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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조점(旌義操點)
1702년(숙종 28) 11월 2일, 정의현성에서의 조련(操鍊)과 제반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정의현성, 달산봉수의 위치와 읍외촌, 궁산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정의현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민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다음에 병고에 설치된 1간 대문에 이른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다. 마당 서쪽에는 현아인 일관헌과 연결되는 문을 제외하고는 담장을 둘러 공간을 구획했다. 마당 북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객사의 북서쪽 가까이에 현감이 집무하는 현아가 ‘ㅁ’자를 형성하고 있다.
그 남쪽으로 교육시설인 문묘(향교)가 주위에 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ㄷ’자를 형성하면서 자리 잡고 있다. 군사들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는 객사 마당쪽 동측에 ‘ㅁ’자를 형성하고 있다. 성 안의 민가들은 병고 남쪽과 서쪽에 밀집되어 있으며 성 밖의 민가 또한 성의 남쪽에서 서쪽에 밀집되어 있다.
당시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 10리, 서면 12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호는 1,436호이며, 전답은 140결이다.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 664명과 제반군기는 물론 목자와 보인 190명, 말 1,178필, 흑우 229수,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을 점검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의현성의 직접적인 관할 봉수는 남산, 독자, 달산, 토산, 연대는 말등포, 천미, 소마로, 벌포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지도와는 달리 남과 북의 방향이 거꾸로 제작되어 있다.
성읍민속마을 이야기
성읍민속마을은 1423년(세종 5) 정의현청을 성산읍 고성리에서 현재 자리로 옮긴 뒤 1914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기본 뼈대를 잘 보존하고 있다.
더불어 마을 전체가 1980년 5월 6일 지방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6월 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정의골 민속한마당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정의현청이 있었던 일관헌, 정의향교, 정의성 등이 복원돼 있고, 300여 채의 제주전통초가, 제주민요, 오메기술, 고소리술, 돌하르방, 연자매, 물허벅, 갈옷 등 유·무형 문화재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관헌 주변에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모두 천 년 가까이 된 노거수로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느티나무는 제주에서 ‘굴무기’라 부르고 있는 낙엽교목으로 재질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예부터 중요한 건축재나 가구 재료로 쓰여 왔다. 현재 제주에 자생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그 수도 많지 못하고 거목이 거의 없다. 도내에서는 성읍리 느티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마을이 현청 소재지였을 때 김면수라는 현감이 부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느티나무 가지가 너무 뻗어 현청에 드는 햇빛을 가린다며 어느 날 그것을 잘라 버렸는데, 그 동티로 인해 딸이 죽고 말았다. 그 뒤로는 이 나무에 함부로 손을 대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성읍마을의 팽나무는 워낙 오래된 나무여서 속이 텅 비어 있는데 그 속에 고인 물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눈병에 특효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무에서 동서남북 중 제일 먼저 순이 나기 시작하는 방향의 마을에 풍년이 들게 되고, 가운데에서부터 순이 돋기 시작하면 마을 전체가 풍년을 맞는다는 속신(俗信)도 전한다. 팽나무 가운데 한 나무에는 둘레가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생달나무가 사이에 끼어 자라고 있고 둘레 50cm의 송악이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어 웅장함이 더 돋보인다.
정의현성은 성곽이 둘러쳐지고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중심지에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좌우에 민가들이 밀집되어 있고, 다음에 병고에 설치된 1간 대문에 이른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다. 마당 서쪽에는 현아인 일관헌과 연결되는 문을 제외하고는 담장을 둘러 공간을 구획했다. 마당 북쪽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은 객사가 자리 잡고 있다. 객사를 중심으로 그 우측에는 사자기가 있고, 정면 좌측과 우측에는 각종 깃발과 무사가 배열되어 있다.
일관헌은 지금의 군청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의현감이 집무하던 청사이며, 그 옆마당에는 거대한 연자매가 있다. 일관헌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성읍리의 팽나무가 아직 싱싱했을 무렵이다. 왼편의 정의현(旌義縣) 청사였던 일관헌은 지붕이 양철로 바뀌어 있다.
영주산과 무선돌 이야기
성읍마을 뒤에는 단아하면서도 중후한 자태를 자랑하는 영주산이 있다. 예부터 신선이 살았다는 영산으로 ‘영모르’라 부르기도 하는 150m 높이의 이 오름은 험한 데가 없고 온통 부드러운 잔디로 싸여 있어 온화한 분위기를 풍긴다.
영주산에는 마을사람들이 ‘무선돌’이라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영주산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영주산도 무선돌도 없었던 아주 먼 옛날, 이 마을에 한 가난한 총각이 살고 있었다. 총각은 마을사람들이 효성의 귀감으로 삼을 정도로 늙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어느 날 산에서 땔나무를 해오던 총각은 물을 긷고 가는 부잣집 딸과 마주쳤다는데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뒤로 총각은 그 처녀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그 처녀가 보고 싶어 일은커녕 어머니 봉양마저 다 접어둔 채 길목을 지키고 서있기 일쑤였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마을사람들은 총각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각은 오직 부잣집 딸에 대한 연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늙은 어머니가 추운 겨울날 외로이 세상을 떠나자, 총각은 마을에서 고립되다시피 했다.
어느 날 총각은 용기를 내어 부잣집 딸이 지나는 길을 막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광경을 보게 된 처녀의 아버지는 딸을 집에서 내쫓아버렸다. 부잣집 딸은 할 수 없이 총각과 살림을 차렸지만 마을사람들의 눈초리가 매워 마을에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둘은 마을을 뜨기로 했다.
부부가 막 동구 밖을 나서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더니 그들 위로 떨어졌다. 벼락소리에 놀란 마을사람들이 나와 보니 처녀는 영주산이 되었고 총각은 무선돌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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