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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이야기
대실(竹谷)마을이 분주하다. 다름아닌 혼례식 때문이다.
전라도 남원군 매안 마을에서 오는 꼬마신랑 '강모'를 맞기 위해 그리도 분주한 것이다.
신부 '효원'의 증조부인 '허근'의 진행으로 혼례식이 진행된다.
부선재배(婦先再拜): 신부가 먼저 두 번 절하라
부우재배(婦又再拜): 신부는 다시 신랑께 두번 절하라.
신부의 절을 받고 신랑이 답으로 한번 절한다.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
"신랑이 아직 학상이당가?" "인자사 열다섯 살이랑만" "신랑 이쁜거어"
허근의 말이 이어진다
시자각침주(侍者各침酒): 시중드는 사람은 술을 치시오
신랑 신부 잔의 술을 마시지는 않고 시늉만 낸다.
거배애상호서상부하아(擧盃相互서上婦下): 서로 잔을 들어 신랑이 위로
신부가 아래로 가게 바꾸시오.
표주박을 반으로 타갠 신랑쪽 잔엔 푸른 실이, 신부쪽엔 붉은 실이
요요히 빛나고 있다.
시자각침주(侍者各침酒)
츳! 하는 신음소리가 허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청실 홍실이 꼬인 것이다.
하이고오,어쩌꼬오. 구경꾼들이 수근거린다. 사위스럽다. 불길한 예감이다.
신혼방.
신랑 신부 고요와 어둠 속에 말이 없다. 병풍에 비친 신부의 그림자를 보고 새신랑은 기겁을 한다. 크다... 겁이 났다. 밤이 깊도록 신랑은 신부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든다.
강모는 꿈을 꾼다.
'강실아...'
강모가 목이 타게 부른다.
'강실아...'
누군가 강모의 어깨를 장작으로 후려친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덤벼 들어 물매를 퍼붓는다
"덕석에 말아라. "
오류골 숙부의 앙칼진 목소리다.
"이 짐승같은 놈. 인륜 도덕이 뭔지도 모르는 천하에 못된 놈.
가문에 먹칠을 하고 상피붙은 네 놈이 그래 사람이냐?"
돌팔매가 날아온다. 누군가 뒤에서 그를 덕적으로 두르르 말아버린다.
허억. 신랑 강모는 잠에서 깬다.
신부는 밤 새 한 잠도 자지 않고 고 어린 신랑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만 보았다.
강모는 색시의 모습을 보고 다시 두려운 생각이 든다. 색시가 무섭다.
열 다섯의 나이에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된 강모.
신혼 첫날 밤, 병풍에 비친 신부의 거대한 몸 그림자에 주눅이 들어
신부를 홀로 지새게 한 강모.
온몸에 땀이 배고 팔다리가 저린 상태에서 긴 긴 밤을 뜬 눈으로 효원은 지새게 되는데......
혼례식 올릴 때 청실 홍실이 얽히더니, 이제 효원과 강모의
암울한 앞날의 서막이 오른 것인가?
강모는 첫날밤 몹쓸 꿈을 꾸게 되고 애타게 강실이를 부르다 몰매를 맞고 잠에서 깨어난다.
강실이가 누구인가?
이 소설의 초반 주인공 청암부인, 종가 큰며느리로서 집안을 이끌어가는 실세이다.
그 청암부인은 이 매안마을의 종가집 며느리로 시집 와 열 아홉의
어린 나이에 남편(이준의)을 잃고 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된다.
그때 신랑의 나이가 열 여섯이었으니 슬하에 자녀가 있을 리 없다.
이준의(청암부인의 남편)에게는 남동생 병의가 있었는데, 그 병의가
결혼하여 기채, 기표, 기응을 낳고 그 중의 큰아들인 기채를 큰댁으로
양자를 들이게 되는데, 이때 청암부인의 나이가 스물 다섯이었다.
청암부인의 보살핌으로 자란 기채는 후에 율촌댁과 결혼하여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 강모를 낳고, 지금 그 강모가 효원과 결혼하여 새삶을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강모는 엄격한 할머니 청암부인과 고루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오류골
작은아버지댁(이기응)에 자주 놀러간다. 작은 아버지댁에는 그보다 두어 살 아래인 사촌동생 '강실이'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둘은 너무도 사이좋게 지내고 드디어는 신혼 첫날밤
꿈속에까지 나타나게 될 정도로 사모하게 된 것이다.
아, 이를 어쩌랴 !
혼례를 마친 강모는 매안마을로 묵신행을 오게 되는데,
그 묵신행이 일 년이 될지 삼 년이 될지 모르는 사태에 이른다.
신랑을 매안으로 보낸 신부 효원은 친정 대실마을에서 홀로 지내게 된다
한편, 강모는 매안을 떠나 전주에 나가 학교를 다니던 중 음악에 선천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고, 음악선생으로부터 책을 건네 받고 일본 유학을 꿈꾸게 된다.
그러할 즈음, 강모는 할머니의 위급함을 알리는 급보를 받고 부리나케 매안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손주를 신부가 있는 대실마을로 보내기 위한 계책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효원은 시댁으로 오게 되나, 독수공방하기는 첫날밤이나 변함이 없다.
독수공방.
효원은 신혼 첫날 밤, 친정어머니가 원앙금침에 넣어주던 삼팔주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은 다름아닌 첫날밤의 신부가 꽃잎같이 떨구는 한 점 앵혈을 정갈하게 받아내는 부드럽고 흰 비단일진대, 아직껏 그대로이다.
아!!
시댁으로 돌아온 효원.
청암부인의 따뜻한 말로 크게 위안 받지만,
신랑 강모는 할머니의 강요로 효원과 동침을 하게된다.
"나는 아무래도 동경으로 가야겠소"
모처럼 던진다는 말이 이 정도다.
"이제 그만 잡시다"
효원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데,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난 강모,오줌 누러 간다며 또 효원 곁을 떠난다.
아!
효원은 장 속에 곱게 접힌 채인 삼팔주 수건에 생각이 미친다.
강모는 또 작은 소리로 어둠 속에 서서 외친다.
"강실아......"
청암부인은 홀열듯 그네의 시아버지가 떠오른다.
참으로 기구한 생을 살다가신 분.
첫번 째부인인 반남 박씨부인과 사별하더니, 재취로 들어온 청주 한씨부인마저 여의고 마지못해 삼취로 남양 홍씨부인을 들인다.
여복이 많은 것인가?
홍씨부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집안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남노여비들은 눈치껏 재물 빼돌리기에 바빴고, 부인 홍씨는 온갖 패물로
치장을 하며 자색을 가꾸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날이갈수록 요요하여지던 홍씨부인은 시집온 지 구년 되던 해에 야밤도주를 한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때 열 네살이 된 아들 준의와 열 두 살 된 병의를 앞에 두고 시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집안은 나날이 몰락에 몰락을 거듭했고, 한 삼백석 하던 종가의 농토는 어느덧 모조리 탕진되어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장롱 속에 그득하던 온갖 패물들은 홍씨부인이 집을 나가며
모두 가져가버려 말 그대로 집안은 폐허 그 자체였다.
시부에겐 마지막 죽기 전 소원 하나가 있었다. 다름아닌 큰아들 준의를 장가보내는 일이다.
그러자니 준의의 엄마가 필요했다.
세 번씩이나 상처를 한 시부로서는 사취를 할 작정도 아니고..... 난감했다.
그런 낌새를 챈 문중에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건너 마을 수절과부를 보쌈해 오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시부는 보쌈마님을 들이고 아들 준의 혼례에 온 힘을 쏟는다.
청암에서 혼례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온 준의는 그날로 병을 얻어
시름 시름 앓더니 그만 아버지 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운명이라니!
청암에 남겨진 신부는 이런 비보를 접하고 소복을 입은 채 시댁으로
달려오고, 아들 잃은 슬픔에 잠겨살던 시부 또한 유명을 달리한다.
보쌈마님과 청암새댁은 졸지에 쌍초상을 치르고,둘 다 소복입은 기구한
운명 앞에 멍 하니 서 있다. 참 어이없는 광경이다.
일본의 강압적 창씨개명의 바람은 매안마을 이씨 종가에도 들이닥친다.
종가 종손인 이기채는 창씨개명 문제로 아우 기표와 의견이 분분하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인들의 눈밖에 나서 무슨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기표.
조상 대대로 지켜온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꾼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종가 종손다운 기채의 생각. 아무튼 완강한 청암부인을 봐서도 창씨개명은 불가한 일이었다.
매안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창씨개명에 참여했으나,
일본 순사도 청암부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기가 눌려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이야기는 강모내외로 돌아가자.
독수공방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며 여인의 한을 삭이고 있는 효원.
허구헌날 독수공방이다. 무료한 밤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집올 때 가져온 서책을 읽으며
고독을 달래는데, 이 마저도 시어머니 율촌부인에게는 못마땅한 모습으로
비치고 급기야는 시어니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는다.
율촌댁은 며느리가 영 못마땅했다. 뭔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며느리.
기골이 장대하고 굽힐 줄 모르는 기세, 당당함 그에 비하면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
강모.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미움은 서서히 시작된다.
긴 긴 밤을 글을 읽으며 야심토록 불을 밝히는 것이 흉이 된다며,
일찍 소등하고 잠자리에 들라는 분부와 함께 자기가 입을 저고리를 하나
지으라며 일감을 건넨다. 시어머니의 명을 받은 효원은 밤을 새며 저고리를 정성껏 지어 이틑날 시어머니께 바친다. 그렇지 않아도 며느리가 밤새도록 불 밝히고 일찍 소등하라는 자기의 명을 거역한 것이 몹시도 마음에 걸렸는데, 효원이가 지어온 저고리를 보자 몸을 바르르 떨며 눈에 독기를 품고 만다.
'아니 이것이 시에미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이걸 내게 입으라고 지었단 말인가? 내 이년을 그냥.....'
본디 바느질에는 관심이 없던 효원이라 아무리 정성을 다해 지었어도,
시어머니가 보기에는 자기를 능멸하려는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시어머니는 저고리를 나꿔채더니 대청으로 나가 눈 녹아 질펀한 마당에다
저고릴르 냅다 집어던진다. 그 모습을 여러 아랫것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보고 기가 질린다.
'아,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지난 번 혼례 때 초례청에서 남편 강모에게 당한 모욕보다도 더한 수치였다.
청암부인이 다행히 아랫마을로 마실 가셨길 망정이지......
싸리한 방으로 들어온 효원은 흐느껴 울고 있다. 아, 가련한 새색시 효원.
한편, 하절기 방학을 강모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손에는 바이올린이 들려있다.
청암부인께 인사드리고 아버지 앞전에 머리 조아리고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눈다.
"그게 뭔고?"
"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입니다"
강모의 말에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 내 자식이 기생이나 하는 저런 풍류를 배우고 있다니.
기가 막히다. 이씨 종가를 이끌어가야 할 아들녀석이 기생오라비나 하는 그런 악기를..
그는 강모에게 다가간다. 바이올린을 집어든다. 그리곤 휙 집어던진다.
"썩 꺼지거라, 넌 내 자식도 아니다. 어서 썩 꺼져라"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라 .난 너 같은 놈 아들로 둔 적도 없다"
강모의 머릿속에 다시 강실이가 떠오른다.
'아, 강실아....'
혼불 제2권 지난 줄거리.
청암부인의 시아버지는 매우 여자복이 없는 분이셨다.
첫째부인과 둘째부인을 병으로 사별하더니, 삼취로 얻은 홍씨부인마저
재산을 탕진하고 온갖 패물을 가지고 야밤도주한다.
이후로 집안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아들 준의의 결혼을 앞두고
네번째 부인을 보쌈말이해 온다. 불행의 역사는 준의의 급사로 시작되고 청암에서 비보를 들은 새색시는 하얀 상복을 입은 채 매안마을로 들어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마저 죽자, 종가에는 달랑 두 여인만 남는다,
보쌈부인과 새댁 청암부인.
형님 준의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아우 병의는 결혼을 하여 기채, 기표, 기응을 낳고 형수님이 자식도 없이 종부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안타까워
문중과 상의한 후 큰아들 기채를 양자로 보낸다.
양자로 들어간 이기채는 율촌부인과 결혼하여 아들 강모를 낳고,
그 강모가 소설의 제1권에서 대실마을 효원과 결혼을 하고, 효원을
처음부터 두려워한 강모는 잠자리를 통 멀리하게 되는데......
매안마을에 사상 초유의 가뭄이 몰아 닥쳤다.
가뭄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해 급기야는 청호 저수지까지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청호저수지가 어떤 저수지인가? 청암부인이 서른 아홉의 나이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파고 넓혀 수로를 만들고 물을 끓여들여 4년만에 완성한 그 저수지가 아닌가?
그 푸른 빛 감도는 청호는 청암부인의 자부심이었고, 매안마을
이씨 문중의 위엄을 상징하는 그런 저수지였다.
명주 꾸러미를 두 서너개 풀어 넣어도 모자를 둣했던 그 청호.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이씨문중의 수호신으로 여기던 조개바위마저 그 모습을 드러내자 온갖 불길한 추측만 무성하다.
이런 가뭄이 이어지자 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용할 식량마저
바닥난 마을 인심은 흉흉해지고, 급기야 청호 바닥에 버쩍이는
가물치며 잉어를 너도 나도 없이 잡아다 먹느라 난리다.
"그럼, 안뎌. 그게 어디 우리 먹으라는 괴기인가?"
베틀에서 물러난 인월댁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우울하다.
그 이유는 청암부인이 며칠째 혼수에 빠져 있어서이다.
그 바위같고 위엄있던 청암부인도 70 고희를 앞두고 거목처럼
쓰러져 눕게 된 것이다.
'안되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큰집에 좀 올라가 봐야겠다.
그 새 차도가 좀 있으신지...'
인월댁은 찬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사람들 웅성거리며 신새벽 어둠을 뚫고 청호로 향하는 소리 웅성거린다.
가뭄. 청암부인의 희망이었던 청호가 마른다.
수호신으로 여기던 조개바위가 그 모습을 드러내 놓았다.
물을 떠난 조개, 그 조개의 운명과 청암부인의 운명.
(계속)
어제는 장인어른을 두 번 뵙고 오늘은 한 번 뵈오니 어른 말씀은
" 어디, 힘든 걸음해서 어떻하나? "
하시는 말씀은 분명하시니 다행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생리적으로 나이가 들면 전립선이 비대해지니 요도를 막아 소변보기가 불편해지니 수술로서 처리하나 장인어른의 나이 구순이시니, 외부로 플라스틱 관을 방광까지 삽입하여 허벅다리 쪽에 찬 비닐봉지로 소변이 고이게 되어있습니다.
내달 초순에는 허리에 구멍을 내서 바로 소변을 뽑아내는 조치를 취하기로 병원 측과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몸을 제대로 추수 리지 못하시어 장모님이 소변을 처리를 해주시나 눈뜬장님과 다름없는 흐릿한 노안이며, 굼뜬 손놀림으로 끝처리에 흔적이 남으니 장인어른 방에서는 어쩌지 못할 병색의 체취와 종말 처리의 정화되지 못한 끝물의 냄새가 가득합니다.
구순의 노익장으로
"나는 아프지 말고, 자식들 폐를 주지 말고 죽어야 할 텐데. "
하셨지만 인체의 슬픈 생리는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움직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공기 정화기를 가져다 설치하고 틀어드렸으나 부질없는 노릇이지요.
오늘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형과 함께 아내가 동네 장에 가서 스펀지 요와 비닐 덮개를 사서 친정아버님을 뵈우러 갑니다.
나는 당연히 기사였고, 처가에 가서는 당연히 일꾼입니다.
어른의 옷을 벗겨 들고 간 낡은 내 잠옷으로 입혀 드리고 딸들은 자기들
의 아버님 다리 속살과 손을 닦아 드리고 어른은
" 귀찮게 왜들 그러냐? "
하시나 기쁜 표정이 역력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얼마나 갈지.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며 나는 아내의 간병 열 한달을 생각합니다.
머리에 추를 매단 채 천장 보고 누워 있는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더러는 역겨울 때도 없었다면 너무도 꾸미는 말일 것이었으나 나 하나
만을 기다리며 나를 향한 아내의 해바라기 마음이 소중해서 나는 햇살을
봐도 눈이 시리고, 서러웠습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님은 홀몸이었답니다.
필시 그네의 마지막에는 온몸을 찢는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병상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통곡보다 슬펐으리라.
지난 번 영안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가족 중 하나인 어느 아낙은
" 별로 고통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
했지만 암환자의 고통은 단말마적인 것입니다.
임종의 시간에 사랑하는 이의 간절한 눈빛이 없었을 것이 정녕 틀림없거늘
1년 뒤에 유명할 달리할 것을 전혀 모른 체 작가는 혼불에 대한 자기의 애정에 대하여 피멍처럼 진한 글을 써갑니다.
<생명과 존재의 불, 혼불>
최 명 희
'혼불'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혼불을 보았다는 사람은 많다.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서 모양은 둥글고 크기는 종발만한데, 빛살 없는 푸른빛이며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혼불이 나가면 적어도 몇 시간 안에 그 사람은 죽게 된다. 또 아무리 길게 잡아도 사흘 안에는 초상이 난다는 것이다.
나가는 혼불은 다른 남의 눈에도 뜨이는 것이리라. 어두운 밤 어느 집 지붕 위로 훌렁 가벼이 떠오른 혼불을 보고, 사람들은 저 집에 초상이 나리라는 것을 짐작하곤 하였다.
이것이 미신이냐 실화냐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혼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리라.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의 몸에 혼불이 있으면 산 것이요,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혼불은 목숨의 불, 정신의 불, 삶의 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의 불이기도 하다. 즉 혼불은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지혜와 감정을 지니고, 자신은 물론 주변을 환하게 비쳐주는 등불 같은 혼불이 밝은 사람과 불빛이 어둡고 미약한 사람이 있듯이, 한 개인이나, 집안이나, 가문이나, 지역사회나, 나라나, 세계가 서로 밝은 혼불로 환한 세상도 있을 터인데, 역사와 문명도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혼불이 나가고도 '사흘'은 산다. 그 사흘은 물리적인 사흘이 아니리라. 삼십일일 수도 있고 삼십 년, 혹은 삼백, 삼천, 삼만 년일 수도 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혼불이 나가버린 사람의 껍데기만 남은 어둡고 차디찬 몸을 살아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여.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것일 수도 있고 너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또 나와 너의 관계나 역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한 두려운 인식은 오래도록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나는 혼불이 살아 있는 시대를 간절히 꿈꾸면서, 사실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아픈 일제 강점기 상처의 삼십여 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작은 성냥불 하나라도 제 몸을 켠 불빛이 몫을 다하려면 반드시 어둠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일까.
역사의 혼불이 위태롭고 참혹하게 시달리며 살육당하는 시대의 감옥에, 개개인이 갇히어 운명적으로 겪는 쓰라리고, 서럽고, 응어리지고, 피멍 맺힌 사연들을 나는 나의 핏속으로 깊이 빨아들이면서, 그 피멍이 삭아 부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기를 빌었다.
그 눈물나는 해원의 굿이 열리는 마당으로 나는 소설 '훈불'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98년 12월 22일)
독서의 계절에 권해 드리고 싶은 책!
작가: 최명희
독서명: 혼불
장르 : 대하소설
발표 : 1996년 12월 전10권 완간
수상 : 단재상, 세종문화상, 여성동아 대상, 호암상 예술상
...내용...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된
직후부터 쓰기 시작해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2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제1부가 당선되었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제2~5부를 연재한뒤
1996년 17년 만에 전10권(5부)으로 완간된 최명희의 작품이다.
원고지 1만 2000장 분량의 대하소설, 1930년대하소설로
전라북도 남원의 몰락해 가는 한 양반가의 며느리3대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힘겨웠던 삶의 모습과 보편적인 인간의
정신세계를 탁월하게 그려냈다.
특히 ꡐ우리가 인간의 본원적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한다ꡑ는
작가의 말이 고스란히 표출된 작품으로, 호남지방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노래, 음식 등을 생생한 우리
언어로 복원해내 ꡐ우리 풍속의 보고(寶庫), 모국어의 보고ꡑ
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열규는 ꡐ전통적인 소재,유교적인
이데올로기, 지역민속지적 기록, 그리고 가문사 등이
어울린 민족학적 서사물 또는 자연서사물ꡑ로, 소설가 이청준은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ꡑ로, 유종호는 ꡐ일제 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ꡑ으로 평가하는 등
1990년대 한국문학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작가 최명희는 이 《혼불》 완간 4개월을 앞두고 난소암에
걸렸으나 주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집필에만 매달린
끝에 1996년 12월 완간, 2년 뒤인 1998년
12월에 작고 하였고, 이 작품으로 단재상 문학부문,
세종문화상, 여성동아 대상, 호암상
예술상 등을 받았다.
1997년 7월, 각계 인사들이 모여 작가 ꡐ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ꡑ이 결성되었고,
1999년에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에 작가를
기리는 문학마을인 ꡐ혼불마을ꡑ이 조성되었다.
■ 작가 최명희
● 1947년 남원 사매 노봉 본적(전주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쓰러지는 빛"등단
● 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 당선『혼불 제1부』
▷ 17년간 집필(5부 전 10권), 전북애향대상,세종문학상, 단재문학상, 호암상
■ 소설『혼불』의 내용
○ 암울하고 어려운 시절(1930년대)일제하에 내부적으로 조선조말 문화 내재
▶ 이중적 시대 상황속에서 처참하게 부서지고 상처받고 몸부림치는 인간사 조명
○ 남원지방 매안 이씨 종가(전통 양반사회)몰락 전개
▶ 종부 3대(청암부인-율촌댁-효원), 남성상실(강모), 근대사 도래
○ 평민, 천민의 생을 살다간 거멍골 사람들의 슬픈 삶
⇒ 후반부 소설무대 : 만주(조선인의 비극적 삶과 민족혼 회복)
■ 등장인물
○ 청암부인 : 종가댁 큰어른(매안이씨)
○ 강모 : 종손(청암부인 손)
○ 강호, 강태(강모의 사촌형)
○ 강실(강모의 사촌 여동생)
○ 효원(강모의 부인)
○ 율촌댁(강모의 모친), 이기채(부친)
○ 옹구네, 춘복이, 백단이, 쇄여울네(상민 거주촌, 거멍골 사람)
■ 스토리 전개
① 강모는 효원과 중매결혼 ⇒ 종가, 매안마을 경사(도입)
② 어린 강모는 사촌동생인 강실이와의 애뜻한 그리움 ⇒ 사랑
③ 종가에서 강모부인(효원)에 대해서 냉대와 무관심 ⇒ 방관
④ 강태(강모사촌 형)는 강모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 심취 만주행⇒ 도피
⑤ 상민 춘복이는 강실(양반딸)을 겁탈해 아이 뱀 ⇒ 불륜
⑥ 강실이는 사촌오빠(강모)를 사모하지만 상민촌(거멍골)에서의 한많은 삶
⑦ 청망부인(강민조모) 죽음 - 사실상 종가 몰락, 거멍골 상민촌과 어울려 의례
⑧ 상민촌 백단이(무당)는 청암부인 묘에 자기 아버지 시신 합장
▶ 불평등 타파(양반 ↔ 천민교류), 평등사회
⑨ 만주로간 강모, 강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만 ⇒ 겨레의 질곡은 아직 끝나지 않음
■ 주 제 연 구
□ 혼불의 정의
○ 좁은의미 : 사람이 운명하기 전에 저와 더불어 살던 집이라고 할 육신을 가볍게
내버리고 홀연히 떠오르는 푸른 불덩어리로 크기가 종발만 하며, 달보다 더 투명한
살없는 빛으로 별색같이 맑고 가슴에 시리어 에이는 푸른빛
○ 넓은의미 : 서러운 세월속에서도 꽃의 가슴에 희망의 꽃씨를 머금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
□ 왜 혼불인가?
영혼의 불꽃점화
↓
산자와 죽은자간의 정신적인 교감
↓
시대를 잇는 마음의 징검다리
↓
우리 자신의 모습, 본래의 원형, 재 정신의 회복
□ 혼불의 Image
○ 색 채
- 푸 른 색 : 자연, 한, 죽음의 상징 혼의 불, 대나무의 주색조, 마을(좌청룡)의
배경 색채, 소설의 우울한 시대적 배경과 연관
- 연분홍빛 : 봄, 생명, 삶의 이상향 상징
살구나무, 각시복숭아 꽃의 주색조 마을의 주거 및 길가의 색채
소설전체의 우울한 분위기를 관동하는 삶의 역동성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끈질긴 삶의 애착과 희망
○ 소 리
- 바 람 소 리 : 혼백의 상징(단절된 과거)
- 대 나 무 : 과거와 현재를 잇게하는 매개체
- 대숲바람소리 : 무형의 혼이 혼백의 소리로 상징 유형화된 모습
죽은자의 혼이 산자에게 점화되어 이어짐
과거와 현재의 공존,
대화
■ 지명 등 탐색
□ 노봉마을 - 소설 집필지, 사실상 소설 배경지
○ 삭녕 최씨의 집성촌으로 고 최명희의 조부 및 생부 고향(근원지)
○ 종가댁(서원, 제각) 생존 할머니가 실제 작품의 효원 역할
▶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집안, 마을 이야기 ⇒ 소설 『혼불』집필의 영감
□ 마을공간구조
● 주거집합 유형 : 집산촌 ● 주거진입 방법 :
상승진입
① 원 뜸 : 종가댁, 서원, 묘, 방풍지
② 중 뜸 : 마을의 중심공간, 주거지, 동청
③ 아랫목 : 마을 입구, 바깥뜰(일부 타성촌)
※ 노적봉의 영기가 뻗어내린 발 등의 터전
→ 발아래 논을 밟고 서있는 형국
□ 그 외 마을
○ 매안(상신) : 서산 노적봉 앞터, 전주이씨 삶터, 소설지명
○ 거멍골(무산) : 민촌, 각성바지 촌락, 근심바우
○ 고리배미(인화) : 고리봉 언저리 민촌마을
○ 서도역 : 마을앞 기차역, 교통로
○ 둔덕(임실) : 전주이씨 집성촌
○ 대실(순천) : 강모의 부인 효원 친정댁(허씨 사대부)
□ 기타지명
○ 매내골 학동 오신리 : 어린강모 학교가는 길
○ 구로정 : 언덕배기 연날리기 시합하는곳
○ 청 호 : 호수호, 조개바위, 농수원지
○ 체리암 : 동구밖 갈림길어귀 지킴이 바위
○ 호성암 : 호남의 이름난 절
■ 소설 『혼불』마을 조성내역
① 소설 『혼불』마을(사매 노봉)
○ 최명희 『혼불』문학비 → 마을 입구
- 작가 고 최명희님의 유작 『혼불』과 더불어 "꽃심의 땅"으로 남은 노봉마을에
문학의 혼이 영원하기를 바라면 세운비
○ 소설 『혼불』의 주제 장승 → 마을 입구
- 소설 『혼불』배경지 마을 입구에 지킴이 역할의 장승 설치
(꽃심을 지닌땅, 아소님하 ⇒ 표기 장승)
○『혼불』마을 안내 표지 → 노봉 아래몰
- 노적봉의 영기받은 노봉마을은 꽃심의 땅으로 고 최명희 선생님께서 열일곱해
동안 투혼을 바쳐 전5부10권『혼불』을 집필하시었던 문학의 배경지 표주석 설치
○ 청호 저수지 안내판 → 노봉 원뜸
- 소설 『혼불』의 시대적 상황인 농경 사회의 근원지 표식판 게첨 안내
○ 소설 『혼불』문학의 집 → 노봉 원뜸
- 소설 『혼불』의 주인공인 청암부인의 생가
② 문학의 거리(사매 노봉~서도~사매매안)
○ 최명희『혼불』마을 기념비 → 사매면 소재지
- 소설 『혼불』의 길목에 문학의 혼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문학기념비
○ 문학의 거리 표주석, 이정표 설치
③ 문학탐방로(오리정~사매소재지~덕과율천)
○『춘향전』배경지 오리정 안내판
○『춘향전』과 『혼불』에 등재된 길목 소재
○ 3․1만세 운동 발상지 안내석
- 희망의 꽃심을 발하던 터전 소재
남원시 문화관광과 (☎ 0671-620-6547)
- 남원시 사매면사무소 (☎ 0671-620-6609)
ꡒ애달픈 기림의 이중창ꡓ
김열규│문학평론가․인제대 국문과 교수
ꡐ혼불ꡑ은 무엇보다 이제 기념비입니다.
한국적인 전통이며 그 과거, 그 위대한 자취에 바쳐진 기념비로 ꡐ혼불ꡑ은 우뚝합니다. ꡐ혼불ꡑ은 우리들 자신의 추상(追想)으로 우리들 각자의 회억(回憶)으로 은은히 불타고 있습니다. 아니 회억이며 추상에 그칠 것은 아닙니다. 당장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을 비춰낼 빛으로 ꡐ혼불ꡑ은 우리를 밝히고 있을 것입니다. 은은히 또 환하게…….
ꡐ혼불ꡑ은 크게는 ꡐ역사-민속지ꡑ적인 서사물입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한 가족사의 사건과 민속지와 그리고 자연지라는 세 가지 코드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서로 연관되면서 이룩된 서사물, 곧 ꡐ내러티브ꡑ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관습적인 소위 ꡐ소설ꡑ의 테두리를 벗어나 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사적인 사건일 수 있고 그래서 그 자체가 하나의 획기적인 서사물의 역사의 시작일 수 있는 것이 곧 우리들의 ꡐ혼불ꡑ입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역설적인 존재성이 문제될 수 있습니다. 그 전통적인 소재, 유교적인 이데올로기, 지역민속지적 기록 그리고 가문사 등이 어울려서 이 작품으로 하여금 창연한 전통의 무게를 지니게 합니다. 오래고 오래어서 되려 푸른 빛을 더할 이끼가 이 작품에 앉아 있습니다. 거기 더하여서 이야기하기의 전통성도 사뭇 고담(古談)스럽고 그래서 고담(高談)스럽습니다. 판소리 사설 읊기와도 같은가 하면 사설시조 창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또 우리들 옛 어진 이들, 그것도 삶의 구비구비를 두루 겪고 나서 거기 어울리는 식견을 갖춘 한 현로(賢老)의 이야기 풀어가기와 이야기 엮어가기를 연상시키기에 족한 서술양식이 역시 고풍스러움을 더해줍니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ꡐ민족학적 서사물ꡑ일 수 있고 아울러서 ꡐ자연서사물ꡑ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한데 역설적으로 그것으로 해서 우리들은 새로운 양식의 소설 혹은 새로운 형태의 서사물로서 ꡐ혼불ꡑ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어서 새로운 것, 고목의 눈부신 회춘 같은 것이 이 작품에는 신비하게 서려 있습니다. 이 작품을 에워싼 각종 논란은 바로 이에서 비롯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시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향해서 어제의 시간을 알려주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일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념비이기에, 바로 이 우리들의 ꡐ혼의 이야기ꡑ일 이 작품은 비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울고 있는 것, 기울어져 가고 있거나 이미 기운 것에 바치는 슬프디슬픈 노래가 곧 비가이거니와 그 슬픔이 이내 차탄(嗟歎)이 되고 또 탄성(歎聲)이 되는 것 또한 비가의 속성입니다. 애달픔으로 기리고 기려서 애달픈 노래 그것이 곧 비가라면 ꡐ혼불ꡑ은 우리가 지금 당장 잃고 있는 것, 잃어가고 있는 것에 바쳐진 진중한, 장엄한 비가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ꡐ혼불ꡑ 그 자체인 비가에 귀기울이고 그 비가를 우리들 마음 속에 메아리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잔잔한 비가에 더해서 소리 없이 노래되고 있는 또 하나의 비가가 있으니 그것은 ꡐ혼불ꡑ에 바쳐지는 우리들 각자의 비가입니다. 애달프디 애달픈 우리의 소리입니다.
한의 여러 모습들
―최명희의 『혼불』에 대하여 (1)
천 이 두
1.
최명희의 『혼불』은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등과 궤를 같이하는 이른바 대하소설의 하나로 유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이만 하더라도 미완의 상태에서 이 작가가 작고하였기 때문에 그 전체의 길이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어버렸으나 이미 활자화된 분량만 하더라도 장장 1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소설의 장소적 배경은 남원 매안이라는 농촌을 중심 무대로 하고 있으나 그 중심인물 가운데의 일부의 행동반경은 이 고장을 훨씬 벗어나 도회지로 외방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등장인물만 하더라도 누대에 걸쳐 이 고장에 터잡고 살아가는 한 향반(鄕班) 가문의 일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으나,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숱한 민촌 사람들 또한 향반의 일족들과 안팎을 이루며 마치 사진에 있어서의 양화(陽畵)와 음화(陰畵)처럼 『혼불』의 시공간 안에서 기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가 이른바 만주제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조작한 이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른바 북지사변을 일으켜 중국 내륙쪽으로 점차 침략의 마수를 뻗쳐가던 1930년대 후반, 국내적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다 팔굉일우(八宏一宇)다 하는 해괴망칙한 구호를 내걸고 창씨개명이라는 것을 한국인에게 강요함으로써 조선인의 동질성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려 하던 어려운 시기를 중심적 시간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이 작품의 중심인물이라 할 매안 이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장구한 시간이 깔려 있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대의 이야기도 수시로 현재의 시간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작품의 중심적 액션은 매안 이씨 가문의 삼대 즉 할머니 청암부인과 아들 이기채 부부와 손자 이강모․허효원 부부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하겠고 따라서 가족사소설로서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가족사소설적인 흐름은 대체로 이 소설의 초반 부분에 있어서 두드러지고 중반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이 소설은 여러 방향으로 그 흐름의 구비를 바꾼다. 그리하여 때로는 조선조의 농촌 사회를 지탱해 왔다고 할 향약(鄕約) 내지 내훈(內訓) 등에 관한 광범한 섭렵으로 벋어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민담 야사 등에 대한 인용으로, 일제하에 있어서의 항일운동사 등에 관한 진술에로, 그리고 조선시대의 걸물이라 할 유자광, 혹은 더 거슬러 올라 후삼국시대의 견훤 등의 비극적 사실에의 천착으로 작가의 관심은 다양하게 확대되어나간다.
이 소설의 서사적 진행에 있어서의 이러한 다향한 변화와 안팎을 이루어 그 문장의 흐름도 매우 다양한 변용을 보인다. 전통적인 소설 문장이라 할 묘사문이 이 소설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문장의 흐름은 수시로 주류에서 일탈하여 전통적인 소설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비소설적이라 할 여러 유형의 문장들이 수시로 얼굴을 내민다. 가령 향약이나 내훈에 관한 진술에 있어서의 서술문, 민담이나 야사 등의 진술에 있어서의 해학적인 구어, 그리고 견훤 유자광 등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진술에 있어서의 객관적 서술 등등. 근래에 탈쟝르라는 용어가 대두하고 있거니와 이 작품이야 말로 대담한 탈쟝르에 입각해 있다고 하겠다.
이런 부문에 관한 이 작가의 조사 천착은 사계의 전문가를 무색케 할 정도로 면밀한 것이어서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가령 복사꽃에 관한 것이 화제에 오른 경우 화자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삼국지』의 「도원결의」로 나아가서 『시경(詩經)』의 도화에 관한 구절에로 이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 작가의 면밀한 섭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섭렵이 이따금 지나친 천착으로 기울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혼불』은 여러가지 점에서 박경리의 『토지』와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이다. 『토지』가 개화기에서 해방까지의, 거의 1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혼불』은 일제가 대륙침략의 마수를 집요하게 뻗쳐가는 일방 내선일체라는 허위에 찬 구호 아래 우리 동포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1930년대 후반의 매우 어려웠던 한 시기를 작중의 중심적 시간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그 설정된 시간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으다. 그러나 『토지』가 경남 평사리라는 한 농촌을 주된 장소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라면 『혼불』은 전라도 남원의 매안이라는 한 폐쇄적인 농촌을 주된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데서 비슷하고, 시골의 한 토호 집안의 할머니 아버지 손녀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토지』와 마찬가지로 『혼불』 역시 매안이라는 고장에 터잡고 있는 한 향반(鄕班) 가문의 할머니(청암부인)와 아들(이기채․율촌댁) 그리고 손자(이강모․허효원)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즉 양자가 다같이 이른바 가족사소설로서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대를 거쳐 손자의 대에 이르러서는 그 주인공의 활동 무대가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만주 등지로 뻗어나가는 것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각기 뚜렷한 개성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문장의 톤온에 있어서 박경리나 최명희가 다같이 섬세한 여성적 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지극히 서정적인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경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건진행의 윤곽이 비교적 굵직굵직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식의 진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반하여 최명희의 작중현실에 있어서의 서사구조들은 중심인물들의 액션의 전개 뿐만 아니라 민담 역사 고사 고전의 패러디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특히 작품의 중심인물들이라 할 강모를 정점으로 하는 효원이나 강실 등과 관련되는 진술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 서사적 진행 속에 말려들어 있는 개개의 작중인물들의 마음의 분위기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의 최명희의 문장은 그만큼 내면화되어 있고 또 그만큼 서정적 시적 분위기가 짙다. 이런 경우의 상황 전개가 대체로 작중인물들의 내부 독백의 방법을 위주로 하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작가 최명희는 높이 평가해서 마땅하다고 하겠다.
『토지』에 설정된 시간대가 19세기 후반 무렵에서 8․15해방까지의 거의 1세기에 걸친 기간인데 반하여 『혼불』은 일제가 대륙침략에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뻗쳐가는 일방 우리에게 창씨개명이라는 치욕적인 처사를 강요하던 그러한 특정한 시점을 중심 시간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하였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불』에 있어서의 시간대는 이런 특정한 시간대에서 수시로 역사적 시점에로, 또는 민담이나 설화같은 초역사적 내지 무시간적 시간대에로 수시로 일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지』에 설정되어 있는 시간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혼불』은 청상이 되어 남의 가문에 종부(宗婦)로 들어선 할머니와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 부부 등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진술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 삼대는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거기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계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며, 그것도 여인으로서 살아야 할 한스러운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할머니 청암부인과 손자며느리 효원 두 여인의 분위기에서 그런 점을 짙게 느낄 수 있다. 청암부인의 망부(亡夫)되는 사람은 청암부인과 혼례를 치른 후 신부가 채 시댁으로 신행을 오기도 전에 돌림병으로 세상을 떴고, 따라서 청암부인은 꽃다운 젊은 나이에 애처러운 청상이 되어 시가로 이른바 `묵신행`을 와야 할 운명이었으니 그녀의 생애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시조모인 청암부인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 집 손자 며느리인 효원 또한 첫날밤부터 신랑으로부터 소박을 맞은, 박복한 미래의 운명이 예견되는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신랑인 이강모에 비하여 훨씬 짙은 비중으로 작중현실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점도 종가의 어른으로서의 무게를 완벽하게 지탱해가고 있는 청암부인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라 하겠다. 물론 시할머니 청암부인이 집안에서 행사하고 있는 바와같은 권위나 세도같은 것을 갖 시집 온 새댁인 효원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것 뿐이기는 하지만.
아들인 이기채․율촌댁 부부는 그래도 할머니인 청암부인이나 손자인 강모․효원 부부에 비하면 비교적 순탄한 생애를 살아온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채는 종가의 대를 잇기 위하여 청상으로 매안 이씨 가문에 묵신행으로 들어선 청암부인의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다. 그는 비록 양자로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종가의 장손으로서의 구실, 남편으로서의 구실 , 아버지로서의 구실 등을 그 나름으로는 하노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인 청암부인의 짙은 분위기에 늘상 가리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집안의 가계(家系) 자체가 그야말로 위태위태한 내력을 간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청암부인의 시아버지는 처복(妻福)이 아주 없는 사람이었다. 잇달아 상처를 하는 불운 가운데서 어찌어찌 소생을 두었으나 그 신랑이 혼례만 치른 후 죽어버리는 바람에 이 집안의 종부(宗婦)인 신부(청암부인)는 결국 애처러운 묵신행으로 망자가 되어버린 신랑의 집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청암부인이 범상한 여인이 아닌 기골찬 인품의 소유자임은 어린 나이에 청상이 된 그녀가 타고 오는 이른바 묵신행길의 가마를 함부로 열어보는 민촌 아낙의 방자한 소행을 두고 다부지게 닥달하는 장면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난다. 선대로부터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한 가운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녀의 능력이요, 물이 부족한 고장의 전답을 생각하여 크게 저수지를 이룩한 것도 그녀의 궁량에서 연유된 일이다. 그녀는 그야말로 능소능대(能小能大)할 줄 아는 궁량을 지녔다. 기울어지는 가운을 일으켜 세울 궁량을 가진 일방으로 아랫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후하게 베풀 줄도 아는 여인이다.
청암부인과 아주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또하나의 여인이 허효원 즉 청암부인의 손자며느리이다. 우선 효원은 여자치고는 체대도 당당하고 다부진 성품도 갖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 시할머니 못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갖 시집온 새댁인 그녀로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밖으로 드러낼 만한 위치에 아직은 놓여 있지 않아서 그렇지 이 시댁에서 일정한 연조가 쌓이고 그리하여 자신의 뜻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 자기 시할머니 못지 않을 다부짐과 넉넉한 궁량을 발휘하게 되리라는 독자의 예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효원의 사람됨은 다른 누구보다도 시할머니 청암암부인이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시할머니는 손자며느리인 효원과 같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또 `너는 나를 많이 닮았다`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청암부인의 이 말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적중한 예언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청암부인으로서는 손자며느리 효원에게서 남정네 못지 않은 궁량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동시에 평생을 청상으로 살아야 하였던 박복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손자며느리의 모습에서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첫날밤 자신의 신부 치장도 제대로 풀어주지 않은 채 신랑이 자리에 들어버리는 수모를 겪은 효원이 신랑의 소행을 두고 '내 이 자리에서 칵 고꾸라져 죽으리라. 네가 나를 어찌 보고……'라는 섬찟하기조차 한 내부 독백을 하는 데에서도 이런 점을 느낄 수 있다. 효원의 이 독백을 통해서 우리는 강모의 아내로서의 그녀의 앞날이 결코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호락호락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그녀의 당찬 오기와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면은 청상의 차림을 하고 '묵신행'을 와야 하였던 청암부인이 도중에 무례하게 가마 문을 연 민촌 여인을 야무지게 닥달한 그녀 시할머니 청암부인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시할머니 청암부인 못지 않게 손자며느리인 효원 역시 박복한 운명을 살아가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그녀와 이강모와의 예사롭지 않을 미래의 모습은 그들의 초례청에서의 불길한 조짐에서부터 예측케 하고 있다. 초례청에서 신랑 신부가 첫 술잔을 교환하는 아주아주 조심스러운 과정에서 그만 청실홍실의 실타래가 얽히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빚어졌던 것이다. 이런 불길한 조짐은 그대로 이들 부부의 첫날밤의 냉냉한 풍경으로 이어진다. 신랑 이강모는 신부 허효원에게 신부의 친정 고장인 대실에 대가 많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여 덕담이라도 하는 셈으로 대를 노래한 시조 한 수를 읊었는데, 읊고나서 아차, 실수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읊은 시조가 `아무래도 첫날밤의 덕담으로는 걸맞지 않은` 내용이라는 자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자책을 하게 되면서부터 신랑의, 신랑으로서의 행위의 흐름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첫날밤의 흐름은 꼬이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신랑 강모는 첫날밤에 신랑으로서 해야 할 바 행위의 절차에 대하여 어른들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을 느낀 그는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겨우 신부의 큰댕기까지만 풀어주고는 자리에 들고 말았고, 신부는 겹겹이 입고 걸치고 한 신부 치장들을 하나도 벗기우지 못한 채 고스라니 앉아서 앞서 인용한 바 `내 이 자리에서 칵 고꾸라져 죽으리라` 하는 당찬 독백을 하며 첫날밤을 밝히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청암부인의 며느리이자 효원의 시어머니인 율촌댁은 궁량이 자기 시어머니에 비하여 또는 자기 며느리에 비하여 멀리 미치지 못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치산(治産)을 함에 있어서나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있어서 능소능대할 줄 아는 청암부인과는 달리 아랫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으로만 비쳐져 있는 그녀 인품이 단적으로 이를 반증한다. 청암부인이 손자며느리에게 매사에 있어서 너그럽고 인자하게 대하는 데 반하여 율촌댁은 자기 며느리에게 까다롭게 군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손자며느리 효원에 대한 시할머니 청암부인의 유별난 사랑은 손자며느리 효원에게서 자기와 방불한 궁량과 아울러 당찬 오기를 보고 있는 사실에서 연유되는 것이며, 며느리 효원에 대한 시어머니 율촌댁의 미움은 자기에게는 없는데 효원에게는 있는 그 궁량과 오기에 대한 율촌댁 자신의 압박감 내지 두려움의 반동적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실지로, 시할머니의 권유와 인도로 부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달님에게 축원을 하는 이른바 흡월정(吸月精)을 하는 효원의 초인적인 인내력을 옆에서 지켜보던 시어머니 율촌댁은 자기 며느리의 그 초인적인 인내력 내지 당찬 오기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며느리에 대한 인월댁의 미움의 원인 가운데의 중요한 일부는 효원이 시집올 때 자기 친정에서 그럴 만한 땅문서 하나 가져오지 않은 사실에 대한 섭섭함에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2.
이 작품에는 할머니, 아들부부, 손자부부 등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진술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중심적 위치에 놓이는 인물은 손자며느리인 효원이라 할 것이다. 미완으로 끝나고 있는 이 작품의 현재까지의 진행만을 놓고 볼 때 효원을 정점으로 하여 빚어지는 강모와 강실 세 사람 사이의 숙명적인 얽힘, 그것이 작중의 중심적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강모와 효원의 결혼식에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하고 있고, 그들의 첫날밤에 신부의 치장을 제대로 벗기우지 못한 채 고이 간직해온 `앵혈`을 소중히 수습해야 할 `삼팔주 수건`이 무색하게 된 채 앉아서 첫날밤을 밝혀야 하는 효원의 바로 앞에서 신랑 이강모는 강실과의 `상피붙음`의 죄명으로 덕석몰림의 꿈을 꾸는 풍경이야말로 단적으로 이를 반증한다. 따라서 가족사소설로서의 구도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기야 『혼불』은 미완성의 작품이므로 작자의 전체적 구도가 어떠하였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효원과 강모의 부부로서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감은, 순탄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앞날이 아주아주 험난하리라는 예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청실홍실이 얽히는 초례청에서의 상서롭지 못한 조짐에서부터 충분히 예감케 하고 있다. 그러한 예감은 겨우 겨우 큰댕기만 풀리운 채 겹겹으로 입은 신부 치장을 고스라니 그대로 하고 뜬눈으로 첫날밤을 밝혀야 하는 그녀의 남의 아내로서의 소중한 출발점에서부터 의심할 여지 없는 현실이 되어 드러난다.
마을 여인들이 이쁘다고 탄성을 발할 정도로 어리고 고운 신랑의 눈에 비친 신부의 모습은 너무도 크고 무서운 모습이었다. 지난 날 효원의 어머니 정씨가 효원에게 `너는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처럼 그녀는 이쁘고 섬약한 신랑에 비하여 오히려 선이 굵고 다부진 데가 있는 여인이다. 흔들리는 촛불로 벽에 비쳐진 신부의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강모를 덮어누르려고 두 팔을 벌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신랑 강모에게 비친 것도 그런 데서 연유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다가갈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강모가 효원에게 다가갈 마음이 일지 않은 또하나의 이유, 또하나의 이유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정적이라 해야 할 이유는 그의 마음에 깊이깊이 자리잡은 자기 사촌누이 강실에 대한 연모의 정 때문이라 하겠다. 타성받이가 거의 살지 않은 매안이라는 폐쇄 사회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아주아주 사이좋게 지냈고 그런 사이가 사춘기를 넘어서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정으로 뻗어나간 강모의 마음 안에 신부 효원이 자리할 여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첫날밤의 신부 효원의 모습이 강모에게 마치 자기를 `덮어누르려고` 달려드는 모습으로 비친 것은 말하자면 강모의 마음 안에 완강하게 자리잡은 강실의 모습이 신부 효원을 세차게 거부한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부의 그러한 비극적인 양상은 첫날밤의 그들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 있다. 금방이라도 자기를 덮어누를 듯이 달려드는 신부의 그림자를 본 신랑 강모가 그대로 자리에 들어서 꾼 꿈은 다름아닌 강모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효원에의 완강한 거부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투사해주고 있다. 그 첫날밤에 자리에 든 신랑이 꾼 꿈은 너무나도 황당한 것이었다. 집안의 어른들한테서 자신이 덕석몰림을 당하는 꿈이었던 것이다. 자기의 사촌 누이동생 강실과 근친간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여인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첫날밤부터 소박데기가 돼야 하는 수모를 고스라니 감당해야 하는 효원, 고이고이 간직한 앵혈을 아름답게 수습해야 할 효원의 `삼팔주 수건`을 쓸모없이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효원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강모와 효원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부부로서 만날 계기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것이다. 강모는 마침내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동경으로 건너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신부인 효원에게서 전혀 여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 바 육친(강실)에 대한 연모의 정을 제대로 행위로 드러낼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궁지에 몰린 강모가 선택한 하나의 탈출구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강모의 그러한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버지나 할머니가 이를 승낙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의 동경행의 이야기가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호통이오, 할머니는 하다하다 못하여, 그러면 아들 하나만 낳고 가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천자 만손(千子 萬孫)이 집안에 모여드는 길일 즉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택일해 놓고 손자 며느리에게는 미리 흡월정(吸月精)을 시키는 것이다. `흡월정이란, 음력으로 초열흘부터 보름까지 닷새 동안 달이 만삭처럼 둥그렇게 부풀어오를 때, 갓 떠오르는 달을 맞바라보고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우주의 음기(陰氣)를 생성해 주는 달의 기운을 몸 속으로 빨아들이는 일`(1권.102쪽)이라고 화자는 진술하고 있다. 손자 며느리 효원으로서는 할머니의 분부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의 성패 여부는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절명의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시어머니 율촌댁으로 하여금 감탄의 정도를 넘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던 것이다.
종가의 대를 잇고자 하는 청암부인의 극성스러움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주선 그리고 그러한 시할머니의 분부에 초인적인 노력으로써 순종하는 손자며느리 효원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난 날의 한국 여인의 한 전형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은 전날의 한국 여인으로서의 한(恨) 의 모습이기도 하다.
청암부인의 극성스럽고도 간절한 소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총각의 몸으로 죽은 강모의 집안 형인 강수의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하여 역시 처녀귀신으로 이승의 산야를 떠돌아 다니는 외로운 혼백을 찾아 짝을 지어주는 이른바 명혼(冥婚)굿이 진행되는 날 밤 강모는 강실을 만나게 되고, 그 애처러운 명혼굿이 절정을 치닫는 순간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 도 한 듯 강모의 마음 속에 줄곧 소용돌이치던 타부의 봇물이 마침내 터지고 만다. 강실에 대한 누를 길 없는 연모의 정이 봇물 터지듯한 뜨거운 흐름이 되어 마침내 그녀를 풀밭에 쓸어뜨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이 뜨거운 흐름이 휩쓸고 간 뒤 타부를 범한 그 앞에는 깜깜한 절망이 밀어닥친다. 그런 말할 수 없는 절망감 가운데서 그는 충동적으로 효원을 또한 쓸어뜨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패륜의 둑이 터지면서 강모의 젊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격류가 되어 효원을 아울러 덮쳤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그렇게 하여 할머니 청암부인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효원은 이내 회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강모는 집에서, 그리고 줄곧 자기를 `덮어누를 듯한` 무게로 다가서던 효원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간 이후의 강모의 행위는 그야말로 항로를 잃은 조각배처럼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의 방탕, 가련한 화류계 여성인 오유끼와의 만남, 직장에서의 공금횡령, 거기에서의 파면 등등의 어지러운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사회주의자인 사촌형 강태를 따라 방랑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3.
작중현실에 있어서 효원의 모습이 굵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데 비하여 강실의 모습은 지극히 희미하고 섬약한 모습으로 비친다. 강모와 효원과의 액션은 설사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 하여도 예외없이 굵고 선명하게 그 윤곽이 드러나는 데 반하여 강모와 강실 사이의 액션은 반대로 설사 밝은 대낮에 진행되는 경우라 해도그런 경우란 거의 없기도 하지만거의 예외없이 그 윤곽이 지극히 희미하고도 은밀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모의 의식을 근원적으로 휘어잡고 있는 것은 `덮어누를 듯한` 무게로 다가드는 효원쪽이 아니라 달빛과도 같이 약하고 은은한 강실쪽이다. 강모와 강실과의 액션의 진행이 대개의 경우 어둠 아니면 달밤과의 관련 속에서 아주아주 희미하고도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모와 강실 사이에는 사실은 이렇다 할 액션의 진행이 없다. 특히 어른이 된 이후의 그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모의 의식이 온통 강실에게 쏠려 있는 것은 강실로써 표상되는 어둠의 의식이 밝음의 의식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강실은 강모에게 있어서는 말하자면 자기 리비도의 표적인 셈이다. 이 점에서 자기 리비도를 제어하기에는 강모 자신이 이쁘기만 하였지 너무나도 대가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강모의 이런 약한 면은 직장에서의 공금회령, 오유끼와의 혼외의 관계 등에서도 드러난다. 매안의 고향을 떠난 이후의 강모의 행위의 흐름은 그야말로 방황 그것이다. 동시에 그의 행위의 궤적은 대체로 효원의 그것에 비하여 충분한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강모 뿐만 아니라 『혼불』의 세계에 있어서의 남성들은 대체로 여성들에 비하여 설득력이 약하게 그려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 역시 박경리의 『토지』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의 중심적 흐름은 역시 여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한스러움에 대한 천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흡월정(吸月精)에 관한 작자의 진술을 인용한 바 있거니와, `우주의 음기(陰氣)를 빨아들인다`는 흡월정이야 말로 이 작품의 중심축이라 할 것이다. 우주의 음기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기운, 생산의 힘 등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흡월정을 한 효원이 잉태하게 된 것도 이 『혼불』의 현실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그 흡월정이 `양반 아들` 하나만 얻고자 하는 머슴 춘복의 간절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도 흡월정의 다산에의 상징성을 잘 표상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미완으로 끝난 『혼불』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확인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이 흡월정의 모티프와 안 팎을 이루는 것이 혼불을 마시는 행위이다. 『혼불』의 세계 안에서 흡월정이 소중한 모티프로서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현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혼불의 모티프 역시 여러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현현되고 있다. 특히 혼불의 주인인 청암부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효원에 있어서 이는 절실한 문제로 표상되고 있다.
효원은 언제까지나 마당에 선 채로 빈 하늘을 우러른다.
저 총총한 별들의 그 어떤 별빛이, 금방이라도 가던 걸음을 먼추고는 뒤돌아보며
`아가`
하고 그네를 불러줄 것인가.
효원은 사라지는 불꼬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을 조이며 숨을 죽인다.
마치 흡월정을 하던 때와도 같은 무서운 정성으로 그네는 청암부인의 혼불을 빨아들인다. 한번 들이마신 그 기운이 행여 새어 나갈까 하여 그네는 죽은 듯이 고요히 숨을 참는다.
드디어 그네의 온몸에, 실핏줄의 끄트머리에까지 청암부인의 넋이 파도 물마루보다 아찔하고 아득한 기운으로 차오르며, 그네는 숨이 가빠져, 그만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고 만다.
이제 그네가 청암부인을 낳을 것이다. (3권102쪽)
할머니의 혼불을 본 효원은 달의 정기를 빨아들일 때와같은 `무서운 정성`으로 그 혼불을 들이 마신다. 그리하여 효원은 `할머님 가신 생애를, 내 또 그대로 살게 될 것이다.`라고 독백한다. 그 독백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화자는 `이제 그네는 청암부인을 낳을 것이다.`라고 진술한다. 말하자면 손자며느리 허효원은 이제야 매안 이씨 가문의 실질상의 최고 권력자인 `종부`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흡월정의 장면이 남의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온 효원에 있어서 그 가문의 대를 이어주어야 할 간절한 소원의 표상인 것처럼 이 혼불을 빨아들이는 행위 역시 가문의 종부(宗婦)인 효원으로서 가문을 굳건히 간수해 나가야 할 종부로서의 간절한 소망의 표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기울어져가는 한 가문의 종부로 들어선, 그것도 소복한 모습의 묵신행으로 들어선 청암부인이 마침내 기울어져가는 가운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처럼 이제 종가의 종부로 들어선 효원 또한 종부로 살아가야 할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시할머니의 혼불을 들이마심으로써 그녀의 모든 자질을 남김없이 이어받자는 것이다. `이제 그네가 청암부인을 낳을 것이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남의 가문의 종부로 들어선 청암부인이 마침내 가문을 일으켰던 바 그 탁월한 종부로서의 궁량을 이제 또하나의 종부로 들어선 효원이 능히 계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장면에 표상되어 있는 바 청암부인에서 그 손자며느리인 효원에 이르는 흐름에서 우리는 지난 날의 향반 가문의 여인으로서 겪어야 할 고초 그리고 종부로서 겪어야 할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며 아울러 지난 날의 우리 여인들의 삶의 모습이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 여인들의 모습이야 말로 오래도록 우리의 폐쇄적인 유교 사회를 지탱해온 요인 가운데의 가장 소중한 요인의 하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유교사회는 이러한 여인들의 눈물과 한숨을 제물로 하여 지탱해온 것이라 할 수조차 있다.
이 점에서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한, 그래서 그 절행을 기리어 열녀비까지 세우게 된 청암부인의 시조모의 모습, 소박을 맞고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 평생을 베틀 위에서 보내야 하였던 인월댁의 모습 또한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였던 지난 날의 우리 여인들의 모습 중의 전형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강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 『혼불』의 세계 안에서는 특수한 예외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실의 문제는 일단 시대를 넘어선 인륜의 문제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현실의 조건, 나아가서 당대 현실의 조건은 역시 그녀의 비극적인 사태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 문제는 작중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바 당대의 현실적 조건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의 당사자인 강모나 강실이 다같이 외부세계와 단절되다시피 한 폐쇄사회에 살고 있다는 조건이 비극적 사태의 결정적인 유인이 되고 있음을 작자는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보면 `사촌 남매간은 가장 위험스런 친척`이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는 모양이거니와, 『혼불』의 폐쇄 공간 안에 있어서의 사촌간이야말로 가장 위험스런 친척인 것이다. 그 예로서 강모와 강실 사이의 치명적인 행위가 역시 같은 집안 간의 사촌 끼리인 강수․진예의 치명적인 행위와 상호 투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강모․강실의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강수의 명혼(冥婚)굿이 진행되는 으스름 달빛 아래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저질러진 일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비극적인 행위의 결과를 결정적인 십자가로 감당해야 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남자인 강모보다는 여자인 강실인 것이다. 물론 미완으로 끝난 이 작품에 있어서 이 두 남녀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를 예측할 수는 없게 되고 말았지만.
요컨대 『혼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반촌의 여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두가 이런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최명희는 이런 여인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애처롭고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4.
작가 최명희는 다른 한편으로 이런 여인들의 삶의 모습을 동시대의 민촌 사람들의 대화를 통하여 투사시키고 있다. 이리하여 『혼불』의 작중현실에 있어서의 반촌 사람들의 삶은 수시로 민촌 사람들의 시선에 의하여 점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이 옹구네와 춘복이다. 옹구네와 춘복은 매안 이씨가 터잡고 살아가는 이 마을의 비판자이자 반역자이다. 작가 최명희는 이 고장 반촌 여인들의 삶의 모습을 다만 아름다운 것으로만 미화하지 아니하고 옹구네나 춘복같은 민촌 사람들의 중구난방의 푸념이나 신세타령을 통하여 이제껏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되어 온 바 열녀비의 주인공이나 독수공방의 오랜 나날을 베틀 위에서 보낸 인월댁 혹은 민촌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군림하여온 청암부인 등의 소행을, 그들 반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독자에게 열어주고 있다.
가령 청암부인이 소복 차림으로 묵신행 왔을 당시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을 때 `어른을 뫼시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입이 무거야 하고 부지런하면서도 눈치없이 촐랑대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손아랫 사람을 훈계하는 안서방네와는 대조적으로 옹구네는 `그께잇 가마 뚜껑 좀 열어봤다고 그렇게까지 헐 거 머 있당가? 하도 요상허게 뀌민 가매라 지내감서 한번 디리다 봤을티제잉` 라고, 오히려 신행 오는 도중에 가마 문을 열어본 민촌 아낙을 닥달한 청암부인의 소행을 두고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동구에 서 있는 열녀비만 보아도 옹구네는 울컥 아니꼬운 심정이 드느 것이다. 그러기에 언젠가 자기 남편의 제사를 지내다가 음복주를 마시고는 그 열녀비의 주인공에 대하여 이렇게 넉두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허엉 열녀? 니가 멋으로 열녀를 했능가는 모르것다마느은, 너도 참말로 불쌍헌 헛세상을 살다가 갔다. 인생이 한번 왔다가 죽고 말먼 그것 뿐인디 어디 눈에 맞는 머심 등짝에라도 엡혀서 밤도망을 갔으먼 또 말도 않겄다. 속절없이 죽어간 것은 누구 보라고 헌 짓이냐고오. ……그게 무신 지랄이냐.`(1권281쪽)
취충에 넉두리하듯이 지껄이는 옹구네의 이러한 발언은 분명 청암부인이나 그 전후의 여인들의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발상에서 연유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작가 최명희는 청암부인 그리고 효원을 중심축으로 하는 조선 여인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나가면서 다른 일방 그들을 비판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그들과는 전혀 발상을 달리하는 시선을 예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조선조적인 여인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은 옹구네 못지 않게 당대 현실에 대하여 불평이 많은 춘복의 안목을 통해서토 표출되고 있다. 가령 어떤 놈은 죽어라고 일만 하고, 어떤 어떤 사람은 편안히 놀고 지내도 부자니 뭔 놈의 세상이 이런다냐고 투덜대는 춘복에게, 씨가 다르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공배가 응수하자,
`씨? 씨가 머이간디? 일월성신이 한 자리 뫼야 앉아서 콩 개리고 팥 개리디끼 너는 양반 종자, 너는 쌍놈 종자, 소쿠리다가 갈라 놓간디? …… 사람이 이리 저리 갈라 놓고는 양반은 양반 노릇 허고, 쌍놈은 쎄가 빠지고 안 그러요? 그게 머언 씨 탓이라요?`(1권113쪽)
라고 하며 공배에게 대든다. 공배의 입장이 당대 현실의 관행에 순응하려는 입장이라면 춘복의 입장은 다분히 비판적이요 반항적이라 할 것이다.
당대 현실에 대한 춘복의 불만은 반항적인 행위에로 나아간다. 그것은 자신도 양반의 자식을 낳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고 그러한 소망은 결국 저주의 씨를 잉태한 강실에의 당돌한 행위에로 내닫게 된다. 시할머니 청암부인의 주선으로 효원이 흡월정을 한 바 있거니와 춘복 또한 흡월정을 하는 것이다. 양반 아들을 하나만 낳게 해달라는, 그래서 자신의 상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의 흡월정 말이다. 그가 강실을 범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염원에서 연유된 행위이다. 상놈으로 태어난 춘복의 한은 한편으로는 양반에 대한 반항적 의식을 품게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 그 상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갖게 되고 그러한 염원의 구체적 행위로서 양반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이다. 서출인 유자광의 이야기가 『혼불』의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문맥에서 연유되는 것이다.
한편 무당 백단이 부부가 새로 마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암부인의 묘소를 뚫고 그곳에자기 시아비의 백골을 투장시기는 행위 역시 춘복이 강실을 범한 행위와 맥을 같이 하는 소행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슬이 퍼런 향반 가문의 묘소를 뚫고 그 밑에 자기 아비의 백골을 투장하는 일은 화자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시퍼렇게 서 있는 양반의 생옆구리를 따고 그 속에다 제 창자를 우겨넣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5권321쪽) 그러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춘복이 강실을 범하는 행위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나게 당돌한 행위인 것이다.
요컨대 『혼불』의 세계에는 매안 이씨 일문의 여러가지 삶의 모습이 펼쳐지는 일방 그들의 삶을 선망과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민촌 내지 하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펴쳐진다. 매안 이씨 일문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청암부인에서 효원에 이르는 여인의 흐름이 조선 여인들의 애절한 한의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의 삶의 모습을 뒷전에서 비판하고 냉소하는 옹구네나 춘복의 당돌한 언행에서 혹은 양반 가문의 묘소에 자기 조상의 백골을 투장함으로써 자기들도 천민의 굴레에서 벗아나고자 하는 백단이 부부 등은 또한 그들나름의 한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비극적인 영웅인 견훤, 유자광 등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혼불』의 서사공간은 대하처럼 흘러간다. 그러한 흐름이 소설문학으로서의 종착점에 이르기 전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애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 이런 소설이 있게 된 것도 하나의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은 당연하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흐름 자체가 당초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까운 나이에 오직 이 『혼불』하나만의 완성을 위하여 모든 행복같은 것을 다 희생하고 매달려온 필생의 일을 채 마무리짓기도 전에 그야말로 혼불처럼 스러져간 최명희의 영혼을 조상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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