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시 준비해야지
삼십여 년 전 서귀포지역 중학교로 출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제주시 버스터미널에서 서귀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비를 요금통에 넣으려는데 운전기사가 손으로 요금통 입구를 막으며 그냥 타라고 한다. 의아한 눈으로 기사님을 쳐다봤다.
“저 모르시겠어요?”
전혀 기억이 안 난다.
“……”
때마침 운전기사 뒷좌석이 비어 있어서 앉았다.
“동려야간학교 졸업한 은수입니다.”
“김은수?”
오래된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은수를 만난 것은 1980년 봄 동려야간학교에서이다.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정규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을 모집하여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비정규학교였다. 당시 제주도 내 각 대학에는 교육봉사 동아리 동려회(同旅會)가 조직되어 있었고, 뜻있는 대학생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야간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나도 동려회원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야간학교의 교훈이 ‘태양이 아니면 호롱불이라도 되자’이다.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이 될 수 없다면 한 사람의 밤길이라도 비추어주는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은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고물 수집하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밤에 동려야간학교에 다녔다. 키도 자그마하고 체격이 왜소해 항상 눈이 가던 학생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기죽지 않고 밝게 수업받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수가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되면서도 각 대학이 중간고사 기간이라 시험 준비에 바쁜 선생님들도 은수에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고물 줍는 일을 하는 할아버지를 도와드리느라 가끔 학교를 안 나온 적이, 며칠 있으면 학교에 나올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일주일이 지나도 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수네가 세 들어 사는 집에 찾아갔다. 한쪽 다리를 다쳐서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손자의 소재를 물어보았으나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라며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서둘러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하고 은수와 친한 친구들을 대동하여 갈 만한 곳을 수소문했으나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더 찾아다녔으나 헛수고였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고 동려야간학교 아이들과 새 학기를 기약하며 겨울방학을 맞았다. 은수가 할아버지 곁으로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으며 걱정을 점점 지워버렸다.
당시 동려야간학교는 관덕정 옆 제주시청에서 사용하던 창고를 빌려서 운영하였다. 노후 한 창고라서 지붕에서 비가 새고 허름한 창문으로는 비바람이 들이쳐 교실 바닥이 물바다를 이루는 게 다반사였다. 우리 동려회 회원들은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 지붕과 창틀을 보수하느라 며칠째 매달리고 있었다. 철거하는 집을 찾아다니며 지붕을 덮을 기와를 구하고, 창틀과 창문은 발품을 팔아 중고품 가게에서 싼 가격으로 매입해서 재활용했다.
그렇게 동려야간학교 보수작업이 끝날 무렵에 은수가 할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나타났다.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며 고물을 줍다가 쓸만한 책장과 책상이 발견되어 손수레로 운반해 온 것이다.
“학교에 필요할 것 같아서….”
할아버지는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은수가 도와줘서 손수레를 쉽게 끌고 왔다고 손자를 치켜세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처분을 기다리는 은수를 보니 반가움보다 서운한 감정이 앞섰다. 그동안 야간학교 선생님들은 은수네 사정을 잘 아는 터라, 불우이웃돕기 물품이 답지하면 가장 먼저 챙겼고, 신문이나 폐지가 생기면 할아버지께 가져다드렸다.
얄밉기도 하고 야속한 마음이 생겨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 무심한 듯 한마디 했다.
“은수야! 개학하면 학교에 나와 검정고시 준비해야지.”
울음을 참고 있는 눈을 보았다. 눈물이 고였으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서글픈 눈망울 속에 어떤 다짐을 보았다.
봄학기가 되니 은수가 확 달라졌다. 말이 없어지고 매사에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지각이나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하는 농담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한번 책상 앞에 앉으면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버린 듯 좀처럼 일어설 줄을 몰랐다. 눈빛에는 비장함이 묻어났다. 공부하다가 코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은수는 그해 오월에 치러진 중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했고, 이어 공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학비도 만만치 않았다. 아픈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어서 학비를 감당할 처지가 안되었다. 동려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다.
은수는 서귀포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할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자 계속 학업을 이어 갈 형편이 못 되어서 자퇴하고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했다. 그 후 신문 배달을 일 년 정도 하고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관광안내 가이드 자격을 취득했다. 졸업하고 중장비 가사 자격증과 대형운전면허증도 취득하였다.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버스회사에 근무하던 아내를 만났고, 귀여운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해서 몇 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게 되면 나한테 연락하겠다고도 했다. 지금 너무나 즐겁게 일하고 있으며 행복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엿한 가장 역할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한번 찾아뵙지도 못하고….”
“검정고시 준비해야지.”라고 한마디 해주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반듯하게 살고 있습니다.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의 말을 몇십 년 동안 새기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쉽게 말을 내뱉은 적도 수없이 많았을 텐데 새삼 나의 말버릇을 되돌아보게 된다. 술김에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습관, 말해 놓고 금방 후회하는 차가운 말, 마음과 다른 건조한 말버릇, 정리되지 못하고 마무리되는 말, 웃음을 준다고 말했는데 아재 개그가 되고, 공감시킬 줄 모르고 설득하려는 버릇….
한마디 말의 온도는 얼마나 될까.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들 때 친구와 말을 주고받으며 고민을 털기도 하고,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건네는 한 줄의 언어로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이렇듯 언어가 가진 온도로 한순간 마음을 꽁꽁 얼리게도 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기도 한다.
“선생님 이번 주 토요일은 비번이라 쉽니다. 저녁에 연동 맛집 **네 숯불갈비로 오세요.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그래, 그때는 오늘 못다 한 말 밤새도록 해보자.” (2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