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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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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년9월 2일 조선황해도해주부 |
사망 | 1910년3월 26일 일본 제국료쥰 |
사인 | 포로 |
국적 |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
별명 | 응칠(아명), 도마(세례명) |
직업 | 교육자, 군인, 독립운동가 |
종교 | 천주교 |
배우자 | 김아려 |
부모 | 안태훈, 조마리아 |
안중근(安重根, 1879년9월 2일~1910년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1]
1905년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10월 26일에 중국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은 사도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목차 |
황해도해주부수양산 아래에서[2]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3], 안중근 자신도 1895년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1905년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909년10월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4]하얼빈 역 전 역인 채가구 역, 창춘 역에서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의 암살 계획이 있었으나 각각 철통 같은 수색과 역장의 의심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안중근 이전에도 안양에서 원태우가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 역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총을 맞은 지 3분 만에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4]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
코레아 우라! (Корея! Ура!) |
” |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4]
안중근은 곧바로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의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2008년3월 25일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건국훈장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3월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5]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또한 일본은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6]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동경에서 한일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그의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
장부가(丈夫歌)
-안중근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엇지 이에 이를 줄을 시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丈夫處世兮 其志大이
時造英雄兮 英雄時趙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鼠절伊藤兮 豈肯比命
豈度至比兮 事勢固然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자료에는
장부가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恨慨一去兮 必成目的(한을 품고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그러나 이는 원문과 다르다.
안중근의사 자서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한을 품고 가는 것과
의지로 가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을 것인가
憤慨一去兮로 바꿔야 한다. 반드시.
----감상
분노로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동포, 인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바꾸는 것이라는 것.
동포의 의지가 살아있으면 언제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의 깊이를 느낀다.
인간의 깊은 사고와 꺽이지 않는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1909년 가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한국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樞密院)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사무실에서 독립 투사 정재 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東淸)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삼았다. 또 하얼빈에 도착한 뒤에는 교포 김성백(金成白)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曺道先 )을 동지로 맞았다. 안중근 은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 행사 등에 관항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안 중근은 일본 의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 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이토 히로부 미가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 채가구에서도 기회를 엿보기로했다.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 후,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일본 총영사(總領事)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대 뒤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쏠 기회를 노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10보 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 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 들을 향해 3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 던 하얼빈 일본총영사가 가와 가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야스지로, 남만주 철도 (南 滿州鐵道)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때, 러시아 헌병 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코레아우라! (대한만세)' 라고 3번 외친뒤 순순히 체포 됐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에 이어 만주(滿州)를 집어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 전세계가 떠들 썩했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 중국의 친일파 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 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시중국의 국가 주석 이었던 원세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안중근 의사 만
(安重根義士輓)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 년을 가오리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러시아 기병 대위 니키프로프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파출소로 끄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 날 오후, 안중근의사는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장소가 러시아 땅인 하얼빈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고 재빨리 발을 뺀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우덕순, 조도선 등 사건과 관련된 동지들이 하나둘 씩 잡혀 들어와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 갇혔다.
그 뒤, 여순(旅順)에서 온 미조부치 다가오 검찰관이 안중근 의사를 조사했다.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미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15 가지로 나누어 대답했다.
1.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죄
2.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죄
3.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4.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7.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8.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9.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0.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1.한국인이 일본인의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 을 퍼뜨린 죄
12.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죄
13.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4.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하나하나 들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듣고 난 미조부치 검찰관은 매우 놀라면서 "이제 그대가 하는 말을 들으니, 그대는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하겠다. 그대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안중근 의사는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이 뜻을 어서 일본 천황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하루빨리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책을 고쳐서 동양의 위태롭고 급한 사태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대답했다.
(공판사진)
"하얼빈 역에서 이토 공작에게 총을 쏜 일이 있는가?"
"그렇다. 틀림없이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어째서 이토 공작을 죽였는가?"
"이것은 내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고 동양의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 일찍이 일본은
러.일 전쟁을 벌이면서, 동양의 평화를 위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 했다. 그런데 일본은 오히려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았는가?"
"왜 도망가지 않았는가?"
"나는 대한 제국의 의병 참모 중장으로서, 하얼빈 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이다가 포로가
된 몸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벌이 일인데, 무엇때문에 도망 간단 말인가? 나를 국제법
에 따라 전쟁 포로로 재판해 달라.
마침내 1910년 2월 14일, 일본인 재판관이 사형을 처한다고 말을 했다.
안중근은 이렇게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과연 큰 죄인이로다! 바로 내가 착하고 약한 나라의 백성이 된 죄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 법에 사형 위의 형은 없는가?"
안중근의사는 일본 소장의 부탁을 받아 붓글씨를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중에서 한 글귀는 우리가 언제나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글이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여순 감옥 생활과 공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1차 조사를 받은뒤, 11월 3일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같이 여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졌다.
여순(旅順)은 중국 북방에 있는 최대의 항구도시인 다롄(大連)시의 6구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관동 도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의 지휘, 감독아래 형무소장을 두어 형무소를 맡아 보게 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旅順)감옥에 갇혀있을 때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여러 자료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은 안중근의사를 정중하게 대해 주었으며 고문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에서, 검찰관이 조사를 마친 뒤에는 언제나 담배를 권하고 서로 토론을 했으며, 형무소장과 다른 관리들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고마웠었다고 쓰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14일 여순 에서 두 번째로 검찰관의 조서를 받기시작해서 이듬해 1월 26일까지 모두 11번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조사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검찰관의 태도는 점점 강압적으로변해갔다. 당시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 법원에서는,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데에는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안중근 의사가 신앙심이 두터운 점 등을 높이 평가하어, 안중근 의사에게 무기 징역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 내의 강경파가 서둘러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법원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7.여순 지방 법원의 공판 공판정에는 많은 신문 기자들이 이 재판을 지켜 보러 와 있었다.
오전 9시 20분경, 마침내 재판이 시작되었다. 마나베 판사는 네 사람의 피고인들은 일일이
확인한 뒤, 안중근 의사부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마나베 판사는 안중근 의사의 가정 환경, 교육 정도, 신앙 등에 대해 차례로 물은 뒤, 한국을 떠나 해외로 온 목적에 대해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해외로 오게 된 목적이 첫째는 교육을 통해 한국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국의 의병으로서 나라를 위해 교포 사회를 돌며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연설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마나베 판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물었다.
공판정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일본 천황은 러일전쟁(露日戰爭) 이 동양의 평화를 지키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 이겼을 때, 한국인은 마치 우리 나라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협박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었다.
그것은 일본 천황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에 한국인은 모두 이토 히로부미를 미워하게 되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강제로 우리나라와 7조약을 맺어 한국인의 불이익은 더해갔다.
또한 한국의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토 히로부미를 원수로 삼게되었고, 그래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다. " 의거 이유(義擧 理由)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때문이다.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 해서 한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 뒤, 재판은 일본 정부의 강압에 의해 1주일 만에 서둘러 모두 끝났다.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 공판이 무효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사건이 러시아 땅인 하얼빈에서 일어났고,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마음대로 일본 형법에 의해 재판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강대국이 국제법과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힘이 약한 나라의 국민을 마음대로 재판한 하나의 예이다.
다음은 외국인 민선(民選) 변호인단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관선 변호인을 지명하여 재판을 진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법률 위반일 뿐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또한 중요한 점은 안중근을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서둘러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책을 고쳐서 동양의 위태롭고 급한 사태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대답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한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태도에는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2월 19일, 안중근 의사가 항소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고등 법원장 히라이시(平石)는 일부러 형무소로 안중근 의사를 찾아와 항소할 것을 권했으나, 안중근 의사는 찾아와 항소하지 않은데에는 옳은 일을 했으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굳은 의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놀라운 애국심이 뒷받침이 되어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안중근의사의 두 동생을 급히 여순(旅順)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이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의 대한 매일 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뒤, 사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自敍傳)'안응칠 역사'는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해서 1910년 3월 15일에 끝마친 것으로, 출생에서부터 의병 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여순에서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의 옥중 생활을 기록하고있다.
안중근 의사는 자서전을 끝마친 뒤, 3월 15일부터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쓰기 시작했다.
이 때, 안중근 의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염려하여, 히라이시 고등 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 3월 26일 에 사형이 집행되어 안중근 의사는 불과 10여 일 동안에 '동양평화론'의 머리말과 제1장인 전감(前鑒)의 일부분밖에 쓸 수가 없었다. '동양 평화론'은 안중근 의 사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동양 평화론'은 일본, 한국, 중국이 각기 자주 독립국으 로서 힘을 합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데 근본 정신이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감추기위해 주장햇던 '아시아 연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쓰며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 는 한편, 형무소장에게 부탁해 홍석구(洪錫九)신부로부터 마지막 고해 성사를 받았다. 평소 신앙심이 깊었던 안중근의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신앙인으로서 인생 을 끝마치려 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날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사형집행인이 안중근의사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사형집행 전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으다.
그는 술을 마시게 해달라거나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요.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는 5분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1910년 3월 26일 아침에 형장으로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시 한수 입니다.)
丈 夫 雖 死 心 如 鐵
義 士 臨 危 氣 似 雲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처형 한 시간 전 안중근 의사는 두 아우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유해는 고국에 못 돌아가고 감옥묘지에 묻히게 될 것이다. 만약 유족의 손에 건네지면 하얼빈공원 인근에 묻었다가 고국에 반장하라” 했다.그러나 형집행 후 시신을 돌려 달라는 유족들에 부탁에도 일본순사들은 이에 반대하면 여순감옥묘지에 시체를 안장했다...
죽어서 고국에 묻히길 소망했던 안중근은 현재 여순감옥묘지 어디인지 모를 자리에 97년동안
잠들어 계신다...
이러한 현실에도 우리 무능한 정부나리들께서는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올 생각도 의지도 없어보인다.
이토 히로부미
(1) 출생 및 청년시기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9월2일 조슈번의 구마게군 츠카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슈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모노세키 항구가 있는 지금의 야마구치현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하야시 주조다. 이토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른 것이다. 아버지 주조는 하층농민 출신으로 낭비벽이 심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7살 때 모리번에서 많은 빚을 지고 혼자서 도망가버렸다. 그리하여 7살의 리스케(이토 히로부미의 아명)는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에 들어가게 되고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어릴 때는 주위로부터 거짓말쟁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영민한 소년이었다고 전해진다.
하기로 간 아버지는 일일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이토 부헤이라는 노인을 알게 돼 이토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다. 아버지가 양자로 간 이토 집안은 무사계급 중 가장 낮은 잡병 아시가루 출신이었다. 아시가루는 최하급 병졸로 전쟁 할 때는 최전방에서 싸우게 돼 있다. 사회에서 이들의 신분은 극히 낮아 먹을 것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아시가루 중에는 도적 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왜구 출신도 많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난한 농민으로서 아시가루 출신이었고 후에 재상까지 올라간 경력을 보면 이들 둘의 인생 역정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토 집안에 양자로 간 아버지는 친가에 가 있던 처자식을 모리번의 하기로 부른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 9살 때다. 집안이 곤궁했기 때문에 리스케는 그때부터 번의 관리인 한시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고, 한편으로는 법광원이라는 절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뚯한 밥 한번 제대로 못 먹고 자랐다고 한다. 어느날 그 집 여종이 몰래 따뚯한 밥을 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출세한 후에 그 여종에게 하사금을 주고 그녀의 자식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는 16살 때 당시 개화파의 선구자였던 요시다 소인의 쇼카숙에서 1년 동안 공부한다. 당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다녔던 쇼카숙과 같은 사설학교가 많았고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가 일본의 개화를 앞당겼다. 기존의 관학이 사서삼경 등 동양의 고전을 가르쳤다면 사립학교에서는 난학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어와 상업, 후에는 영어 등 주로 서양사정을 가르쳤다.
당시의 고급무사들이 메이지유신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으나, 이러한 교육환경에 크게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고급무사들이 유학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이토 같은 하급무사들은 오히려 이러한 사설 의숙에서 서양 문물을 배워 현실을 타파하는 개혁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60여년간 지속되던 에도막부 시대를 끝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들 중의 하나였으며, 일생 동안 쇼카숙의 설립자 요시다 소인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스승 요시다 소인도 이토를 총애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곳에서 일생의 동지가 되는 이노우에 가오루,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중의 하나인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교우관계를 맺는다. 이들과 함께 이코 히로부미는 1863년 12월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영국 공관을 습격해 불지른다. 그때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 22살이었다.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돌아온 이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863년에 같은 고향사람이며 쇼카숙의 교우인 이노우에 가오루(구한말에 주한 일본 공사가 됨)와 모리번의 젊은 무사 5명과 함께 해군을 연구하기 위해 막부 몰래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그들이 영국에 가는 목적은 유학이 아니라 적의 동향을 시찰하고 막부에서 금하고 있는 서양문물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5월12일 요코하마를 출발한 배가 출항한 지 5일 만에 상해에 기항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수많은 서양군함이 중국에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토는 이를 보고 런던에 도착한 후에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화를 부르짖게 된다.
그들은 1864년 6월 중순 메이지유신이 선포되기 몇 해 전에 영국에서 돌아온다. 얼마 후 1867년에 이토의 출신지역인 조슈번이 외국 함선에 포격한 것을 이유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이 시모노세키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는 다시 조슈번으로 달려가, 서양 열강과 대결하는 것은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것과 같으므로 개국화친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설득은 안 되고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 조슈번은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그 후 일본은 개화를 주장하던 사츠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과 조슈번이 화해. 연합해 1868년 12월 메잊 유신으로 왕정복고를 성고, 260년 간의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종식시킨다.
도쿠가와 막부, 소위 에도 막부는 사츠마, 조슈, 토사 번이 메이지 천황을 앞세운 개화파 혁명군에게 무너진 것이다. 하급무사들의 왕정복고 혁명이 성공한 후 메이지 천황의 직접 통치에 의해 입헌군주제가 성립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국 사무를 담당하게 되어 처음으로 조정 관직에 진출한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의 나이 28세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스케라는 이름을 버리고 히로부미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은 이때다.
1870년(메이지 3년)에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로 하고 기토, 오쿠보 등과 이토 히로부미는 부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사절단으로 가게된다. 이토 히로부미로서는 두 번째 서양 견문인 셈이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대부분 메이지 신정부의 요인들로 구성됐지만, 이들 외에는 총수 약 5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다. 이 사절단의 목적은 에도막부 이래 조약을 체결한 12개 국가를 방문하고 국서를 전달하면서 조약개정을 예비교섭하는 데 있었다. 또한 선진국의 제도와 문물을 조사. 연구하는 것도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72년 1월 15일이었다. 사절단 일행은 이미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미국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선상에서 미국인들로부터 배우고 도착했다. 그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함으로써 일본 개국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이토에게 많은 영향을 준 기토는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일본의 개화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기토는 진정한 개화를 위해서는 학교를 통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껴 교육제도를 살피게 된다.
한편, 사절단은 미국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최고의 문명국가를 시찰하면서 일본과의 격차를 크게 느낀다. 그러나 이들 사절단은 서로간에 외교정책에 대한 생각이 달라 조약의 체결. 개정 면에서 의견이 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절단으로 떠나기 전에는 기토 다카요시의 편에 섰으나,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간 뒤부터는 사츠마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하급귀족 출신인 이와쿠라 도모미와 의견을 같이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때 이오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합류했던 경험이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스스로 말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에 가서 서절단의 3거두인 이와쿠라, 오쿠보, 기토를 위해 불철주야 통역관 역할을 해주고 신문믈에 대한 정보를 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개화의 방법과 그를 위한 법체계 정비, 사회제도 창설 등을 의논하게 된다.
(2) 정한론
사절단의 시찰경험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떠나기 전까지는 비교적 서양문물에 보수적이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급진적 모던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개화에 대해 급진주의적이던 기토 다카요시가 오히려 문명개화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기토는 런던의 밤거리에서 거리의 여자들을 보게된다. 그는 이 점을 좋지 않게 생각하였고 정부가 전년도에 내린 창기 해방령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문명국을 시찰한 일행의 눈에는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달랐다. 따라서 메이지유신 세력 내부의 분열은 시작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로한 상황에서 오랫동안의 지기인 기토를 버리고 권력자 이와쿠라와 오쿠보의 편에 서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구미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지만, 정한론으로 메이지정부는 대분열을 맞게 된다. 그 때 메이지 정부는 정한론의 주창자 사이고 다카모리를 특명사절로 조선에 보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이토 히로부미의 사절단이 돌아왔다. 사절단으로 나가 있을 때 메잊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뻬이 등이 정한론에 이와쿠라, 오쿠보 도시미치, 기토 다카요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반대를 한다.
오쿠보, 기토, 이와쿠라 등이 정한론을 반대한 이유는 조선 정벌시기를 늦추자는 것이지 정한론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구미를 시찰한 이들은 당장의 선결과제는 정한보다는 일본의 내실 있는 통일 국가 형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절단은 중지되고 급진적 정한론자들은 오쿠보 등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정책의 시정과 부당한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당시의 메이지정부의 내정과 외정에 반하여 일으킨 세이난 전쟁을 일으키지만 곧 진압된다.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이 중심이 된 새 정부의 구상은 내정을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로 가져가고 민간인이 직선으로 선출하는 의회 구성은 나중으로 미루자는 쪽으로 합치되었다. 그러나 외정문제는 미묘하게 대립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잡는 방향으로 나가자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방법과 시기 선택에 있어서 기토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오쿠도 도시미치가 조선문제에 대해 신중했던 반면, 기토 다카요시는 적극적이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토 히로부미가 존경했던 인물들이 모두 당시 조산을 침략하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함국 침략은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치밀하게 계획되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정치가로서 입신
최초의 헌법제정
일본정부는 1868년 메이지정부를 수립하고 국회 개설을 위해 헌법 제정을 서두르는 데, 이 중차대한 일을 이토 히로부미가 담당한다. 이를 위해 1882년부터 1883년까지 이토는 유럽을 순방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시찰하며 그는 당시 독일 헌법과 제조에 영향을 받는다. 1885년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새롭게 내각제를 도입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의 총책임자인 총리대신이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기초한 소위 제국헌법에 의해 구성된, 2차대전 이전의 일본의 통치기구는 전체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일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내각 외에 때로는 권력이 더욱 강한 추밀원, 귀족원, 내대신부 등 특권 관부가 행정부를 견제했으며, 또한 메이지유신 이래 원훈이라고 불리는 권력자가 군림했다. 극히 권력의 소재가 다원적이고 권력의 행사가 복잡했던 것이다.
그 위에 군사권에 대해서 육군은 참모본부, 해군은 군령부가 천황에 직속되어 있었으며 의회는 정부에 귀속되어 있지 않았다. 정부 관료를 포함한 모든 통치기구의 책임은 천황에게 있었다.
1887년 이토 히로부미 주도하에 헌법 초안이 마련되고 1888년에는 완성이 되었다. 이토는 수상 자리를 구로타에게 주고 자신은 추밀원에 들어가 최초의 추밀원장이 된다. 헌법 초안은 추밀원의 심의를 거쳐 1889년 11월에 발포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왕실의 관계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많은 번벌정치가들은 에도 막부정권 말에 존왕도막운동에 종사했다. 이때 왕의 존재는 그들에게 막부권력을 찬탈하는 데 필요한 심볼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천황은 그들에 의해 새로운 일본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됨으로써 천황제라는 거대한 국가체제가 정비되었다.
왕은 그들에게 지성지고의 존재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왕실 사직인 이세신궁에 정식 참배한 것이 전후 다섯 차례였다고 한다. 이토는 열성적인 천황제 신봉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특별히 궁중의 신임을 받았다. 천황이 자기 앞에 앉도록 의자를 수여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와 다나카밖에 없었다. 또 왕비는 1909년 2얼 친필 글을 그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이토가 메이지 천황에게 깊이 인정받은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로서 가네코 겐타로의 말을 인용해 보면 러일전쟁 개전 직전인 1904년 2월 4일의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이토에게 “이 전쟁 중에는 도쿄를 떠나지 말고 내 곁에서 외교나 국무를 보좌하시오.”라고 분부를 내렸다. 그래서 가네코가 러일전쟁이 끝나 갈 무렵 미국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행에 오를 때에도 이토는 “내가 갈 수 있었다면 자네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네. 나는 천황폐하의 측근에서 보좌하라는 분부를 받았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일세.” 라고 말하고 있다.
또 가네코는 러일강화회담과 관련하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로부터, “러시아가 전권을 위임받는 정계의 최고 실력자를 보낸 온 이상 일본도 최고의 정치가를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에서 이에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은 이토이므로 강화회의의 전권으로서 이토를 보내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가네코는 위와 같은 사정을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의 중대 사건에 대해 천황이 이토를 측근에 놓고 무엇이든 상의하려 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천황이 이토의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 대해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음을 말하는 것이다.
(4) 한국침략
20세기초 러시아는 의화단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병력을 주둔시켜 사실상 점령을 하게 되는데 이를 일본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903년 4월13일 교토에 있는 야마가타의 별장 무린암에 이토 히로부미, 가츠라 다로(당시 총리로서 1905년 맺어진 가츠라-태프트조약의 장본인), 고무라(당시 외무대신) 등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에 엄중 항의한다. 둘째, 만주문제를 기회로 조선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 셋째, 조선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러시아에 승인시킨다. 넷째, 만주에 있어서 러시아의 우월권을 인정한다. 일본은 이상의 내용을 러시아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이 이처럼 강력하게 러시아에 대응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이 직접적으로 식민지가 되게된 동기인 러일전쟁이 1904년 2월 10일 일본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으나 일련의 한국 침략에 이토 히로부미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 일행은 서울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한국 황실 위문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메이지왕의 특명대사로 파견되었다. 1905년 11월 15일 고종황제를 알현한 이토 히로부미는 방약무인한 태도로 협박을 했다.
“이 조약을 승인하거나 거부하거나는 자유지만, 만약 거부하면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쁜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병탐에 점진주의자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고종황제와의 일은 그렇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뿐만 아니라 광업권 등 경제적인 수탈을 의미했으며 그 선봉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후 그는 초대 통감 겸 한국주둔 육군 통수권자로 1905년 12월에 부임했다.
이토가 부임한 후 악명 높은 경찰제도가 확립되었다. 또한 그는 궁정제도를 개편했다. 개편 목적은 경제지배의 확립과 일본측 권력에 이한 치안유지에 있었다. 특히 치안유지에 대해서는 고문제도를 통해 경찰권을 확보했다. 그 배후에 강력한 주둔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궁정을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에 일본의 경찰망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깔리게 된 것이다. 13도의 도청 소재지에 경찰 고문지부를 두고. 전국에 26개의 분견소와 122개의 분파소를 두고 일본인 경찰관을 두었다. 일본인 경찰관은 직접 통감의 지시하에 움직였다. 당시 일본인 경찰관은 경시 21명, 경부 52명, 순사 605명이었다. 이 수는 1907년 10월 경무 고문제도 폐지에 의한 한일경찰 합동일 때는 보좌관경시 21명, 보좌관보 78명, 보조원 1,205명으로 특히 한국인 등의 하부조직이 확대되었다.
(5) 이토의 죽음
1909년 6월 이토는 통감을 사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만주 사찰의 길을 떠났다. 이 여행은 하얼빈에서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크초프와 만나 한국문제를 중심으로 극동에서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0얼 14일 한밤중에 도쿄 남쪽 해안가의 오이소에 있는 집을 출발한 이토는 14년 전에 청나라의 이홍장과 청일조약을 맺었던 시모노세키의 춘범루에서 일박 한 후 중국의 대련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러일전쟁 때의 격전지 여순203고지를 방문한다. 다시 여순을 출발해 장춘을 경유하고 10월26일 아침 9시 조금 넘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코크초프와 함께 러시아 수비대가 열병하고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환영나온 일본인들에게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러시아 수비대 뒤쪽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이토는 열차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빈사상태에서 이토는 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수행인이 “한국인입니다. 체포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바보 같은 놈” 하고 눈을 감았다. 이때의 그의 나이 69세였다.
사건 공판은 일본측에 의해 행해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질문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인물이기 때문” 이라고 대답하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러일전쟁 때 일본왕은 선전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해 당시 한국인은 감동했다. 그리하여 전쟁중에 이 말을 믿고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위해 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개선했을 때는 한국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이제 곧 한국의 독립ㅇ 확실하리라고 다들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이 된 후 제 2차 한일협약 그리고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이 설정되었고 이전보다 일본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선전포고문의 책임자인 일본왕의 말과는 다르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모든 한국민은 역적 이토 히로부미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은 한국의 독립 달성을 위해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고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죽였다.”
(6)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한 평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이토의 죽음에 대해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당시 문학가이며 교육가인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후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썼다.
“.......... 1909년 9월 초순경, 가츠라 수상 집에서 연회가 있었을 때 이토공이 갑자기 졸도했다. 위독하다는 소문도 나돌았으나 곧이어 회복이 됐다. 앞으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내심 생각했다. 공은 이미 69세라는 고령이어서 앞으로 길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던 중, 하얼빈 역에서 우연스럽게도 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그와 같은 화려한 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자택 다다미방에서 죽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장소는 하얼빈이다. 그 상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초대 한국 통감을 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깊은 의의가 있다. 이때는 공으로서는 스스로 업무를 일단락 시켰을 때다. 그리하여 한국경영에 대해 일단락을 봤으므로, 이 해 6월에 통감을 사임하게 된다. 이제 공으로서는 한가한 시기로 돌아가던 찰나 한국인을 상대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대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경영을 위해서 공이 희생된 것이 명료해진 것이다. 피를 가지고 생전의 결점을 씻어버리게 되었고, 세계만민의 동정을 공은 최후에 얻은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에게 침략자로서 ‘악’ 그 자체이고 이토는 ‘악’ 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토를 사살한 의사 안중근의 반대편에 이토를 세워놓았을 때 이러한 이미지는 매우 명쾌하게 부각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지만 일본에서의 이토의 평가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양국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토대를 쌓은 민족의 위인이며 네 차례에 걸친 내각의 수반으로서,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천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지폐에 나올 정도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실무가형 정치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극히 당리당파를 초월해 중립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태도로 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 나라에서는 36년간 암울한 식민지 지배를 가능케 한 주요 인물로 기억이 되고 있지만 그의 멀리 내다보는 혜안과 실리 추구의 정치 자세는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명은 도시스케[利助]. 현대 일본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메이지 헌법(1889)의 초안을 마련하고 양원제 의회(1890)를 수립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84년 후작작위를 받은 데 이어 1907년 공작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토 히로부미 시신 실은 배
한일병합 99주년을 맞아 1875년부터 1945년까지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사진집 '한일병합사'가 출간됐다.
사진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을 실은 배가 요코스카에 상륙하는 장면.
눈빛출판사 제공=연합뉴스
이토 히로부미 장례 행렬
연합뉴스 / 한일병합 99주년을 맞아 1875년부터 1945년까지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사진집 '한일병합사'가 출간됐다.
사진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 행렬이 도쿄 가스미가세키 부근을 지나는 모습.
첫댓글 형식적인 추모보다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실천했으면..안중근의사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가슴이 아프다!
남수야, 왠지 뜬금없다....
아니 왜? 하긴 내가 좀그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