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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길지만 동두천 두레 수도원 김진홍 목사님의 북한 방문 사역기를 실어봅니다. 직접 북한에 가서 농장을 경영했던 경험과 북한을 향한 비전이 실감납니다. 머잖아 북한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그분의 소망이 속히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김진홍 목사의 북한 방문 사역기’ 아침 묵상 7편.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1)
말씀 : 에스겔 37장 15절~17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위의 말씀은 나의 삶을 이끌어 준 말씀들 중의 하나입니다. 다름 아닌 통일의 비전입니다. 통일이 다른 사람 아닌 영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그의 아들 대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 이후 둘은 서로 다투며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과 북의 통일은 그들이 직면한 민족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민족의 지상 과제인 통일의 문제가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의 환상을 통하여 먼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북한의 막대기와 남한의 막대기가 먼저 교회를 통하여 성취되어지는 비전을 봅니다. 특히 1990년대에 북한의 굶주림이 극심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동포들이 날로 늘어난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정이 어떤지를 직접 가서 보고 싶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마침 미국에 간 길에 뉴욕으로 가서 북한 유엔 대표부를 찾아 갔습니다. 대표부에 가서 남조선 농촌에서 일하고 있는 목사인데 북한 농촌과 농민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여 북한을 방문하기를 원한다, 가능하다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 하였습니다.
나의 신상 명세를 자세히 묻더니 한 달 뒤에 오라 하였습니다. 아마 한 달간 나의 성분을 조사하려는 기간이겠거니 여기고 한 달 뒤에 다시 갔더니 나를 반색을 하면서 〈조국에서 김 동지의 래방을 적극 환영합네다〉 하며 초청장을 주었습니다. 귀국 후 국정원의 내 담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수속 절차를 거처 평양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평양에 도착하여 모란봉 산 중턱에 있는 고려호텔에 방을 정하고 짜 놓은 일정을 따라 일주일 가까이 보냈습니다. 날마다 일정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한 곳들만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첫 방문이라 아무 말 없이 따랐습니다.
3일째 되는 날 고위층과 만찬을 나누는 내게 물었습니다. 〈김 선생께서 조국을 왜 도우시려 합네까?〉 나는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일러 주었습니다.
〈몇 해 전 남한이 큰물 피해를 당하여 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북한에서 쌀과 옷감을 보내 주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그때 보내 준 쌀로 밥을 지어 함께 먹으면서 고마운 마음에 마을 잔치를 열어 함께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밥이 웬 밥이냐. 북녘 동포들이 보내준 쌀로 지은 밥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먹자. 앞으로 북녘 동포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우리가 도와주자" 하며 먹었다. 들으니 지금은 북한이 어렵다 하니 이번엔 우리가 도우려 한다.〉 이렇게 차근차근 일러 주었더니 그들의 마음에 닿는 듯 하였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2)
〈김 선생께서 조국에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네까?〉 하기에 2 가지를 제안하였습니다.
첫째는 고아들을 돕고 싶습니다. 둘째는 농촌에서 두레마을이란 농장을 경영하고 있으니 평양과 묘향산 가까운 곳에 두레농장을 세워 남한의 농업 기술과 종자, 농기구 등을 들여와 북한에 도움 되는 시범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다음 날 다시 만나 논의를 계속하자기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식사를 마쳤습니다. 자신들이 결정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짐작이 갔습니다. 내가 시범 농장으로 평양과 묘향산 사이 어느 곳을 말한 것은 일정 중에 묘향산에 세워진 김일성 기념관을 시찰하러 가는 도중에 도로 양편에 있는 산들을 둘러보고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승용차로 2 시간 가까이 달렸는데 양편 산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즐비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정 차를 세워 달라 하여 소변보는 시늉을 하며 산들을 살폈습니다. 어쩜 그렇게 산 전체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그렇게 헐벗은 산 아래 이삼십 세대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농가들이 마치 헛간같이 볼품없는 집들이었습니다. 그런 농촌에 한 마을을 세워 시범 마을을 세우고픈 마음이 솟았기에 그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다음 날 만났을 때에 고아원 돕기로는 혁명 열사들의 자녀들을 위해 세워진〈○○특별고아원〉을 지원하여 주면 좋겠고 시범 농장 건은 평양 부근은 아직은 이르고 첫 시작은 함경도의 나진·선봉 지역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답하기를 〈○○특별고아원〉은 보아하니 특수한 고아원 같은데 그런 곳 말고 변두리에 있는 가난한 고아원을 정해 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범 농장 건은 우선 변두리에서 시작하여 서로 신뢰를 쌓아가면서 평양 부근으로 옮겨 오자는 안이 이해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떠나기 전에 함경도 변두리 지역의 나진·선봉 지역에서 고아원 운영과 시범 농장을 설립, 운영키로 합의하였습니다. 출발하기 전날 담당에게 한 가지 요청하였습니다.
평양시 변두리에 있는 농촌 마을 한 곳을 방문하게 해 달라 하였습니다. 그가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기에 내가 어렵사리 평양까지 왔는데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는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일단 상부에 건의는 해 봐 달라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 (3)
다음 날 아침 보안사령부 소속의 나의 담당이 웃음 띤 얼굴로 나에게 〈김 선생, 허가가 났습니다. 오늘 농촌 마을로 모시겠습니다〉 하기에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평양 시가지를 벗어나 농촌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목적지에 이르기 전 마을 몇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을들을 지나며 유별나게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중간쯤에 군인이 총을 매고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담당에게 물었습니다. 〈농촌 마을마다 왜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나요?〉 그랬더니 그가 퉁명스레 답하였습니다. 〈김 선생,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라요.〉
하기에 나는 더 궁금증이 일어나 〈신경 좀 씁시다. 군인이 전선을 지켜야지 농촌 마을을 왜 지키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을에 이르렀더니 마침 옥수수를 심는 날이었습니다. 옥수수를 벼처럼 모판에서 길러 한 포기, 한 포기씩 심고 있었습니다.
내가 마을 대표에게 묻기를 〈옥수수를 그렇게 한 포기씩 심으면 노력에 비하여 수확이 너무 낮을 텐데요〉 하였더니 마을 대표인 분이 내 얼굴을 보지 아니하고 담당 얼굴을 보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가을 추수철에 나진·선봉으로 들어가는 길에 보니 옥수수 밭마다 군인이 총을 들고 옥수수 밭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을마다 집단 농장을 이루어 농사를 짓는데 농사가 끝나면 모두 정부에 바치고 정부에서 배급 주는 식량으로 살아가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배급량이 점차 줄어들게 되니 자신들이 농사지은 밭에 몰래 들어가 따 가는 모습을 보며 슬펐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남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인데 그릇된 체제 아래 사는 탓에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에 슬펐습니다.
평양에서 내가 머무는 호텔인 고려호텔 2층에는 서점이 있습니다. 나는 갈 때마다 서점에 들러 새로 출간된 책들을 구입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책이 〈김일성 동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란 책 8권과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책이어서 모두 구입하여 열심히 읽었습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인간 개조는 본질에 있어서 사상 개조입니다. 사람들의 가치와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상이며 따라서 사람을 개조하는 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상을 개조하는 것입니다. 사상 개조는 사람들의 물질생활 조건을 개변하는 사업이나 그들의 문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사업보다 더 어려운 사업입니다...
낡은 사상 잔재는 매우 보수적이고 집요합니다. 사상 개조는 복잡하고 장기성을 띠는 사업이며 정력적으로 투쟁하여야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70 페이지)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 (4)
평양에 갈 때마다 내가 머무는 숙소가 모란봉 중턱에 있는 고려호텔입니다. 고려호텔에서 산을 끼고 조금만 가면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평양 시가지와 대동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입니다. 나는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그 자리를 찾아가 동상 주위를 몇 바퀴씩 돌곤 합니다. 돌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밧줄을 동상 목에 걸어 어느 자리에서 당기면 잘 무너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1907년에 일어나 한국교회 부흥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던 장대현교회가 서 있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서 깊은 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웠습니다. 나는 한국교회 목사의 한 사람으로 그 동상을 헐고 장대현교회를 복원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그 후로 절차를 밟아 두만강 다리를 건너 〈나진·선봉〉으로 가서 고아원을 세우고 농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고아원 세우기는 성공을 하여 북한 전국에서 가장 좋은 고아원이 되어 남북 관계가 끊어져 있는 지금도 그 고아원만큼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일할 때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고아원을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나진·선봉을 방문하면서 100달러짜리 현금을 3만 달러 준비하여 주머니에 넣고 갔습니다. 나진·선봉시 인민위원장을 만나 고아원 사역을 시작하기로 합의한 후에 내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함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이 허락되지 않으면 오늘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 말에 그들이 움칠하며 말했습니다. 〈조국의 일에 무슨 조건이 필요합네까?〉 하기에 〈조국을 돕는 일이니까 시작하는 때부터 분명한 조건이 있어야지요〉 하였더니 인민위원장이 〈그럼 조건을 말해 보시라요〉 하기에 〈고아원 운영을 직영(直營)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건축에서부터 운영 전체를 우리가 직영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한국의 시장(市長)격인 인민위원장이 딱 잘라 말했습니다.
〈우리 공화국에는 그런 법이 없습네다. 필요한 예산을 넘겨주면 우리가 알아서 운영합네다〉 하였습니다. 나는 산전수전 겪으며 일해 온 터라 그런다고 그 말에 곱게 물러날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분명히 일러 주었습니다.
〈이 고아원 운영의 비용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운영합니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성금 3만 딸라를 준비하여 왔는데 자체 운영의 조건이 허락되지 않으면 이 기금을 가지고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하며 안주머니에 있는 3만 달러를 끄집어내어 흔들며 보여 주었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5)
내가 달러를 보여 주며 완강히 주장하였더니 우리 공화국 방침이 그렇게 허가해 줄 수 없노라고 거듭 말하기에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으니 고아원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하고 귀국하겠노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고 헤어졌는데 사람을 보내 거듭 그냥 지원금으로 주라고 요청하기에 나 역시 그럴 수 없노라고 굽히지 않았습니다.
출발할 시간이 되어 짐을 꾸리고 있는데 출발 30분 전에사 담당관이 와서 말했습니다. 〈김 선생 고집이 대단합네다. 김 선생 주장대로 하갔시다.〉
그런 과정을 거쳐 고아원을 짓는 작업부터 하였는데 목수팀을 중국 연변에서 데려오고 시에서 추천하는 분과 반반으로 건설팀을 구성하여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건축을 마치고 결산하니 275,000 달러로 지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서울의 한 대형교회에서 우리 고아원과 비슷한 규모로 건축하였는데 시에서 요청하는 대로 지출하였더니 무려 10배 가까운 3백만 달러가 들었습니다.
북한 당국과 무슨 일을 할 때는 이런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대로 진행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자는 대로 하다가는 그렇게 10배 가까운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우리 정부에서나 민간 기구에서나 북한 돕기를 할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고아원 건축을 진행하면서 시범 농장 세우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중앙에서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사안이어서 쉽게 진행되었습니다. 나진·선봉시 인민위원장의 지시를 받은 농산국장이 나를 한 언덕 위로 데려갔습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밭을 가리키며 〈김 선생, 경작하고 싶은 땅을 어드메서 어드메까지 골라잡으시라요〉 하길래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주인들이 있을 텐데 그냥 골라잡으라니요〉 하였더니 나를 나무라는 말투로 일러 주었습니다.
〈거 자본주의 식으로 생각 마시라요. 모두가 인민의 땅이요, 수령님의 땅인데 땅 주인이 어찌 따로 있습네까? 김 선생께서 정하는 만큼 배정하고 지금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은 다른 땅으로 배치하면 되는 기지요〉 하기에 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식 일 처리가 간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3, 4 만평 정도 되는 땅을 지적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결정하였습니다.
땅이 정하여지자 나는 그 땅의 토양을 살펴보고 싶어 밭으로 다가갔습니다. 시기가 11월 초순이어서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시기였습니다. 밭에 수숫대만큼 크기의 대강이 줄을 지어 있기에 〈올해 수수 농사를 지었구먼요?〉 하고 물었더니,
〈아닙네다. 수수가 아니고 옥수수입니다〉 하기에 〈옥수수 대강이 이 정도였으면 수확량이 볼품 없었겠는데요〉 하였더니 〈잘 아시네요. 하늘이 하는 걸 사람이 당할 수 없었지요. 가뭄이 오래 가다가 폭우가 쏟아져 홍수를 일으켰으니 당해 낼 도리가 없었시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밭의 흙을 한 주먹 쥐고 바람결에 뿌려 보았습니다. 흙이 마치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졌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 (6)
흙덩이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보고 농산국장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금년 농사가 흉작이 된 것은 하늘 탓이 아닙니다. 사람 탓입니다. 보세요, 흙이 덩어리가 되어 있어야 유기질 성분이 많아 농사가 잘 되는데 흙에 거름기가 없으니 마치 밀가루처럼 바람에 날려가잖습니까? 오래도록 거름을 넣지 않아서 토양이 메말라서 수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농산국장은 할 말을 잃고 나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김 선생께서 전문가이시니 잘 가꾸어서 인민들에게 교육장으로 활용해 주시라요. 시에서는 적극 협력하겠시다.〉
이래서 나진·선봉 두레농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귀국해서 두레마을에서 헌신적인 일꾼 셋을 데리고 가면서 종자, 가벼운 농기구 등을 챙기고 가서 3년 안으로 좋은 농장을 만들자 다짐하고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토양을 비옥하게 할 거름을 구할 수 없는 점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심하던 중에 우리 밭가 산 아래 높다란 언덕이 있기에 무슨 언덕인가 살펴보았더니 대박이었습니다. 토탄(土炭) 더미였습니다. 옛적에 나무는 석탄이 되고 숲은 토탄 혹은 이탄이 되었습니다.
함경도에서 만주를 거쳐 사할린 지경까지가 세계에서 최고 양질의 토탄이 있는 지역인데 우리 밭가에 그 토탄 더미가 있었습니다. 토탄을 제대로 발효시키면 최상의 퇴비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한국으로 와서 미생물을 가져다가 발효를 시켜 두껍게 밭에 뿌려 두니 토양이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부터 감자를 심었습니다. 북한의 감자는 자주색 감자로 종자가 퇴화되어 수확량이 적은 데다 바이러스가 심하여 곰보 감자였습니다. 우리는 종자 개량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 같아 대덕단지 과학자들이 개발한 신품종 감자를 4만개 구입하여 심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평양 김일성대학 농대에서도 신품종 감자 얻으러 왔기에 적절한 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계획하였던 바대로 3년 만에 풍작이 되었는데 감자 캐는 날 집단 농장의 농민들의 손을 빌려 캐는데 아낙네들이 연방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 한 뿌리에 8 개나 열렸시요〉 〈이 쪽은 10 개나 열렸시요〉 하니 뒤에 서서 지키던 정치보위부 담당관이 듣기가 거북하였던지 〈그만들 하시라요. 감자를 입으로 캡니까?〉 하니 조용하여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주에 우리더러 철수하라는 명령이 당국으로부터 떨어졌습니다. 나는 의아하여 시 인민위원장을 찾아가 〈아니, 농사가 잘 되고 농장이 자리 잡혀 가는데 왜 철수하라는 기요?〉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김 선생, 너무 빨리 잘 됐시요. 천천히 잘 돼야 하는 것인데 3년 만에 달라지니 중앙에서 소문을 듣고 인민들의 관심이 그리로 쏠리기 전에 철수시키란 명령이 내렸시요. 우리도 안타깝습니다. 일단 철수하셨다가 다른 기회를 만들어 보시자구요.〉 나는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그냥 물러섰습니다.
내 삶을 이끌어 준 10 가지 말씀 (7)
평양의 지시를 지방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아는지라 섭섭하지만 조용히 물러나겠다 하였더니 시 인민위원장이 미안하고 섭섭하다며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 하여 단고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북에서는 개고기를 단고기라 합니다.
그런데 그 단고기가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전기가 수시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니까 전기가 나갔을 때는 고기가 녹고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 다시 얼고를 몇 차례 되풀이하게 되어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걸 모르고 귀한 손님 잘 대접한다고 대접 받았는데 그날 밤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아래로 위로 토하고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 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두 손 모아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개고기 먹다가 죽으면 순교도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살아서 귀국하여 해야 할 일 하고 싶습니다. 제발 죽지 않게 손써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드리고 있는데 소식을 들은 담당과 시 사람들이 오더니 나의 심각한 사정을 보고는 나를 들것에 눕히고는 보건소 비슷한 곳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정말 놀랐습니다. 옆방에서 맹장염 수술을 하는데 마취약이 없으니까 생배를 째는데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병원이 아니라 수라장이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한밤중에 동원되어 나를 치료한답시고 링겔 주사를 놓으려 하는데 링겔 병이 맥주병 같은 병에 노끈으로 묶은 병으로 주사를 놓으려 하기에 내가 소름이 끼치면서 저걸 맞다가 잘못되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제지시키고 차를 대절하여 중국 연길로 나왔습니다. 연길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여 치료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꼭 같은 사람들인데 체제를 잘못 만나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식량이 없어 지금 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미사일을 연방 쏘아 올리고 핵무기 만드는데 예산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핵무기는 사용하지도 못할 무기입니다. 그걸 쓰는 날이면 김정은과 그 정권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1960년에는 남한의 국민 소득이 78 달러였고 북한은 242 달러였습니다. 그 시절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3배 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소득이 역전하여 지금은 남한 경제력과 국력이 북한에 비하여 60배가 넘습니다.
통일에 대하여 북한 돕기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길은 오로지 한 길입니다. 김정은 정권 무너뜨리고 민주 통일하는 길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