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현리 적석총 참고자료
경남 울산에서 약 20Km 서남쪽의 웅촌(熊村)에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지름 약 20m, 높이 약 6~7m 정도되는 거대한 반구형(半球形) 적석총(積石塚)이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행정지명은 경상남도(慶尙南道) 울산시(蔚山市) 웅촌면(熊村面) 은현리(銀峴里) 서리마을이며, 뒷산을 넘어가면 곧 통도사(通度寺)가 들어앉은 취서산(鷲棲山, 1059m)과 함께 길게 남북으로 뻗은 장엄한 산자락을 보게된다. 울산과 부산(釜山), 양산(梁山)을 연결하여 보면 이 일대는 세갈래의 산줄기가 남북으로 평행하여 줄지어 있는 매우 특이한 지형(地形)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 습곡(褶曲) 산맥(山脈)의 중앙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정족산(鼎足山, 700m) 자락의 동쪽 경사면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돌무지는 동쪽의 운암산(雲岩山, 418m)을 앞에 두고 은현리의 넓은 분지(盆地)를 내려다 보고 있다. 돌무지 바로 옆 북쪽에는 저수지가 건설되어 있으며, 웅촌 앞을 흐르는 회야강(回夜江)은 정족산 남쪽 원효산(元曉山, 922m)에서 발원(發源)된 것으로 이 곳을 거쳐 북상(北上)하다 다시 남향하여 진하(鎭下)에서 동해(東海)와 만나게 된다.(1)
멀리서보면 완만한 경사면의 푸르른 솔밭 중간에 마치 백골(白骨)들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듯 창백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가서보면 그저 자연석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어느 채석장(採石場)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돌산이 조각나서 고스란히 주저앉은 듯이 큼직한 돌덩어리들이 산을 이루고, 그 표면을 솜털처럼 돋아있는 희뿌연 이끼들이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돌무지에 사용된 돌들은 주변 계곡이나 지표면(地表面)에서 쉽게 구할 수있는 풍화(風化)된 화강암(花崗岩) 또는 니암(泥岩) 종류의 자연석이다. 여러가지 형태의 자연석(自然石)들을 쌓아놓은 것이라 서로 얼기설기 얽혀져서 일부러 돌을 들어내지 않는 한 지금의 상태가 변하지는 않을 것같다. 그 대부분이 주로 길이 약 80Cm 이하로서 양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들이며, 중간 중간에 작은 돌들이 있지만 위 아래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쌓아올렸다. 단지 앞이라 할 수 있는 동쪽 경사면에는 유난하게도 작은 크기의 돌들이 보이고, 돌무지 앞쪽에는 크고작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비록 앞면의 돌들이 잘게 부수어져 있고 돌무지의 정상(頂上) 부분이 주저앉은 듯이 둥글게 보이나, 동면(東面)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三面)이 대강 비슷한데다가 정상부분을 헤쳐낼 수는 있어도 돌무지 중심까지 파고 들어가서 도굴(盜掘)하고 다시 쌓아올렸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앞에 흩어져 있는 돌들은 앞 면이 도굴되면서 파괴되어 굴러떨어진 돌들이며, 그렇지만 완전하게 도굴된 것은 아니고 중단되었다고 생각된다.
거의 반구형(半球形)으로 보이는 이 돌무지는 엄밀하게 말하여 피라미드의 사면(四面)을 분명하게 판단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산으로 향한 서쪽과 남쪽 기단(基壇)에는 오른쪽 사진(西側 基壇)에서 보이듯이 돌을 가지런히 한줄이 되게끔 박아놓았으며, 이러한 경우는 이 돌무지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규칙성(規則性)으로, 그 돌들을 연결하여 방위(方位)를 측정해 본 결과, 서쪽에서는 340도 북쪽을 가르키고, 남쪽 즉 돌무지의 정면(正面)은 정동향(正東向)에서 북으로 20도 옆으로 비켜있는 70도이었다. 이 두개의 선(線)이 정확하게 직각(直角)을 이루기에 분명 정방형(正方形)의 기단(基壇)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정상(頂上)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렴풋이 층계(層階)가 보이고, 서쪽과 북쪽 중앙에는 감실(龕室)을 설치하려 했는지 작은 돌들로 쌓은 흔적이 있지만 이것들이 과연 축조 당시의 것들인지는 판단하기 곤란하였다. 여하튼 이 돌무지는 동쪽 70도를 향하는 정방형(正方形) 기단(基壇)을 만들고는 그 위에 반구형으로 돌들을 얹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돌무지 정상에 놓여진 돌에는 바위구멍(性穴)이 하나 파여져서 이끼에 뒤덮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변 어디에서고 바위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특이하게도 돌무지 정상에서만 바위구멍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구멍이 혹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구멍이 아닐까 생각하여 주변에서 비슷한 경우를 찾아 보았으나 이것뿐으로, 자연적인 균열과 함께 둥그런 반구형의 구멍이 새겨져 있어 분명 인위적(人爲的)인 바위구멍임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답사하였던 피라미드에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事例)이어서 이 바위구멍은 이 돌무지의 축조(築造) 이후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돌무지 바로 옆 동남쪽에는 길이 약 2m 정도의 바위들이 서너개 흩어져 있으며, 약 30m 전방(前方)에는 자그만 돌로 쌓아논 소형 돌무지 1기가 있다. 또한 대형 돌무지의 뒷편이자 서쪽에도 조그만 돌들이 모여있거나 둥그렇게 원으로 놓여져 있다. 그리고 돌무지 옆에 놓여져있는 커다란 바위들은 장군총(將軍塚)의 경우같이 붕괴(崩壞) 방지(防止)를 목적으로한 호석(護石)은 아니라고 여겨지며, 단지 돌무지를 축조하기 위하여 주변에 흩어져있는 다양한 크기의 돌들을 이리로 옮긴 다음, 돌무지 건축에 필요없는 바위를 한 쪽에 모아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변의 돌들은 모두 흙 또는 잡초와 나무로 덮어져 있어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돌무지의 남쪽과 서쪽에는 돌무지에서 약 40m의 거리를 두고 높이 1m 정도의 돌담이 'ㄱ'자형으로 둘러져있으며, 북쪽에도 돌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북쪽 골짜기에 저수지(貯水池)를 만들면서 상당수 파괴되었다고 한다. 북쪽의 돌담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과거 그대로라는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생각하여 보면 돌담은 원래 돌무지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의 앞면을 트이게하고 산으로 향하고 있는 나머지를 'U'자형의 평면(平面)으로 담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고 돌무지의 남서쪽 돌담에 붙어서 다시 지름 약 10m 정도의 반월형(半月形) 평면으로 돌담이 둘러져있으며, 북서쪽에도 이와 비슷한 돌담이 보인다. 오른족 사진은 남서쪽 반월형 자리를 찍은 것으로, 주변의 지표면에 비하여 약 1m 정도 움푹 꺼져 들어가 있어 마치 집자리처럼 보이는 데 반하여, 북서쪽의 것은 단지 지표면에 돌을 담처럼 줄지어 놓은 것 같다. 만약에 이 반월형 자리가 집자리일 경우, 이는 필시 돌무지와 관계있는 사당(祠堂, 廟宇)이나 관리자의 집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지방에 산재(散在)되어있는 피라미드와 적석총에게는 특이하게도 삼국시대의 가람(伽藍) 배치와는 다르게 모서리 방향에 하나씩의 사당(祠堂)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반도(韓半島) 내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石棺墓)과 매우 흡사한 구조와 축조방식을 보여주는 무덤이 만주(滿洲) 지방에서도 발견되었다. 발해만(渤海灣) 북쪽 대릉하(大凌河) 상류 지역인 중국(中國) 요녕성(遼寧省) 능원현(凌源縣) 우하량에서 1983~85년에 발굴된 외경 22m의 원형(圓形)의 3단 돌무지 무덤(오른쪽 사진)에서는 신석기(新石器) 시대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시기로 알려진 돌널무덤이 하나의 돌무지 안에서 무려 15기가 발견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신석기시대의 유물과 함께 당시의 제사(祭祀) 유적(遺跡)과 신전(神殿) 및 소조신상(塑造神像)이 출토(出土)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제사유적의 방사선 측정연대는 기원전 3500년으로 홍산문화의 연대(年代)와 일치하였다. (2) 그리고 중국 요녕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여순구구(旅順口區)에서 1964년, 1975년에 발굴된 동서 길이 12m, 높이 1m의 세모꼴의 장군산(將軍山) 돌무지 무덤은 구릉에 위치하며 기원전 2000년 전반기(前半期)의 유적으로 알려진다. 한반도 내에서는 경기도(京畿道) 시도(矢島)에서 발견된 돌무지가 가장 오래된 돌무지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도 유적의 방사선 측정 연대는 기원전 1500~1000년 경으로 밝혀졌다.
압록강변(鴨綠江邊)에 위치한 집안(集安) 인근에서도 여기 은현리 적석총과 비슷한 위치에서 그리고 같은 형식의 돌무지가 산재(散在)하고 있다. 집안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경까지 강변 모래사장에서 보이는 돌무지가 기원 후 2~3세기 경부터 산기슭으로 올라갔으며, 둥근 강돌에서 모난 산돌로 바꾸어지면서 넓적한 판석(板石)으로 바닥에 정방형의 갓돌을 만들고 그 위에 반구형의 돌무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돌무지 무덤에는 부부합장(夫婦合葬)이 원칙으로 알려져있다.(3)
여기의 지명은 웅촌면(熊村面)이며, 여기보다 회야강(回夜江)의 상류지역인 가까운 남쪽의 지명(地名)도 웅상면(熊上面)이다. 즉 곰의 마을을 뜻하는 지명을 갖고있으며, 이같은 지명은 창원(昌原)의 웅산(熊山)과 웅천(熊川), 공주(公州)의 웅진(熊津), 파주(波州)의 웅담(熊潭), 황해도 옹진(甕津)의 웅현(熊峴) 등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비롯하여, 내륙 지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곰'과 관련된 지명은 이것말고도 '곰' 또는 '고마'의 음역(音譯)인 개마고원(蓋馬高原), 화성(華城)의 고모(古毛), 구미(龜尾)의 금호(金湖), 금오산(金烏山), 대구(大邱)의 금호강(琴湖江), 김해(金海)의 고모(古慕)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일본에서도 이러한 곰과 관련된 지명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예맥(濊貊)은 고대 중국사람들이 '곰'을 음역한 것으로 현대음은 'houei-mai'이며, 고대음은 'khouei-mai' 또는 'kuaimo'이다. 또한 고구려 패망 당시 유민(遺民)들이 이주(移住)한 곳으로 알려진 일본 관동(關東)지방 팔간군(八間郡)에서는 '고려(高麗는 高句麗를 뜻함)'를 'koma'로 발음하고 있다.(4)
이런 점에서 예맥족(濊貊族)은 단군신화(檀君神話)와 관련되어 곰을 숭배하는 부족으로서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었지만 점차 각 지역에 따라 각각의 국가로 형성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고인돌 사회와 적석총 사회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에 따라 일본의 학자(三上次男)는 예맥은 고인돌, 그리고 고구려는 적석총이라는 공식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쪽에 거주하였던 예맥족의 별종(別種)이 세운 국가이며,(5)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 시대에 적석총이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반도 남부 여러곳에 흩어져있는 피라미드나 적석총의 주체를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따른다. 이런 점에서 여기 은현리 적석총의 주체(主體)는 고구려의 전신(前身)이자 신라의 전신인 예맥족의 일부로서,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삼한(三韓) 중 진한(辰國) 시대의 유적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또한 과거 진나라 때부터 적석총이 있어왔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이나, 뒷산을 '진등'이라 하고, 회야강(回夜江)의 입구가 '진하(鎭下)'라는 점은 어느 정도 진한(辰韓)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의 적석총(積石塚)을 집안의 돌무지 조성(造成)연대와 비교하여 대략 서력(西曆) 기원(紀元)에서 부터 기원 후 2~3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더라도, 신라 초기 3세기 경에 발생하였다고 알려지는 봉토분(封土墳)과 시기적으로 커다란 차이없이 연결이 가능하며, 외관(外觀)에 있어서도 단지 지역적인 사정이겠지만 돌을 흙으로 바꾸기만 하여도 신라 전형(典型)의 봉토분이 되는 것이다. 단지 다른 점은 평지와 구릉의 차이와 내부구조에서 석곽(石槨)과 목곽(木槨), 석관(石棺)과 목관(木棺) 등 주로 주변환경에서 비롯된 차이라고 할 수 있는, 돌과 나무의 차이 이외에는 죽은 자의 영원한 집으로서의 기본적인 구조에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만큼 비록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러한 돌무지를 염두(念頭)에 두고 신라 초기에 봉토분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이 돌무지와 함께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는 피라미드형 적석총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피라미드의 전형(典型)이 다른 각도에서 발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1997년 12월 촬영, 1997년 12월 작성) 웅계지명의 분포에 대하여 (c) 변광현 1997
<자료 출처 : 원시예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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