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기림사로 떠난다. 입구에서부터 숲이 우거져 있다. 역시 수풀림(林)자가 들어간 절이라 그런걸까? 매표소를 지나 기림사로 가는 윗길을 버리고 오른쪽 아래로 난 길로 접어든다. 용연폭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이 신라시대에는 왕경에서 동해구로 통하던 교통로였다고 한다. 길가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답사객을 맞이한다. 가파르지도 않고 평탄한 길인지라 누구나 손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20여분 정도 오르면 용연폭포를 만나게 되는데 폭포는 숨어있어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여름철 수량이 풍부할 때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겠지만.

<기림사 용연폭포>
아무런 유적도 유물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답사객이 찾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 이곳에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신문왕에게 내려준 만파식적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댓잎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이다. 개요(開耀) 언년 신사(681) 7월 7일에 즉위하여 영명한 선대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이듬해 임오년(682) 5월 초하룻날 바다 일을 보는 파진찬(波珍 ) 박숙청(朴夙淸)이 왕께 아뢰기를, "동해 가운데 한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하여 떠와서 파도가 노는 대로 왔다갔다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천문을 맡은 관리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쳐보라고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선대 임금이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또 김유신공은 33천의 한 분으로 지금 인간 세상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사온바 두 분 성인은 덕행이 같으신 지라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리시려는 것 같사오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으로 나가보신다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無價大寶)을 얻을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대왕암>
왕이 기뻐하여 그 달 이렛날 이견대(利見臺)로 거동하여 그 산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잘 알아보게 하였더니 산 모양은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막대기 한 개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와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감은사에 와서 묵는데 이튿날 오시(午時)에 갈라졌던 대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이레 동안 캄캄하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정 옥대(黑玉帶)를 가져와 바치는지라 왕이 영접하여 함께 앉아서 묻기를, "이 산과 대가 어떤 때는 갈라지고 어떤 때는 맞붙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용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는 쳐도 소리가 없으나 두 손뼉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라는 물건도 마주 합한 연후에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갸륵한 임금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이 대를 가져다가 젓대를 만들어 부시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선대 임금께서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시고 유신공도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의 마음이 합하매 이와 같이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 나를 시켜서 바치는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왕이 놀랍고도 기뻐서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시주를 하였다. 칙사가 대를 꺾어 바다에서 나올 때에는 산과 용이 갑자기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는 기림사(祈林寺) 서쪽 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참을 치렀다.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치하하면서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옥대에 달린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가 진짜 용들입니다" 하니 왕이 물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옥 장식 한 개를 따서 물에 담가 보여드리지요" 하고는 곧 왼쪽에서 둘째 옥 장식을 따서 개울물에 담그니 즉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이름지었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를 가지고 젓대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방(天尊庫)에 간직하였는데 이 젓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개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잦아졌으므로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여 국보로 일컬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조>
이 설화는 여러 가지 유적과 관련된 설화이다. 먼저 기림사라는 절 이름이 나옴으로써 신문왕 당시에 이미 기림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신문왕이 점심을 먹었다는 기림사 서쪽 냇가에는 옥대의 장식이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고 그 자리가 못이 되었다는 용연이 있다.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젓대, 만파식적은 정치를 하며 일어나는 근심거리를 없애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신문왕이 국가를 통치하는데 절대적 존재로 자리잡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김유신 장군이 33천의 아들로서 우리나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다는 것은 국가 운영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이야기함이다. 33천은 불교적인 용어이니까.
사실 문무왕 이전에 모든 왕릉은 왕경에 있었다. 오직 문무왕만이 동해로 왔는데 이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중략…종묘의 주(主)는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돼는 것이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중략…한갓 자재를 허비하여 역사의 조롱거리를 까치며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죽은 넋을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니…중략…죽은 뒤 10일이 되거든 고문의 바깥 뜰(顧問外庭)에서 서국(西國·인도)의 식에 의하여 화장하고 복의 경중은 본래 정규가 있거니와 치상하는 범절은 되도록 검약을 따를 것이며…중략…」

<용연폭포>
우리는 문무왕이 이러한 유언을 남긴 배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삼국통일의 과정은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이어 676년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서 완성된다. 그러나 백제의 귀족 세력들은 비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왜와 연합하여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백촌강 전투이다.
백촌강은 현재의 금강하구 또는 동진강으로 비정이된다. 이때 백제부흥군과 왜 수군의 연합세력과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맞붙은 동북아의 국제전 성격을 띤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 왜 연합군은 전멸하고 그 잔존세력은 완전히 왜로 망명하여 일본국(日本國)을 세운다. 그리고 신라와 당에 사신을 보내고 외교문서에는 「해뜨는 곳의 천자(日出之天子)가 해지는 곳의 천자(日沒之天子)에게 보낸다」는 용어를 쓰곤 했다. 이 때 일본은 나당 연합군이 대마도까지 쳐들어올 것으로 생각했으며 반대로 신라는 일본이 신라로 쳐들어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무왕이 승하하여 국가의 공백을 없애기 위해 관 앞에서 태자가 즉위식을 하고 동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나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받은 흑옥대(黑玉帶)는 이제 신라가 중국화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고기까지 신라는 황금숭배문화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옥으로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옥문화였다. 이제 신라에서도 옥으로 왕의 신분을 상징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문왕은 16년간이나 끌어온 전쟁이 끝나고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고 평화를 갈구하는 그들의 마음을 위무(慰撫)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백성들은 이제 동해의 왜구를 걱정하지 마라.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지켜줄 것이다. 만파식적이 있으니까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며 외환이나 가뭄, 홍수 등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하라는 대국민 담화를 했던 것이다.
첫댓글 기림사 옆 냇가가 그 옛날 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돌아갈 때 쉬어가던 곳이란 설명과 함께 도란도란 모여 앉아 점심을 먹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용연폭포까지는 못 갔지만 신라왕이 지나던 그자리에서의 점심 새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