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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베트남
-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
김남일(소설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회원)
1. 베트남: 한국 현대사의 화두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내년으로 30년이 된다. 사이공의 미대사관 옥상에서 마지막 헬리콥터가 뜰 때 미처 올라타지 못한 이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모습이 새삼 눈에 선하다. 그 시각, 북베트남군의 탱크는 대통령궁과 탄선녓 공항을 접수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그것을 ‘통일’이라고 부르지 못했으며,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박정희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유신을 선포하고 연이어 저 악명 높은 긴급조치를 선포하는 등 정권 안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베트남인들에게 해방과 통일은 한국인에게 패망과 적화였다.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했는데, 그것은 결국 ‘반공’ ‘멸공’ ‘승공’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놀랍게도 이 자리에는 당시 탄선녓 공항을 점령했던 북베트남군 병사가 함께 앉아 있다. 1967년 소집된 ‘영광의 제27청년여단’의 병사였던 그는 17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수년 간을 전장에서 보냈다. 처음 5백 명이던 그의 부대원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는 단 몇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딱히 비극적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북베트남군 병사들의 생존률로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지난해 한국을 다녀간 베트남의 시인이자 소설가 반레 역시 북베트남 병사로 참전했다가 그런 확률 속에서 살아남았다.
세월은 어제의 동지를 적으로, 어제의 적을 동지로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헤겔에 기대어 ‘역사의 간계’라고 부른다. 베트남전쟁에서 총부리를 맞댔던 한국과 베트남은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역사의 간계를 행복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베트남전쟁, 그리고 파병
베트남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처음 각인시킨 것은 불행히도 망국(亡國)의 역사를 통해서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06년 민족운동가 현채가 번역한 ꡔ월남망국사ꡕ가 출간되었는데, 당시 독서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의 망명객 판 보이 쩌우(潘佩珠; 1867-1940)가 일본에서 당시 무술변법(戊戌變法) 실패 후 역시 망명 중이던 중국의 양계초(梁啓超)를 만나 대화를 나눈 내용을 기록한 이 책은 말 그대로 베트남의 망국기라고 할 수 있다. 1909년 이 책은 일제 검열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을 받는다. 이로 미루어볼 때, ꡔ월남망국사ꡕ를 번역하고 출간한 당시 지식인들의 태도에는 베트남의 멸망 과정을 하나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던 의도가 뚜렷하다 하겠다.
베트남과 우리의 관계는 이처럼 ꡔ월남망국사ꡕ로부터 시작되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관계는 베트남전쟁을 통해서라고 봐야 한다.1)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보 응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월맹)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북위 17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베트남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결성되어 부패와 독재로 일관하던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항쟁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도미노이론을 내세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신의 세력 유지를 꾀하던 미국은 1964년 마침내 통킹만사건을 조작하여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른바 베트남전)의 확전을 유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자신의 개입을 은폐시키고 전쟁을 국제화시키기 위해 동맹군의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한국은 1965년 3월 비전투부대(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시작했다. 어쨌거나 베트남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상 전투부대의 파병 또한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요즘 이라크전을 보라!) 마침내 1965년에는 맹호부대가 최초의 전투부대로 파병되었으며, 이후 백마부대와 해병 청룡부대도 속속 베트남에 진입했다.
한국군의 파병에 대해 모든 국민이 백 퍼센트 찬성표를 던진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지식인들조차 파병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그들이 지닌 세계사적 시야가 너무 좁았을까. 1965년 4월 국회에 파병동의안이 상정되었을 때에는 두 사람의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이 반대표를 던진 자랑스러운(?)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투표 후 검표 과정에서 기권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반대표가 한 표가 되었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 역사상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긍지로 여기던 전통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도대체 한국군은 왜 베트남에 가야 했던 것일까. 대통령 박정희는 1965년 2월 9일 ‘월남파병환송 국민대회’의 환송사를 통해 한국군 파병의 이유와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일찌기 정부는 중공의 지원을 받은 월맹 게릴라의 악랄한 침공에 직면하여 힘겨운 반공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자유월남공화국으로부터 군사지원 요청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중략)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정부와 국회가 이와 같은 (파병)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첫째로, 이것이 전자유아세아 집단안전보장에의 도의적 책임의 일환이라는 판단과, 둘째로는, 만약에 월남이 공산화하는 경우에는 아세아지역 전체에 미칠 공산위협의 증대는 필연적인 사실이므로, 월남을 지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간접적인 국토방위가 된다는 확신, 그리고 셋째로는, 과거 6.25 공산침략을 당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자유우방의 지원을 받아 위기일발에서 조국의 운명을 구출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른 우방이 공산침략의 희생이 되는 것을 피안의 화재처럼 방관할 수 없다는 공동운명의식과 정의감에 입각한 우리의 대의명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설명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첫째, 한국군의 파병이 ‘자유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당연히 미국의 막후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관리들은 한국군의 파병이 언제나 월남공화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했다.” 당시 사이공 정권은 이를 “미국 정부가 자국민들에 대해 벌이는 PR전“으로 이해했다.2)
둘째, 한 국가가 공산화되면 다른 국가도 공산화된다는 이른바 도미노이론은 실질적으로 당대 한국 반공정권의 정권 유지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국내의 반대 세력을 억압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국민들의 반공의식을 이용했다는 것은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없다.
셋째, ‘자유월남’의 국민들이 한국군의 파병으로 용기를 얻으리라는 설정은 과연 그 국민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아니 파악할 능력도 없고 그럴 의사 또한 전무했던 한국 군사정부의 일방적인 판단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오랜 외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에 반항하고 민족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며 싸운 애국지사와, 역대 외세에 빌붙어서 일신의 영달을 꾀해 온 민족반역자들과의 싸움”이라는 해석도 이미 정설로 굳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이른바 베트콩, 즉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경우,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중앙위원회 39인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 항불투쟁 기간이나 3년간의 일본 식민지배 기간 동안 투옥된 전력이 있었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 정권의 수뇌부는 프랑스의 식민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3) 이것만 보아도 베트남의 국민들이 한국군의 파병을 절실히 요청했다는 판단은 남베트남의 일부 지배층, 기득권 세력에게나 해당하는 것으로 축소하지 않으면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군 파병의 성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입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은 이미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고단한 신세였다. 아무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그런 상황에 처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 베트남전쟁이 TV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은 호전적인 미국 정책가들에게는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미국 국민들은 그들의 안방에서 미군들이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전쟁하는 것을 TV를 통해 생생하게 시청할 수 있었다. 미군 병사들이 베트콩들의 시체 수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체마다 귀를 잘라 모으고 있는 장면을 TV 카메라를 통해서 보게 되자, 그들은 미국이 과연 평화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가를 회의하기 시작했고 이 전쟁은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4)
베트남의 중부 지방에 있는 선미(밀라이)에서 일어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양민 대량학살사건이 20개월의 은폐 끝에 폭로되었을 때, 미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는 이미 거세게 타오르고 있던 대대적인 반전운동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었다.5)
어쨌거나 미국은 이러한 국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확전의 명분을 필요로 했는데, 이제 막 전쟁의 폐허를 딛고 야심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한 한국은 더없이 적당한 ‘우방’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둘도 없는 우방이라고 할 영국이 참전을 미루고 미루다가 끝내 의장병 6명의 ‘파병’으로 매듭을 지은 일을, 한국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4만 8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66년 3월 4일에 작성된 이른바 브라운 각서는 한국군의 파병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파병의 대가로 풍부한 군사원조를 받는 한편, 파병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부담을 미국이 지고,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차관 제공, 그리고 하다못해 파월한국군에 필요한 물품을 가능한 한 한국에서 구입한다는 등의 사항을 약속받았다.
문: 앞에서 외화벌이를 위한 군인수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월남전 당시 브라운 각서에 의하면 참전시 전투 수당까지 합쳐서 병사 1인당 월 200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우리 정부에서 병사들에게 지급한 돈은 1인당 월 30-40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 금액은 우리 정부에서 국가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쓰여졌다. 우리 경제의 탯줄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는 바로 이 돈으로 건설된 것이다. 한국군이 월남에 갔을 때는 모두 구식장비를 가지고 갔지만 돌아올 때는 모두 최신장비로 바꾸어서 들어와 군의 현대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6)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브라운 각서 이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은 총 9억 달러에 이르는데, 한국군의 현대화사업에 대한 지원 등을 포함하면 실제적인 이득의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커질 게 분명하다.
프랭크 볼드윈은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한국에 지출한 총액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정확한 수치가 얼마가 되든 간에,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주 명백하다. 그것은 즉, 미국이 파월 한국군을 돈으로 매수하여 이용했다는 사실인 것이다.7)
한국군은 미 수송선 바렛드호를 타고 속속 이역만리 베트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군이 맡았던 지역을 이어받아 공산 월맹군과 베트콩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나갔다. 한국전쟁의 경험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던 한국군은 기대 이상으로 용맹했다. 머나먼 조국으로 그들은 매일같이 승전보를 전해왔다. 아울러 소를 살 돈과 쏘니 라디오와 너무나 이국적인 그림엽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자신들의 주검을 보내왔다.
베트남 참전 기간 동안, 한창 꽃피던 나이의 한국군 5천여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8)
2. 한국문학 속의 베트남
한국문학은 베트남을 참전 세대의 문학 속에서 기억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상문의 [회색인], 이원규의 [훈장과 굴레],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신상웅의 [심야의 정담], 안정효의 [하얀 전쟁] 등 장편소설과 송영의 [선생과 황태자], 송기원의 [경외성서], 황석영의 [탑] [낙타누깔] [몰개월의 새] 등 중단편소설이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시에서는 신세훈, 김준태, 송기원, 김태수, 김명인 등의 작품들이 독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들 작가들이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실제 참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을 했다는 점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 문제는 그들이 당대적 현실에서 참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바로 그들의 작품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베트남 전쟁 참전의 문학적 형상화는 황석영, 박영한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삽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작가들마다 베트남전쟁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큰 편차를 보인다. 여기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작가들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러한 역사적 인식을 가로막는 1970년대 유신체제의 정치적 억압에 기인한다. 때문에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인 경우 아직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파헤치지도 못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우리의 입장 역시 정치하게 탐구되고 있지는 못하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게 바로 제3세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베트남전쟁의 형상화는 우리와 무관한 베트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민족국가가 겪은 제국주의의 식민적 침탈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 소설은 베트남전쟁을 베트남만의 전쟁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베트남으로부터 야기된 온갖 모순을 함께 해결해야 할 서사의 탐구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 같은 제3세계적 인식은 1970년대의 베트남전쟁 소설에서 미흡하다. 간혹 작품의 특정한 부분에서 작중 인물의 관념적 사변이나 전쟁에 대한 극단적 혐오와 알레고리에 의해 베트남전쟁이 이해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9)
이러한 평가를 내리기는 고영직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특히 ‘자기모멸과 설움의 동질성 확인’이라는 소제목으로 베트남 참전세대 시인들의 시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장윤우의 다음 시처럼 “‘미국의 눈’을 빌려 베트남 민족에 대한 무지와 경멸의 시선은 물론 한국군 참전마저 정당화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건강한 아들들은/이제 돌아왔다
異域 하늘/太極旗를 꽂고
祖國의 부름으로/참으로 오랜 기간/살점과 피로 싸워 왔던/형제들이, 친우들이/
검은 피부와 반짝이는 흰 이를/들내우며 이제/凱旋하는 것이다
砲煙이 안개로 둘리고/敵彈이 빗발로 쏟아지는/現場에서/투이호아, 짜빈동/
늪과 草原에서/쟝글과 砂丘에서/찬 이슬 맞으며 땅두더지처럼/十字星 지켜보던/
민족의 아들들이/거룩하게,/참으로 위대하게 오는 것이다
血義를 다진/白馬와 비둘기,/鬼神도 잡는 靑龍/猛虎 勇壯들이여/
金上士, 李大尉,/꽁가이의 눈물 젖은 손길을/차마 못 뿌리치던 朴一兵,/
戰塵 속에서 모두 飛虎 같던/친구들이여/우린 무엇을 드려야 하는가
오직 感泣할 뿐/民族의 이름으로 꽃다발 드리느니/
우리의 젊은 피는/식을 줄 모른다
([우리의 젊은 피는 식을 줄 모른다] 전문)
마치 한국전쟁 당시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도 말한다]를 떠오르게 하는 이런 세계 인식은 당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참전 세대 문학의 일정한 한계를 증명해 줄 뿐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인식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 타자에 대한 예의, 타자에 대한 고려가 전혀 끼어들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파병 홍보전단을 연상케 하는 선전문학을 벗어난 지점에서는 아무런 세계사적 시야도 확보하지 못한 채 참전한 병사 개인이 참혹한 전쟁과 맞닥뜨리며 겪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실존적 고뇌가 지배적이다.
지금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착검이다
실탄 장전이다 방아쇠를 푸는 일이다
지금 이 시간 중요한 것은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여자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사격 명령이다
- 신세훈, [지금 참으로 중요한 것은] 제1연(시집 [비에뜨남 엽서](1965) 중)
나를 쏘아보는 아이들의 큰 눈을 총구처럼 두려워하면서/낯선 거리를 소총을 겨누어 쥐고 걸었다./어설픈 연극의 배우처럼 자신의 행동을 비웃어 보면서/나는 소총을 쥐어잡은 자신의 손아귀와/그런 모습의 나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눈길 중에서/누구의 불신이 더 큰 것인가를/어려운 수학 공식을 풀이하듯이 생각하며/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을 걸었다.
- 송기원,([월남에의 기억 2] 제1연)
전쟁에 대한 이러한 실존적 인식은 결국 자신들이 참전한 베트남전쟁의 특수한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베트남전쟁의 발생 원인과 실제 베트남 민중의 기원이 무엇인지, 우리는 왜 참전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 의식은 자라날 틈조차 없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대부분의 소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자기 존재와 베트남전쟁의 세계사적 위상을 전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당시 참전 병사의 처지에서는 어쩌면 솔직하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 경우, 전쟁은 야만이 이성을 파괴하는 거대한 복마전에 다름아닐 것이다. 문학이 거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파괴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참담하게 증언해 내는 일뿐이다.
이쯤에서 고영직은 특히 안정효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린다. 길지만 인용한다.
“안정효의 『하얀전쟁』(원제 ‘White Badge’, 전3부작)은 여러 차원에서 문제적인 요소가 있다. 직접 영어로 개작, 미국의 유수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그쪽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렇고, 극장 영화로 상영돼 대중적인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국적 불명의 뒤틀린 세계 인식을 보임으로써 소설의 균열을 낳고 말았다. 출판사 부장인 한기주의 사고 방식은 도저히 한국인의 그것이라 할 수는 없다. 미국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권에서 정보를 얻는 그는 가치 평가를 철저히 배제한 채 자기 중심적인 폐쇄 회로와도 같은 지식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가령, “이길 수만 있었다면 월남전은 미국이 공산주의를 저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싸움이 아니었던가?”(제1권 142쪽)라는 진술이 어찌 베트남전에 개입함으로써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논리라 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한, 한기주가 월남병을 앓고 있는 변진수의 문제를 더불어 고민하고 진정 포용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익숙한 문법이지 않은가. 김철은 이와 관련, “막연한 휴머니즘이나 이데올로기 혐오증, 베트남 민족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각 등의 ‘정치적 무의식’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이 은밀히 전파한 또 하나의 지배 전략이며, 베트남 민족에 대한 또 다른 모욕이다”10)라고 썼다. 그런 예는 숱하게 많다. 베트콩 여자 포로의 뛰어난 미모를 보고 결코 베트콩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든가, “월남전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추적이나 입체적인 조감을 해보겠다는 오만한 욕심은 없다”는 ‘후기’에도 불구하고 작가 나름의 시각으로 전쟁의 의미를 따지는 것은 그 좋은 사례이다.
인간은 과연 전쟁에서 무엇을 얻는가? …(중략)…인간은 얼마나 초라하고 추하고 교활한 존재인가? 그 교활함의 극단적인 상징이 월남의 정글이다. 존엄성도 없고, 남성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비열하기만한 싸움. 장쾌한 도전도 없고, 그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하나씩 하나씩 죽이기만 하는 싸움. 이곳에서는 죽음조차도 모욕을 당한다. (279쪽)
그렇다, 우리들은 속수무책인 백지 답안지를 내야 했던 남의 전쟁을 그냥 다녀왔을 뿐이지, 사이공의 이름이 호지명시라고 바뀌는 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중략)…온세상의 모든 전쟁을, 역사책에 줄줄이 나오는 모든 전쟁을 처형할 사람, 전쟁에 대한 모법답안을 낼 사람은 누구인가? (330쪽)
작가는 미국의 서부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차라리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것이다. 후자는 영화의 멋진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한기주의 변진수 살해는 결국 자신을 겨냥한 일종의 자살 행위인 셈이다.작가는 시종일관 헛되고 헛된 이념과 전쟁에의 회의와 불신을 토로하지만, 그 근거의 설명은 물론 자신이 또 다른 어떤 이념에 이미 깊이 감염되어 있는지조차 한번도 진지하게 회의하지 않고, 너무나 낯익은 실존주의의 우산 아래로 도피한다. 지독한 역사 허무주의에의 경사는 후속편에도 계속 이어진다. 한국인이 쓴 이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여간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편이 백배 낫다.”11)
참전병사의 실존적 회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또다른 작품으로 이원규의 [훈장과 굴레]를 들 수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눈을 통해 전략촌을 건설하여 베트남 민중을 도와주려 했던 선의가 오히려 그들을 치명적으로 섬멸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는 현실의 모순을 짚어낸다. 그것은 결국 전쟁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작가는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고영직이 이 작가에 대해 “자기 위선에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이념에의 심한 경사를 보이지 않으며 고지식할 정도의 성실한 글쓰기와 차분한 관찰로 작가로서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상대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고 있지만, 작가의 성실성이 작품의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균형감각’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바로 그 균형감각을 세계사적 수준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를 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은 아시아적 시각에서 제국주의의 문제는 물론, 고통스럽지만 외면해서는 안될 한국군 참전의 의미를 정면에서 다룬 탁월한 성취이다. 자신의 체험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저 팽팽한 문체로 미군 장교와 사병, 월남 정부군과 해방전선, 월남의 농민과 소시민, 한국군 장교와 사병 등 숱한 인물의 다양한 시점을 통해 서로의 체험을 비교할 수 있도록 소설을 구성해 전쟁의 실상을 폭넓게 재현하고 있다.”12)
“베트남전쟁 소설의 대부분이 전장의 최전선을 주요한 사건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반해 이 소설은 전장의 최후방이랄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최전선에 온갖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최후방을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하여 베트남전의 실상을 예각적으로 탐구한다. 작가의 이러한 시각은 베트남전을 다루는 기존의 시각과 뚜렷하게 변별된다. 이것은 황석영이 베트남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황석영이 전장의 최전선이 아니라 최후방, 그것도 군수물자가 암거래되는 암시장을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문제적이다. 최전선에 정상적으로 보급되어야 할 군수물자가 암시장에서 미군과 한국군, 베트남 정부군,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등이 뒤엉킨 관계 속에서 암거래되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베트남전은, 기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 갈등보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이해관계로 전도된 것이다라는 작가의 독특한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다.”13)
황석영은 소설을 통해 이렇게 베트남전쟁을 규정한다.
--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 가이사의 것, 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이다. 달러, 그것은 제국주의 질서의 선도자이며 조직가로서의 아메리카의 신분증이다. 전세계에 광범하게 펼쳐진 군대와 정치적 힘 보태기, 다국적 기업망의 그물로 거두어진 미국 자본의 기름진 영양 보태기, 지불과 신용과 예금의 중요한 국제적 매개체로 정착된 달러 보태기, 다국적 은행의 번창 등의 결합 위에 핏빛 꽃은 피어난다.
이렇듯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전쟁이 결국 미국의 전쟁, 자본의 전쟁, 제국주의의 추악한 욕망이 판치는 대리전쟁일 수 있다는 인식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황석영은 베트남 민중을 주요한 등장인물로 등장시키고 그들의 동선(動線)을 치밀하게 추적하여 더욱 큰 설득력을 얻는 데 성공한다. 아마 이 작품은 베트남전쟁을 그린 작품 중에서 세계사적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획득한 드문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전쟁, 그 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경제성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는 베트남쪽에서 결코 소홀히할 수 없는 경제적 동반자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베트남과의 관계 재설정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몇 가지 요인이 여전히 존재한다.
첫째, 고엽제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와 보상문제.
베트남전 당시 정글지역에 대량 살포됐던 고엽제(일명 에이전트 오렌지)는 농가에서 제초제로 흔히 쓰이는 2-4D와 2-4-5T를 1대 1 비율로 섞어 만든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시계 청소용으로 뿌려진 이 다이옥신은 1백 70㎏이 전세계 인구를 죽일 수 있는 치사량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다이옥신이 호흡기,피부 접촉,계곡 또는 강물의 식수를 통해 인체에 들어가면 각종 기관에 붙어 암 또는 불치병을 일으킨다. 증세가 나타나는 과정 또한 독특해 흔히 AIDS(후천성면역결핍증)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는 감염 즉시 증상이 나타나지 않고 5-10년 후에 발병되기 때문이다. 얼굴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몸 전체가 조금씩 굳어지며 결국에는 마비증상을 보이면서 암으로 번져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꼭 모기약인 줄 알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역시 잘사는 나라답게 모기약을 저렇게 비행기로 뿌리는구나 하면서 아예 웃통을 벗고 나가서 맞기도 했습니다.”
한 참전 피해자의 말에서, 그 당시 파월 장병들이 미국이 은폐한 고엽제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고엽제 후유증은 2세에게도 유전되는 바, 온갖 기형과 마비 등의 증상이 자식들에게 이어져 참전용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1992년 6월 29일 파월장병이 개별적으로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서 고엽제피해자전우회에 신고한 자료에 의하면 총 2,341명 중 신체마비 227명, 각종암 208명, 결핵 및 호흡계질환 134명, 피부병 264명, 손발부패 264명, 기형아 분만 106명, 정신질환 114명, 후유증 사망 108명, 비관 자살 12명, 기타 1,414명이다. 물론 이 자료는 피해자들의 신고에 의하여 집계된 자료이기에 해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의 피해상황에 비교하여 우리나라 고엽제 피해자는 대략 1만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94년 7월 보훈병원 검진 등록환자는 총 4천 5백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고엽제 후유증 환자는 330여명,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는 1천 40여명이었다.14)
고엽제 관련 법령이 있긴 해도 정부에서는 효과적인 보상이나 치료 대책을 세우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둘째, 한국인 2, 3세 문제.
베트남전 당시 파월 한국군, 그리고 특히 상대적으로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있던 파월기술자들에 의해 생겨난 한국인 2세들을 라이따이한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들의 존재는 두 나라 국교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언론에 의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베트남 현지에서 이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펴고 있는 단체에 기대어도 적게는 2천 명에서 많게는 2만 명까지로 추정이 분분한데, 사실 베트남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이들에 대한 규모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의 존재 그 자체는 우리와 베트남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미묘하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관건으로 간주되어 왔다. 미묘하다는 것은, 그들이 어쨌든 적국의 ‘씨앗’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종전 후 그들은 자신의 출신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일단 과거가 드러나면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의 한국인 2세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실정에서도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지난 세월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또다른 한국인 후세들의 문제가 대두하고 있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한국이 베트남에 경제적으로 진출하면서 현지에 오래 주재하게 되는 상사원이나 개별 사업가들이 많이 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른바 신라이따이한이 많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를 파헤치는 움직임에 대해서, 현지의 교민들은 상당한 반감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대부분의 교민들은 외로움을 견디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의 존재 또한 사실이라면 무작정 숨기는 것보다 공개적인 조사 활동 등을 통해 바람직한 해결방안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내 베트남 노동자문제와 베트남 현지 진출 한국기업의 노동문제.
현재 한국에는 다른 나라 동남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노동자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 이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베트남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어 교재를 보라.
-- 사장님, 왜 월급을 안 주세요?
-- 제발 때리지 말고 말로 하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더 무슨 말을 하랴.
물론 이들의 문제는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만 다루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크게는 우리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 전반에 걸쳐 정밀하게 처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과 우리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현재 한국에 와 있는 이들 베트남인 노동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쉽게 생각하는 것 이상의 중요성을 지닐 것이다.
한편,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인 기업의 노동문제는 더욱 심각한 양상이다.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에서는 분쟁에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에 일반 기업은 물론, 외국기업에서도 노동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특히 한국기업에서 노동문제가 발생하여 적지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 (조선일보 1996년 7월 3일자)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에 진출한 한국기업 태광비나사의 한국인 작업감독이 베트남 여성노동자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등 학대행위를 저질렀다고 베트남 관영 ꡔ탄 니엔ꡕ지가 2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김으로만 알려진 이 한국인 작업감독이 조업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베트남 여성노동자 45명에게 무릎을 꿇고 팔을 들고 있게 했으며, 회사내 다른 부서 노동자들이 항의하자 30분만에 중단했다고 전했다. (중략) ꡔ년던ꡕ지는 최근 작년 외국인 고용주들의 노동자 학대가 22건에 달했으며 그중 절반이 한국기업들이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 올해 초에는 한국 의류공장의 한국인 여성 작업감독이 베트남 노동자들을 줄세워 놓고 구둣발로 때린 뒤 출국조치된 바 있다.
민간인학살문제15)
그러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관심있게 살펴야 하는 것은 근년에야 이슈로 떠오른 파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다. 한 시사주간지의 베트남 통신원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 이 문제는 베트남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마지막이자 결코 미루거나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보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충격이었다.
--ꡒ따이한 병사들이 토끼몰이하듯 주민들을 암자로 몰았어요. 갑자기 병사 한 명이 주민들 속에서 응의 아들인 코(당시 10살)를 불러냈어요. 그가 뭐라 물었지만,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얘는 고개만 흔들었지요. 그러자 얘에게 총을 쏘았어요.ꡓ
-- 한국군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일부 주민들만이 집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논에 일을 하러 갔었다. 한국군들은 주민들을 여러 그룹으로 모아놓고 총을 닦았으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전하기를, 한국군들이 총을 쏘자, 어떤 사람들은 위로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고 목이 떨어져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 6시, 일을 나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은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하였다. 어떤 집의 경우엔 20여 명의 가족이 몰살을 당하기도 하였고, 진창구덩이 속에는 몇 명 아이들이 사람들의 밑에 깔려 여전히 살아있기도 했다. 어머니의 젖을 찾아 기어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사람들의 밑에 가려 숨죽여 있던 7명의 아이들은 살아났다.
우리는 당연히 너무나 끔찍스러운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의 증언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통일베트남의 문화통신부가 조사해 확보한 명단에는 현재까지 희생자가 5천여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증언과 증거가 아무리 구체적이고 생생하더라도 선뜻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전쟁, 그것도 비정규전이라는 베트남전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는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실, 국방부와 일부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단체에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그로부터 너무나 긴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 ‘국민의정부’가 들어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한국군 파병으로 빚어진 불행한 과거에 대해 유감의 뜻을 공식적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그 사과 한 마디로 모든 상처가 다 아물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가 끝난 지 반백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진정한 사과, ‘유감’이니 ‘통석의 념’이니 하는 교언영색(巧言令色) 겉치레말뿐인 사과가 아니라, 진심으로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사과 한 마디를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서 무엇을 왜 사과하는지도 모르는 채 대통령의 유감 표명 한 마디로 모든 과거를 덮어두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는 냉혹한 것이다.
우리는 싫어도 지나간 베트남전을 돌이켜 봐야 한다. 나아가 엄연히 가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그리하여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양민을 학살한 의혹이 있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4. 3사태와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물론이고, 최근 화제를 모은 바 있는 노근리사건의 예를 보더라도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물론 그 끔찍한 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형제, 우리의 부모, 우리의 자식이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책임은 전적으로 참전을 결정한 세력이 져야 한다. 따지고보면 그들이야말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일 수도 있다. 그들은 도움을 원하지도 않았고 오는 것을 반가워하지도 않은 남의 땅에 가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도 스스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귀국 후에는 부상과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존재 자체가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나아가 베트남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담론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16)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쓸모없는 것이라 무시해버릴 순 없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작업이 더더욱 중요하며, 그들이 먼저 나서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역사의 한 대목을 무작정 덮어두자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무작정 부인할 때, 우리가 세월이라는 간편한 방책에 기대어 무작정 과거를 잊자고 말할 때, 그들의 희생은 그야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희생으로 간주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4. 전후 세대의 베트남 인식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한국의 작가들에게 베트남은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세대별로 다르겠지만, 현재 40대 작가들은 특히 그 전쟁에 대해 정서적 일체감을 느낄 만큼의 접촉면은 지니고 있다.
내 경우,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시절까지(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는 부산항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파월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여고생들의 환송행사와 늘 대한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파월 한국군의 승전보, 그리고 월남우표가 붙은 답장을 기다리며 쓰던 위문편지로 점철되어 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곳 월남(월나암)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이런 노래들을 부를 때 누구라서 목이 메이지 않았을까. ‘조국의 이름으로’ ‘뽑힌’ 용사들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향할 때, 비는 추적추적 뿌리고, 열심히 흔들던 종이 태극기는 그 비에 젖어 찢어지고, 그들이 행진하던 길바닥에는 오색 꽃종이와 꽃다발에서 떨어진 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마침내 길게 고동을 울리며 배가 움직일 때, 격정에 목이 메어 혹은 아지못할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공포에 떨며 솟구치던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던 경험은 일사분란하기 짝이 없었던 당대 병영국가 체제의 일상사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떠나간 삼촌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내고, 물소 그림이 그려진 월남 우표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죄없는 백인 아녀자를 무참하게 습격 살해하는 인디언만큼 사악한 베트콩들이 안케에서 짜빈동에서 소탕되는 전황을 마치 연탄가스 사고 소식만큼 자주 보고 듣고 자란 우리 세대가 베트남전쟁을 진정으로 공포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훨씬 더 자란 뒤에나 가능했다. 그것은 삼촌들이 귀국할 때 가져온 쏘니 텔레비전이 사라진 그의 다리 한쪽과 맞바꾼 것이라는 사실을 얼핏 알아차렸을 때라든지, 아예 하얀 유골함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삼촌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조차 아니었다.
우리에게 베트남의 공포를 가져다 준 최초의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보다는 오히려 리영희 교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 패망을 반공전선을 강화하고 유신을 통한 장기집권 강화의 계기로 삼는 것이야 늘 있었던 일이기에 차라리 일상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여도,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바로 그 월남전의 진실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것도 미국 펜타곤 문서들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한마디로 그 책은 미국이 우리가 늘 존경해 마지 않았던 존 웨인의 그 미국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다. 어두운 동굴에서 근 스무 해를 산 수인이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조된다면? 아마 그는 바깥으로 나간다는 기쁨보다는 다른 생이 가능해진 그 순간의 햇볕에 대해 차라리 공포감마저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새로운 베트남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더욱 명백한 진리로 굳어졌다.
새로운 베트남은 실록소설 [사이공의 흰옷](응웬 반 봉, 친구)을 통해 우리 세대를 사로잡았다.
-- 흰 아오자이에 흑진주같이 빛나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자전거를 타고가는 여학생.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포도에 구르는 나뭇잎만 보아도 닭똥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나이의 홍. 그러나 그녀의 가방 안에는 삐라며 해방전선의 신문이 들어있다.
홍은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 출신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평범하다는 것은, 항불전쟁때 비밀 서류를 나르던 아버지가 용병에게 잡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나이 어린 딸이 발길질에 걷어차여 강으로 떨어지고, 섬에 숨어 있던 숙부가 사살당하고, 그러자 숙모는 강간까지 당한 뒤 살해되고, 또다른 숙부는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하며,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시장에서 독재의 주구에게 고기 상자를 뒤집어쓰는 모욕을 당하는 것을 말했다.
홍이 투쟁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홍은 동창생이며 연인인 호앙의 추천으로 항전구에 들어가 교육도 받고 나온다. 그러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사이공 동물원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한다. 홍은 적들에게 유리한 진술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초주검이 되어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머리핀으로 벽에 글을 새긴다.
“이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는 이 흰옷처럼/ 미래에 대한 사랑으로 오직 맑게 살려 했던 나/ 이제 이 비참한 수렁 속에 빠뜨려졌으나/ 나의 이 흰옷 더욱 희게/ 언제까지나.”
사이공의 흰옷이란 결국 부패한 정권에 대한 염결한 존재 선언인 것이다. 호앙도 그녀와 마찬가지 길을 걷는다. 그들에게 체포와 고문, 투옥은 당당한 해방전사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당연한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17)
그 책은 ꡔ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ꡕ ꡔ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ꡕ 등과 더불어 격동의 저 80년대 내내 운동권의 교양도서 목록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했고 몇십 쇄 판을 거듭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인도차이나반도에 새로운 확전의 징후들이 나타날 무렵인 1960년대 초반 사이공의 평범한 여학생 홍이 광기의 역사에 휘말리는 과정을 추적하는 그 책을 읽다보면, 베트남과 한국이라는 물리적 거리와 60년대와 80년대라는 시대적 간격을 뛰어넘는 진한 동질성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청년기를 보낸 세대는 더 이상 베트남을 사악한 공산국가로, 또는 자기모멸이나 자기연민의 늪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새 베트남은 차라리 5천년 역사를 통해 세계의 강국들(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을 하나같이 물리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5. 한국문학 속의 새 베트남
이러한 전후 세대 작가들이 베트남을 그려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이 여진마저 희미해진 뒤의 일이다.
그 배경에는 자화자찬 같지만 내가 속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이 있다. 1994년 창립 이후 회원들은 베트남 여행을 함께 떠나는 당시로는 드문 경험을 시도한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노이바이 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싫든좋든 분단 체제를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던 작가들에게는 적지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하노이에서 대절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1번 국도를 따라 훼, 다낭, 호이안, 퀴년, 나짱을 거쳐 마침내 자본주의의 전시장처럼 화려한 옛사이공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15박 16일간의 베트남 국토 종단여행 내내 어떤 형태로든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때 몇 편의 시가 쓰여졌다.
(전략)
옆에는 여전히 낯선 땅이 앉아 있다
내가 쫓아가자, 게으름뱅이 바람이 콧구멍에 겨우 발을 디민다
시원함보다 비린 풀냄새
나는 그와 함께 불볕 속을 달린다
오, 우물처럼 깊은 베트남의 하늘이여
지상에서 또 한번 네 얼굴을 보는구나
배구공처럼 튀어올라 우물에 흠씬 젖고 싶지만
세계는 囚衣처럼 답답한 더위로 덮여 있다
줄넘기를 하는 아이들의 몸에서도 땡볕이 참깨처럼 하얗게 털린다
나는 끊은 지 4년 된 담배를 꺼내물고 깊은 숨 하나를 하늘에 보탠다
싸게 산 중고 지포에선 전쟁의 불꽃이 혀를 빼문다
"나는 죽어 천당에 갈 것이다. 왜냐면 살아 지옥에 있었으니까 - 상병 W. 윌리암"
오, 인간을 죽인 자는 詩를 안다
신중현도 록을 위해 이곳을 꿈꿨지만 나는 죽음이 흔해 걱정이구나
도회 복판에서 장례행렬을 만났다 통행을 막는 일쯤 잘못이 아니다
마른 수숫대처럼 선 채로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삶보다 죽음을 경배하는 사람들
울어라 내 손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을 내가 몰랐다
아마도 이 풍경은 산 자들의 것이리라
네거리에 이르러 씨클로가 잠시 멈칫대는 동안,
퉁명스런 오토바이가 크락션을 울리고, 엑셀을 밟는다
마후라에서 엔진이 울부짖는 소리
저게 혹, 호텔 카운터의 민차오양은 아닐까
내 눈길은 한사코 따라가본다, 아니어도 좋다
어젯밤 나는 폐허의 성터에서 따이한 미망인이 우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사진틀 속의 소녀를 훔쳐보고, 오 비겁하다 인간이여
그때 왜 내 곁에 재우고 싶었던가
(후략)
(김형수, [슬픈 열대 -사이공 연가])
시적 화자에게 베트남은 더 이상 살아서 간 지옥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는 “우물처럼 깊은 베트남의 하늘”에 흠뻑 젖고 싶지만, 결국 발견하는 것은 셔터를 눌러대는 자기 손이다.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산 자들의 풍경. 그러나 그것은 죽음, 또는 죽음의 기억하고 결코 떨어지지 않는 풍경이다. 이 시에서 베트남 전쟁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작 지포 라이터나 슬쩍 목도한 따이한 미망인의 모습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시적 화자가 전쟁(또는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그는 끊은 지 오래 된 담배를 기어이 빼어물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런 불편함은 그 여행 이후 다른 기회에 여행을 다녀온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친구여, 그대의 각진 얼굴에 수시로 드리우는 그늘을 나는
훔쳐보았네 하노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네는 눌러 쓴
모자 벗고 허리 숙여 침묵의 긴 목례를 올리더군
아오자이 처녀들이 숲 속 뛰쳐나온 새처럼 밝게
웃으며 거리를 지날 때 자네 얼굴이 시월 햇살에 따가운
능금과 같이 붉어지고 눈빛 또한 햇살 만난 이슬같이
초롱 빛나던 것을
어디를 둘러보아도 일망무제 초록 융단의 평원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뚝우뚝 수직으로 서서 탐스런 열매의
젖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야자수 그 큰 눈으로 쓸어 담으며
자네의 입은 벌어져 다물 줄을 모르더군 그것이 그렇게도
부러웠을까 하긴 꼬딱지같이 좁은 땅에서 네것내것 다투다
온 우리였으니 그것처럼 부러운 것도 없었을 것이네만.
친구여, 내가 자네를 훔쳐본 것은 이것만이 아니라네
나는 또 보고야 말았네 전쟁박물관, 위대한 영웅 호치민
생가 둘러보면서 구찌 터널 속 두더지 되어 들고
나오며 우리를 괴롭힌 것은 더위만이 아니었네 두 눈에 흘러 든
것 땀방울만은 아니었네 묵직한 돌처럼 단단하게 차오르는 울음
목 안으로 넘기며 애써 하늘 올려다 본 것 감상만은 아니었네
우리들 아버지와 삼촌들이 야만과 광기의 청춘을 보냈던
이곳에 와서 어찌 관광과 유람으로만 소일할 수 있겠는가
철없이 크게 떠들고 방자하게 웃고만 간다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그것처럼 큰 생의 모독도 없었을 것이네
깊은 샘처럼 우묵하게 패인 월족의 눈동자들을 우리는 보지
않았나 나는 바로 알아차렸네
하늘 아래 가장 선한 웃음과 평화의 발원지가 바로 그 눈동자였음을
프랑스 중국 미국 제국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이제 가난과
새롭게 투쟁하는 새 나라가 내미는 화해의 손 앞에서
죄의 술잔으로 두꺼워진 나의
흰 손은 한없이 부끄러웠다네
친구여, 쌀국수를 먹으며 자네는 말했지 이 고장 음식은 마약 같다고
먹을수록 중독된다고, 난 그것을 사랑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네
사랑의 중독이 어찌 연인만의 전유물이겠는가
게릴라처럼 급습했다 사라지는 스콜이 야자수와 메콩강을 살찌우는
자존의 나라 베트남에 와서 나는 뒤늦게 사랑을 배웠다네
용서의 지혜를 읽었다네. 그리고 늦게 찾아온 참회를 여기에 적네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온나라가 분노의 격정으로 몸을 떨 때
함께 월남을 떠올려야 했다고, 월남을 잊고 일본만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들 아버지와 삼촌을 이어 또 한번 그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을 오 친구여, 베트남을 다녀와서 불쑥 어른으로 성장한 친구여.
(이재무, [베트남에서 돌아온 P시인에게])
-- (전략) 그날 우리는 추모 위령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일백삽십육명의 이름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우리 또한 남쥬띤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끝내 헛헛한 마음뿐이었다. 땡볕 아래 서걱이는 마른 풀잎들을 멀리 하고, 우리는 베트남 디엔증사 인민위원회 사람들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옥빛 하미 앞바다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헛헛하여 목짬반짬*만을 외쳤다. 하지만 내 머리속은 온통 하미마을의 그 오솔길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늑한 수평선 물결에 일던 물새의 날개짓, 그리고 게의 발자국까지 저러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던 하미였다.18)
(이승철, [하미에서])
그들에게는 당연히 베트남이 관광지로 흔히 찾는 태국이나 필리핀하고 같을 수 없다. 그것은 베트남전쟁이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생에 불편하지만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인식의 상채기를 남기는 현재의 역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늦게 찾아온 참회”라도 해야 하지만, 하미마을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지우지 못하지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자기와 똑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성숙한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처음 베트남 문제를 다룬 것은 이대환의 [슬로우 블릿]이었다. 이미 나온 평가를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 이대환의 중편 「슬로 부릿」(Slow Bullets)19)은 고엽제 피해자가 처한 참혹한 삶의 조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대환의 이 소설을 보는 것은 편치가 못하다. 필자도 단숨에 읽지 못하고 몇번이나 주저하며 작품을 읽었다. 차라리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누가 이 작품을 보며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월남전 당시 한국군 최초의 화학병으로 참전한 김익수는 헬기에서 씨에스 파우더를 무차별 살포하는 보직을 맡아 4달 동안 근무했다. 그후 25년, 그러니까 89년의 시점에서 씌어진 이 소설은 ‘죽음에 이르는 병’ 고엽제 피해자 가족의 참상을 미세한 곳에까지 미치는 가위 자연주의적 필치로 강력히 증언한다. 익수의 증상은 아들 영호에게 유전되고 고3 영섭은 뉴스 보도 충격으로 가출한다. 하반신 마비와 허리 통증을 앓으며 자살을 준비하는 아들 영호의 저주어린 절규를 듣는 것은 악몽 그 자체랄 수밖에 없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나무를 죽였습니까, 베트콩을 죽였습니까! 그런데 내가 왜요, 아버지-.” 이 도저한 절규 앞에서 어찌할 것인가. 결국 익수와 영호는 죽거나 자살하고, 고3인 영섭은 뼈아픈 실연을 겪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이 도저한 절망의 묘사는 다소 거칠고 더러 르포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지만, 집필(89년 무렵)과 발표 시기(1996)의 낙차를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영섭의 애인이 뉴스 보도 충격에 놀라 영섭에게 한 말이 지금도 귓가에 울린다. “넌 정말 좋은 애야. 하지만 난 불안해. 불안해.”20)
김남일은 [자미원에는 어떻게 가는가](실천문학)와 [중급 베트남어 회화](실천문학) 두 편의 단편소설을 선보였다. [자미원]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현지로 평화진료 봉사 활동을 떠나는 치과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다룬다. 그 팀에 학살당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무당인 내가 참가하고, 동시에 베트남 참전 용사 한 사람도 합류한다. 그들이 이른바 학살 현지에 부닥치게 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진실은 무엇이며,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는 것일까. [중급 베트남어 회화]는 동료들과 더불어 ‘쓸데없이’ 베트남어를 배우는 화자가 탈북자를 만나는 것을 주된 이야기로 삼고 있다. 탈북자는 남한 땅에 들어올 때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부닥친 현실은 어떤가. 남한은 이미 그런 이들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생소하게 변해버린 땅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제까지 견지해 온 삶의 방식, 즉 삶의 언어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곳이다. 화자는 그런 탈북자를 지켜보면서 내가 왜 쓸데없이 베트남어를 배우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과연, 그것이 전혀 쓸데없는 일일까.
전후 세대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방현석의 중편소설 [존재의 형식]이다. 그는 이 소설로 2002년 오영수 문학상과 황순원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 수상작인 중편 '존재의 형식'은 『십년간』과 『당신의 왼편』의 연대기적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베트남이라는 타자를 개입시켜 우리를 되돌아보는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특히 베트남 해방전선의 게릴라이자 시인인 실존 인물 '반레'의 등장은 인상 깊다. 90년대의 한국 현실이 충분히 외로워 베트남에 정착해 통,번역 일을 하는 재우와 변호사로 성공해 베트남을 찾는 문태 등 과거 운동권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소설은 모래알 같던 개인들이 거대한 공동의 적 앞에서 연대하는 결말의 '내딛는 첫발은'이나 '새벽 출정', 계기와 각성을 통해 맹렬한 투사로 방향전환하는 주부가 등장하는 '내일을 여는 집'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중앙일보 : 2003년 09월 19일)
[존재의 형식]에 대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나의 존재의 형식으로, 혹은 나의 존재의 형식을 타인의 슬픔으로 만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해주었다(권명아)라는 평가로부터 “단순히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적 기억의 반복을 통해서 미래를 새롭게 열려는 싸움의 정신이 만들어낸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싸움의 정신이야말로 자본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대응해 왔던 방현석만의 방식이 아니냐”(박수연) 하는 평가까지 내려졌다.21)
이렇듯 전후 세대 작가들은 80년대를 통해 다진 새로운 의식을 바탕으로 전쟁 참전 세대들과는 다른 소재, 다른 시각으로 베트남(과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려 애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창작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선배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불편해하고 대신 반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결국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 자기 모멸과 자기부정의 고뇌에 빠져들었던 선배 세대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에서 베트남은 그것이 한국문학의 지평을 크게 확대시키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이 경우, 베트남을 다룬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다룬다는 인식이어야 한다. 우리의 인식, 우리의 세계인식이 편협한 과거의 틀을 부수고 세계 인류가 진정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열린 사유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앞서 샆펴본 베트남과 관련된 노동자 인권 문제, 과거 청산의 문제 등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소재로 나타나야 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그것들은 비단 소재를 확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결국 인류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제대로 서는 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베트남, 우리 미래의 거울
이제 베트남은 과거와 같은 추억의 거울로만 남아있기를 거부하는 게 분명하다. 디지털문명에 벌써 멀미를 내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추억의 거울로만 여기고 찾아갔다가는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베트남은 도이머이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국가의 제1 과제로 삼고 종전 30주년을 통과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종전 20주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천만예요. 지금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과거에서 벗어나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새삼 건드릴 여유가 없어요.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아닌가요? 우리는 이제 다 용서합니다. 과거를 접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이게 우리의 유일한 슬로건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사실, 베트남인 누구를 붙잡고 과거 문제를 물어봐도 “당신들은 나빴다. 반성해라”하는 식의 속시원한(?) 답변을 듣기는 어렵다. 따라서 과거 문제에 대해 답변을 내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갖고자 한다면, 당연히 과거 역사에 대해 분명한 정리를 하고 나서야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우리에게 추억의 거울인 동시에, 우리 미래의 거울이기도 한 셈이다. 이 점에서 한국과 베트남의 문학인들이 만나서 이룬 성과는 귀중한 시사가 될 것이다.
- 문학은 기억에 관계한다.
얼핏 기억은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며 아무런 현실적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은 우리 모두의 생의 역사인 동시에 고향이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지금 하잘것없어 보이는 낱낱 인간들이 지니는 생의 무게와 가치를 새삼 발견한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지금 하잘것없어 보이는 낱낱 민족의 장구한 역사와 더없이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꿈틀대던 무수한 서사를 인류 공통의 정신적 자산으로 확보할 수 있다. 별과 달에 대한 기억, 할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들에 대한 기억, 고통마저 아름답게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저 놀라운 인내에 대한 기억 없이 어찌 오늘 우리가 있으랴.
테러와 전쟁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인 양 추앙되는 순간, 기억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인류는 오늘은 물론이고 다가올 미래조차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어떤 무기보다 소중하게 보듬어 안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2년, [한베트남 문학인 평화선언] 일부)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베트남문제를 매듭짓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규정될 것이다. 자,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이제 우리 스스로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차, 차를 좀 세워 길을 가다 보았다/ 연두 빛 고운 바탕에 선명하게도 쓰인/ 베트남, 그 당당한 이름의 붉은 글씨/.... 그 아래 선전문구/ 절대 도망안감(박남준, [유린당할 현수막], [인권] 2003년 10월호 여는시)
분명히 한국어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다.
말이 그저 의사 소통의 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좁게는 말을 하는 사람의 생을, 넓게는 그 말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생의 태도 전체를 반영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해방 이후 이제껏 한 가지 언어로만 말하는 법을 배워왔다. 앞으로만 전진하는 말, 앞으로 전진해서 쳐서 무찔러야만 하는 말, 앞으로 전진해서 쳐서 무찔러서 그 목표물의 심장에 기어이 태극기를 꽂는 말..... 반공이 국시라는 말, 증산 수출 건설만이 살 길이라는 말, 새벽종이 울렸다고 매일같이 새마을을 만들러 나가자고 등 떠미는 말. 그 말은 오늘날 “부자 되세요!”와 “재테크”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길을 가다가 잠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제 주변에서 소리도 없이 피어난 들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러다가 문득 속도와 물질과 양적 팽창 대신 어떤 다른 가치가 없지 않을까 생각할 때 필요한 말에 대해서는 도무지 배운 기억이 없다.
타자(그것이 개인이든 국가든 민족이든)를 배려하지 않을 때, 말은 쉽게 폭력이 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그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테러를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을 때, 그는 진정 몰랐을까. 테러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황량한 아프가니스탄의 대지 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꿈과 추억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마침내 이라크마저 ‘해방’시켰다. 그러나 그 도정에서 티그리스 강가에 피어난 저 황홀한 아라비안 나이트의 전설이며, 사막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던 베두인족의 꿈은 ‘부시의 민주주의’로 일방적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물론 안다.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세요”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도무지 자본주의 한국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하지만, ‘다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이상, 힘들더라도 애써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베트남이 우리에게 그 점을 분명히 가르칠 만한 도덕적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끝)
1) ‘베트남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분명 베트남이 원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이라크전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차이! 참고로, 베트남 사람들은 그 전쟁을 ‘항미전쟁’ 또는 ‘통일전쟁’ 등으로 부른다.
2) 프랭크 볼드윈, 「파월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었다」, ꡔ사회평론ꡕ 1991년 5월 창간호. 266쪽.
3) 리영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주최, ‘제1회 베트남연대의 밤’ 행사 주제 강연. 1997.
4) 최웅, 김봉중, ꡔ미국의 역사ꡕ, 소나무, 1992. 283쪽.
5)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저항운동, 특히 미국내 저항운동에 대해서는 조너선 닐, [미국은 베트남에서 어떻게 패배했는가](책갈피, 2004) 제5장을 참고하라.
6)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 회장 김문구 인터뷰. 홈페이지 http:// kosvet. price. co. kr에서 인용.
7) 프랭크 볼드윈, 앞의글, 272쪽. 8) “지금도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 1964년부터 1973년 사이에 베트남 전장에서 숨져간 '젊은 영혼들'이 떠올라 문득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 안달이다. 화랑담배가 아니라 미국담배의 연기 속에 사라져간 전우들이 생각나서,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월남전의 선물'인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리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보훈병원이나 기타 병원에서 오직 죽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볼 때 더 그렇다. 특히 고엽제 환자들을 볼 때가 그렇다.”(김준태, [내가 참전했던 더러운 전쟁], 오마이뉴스)
9) 고명철, [베트남전쟁 소설,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베트남전쟁 소설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홈페이지 참고.
10) 김철, [제국주의와 정치적 무의식], 평론집 [구체성의 시학(실천문학사, 1993), 89쪽.
11) 고영직, [한국 문학과 베트남 전쟁-- ‘치욕과 무의식’의 담론 극복을 위하여], 제1회 한베트남 연대의 밤 행사 주제 발표 논문, 베트남모임 홈페이지 참고. 12) 고영직, 앞의 글. 13) 고명철, 앞의 글.
14) 임종한(평화의원 원장), 「한국 고엽제 피해현황과 대책」, 사단법인 월남참전 전우회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15) 이 부분은 본인이 작성해 1999년 12월 10일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 의혹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민단체들의 모임> 명의로 발표한 「베트남에도 노근리가 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많이 인용했음을 밝힌다. 16) “3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전쟁이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따라다니는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안되거나 큰 사고가 나면 죄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군인입니다. 내가 죽인 사람의 어머니의 눈빛과 통곡을 눈앞에서 본 사람보다 더 불행한 군인이 있을까요. 내 손으로 직접 죽였던 그 영령을 위로하고 우리 때문에 피해입었던 민간인들 앞에 고개 숙여 용서를 비는 것이 내 생에 마지막 할 일입니다.”(김현아 지음,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중에서) 17) 졸고, [사이공의 흰옷], 월간 [희망세상] 2004년 10월호. 18) *하미: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 디엔증사의 한 마을. 1968년 1월 26일(음력) 이 지역에서 따이한(한국군) 남쥬띤(남조선)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 136명이 학살당했다. 지금 이 학살 현장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지난 2001년 10월 8일부터 13일까지 작가 방현석, 김정명 목사 등 KNCC 인권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 하미와 지엔니엔초등학교 등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지역 현장 여러 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목짬반짬: ꡐ원샷'을 뜻하는 베트남 말. *탄타오 시인의「밀라이의 아이들」에서 인용. 19) 고엽제의 영문 표기. ‘서서히, 그러나 마침내 심장에 박히는 총알, 아주 서서히 죽이는 살인’의 뜻임.
21) 좌담 [우리 시대의 문학의 존재 방식은 무엇인가], [실천문학] 2004년 여름호. 이 좍담에서 방현석의 작품은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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