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저. 김난주 옮김. 민음사 간
· 별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 그들 마니아들이 노리는 것은, 자기의 표본 상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도 아니고 분류학적 관심도 아니고 물론 한방 약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곤충 채집에는 훨씬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노력한 보람도 있는 셈이다.
·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 지상에 바람과 흐르고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 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 이렇게까지 짓밟혔는데, 새삼스럽게 체면 따위 무슨 소용이 있을까?·보여 지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면, 보는 쪽에도 그 정도의 껄끄러움은 있을 것이다.…보여 지는 것과 보는 것을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나를 없애기 위한 간단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끝나는 일이다…지상을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나는 이 썩어빠진 수면에서 고개를 내밀고 마음껏 숨을 쉬고 싶다!
· 불현듯, 새벽빛 슬픔이 북받친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 '납득이 안 갔어. 어차피 인생이란 거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
· 딱히 서둘러 도망 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 발췌일 : 2020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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