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처사 조공 행장(處士趙公行狀)
구봉처사(九峰處士) 조명은(趙鳴殷) 공은 자가 여형(汝衡)이니 양주(楊州) 사람이다. 일찍이 속리산(俗離山) 구병봉(九屛峰) 아래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구봉(九峰)이라고 호를 지었다. 그 시조 잠(岑)은 고려(高麗) 때 판원사를 지냈다. 국초의 영중추부사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이 크게 현달하였는데, 문강공의 아들은 관찰사 근(瑾)이고 손자는 정언 중휘(仲輝)이니 공의 8대조와 7대조이다.
조부 휘 상우(相禹)는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호가 시암(時菴)이며, 부친 휘 이후(爾後)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2대가 경학(經學)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났다. 동추공(同樞公)은 두 번 장가들었으니,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원주 원씨(原州元氏)이다. 공은 원씨 소생이니, 운곡(耘谷) 천석(天錫)의 후손 휘 희일(煕一)이 외조부이다.
공은 숭정(崇禎) 계묘년(癸卯年, 1663, 현종 4)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자질이 있었고 장난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면 걱정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남들이 효동(孝童)이라고 하였다.
동추공은 90세의 나이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공은 평소 생활할 적에 그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덕성과 도량이 일찍 이루어져 남들과 크게 달랐다. 중간에 부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윤증(尹拯)이 율곡(栗谷) 선생을 비방하고 무고했을 때 공이 동학 장의(東學掌議)로서 논의를 내세워 팔도에 통문(通文)을 돌렸는데, 그 사의(辭義)가 엄정하였다. 우암(尤菴) 선생이 그 글을 읽고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시암공(時菴公)이 훌륭한 손자를 두었구나.”
하였다.
이로 인해 어전정거(御前停擧)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풀려났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세상의 화란 이후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오직 실학(實學)에 잠심하여 날마다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읽어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얼마 뒤 동추공과 원부인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공은 더욱 출사할 뜻이 없어졌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에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가솔을 모두 데리고 구병산(九屛峰)에 들어가, 두건을 쓰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서 산골짜기를 배회하였다. 평소 거문고를 좋아하여 흥이 오르면 간혹 몇 곡조를 연주하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었다.
사대부들이 공의 지절(志節)을 존경하여 종유하는 자가 날마다 늘어났는데, 공이 그때마다 못마땅해 하며 말하기를,
“남들이 나를 은자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마침내 병을 핑계로 연기(燕歧)로 옮겨 살았다.
얼마 되지 않아 연기 사람이 공의 지극한 행실을 들어 관찰사에게 아뢰고, 관찰사가 조정에 아뢰었다. 공은 일찍이 여러 번 천거되었는데 이때에 또 관직을 제수하는 명이 내려오자, 공은 더욱 편안하지 않아 거처를 옮겨 아산(牙山)으로 갔다. 공은 산야를 정처 없이 떠돌아 한곳에 몇 년 동안 머문 적이 없었으나, 가는 곳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공의 덕의(德義)를 흠모하여 공이 떠나면 추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임자년(壬子年, 1732, 영조 8) 윤5월 16일에 아산(牙山)의 옥암(玉巖)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이 위독할 때도 부축을 받고 가묘(家廟)를 알현하였으며, 집안사람들과 영결할 때는 평소처럼 태연하였다. 당시 큰 가뭄이 들었기에 몇 번이고 비가 내리냐고 물어보았는데, 갑자기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퍼붓는 듯이 큰비가 내렸다.
공이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침소에 들어 세상을 떠나니 비도 갑자기 그쳐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동현(同縣) 부황동(扶皇洞) 임좌(壬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천성이 침착하고 도타우며 기미가 참되고 순수하여 바라보면 세속의 뜻이 없으니 학문에 독실한 군자임을 알 수 있다.
공의 행실은 효제(孝悌)에 근본하였다. 부모님을 섬길 적에는 곁에서 부지런히 봉양하여 한 가지 일도 남에게 시키지 않았으니 직접 불을 때어 부모님이 거처하시는 방의 온도를 알맞게 해드렸다. 병이 들면 밤에도 옷의 띠를 풀지 않았고 한데 서서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또 거상(居喪)을 잘 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죽을 먹고 소상(小祥)을 지낸 다음에 채과(菜果)를 먹어 한결같이 옛날의 예법대로 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돌아가셨을 때는 달마다 해마다 올리는 제수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 큰형과는 우애가 지극하여 맛난 음식 하나라도 먼저 먹지 않고 물건 하나라도 따로 챙기는 일이 없이 한 집에 거처하면서 형을 공경함에 태만한 적이 없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수를 모친처럼 대우하여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만나 뵙고, 뵐 때면 계집종에게 시립(侍立)하게 하였다. 종사(宗祀)를 대리하여 맡았으나 일을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형수에게 여쭙고 허락을 받은 뒤에 시행하였다.
종친들에게 후덕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집안사람끼리 화목하지 않음은 곧 선조를 잊은 것이다.”
하였다.
벗들과 교제할 적에는 출입에 반드시 일어나 예를 다하였으며 종신토록 정의(情義)가 도타워 호들갑스럽게 관계를 맺는 일이 없었다. 가법이 매우 엄격하여 동복(僮僕)들이 감히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였다. 허름한 집은 휑하니 서적들만 가득하고 꼿꼿이 정결하게 앉아있으니 지나가는 자가 아무도 살지 않는 듯이 여겼다.
가산(家産)이 쇠락하여 변변찮은 식량도 자주 떨어졌는데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어떤 이가 이를 두고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말하면 그때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안빈낙도에 일부러 뜻을 둔다면 이른바 안빈낙도라는 것도 거짓이다.”
하였다.
독서는 완색(玩索)을 위주로 하였으니 온종일 말을 안 하기도 하였고 한밤중에 잠을 안 자기도 하였다. 마음에 들어맞는 부분을 만나면 낭랑하게 외우고 읊조려 그 취지(趣旨)를 지극히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은 고원함에 있지 않고 다만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데 있으니, 만약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면 공부를 착수할 곳이 없게 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현(聖賢)의 도(道)는 서적에 환하게 실려 있으니 배우는 자는 다만 그것을 체인(體認)하여 힘써 행해야 한다. 그 외 외물(外物)은 모두 자기의 본분과 관계가 없다.”
하였다.
또 자식들에게 경계하기를,
“‘시서(詩書)는 가문에 전해온 유업이고 청백(淸白)은 집안 대대로 전해온 것이네〔詩書遺業, 淸白傳家〕’라는 두 송 선생(宋先生)의 친필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가법이니 너희들은 응당 여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을 찾아와 수학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다만 하학(下學)의 차례대로 가르쳤으니 여기서 공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방도를 알 수 있다. 공은 또 말하기를,
“노년이 되어 독서하니 이제야 의리(義理)의 무궁함을 알게 되었다. 살날이 많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였다.
또 주자(朱子)가 지은〈재거감흥(齋居感興)〉시의 남긴 뜻을 본받아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서술하였으니 공과 같은 이는 늙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공의 학문은 한결같이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마음을 세웠으니, 원수를 피하듯 명예를 꺼리고 사탕수수를 먹듯 선(善)을 좋아하여 묵묵히 스스로를 닦아 안으로만 온축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 공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자기의 천성을 온전히 하여 자기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했을 뿐이었으니,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무엇을 따지겠는가. 공의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좌랑 두룡(斗龍)의 딸로 자애롭고 화순하여 군자의 배필로 어긋남이 없었다. 공보다 3개월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1세로 공과 합장하였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문빈(文彬)은 약관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차남 덕언(德彥)도 요절하였으며 막내 영언(英彥)은 진사에 합격하였다. 딸들은 각각 진사 홍찬기(洪燦箕), 사인 최상언(崔尙彥), 이의저(李義著), 이장진(李長鎭)의 아내가 되었다. 영언(英彥)의 세 아들은 완경(完慶), 최경(最慶), 인경(寅慶)이다. 외손은 약간 명이다.
나는 공의 진실한 덕을 심복하지만 본래 글솜씨가 없어서 공의 감추어진 덕을 만분의 일도 드러낼 길이 없기에 다만 언행의 대체만을 모아놓아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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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처사 조공 행장 :
저자가 조명은(趙鳴殷, 1663~1732)을 위해 쓴 행장이다.
[주02] 윤증(尹拯)이 …… 때 :
윤증이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강화도 행적을 해명하면서 말하기를 “이제 강도(江都)의 일로써 선인(先人)을 헐뜯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율곡(栗谷)의 이망색비(以妄塞悲) 상소를 가리켜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율곡은 참
으로 산에 들어갔던 과실이 있었지만, 선인에게는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라고 하여 율곡이 젊은 시절 불도(佛徒)가 된
것을 비방하였다.
[주03] 시서(詩書)는 …… 있다 :
송준길(宋浚吉)이 조명은(趙鳴殷)의 막내삼촌 조이병(趙爾炳)에게 친필로 “시서(詩書)는 가문에 전해온 유업이고 청백(淸白)은
집안 대대로 전해온 것이네.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보살피고 나라를 집안일처럼 걱정하네.[詩書遺業, 淸白傳家. 視民如傷, 憂國如
家.]”라고 써서 준 일이 있다. 《宋子大全 卷210 掌令趙公行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