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9:23~31, 11:25~26 힐링, 회복, 다시 세워짐의 ‘다소’ 2013.721.
요즘 힐링이 대세라고 합니다. 영어로? Healing is the big trend. 사람들이 건강을 중시하는 삶을 추구하는 경향입니다. 처음에는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더니 요즘에는 힐링이란 용어입니다. 건강을 지키자는 차원에서 병든 상태를 고치자는 단계로 발전했습니다. 웰빙은 현대 산업사회의 병폐를 인식하고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새로운 삶의 문화 또는 그러한 양식입니다. 웰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입니다. 이전에도 슬로푸드 운동, 느리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슬로비족, 물질적 실리와 보헤미안의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추구하는 보보스 등 육체적·정신적 삶의 유기적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3년 이후 웰빙(문화)이 확산되어 웰빙족을 겨냥한 의류·건강·여행 등 각종 상품들이 선을 보였습니다. 반면 힐링(Healing)은 치유를 뜻합니다. 요즘 ‘힐링’(healing)이 대세입니다. 힐링은 ‘치유하다’, ‘낫다’라는 뜻의 힐(heal)을 동명사화 한 단어입니다. 방송사의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힐링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세파에 찌들고, 상처입은 영혼을 치유해 새 삶을 살게해 준다는 의미로 널리 퍼졌습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가 컷는지 힐링은 급속도로 일반에 파고들었습니다. ‘웰빙’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지만 한 차원 더 높은 힐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문화도, 산업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때 웰빙으로 돈의 흐름이 쏠렸지만 이제는 힐링입니다. 출판, 관광, 방송은 물론이고 공공부문도 ‘힐링행정’을 들고 나올 정도입니다. 힐링의 메시지는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돼야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응어리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힐링 행보’에 주력합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져주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힐링은 궁극적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나의 힐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이고, 마음 씀씀입니다.
여러분, 베트남 사람들이 하나같이 존경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얼마나 존경했는지 나라가 통일되자 수도를 그 사람의 이름을 갖다 붙일 정도였습니다. 호치민입니다. 이 사람은 1960년대 말에 죽었는데, 죽을 당시 남긴 것이라곤 낡은 옷가지 몇 벌과 책 한 권이였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청렴하게 살면서 초지일관 나라 사랑에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리고 있는데, 그래서 그의 생가에는 아직도 내, 외국인을 막론하고 참배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평생 머리맡에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던, 그래서 죽을 때 단 한 권 남기고 떠났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명 저술인지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먼저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 석학 중의 한 분입니다. 이 분은 조선 영조 때 태어나서 순조 때 돌아가셨는데 그 분의 재주는 문과적인 재능은 물론이고 이과적인 재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지금의 기중기 비슷한 기계와 각종 장비들을 발명했습니다. 당시 수원성을 축조하는데 대단한 이분의 재능이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선생은 22세 때 처음 급제를 해서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차례로 승진할 만큼 이미 젊은 나이에 탄탄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다가 1801년에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연루돼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그 세월이 얼마나 길었느냐 하면, 장장 18년이었습니다. 38세에 귀양살이를 시작해서 57세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황혼에 집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목민심서는 바로 유배생활에서 돌아오고 난 바로 이후에 쓴 책입니다. 그 책은 지방의 관리들이 어떻게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지를 쓴 책인데, 18년 동안 귀양살이, 평민으로 살면서 지방수령들의 모습을 충분히 살핀 후의 기록이니까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그 내용이 얼마나 훌륭했으면 한 나라의 지도자가 평생 그것을 정치 교본으로 삼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위대한 책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를 통과한 후에 나온 것입니다. 18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통과한 다음에 보석같이 다듬어져서 나온 책입니다. 그렇다면, 다산 선생에게 있어서 18년 귀양살이는 저주가 아니고, 귀양이 아니고, 그 귀양의 자리가 도리어 축복이었고 상처가 아니라 힐링이였습니다. 그 유배기간이 없었던들, 그 힐링의 기간이 없었던들 다른 500여권의 저술과 목민심서 같은 책은 결코 나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주어진 일 없이 권태롭고 지루해서,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 허송세월 같은 그런 세월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앞에 그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해답을 얻으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고,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그 답이 나옵니다. 오늘은 바울이 그의 고향 <다소>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고향으로 돌아가는 때는 언제입니까? 명절이나, 보통 성공인생이 되어서 보란 듯이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자기가 원해서 낙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 할 수 없어서, 떠 밀려서, 상처받고 아픔을 가지고 다소로 낙향을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어서 다소는 어떤 곳입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다소는 바울에게 있어서 힐링의 장소, 힐링의 시간이였습니다. 다소는 힐링 캠프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바울이 되기 전, 사울 때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세계 전도여행을 세 차례나 다녔고, 성경을 13권이나 쓴 사도지만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는 자에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고, 예수 믿는 자를 색출해서 잡아 올리려던 다메섹에서 오히려 각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전합니다. 이렇게 바뀐 사울을 유대교인들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전에는 동료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배신자가 된 사울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을 이 잡듯이 뒤집니다. 결국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고 그의 제자들이 피신을 시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약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아라비아 3년은 첫 번째 힐링의 장소였고 힐링의 시간 이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회복을 받고 다시 세워짐으로 복음의 사역자로 등장을 합니다. 아라비아 3년은 다윗이 주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1차 힐링이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세워지지만 스스로, 직접 자신이 나서서 담대하게 주님의 제자들과 동등ㅎ게 설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들이 사울이 예수를 만나 회심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긴가민가해서 만나기를 꺼립니다. 그때 바로 바나바가 사울의 신원보증을 섭니다. 바나바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12사도와 거의 대등한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바나바를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하게 됐고, 거기서도 즉시 예수를 전하러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도 열혈 유대교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메섹에서나 예루살렘에서나 사울은 응당 대가를 치뤄야 할 배신자였습니다. 할 수 없이 형제들이 그를 데리고 항구도시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배를 태워 다소로 보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 갈라디아 1장을 보면 오늘의 정황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사울이 베드로를 만나고 다소로 내려갈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보름 동안 머물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고, 그 감격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시작한지 불과 보름 만에 사울은 본의 아니게 낙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가끔 간증을 듣지만 극적으로 삶이 변한 사람에게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사울 역시 그런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계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별 말이 필요 없지요? 너무나 엄청난 증거가 옆에 있으니까 그냥 나사로만 봐도 그 자체가 복음이 됩니다. 지금 사울도 그렇습니다. “당신들 저를 알지요? 가말리엘 문하생의 바리세인 중에 바리세인, 내가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거 알지요? 스데반도 내가 죽였는데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이 만나 주셨어. 그 분은 정말 살아계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셔! 유대인 동포 여러분, 예수 믿어야 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시작한지 겨우 보름 만에 꿈을 접고 낙향해야 했으니 얼마나 실망이 컸겠습니까? 말하자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 3년 세월에 이어 두 번 째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낙향은 잠시 피해가는 일시적 낙향이 아닙니다. 이후에 사울은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 교회로 가서 사역을 하고, 거기서 1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갈2:1 을 보면, 그게 낙향한 지 14년 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1년 사역한 것을 빼면 그가 다소에 머물렀던 기간은 꼬박 13년입니다. 그가 13년 동안 고향 다소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전도 유망한 청년 사울이 고향에서 13년 동안이나 칩거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는지는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영국의 첼리스트 중에 여성으로서 유명한 쟈클린 뒤프레라는 첼리스트가 있습니다. 여성 첼리스트로서 지금까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자입니다. 네 살 때, 자기보다도 더 큰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해서 16세 때 영국에서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가 그녀의 선생님이었습니다. 두분에게 사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23세 때 피아니스트면서 지휘자였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곤 남편과 함께 엄청난 연주 일정을 소화합니다. 이미 20대 초반에 그녀는 너무 잘 나갔습니다. 그녀의 연주는 가는 곳마다 대 성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쟈클린은 자꾸 박자를 놓치고 연주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컨디션이 나빠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다발성 경화증’이란 병으로 판명이 됩니다. 근육이 굳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파킨슨씨 병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바렌보임과도 이혼하고 28세 때 완전 은퇴를 합니다. 여러분, 그녀의 심정이 어떨 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세계적인 선생님에게 사사를 받고, 세계적인 지휘자 남편을 만나고, 악기까지 스트라디바리였으니 얼마나 행복한 음악가입니까? 그런 그녀에게 병이 찾아왔을 때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꽃을 더 활짝 피우고 싶었는데, 한참 나이인 28세에 은퇴를 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바라지 않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시간들이지만 우리가 맞이할 시간 중엔 그런 시간도 있습니다.
사울 역시 유대교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제자가 됩니다. 열심히 공부한 탓인지 엘리트가 되어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습니다. 누가 봐도 출세가 보장된 청년이었는데 겨우 3년 만에 낙향을 했습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사역을 제지당하면서 낙향을 했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와는 완전 절연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새 피조물이 되었지만 지난 3년 동안 특별히 한 일도 없습니다. 자기의 기대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다 무산됐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금,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일도 없습니다. 하는 일 없이 매일 시간만 소일하니 영락없는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 세월이 하루 이틀, 1년 2년도 아니고 장장 13년입니다. 그 기간 동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몹시 그리웠을 겁니다. 고향 사람들도 처음엔 고향에 나타난 사울을 보고, 무슨 급한 용무가 있거나 아니면 쉬러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의 신상에 다른 일이 생긴 것을 알았겠지요. 알고 보니 그는 더 이상 자기들과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때를 맞춰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차마 고향 사람이라 문전박대 할 수는 없지만 고향 사람 모두가 사울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전도유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허구한 날 집만 지키고 있는 바울을 보고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고 경멸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겪었을 모멸감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세상살이에 관한 한 사울은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기간이 13년이나 계속됐습니다. 여러분, 13년이란 세월은 누구에게나 긴 세월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처럼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처럼 살아야 되는 청년에게, 그 13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턴널의 시간입니다. 매일 태양이 뜨는 새 날을 맞는 것이 죽음 같은 고통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터널을 의연하게 나아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가 힐링캠프였습니다. 힐링의 장소였습니다. 다소의 자리는 결코 작은 자리가 아닙니다. 다소는 꼭 필요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바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버팀목으로 회복되기를 준비한 장소입니다. 힐링의 장소요, 힐링의 시간입니다. 그러면 왜 사울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왜 굳이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어야 했을까요? 먼저는 힐링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괴롭고 힘들고 지치셨습니까?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가 주님께서 어루만지시는 힐링의 자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다소는 회복과 다시 세워짐의 장소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사울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지요?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신 이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주님이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고향으로 보내신 이가 주님이셨다면, 고향을 떠나게 하실 분도 주님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후에 주님의 다른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다소를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사울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런 은둔의 시간을 주신 것일까요? 사실 성경엔 사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간이 다 있었습니다.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요한, 사울, 등. 성경의 위대한 모든 인물들에게 이와 같이 없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아니 오히려 없었으면 훨씬 더 유익했을 것 같은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당사자들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까? 회복과 다시 세워짐의 장소이고 시간 이였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쳤습니다. 애굽의 왕이 될 뻔한 인물이 40년이나 처가살이를 하면서 양을 쳤으니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 40년 동안 그가 깨달은 것은 무슨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로구나!”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자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요셉 역시 13 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하지요?종으로 팔려가서 총리가 되기까지 구덩이와 물품창고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습니다. 그 역시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아무리 사람이 용을 써도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한 가지를 터득하는데 1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다윗 역시 기름부음을 받고 골리앗도 죽여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무려 10년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하는수 없이 아둘람 동굴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모여든 빚진자, 환란을 당한자, 원통한자, 한에 맺힌 사람들 400명이 다윗에게 옵니다. 그 뿐이 아니고 조금 더 모이는데 200여명이 추가로 옵니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10년 이상을 헤맸는데, 그 시간을 통해서 그가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나를 인정하고 이끌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믿을 이는, 오직 나를 이끄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이 것을 터득합니다. 이것을 겨우 알자 사울 왕의 추적이 멈춥니다.
사도 요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기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다니면서 전도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자기는 촌구석에서 늙은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를 자기에게 부탁했는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아흔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 일을 끝내고 나니까 자기 역시 70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요한에게 무엇을 깨닫길 바라셨을까요? “요한! 세상살이는 대단해 보이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이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이것 알았으면 요한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일생이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지요? 그 역시 장수하면서 위대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남깁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신앙의 선배들과 사울이 깨달은 것을 힐링을 통해서 얻은 것은‘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이해하는 데 힘 쏟을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같은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당위성은 잘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천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도 사랑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독생자까지 죽이시면서 살리신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분, 한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넌덜머리가 나는 존재입니까? 하는 것을 보면, 하는 일을 보면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잘 났고, 자기는 괜찮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편견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소명이든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힐링을 통해서 회복과 다시 세움의 것들을 깊이 묵상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속성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인간은 얼마나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지, 그런가하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알고 그 껍데기를 벗겨내기를 바라십니다. 사울에게 다소에서의 칩거는 바로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힐링이요, 회복이요, 다시 세움을 입는 시간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후에 히브리서 6장에서 위대한 말을 남기는데 <한번 비침을 받고, 한번 은사를 맛보고, 한번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이 것 뿐이 아닙니다. 6;14에서는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하고 번성케하리라> 주님께서 다시 세워 주신다고 열정을 토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의 고향 다소는 로마 제국의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을 누렸던 곳입니다.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들이 발달했고, 한 때 동방의 지배자였던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겨울을 같이 날 만큼 기후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소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소 출신이란 것을 대단한 긍지로 여겼습니다. 사울 역시 자기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고, 당시 세계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고, 히브리어와 라틴어까지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세계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밝혔듯이 히브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산헤드린의 의원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고, 이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노라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바울의 이 모든 깨달음이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다소에서의 그 긴긴 칩거 시간 속에서 터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소에서의 칩거기간은 힐링이고, 회복이고, 다시 세움을 입는 장소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것뿐이 아닙니다. 고후 4장에서 고백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이 기간에 사울이 또 하나 깊이 묵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영원’이란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결국 주님이 주시길 원하시는 본심은 바로 ‘영원’입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이 영원을 향한 갈망을 빼고 나면 우리 인생은 그야말로 헛되고 헛된 것 뿐 입니다. 인생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고 그 다음엔 영원이란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그 영원의 시간이 복이 될 지, 저주가 될 지는 우리의 짧은 인생을 통해 결판이 납니다. 바로 이 영원한 세상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만약에 사울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시간에 대해서 정리가 미흡했다면 나중에 사도 바울로서 겪었던 고난은 감당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는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때로는 타고 가던 배가 세 번이나 파선해서 일주일이나 표류하기도 했고, 강을 건너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여러 번 강도와 동족들과 이방인, 그리고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등등 온갖 위험을 달고 다녔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시무룩하거나 기죽은 표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표정은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용기가 서려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에게는 살면 전도요, 죽으면 영원입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죽음이 선물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그래 죽여 봐라!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천국이라는 ‘영원’을 살게 된다!” 여러분, 그를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영원에 대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굳건한 믿음은 다소에서의 그 세월 가운데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다소에서 다시 세움을 입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위험도 죽음도 바울을 다시 끌어 내리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바울이 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구세주로서 활동하시기 전에, 30년이란 세월이 왜 필요했습니까? 창조자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떤 시간을 거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의지대로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에서 나시고, 목수 생활을 하시면서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셨습니까? 우리를 향한 인간이해를 하시라고 친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의 굴레를 벗고 인간이 되시고, 인간 연습을 하셨습니다. 한 가정에 태어나서 부모를 모셔보고, 동생들의 뒤치닥거리를 해보고, 목수일을 하면서 동네의 사람들과 어울려 보면서 진짜 인간의 연습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원초적 절망과 슬픔과 아픔을 아시고, 더더욱 나약한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이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13년간의 칩거 생활 가운데 사울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인간의 온갖 심정을 공유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멸시도 당하고, 좌절도 하고, 조그만 것에 기쁨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고상해 보인 세상학문과 세상 모습을 버리고 보다 평범하고 보다 수더분한 사람이 되었고, 자기 영혼의 더러운 찌끼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당신이 쓰시기에 편리한 강한 도구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인간은 제 아무리 능력 있어 보여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과 연약함을 자인할 때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것을 깨달았기에 자기 전체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그 13년이란 긴긴 세월의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움을 입고, 때가 차서 위대한 사도로 부름 받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실족함도 없이 주의 종으로서 사역했습니다. 바로 이 때의, 13년간의 다소에서의 칩거가 그 모판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인생의 다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피하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을 대상으로 장난치거나 골리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인생의 다소를 주시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만 주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인생의 다소를 통해서만 주님이 계획하신 새 날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새로 세움을 입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부신 인생의 꽃은 인생의 겨울을 통과한 후에야 아름답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법입니다. 봄에 뿌리는 봄보리보다도 가을에 파종해서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가 수확이 좋다고 합니다. 인생의 열매는 그렇게 가을보리와 같습니다. 겨울을 거치는 동안에 열매가 더 견실해지고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인생의 다소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는 그런 인생의 다소를 겪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게 경제적 다소이던, 건강상의 다소이건, 인간관계의 다소이건 진로상의 다소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다소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봄을 우리에게 주시려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상황 가운데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시며 사울이 힐링과 회복과 다시 세워짐의 다소였듯이 여러분도 힐링과 회복과 다시 일어섬의 다소가 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사울을 바울로 부르셨듯이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불러 쓰실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롬8:32) 이 놀라운 힐링, 회복,그리고 다시 세움을 입는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