가 정한 올해 최저생계비 163만 820원(4인 가구 기준)과 대동소이하다.
더욱이 이들은 수입의 20%를 대리운전업체와 콜선테에 수수료로 지불한다. 또 앱 1개당 사용료 1만 5000원을 추가로 내야 해 총 5개의 앱을 쓰고 있는 김씨의 경우 7만 5000원이 매달 계좌에서 빠져 나간다.
“앱에 수수료를 미리 적립해 놓으면 콜을 뛸 때마다 20%씩 차감되는 시스템이에요. 미리미리 수수료를 적립해 놓는 것이 중요하죠.”
오후 9시 30분 김씨가 건대입구역 인근에서 첫 번째 콜을 잡았다. 왕십리로 가는 손님을 맞기 위해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김씨는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에 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오후 9시 50분 첫 손님을 도착지에 내려 준 김씨가 다음 콜을 잡기 위해 서둘러 스마트폰을 만진다. 김씨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평소 같으면 2콜 정도 했어야 할 시각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4~5년 정도 대리기사를 하면서 나름의 노하우를 갖게 됐다고 했다.
“다음 콜까지 생각해 두는 게 중요해요. 유흥가 인근 지역이 콜이 많거든요. 도착지 인근에 유흥가가 있는지 먼저 살펴보고 만약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면 아무리 요금이 높아도 가지 않는 편이죠. 특히 공단이나 산골짜기 지역으로 마지막 콜을 뛰면 아주 골치 아파요. 그런 지역에서는 택시 잡기도 힘들고 2~5km를 마냥 걸어야 하죠….”
대리기사들은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상당한 감정 노동을 겪는다. 김씨는 특히 운전할 때 손님이 시비를 걸어 오면 운행 자체가 불안해져 마음이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손님들이 대부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를 찾기 때문에 하대하고 막말하는 경우는 다반사에요. 특히 운전할 때 괴롭히면 이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죠. 또 앞에 손님과 요금 등의 문제로 마찰을 겪었다면 다음 손님을 상대할 때 그 감정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어 힘들어요. 그럴 때는 빨리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어요.”
오후 10시 첫 손님을 맞은 지 10분도 안 돼 김씨가 두번째 콜을 잡았다.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김씨는 왕십리에서 이태원으로 다시 이동했다.
오후 10시 50분 두번째 콜 손님을 이태원 해밀턴호텔까지 데려다 준 김씨는 다시 2대의 스마트폰을 번갈아 확인하며 가장 가까운 지역의 세번째 콜을 골랐다. 김씨가 고른 세 번째 콜은 이태원에서 길동사거리까지, 그는 서둘러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다.
2011년부터 대리기사 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젊은 시절 화물차 35대를 운용했던 운수회사의 CEO였다.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겪으면서 회사 문을 닫게 됐고 이후 의약품 전문 배송 사업도 해봤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사업하면서 생긴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다보니 취직하기가 힘들더라고요. 2~3년은 부업과 아르바이트를 해야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봉투접기를 하면서 한 달에 50만원을 벌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때 딸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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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서울 길동사거리 인근 유흥가에 대리기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주시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사진=김종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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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넘긴 시각, 7일 오전 길동사거리 인근 유흥가 한편에 손님을 기다리는 대리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목에 두른 블루투스 이어폰,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리기사들이었다.
“대리기사들이 주로 모여 있는 지역들이 있어요. 오전 3시쯤에 강남 교보 사거리에 가보면 대리기사들이 바글바글 해요.”
김씨는 대리기사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일단 지리에 밝아야 해요. ‘길치’는 절대 대리기사 못 해요. 손님들이 술에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도착지·경로를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흔하거든요. 그럴 때 대리기사가 알아서 가야하는데 지리가 밝지 못하면 뱅뱅 돌게 될 것이고 그러는 사이 손님하고 괜한 시비가 붙을 수 있죠. 또한 대리기사는 민첩해야 해요 10분 안에는 무조건 손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탈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죠. 손님과 감정적으로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이 정말 많아요. 참지 못하고 손님과 대거리하면 안 돼요. 상대는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그런 점들을 감안하고 감내해야 합니다.”
오전 1시가 넘은 시각, 4번째 콜을 잡은 김씨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떠난 자리, 인터뷰 중 그가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남겼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사업이 망하고 다른 일을 구하기 어려워 대리기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한국은 실패한 사람에게 또 다른 기회를 허락하지 않죠. 그러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은 한국에서 통용될 수 없죠. 현 사회에서 실패는 곧 파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