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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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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전반 스크랩 대승지관법문
妙法蓮華經 추천 0 조회 130 12.04.03 01: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느 젊은이가 불상의 손바닥에 담뱃재를 털었다. 이것을 본 스님께서 노발대발 화를 내자 젊은이는 중생이 곧 부처라 했는데 부처가 부처의 손바닥에 담뱃재를 턴게 무슨 잘못이냐며 어름장을 놓았다. 아무 대꾸도 못하고 얼굴만 울구락 불구락 한 스님...

 

  반야심경에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생과 부처처럼 색과 공,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즉의 논리를 대입할 경우 우리는 앞의 젊은이와 같은 편협한 견해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수행자로써 이런 이치를 모르면 앞의 스님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올바른 수행관도 정립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기신론을 배우면서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심에 심진여분과 심생멸문이 무자성의 어둠과 밝음처럼 존재하며 법계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법계는 진여로 인해 평등하지만 각각의 업에 의해 차별된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진여를 의지해 나타난 천차만별의 현상 속에는 진여의 이치가 녹아있으며 이는 허깨비와 같아 실체가 없지만 업에 의해 나타났으므로 현상조차 없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여와 현상이 무자성을 바탕한 非一非二적 존재임을 이해해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는 진여와 현상을 아우르는 중도적 실천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중생은 진여로 평등하여 앞의 젊은이의 행위는 진여를 드러내 보이는 방편이, 진여에 의지해 차별적 현상이 나타나므로 스님이 호되게 야단치는 행위는 각자의 노력을 통한 공덕의 차이를 일깨워 주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진여와 현상의 중도적 이해는 이 모두를 긍정하고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에 좋은 인연으로 『대승지관법문』을 만나게 되어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대승지관법문』은 부처님의 정법이 조사에서 조사로 전승되며 중국 8종의 종조인 용수보살의 중관론 심법을 천태종의 2조 혜문 스님이 요달하고 그의 제자 남악혜사 스님이 이어받아 저술한 책이다. 남악대극지관서 주적찬에 보면 남악대사는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참여했던 성중으로 3세 동안 남악형산에서 교화할 인연이 있어 은밀하게 부처님의 근본이념을 전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크게 서분, 종정분, 유통분으로 나뉜다. 서분에는 어떤 이가 정법을 청하자 남악대사가 지관수행법을 약설하고 있다. 정종분에서는 지관법에 대해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지관을 수행하는 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둘째, 지관을 수행하는데 경계는 어떤 모습이며 셋째, 지관의 자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넷째, 지관의 수행을 통해 무엇을 끊고 얻을 것인가? 다섯째, 지관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마지막으로 유통분에서는 지관수행의 응용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서분에서 지관에 대해 약설하고 있는데 지란 일체의 모든 법은 보낼 그 자성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며 생겨난 것도 새삼스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만 허망한 인연 때문에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 허깨비처럼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유위법은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있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의 진여일심일 뿐이다. 마음의 자체는 허망하게 분별하는 망상의 모습이 본래 없다고 알아 이와 같이 관찰함으로써 허망한 망념이 일어나 생사의 세계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관은 만법의 자성이 본래 생겨나거나 지금 새삼스레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이러한 이치를 알았더라도 우리의 심성은 인연을 따라 일어나서 허망하게 세간법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지도 않다. 비유하자면 마치 허망한 꿈은 실제로 있지 않지만 허깨비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는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지는 진여를 향해 현상적 차별에서 오는 집착을 타파하고 관은 현상적 차별을 향해 진여에서 오는 무에 대한 집착을 타파할 수 있다. 『기신론』에서는 지관을 함께 행해 지로써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관으로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해 비록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본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만약 지를 닦으면 세간에 주착함을 대치하고 이승의 겁약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관을 닦으면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협렬심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 멀리 여위게 된다. 이래서 지관은 함께 조성해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보리에 들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정종분에서는 지관의 수행은 반드시 청정한 마음에 의지해야 하며 이 마음을 자성청정심, 진여, 불성, 법신, 여래장, 법계, 법성 등으로 이름하며 그 명칭에 담겨진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모습은 진제로써 일체 차별적인 모습을 초월한 측면에서 청정한 진여일심을 밝히고, 속제로써 진리의 세계와 현상세계가 서로 똑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혀 별개도 아니라는 측면에서 법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중제로써 공과 불공의 2종 여래장이 결코 두 모습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진여를 설명했다. 우리의 마음은 진여로 평등하지만 염법과 정법을 구비하고 있어 각각의 인연에 의해 차별적 현상이 일어남을 진제, 속제, 중제를 통해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원융무애한 법계를 거울의 비유로 드러내고 있다. 거울에 의해 나타난 일체 현상은 거울의 공성에 의해 평등하게 나타나지만 그 차별적 모습은 여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이 법계가 사사무애함을 드러내어 수행자에게 어떤 수행관을 가지고 수행해 가야 되는가에 대해 조언을 던져주고 있다. 계속에서 지관의 경계, 체상, 단득, 작용에 관해 설하고 있는데 지관의 경계란 3자성에 관한 법을 말한다. 3성은 장애로부터 벗어난 진여와 부처님의 청정한 덕상을 모두 진질성, 장애로 덮여 있는 진여와 번뇌의 성품이 서로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아뢰야식 즉 의타성, 제6의식과 제7말라식을 가지고 망상으로 분별하는 분별성을 말한다. 지관의 체상은 번뇌로 작용하는 세 가지 성품측면에서 지관의 체상을 밝히고 지혜로 작용하는 세 가지 성품 측면에서 지관의 체상을 밝히고 있다. 지관의 단득은 지관 수행을 통해서 분별성의 측면과 의타성의 측면과 진실성의 측면에서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설명하고 있다. 지관의 작용에서는 지관수행을 완성했을 때 어떠한 모습으로 지관의 공덕이 작용하는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유통분에서는 실생활에서 지관수행의 응용인 실상관, 가상관, 불신관, 공구관과 공양할 때와 변리시의 지관수행을 설하고 있다.

 

  대승지관법문에서 말하는 지관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대한 기신론과 유식의 3성설, 3종 여래장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을 체상용으로 바라보고 체의 측면에서 지, 용의 측면에서는 관을 제시하고 있다. 유식의 3성설에서는 3성을 통해 지수행문과 관수행문으로 다시 관수행에서 지수행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3무성에서 각각 지관수행에 대해 수행의 공덕과 이익을 들어가면서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3종 여래장과 관련해서는 공여래장에 바탕을 둔 수행법인 지수행법, 불공여래장에 바탕을 둔 수행인 관수행법, 공불공여래장에 바탕을 둔 수행법인 지관쌍행법이 각각 성립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세 가지가 우리의 마음, 즉 일체법을 3가지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용수의 진제와 속제를 빌려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의 아공법공의 진제적 측면과 아유법유의 속제적 측면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진공묘유의중도적 측면이다. 이는 진여로 평등한 우리의 마음에 나타난 다양한 차별적 현상을 설명하고 진리로 이끌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즉 마음자체적인 관점에서는 이 셋의 차이는 없지만 현상적 측면에서는 허깨비와 같이 존재하는 차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 최일범 교수는「선불교와 노장사상의 사유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기신론의 체상용의 기원이 도가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체용론이 왕필에게서 시작되고 그 근거가 이미 노장에 내재했기 때문인데 왕필의 체용론은 다양한 만물이 헛되지 않은 것은 理(本體)가 만물에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체인 ‘理’ 또는 ‘一’(貞夫一者)은 만물과 독립한 형이상자가 아니라 만물에 즉해서 작용함으로써 만물이 곧 본체의 현현이 된다. 따라서 본체가 곧 작용이요, 작용이 곧 본체인 체용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러한 體用論이야말로 왕필의 義理易學의 핵심이거니와, 후에 易學뿐 아니라 불교에도 僧肇를 비롯하여 ?기신론?, 화엄학, ?六祖壇經? 등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기신론이 중국찬술이라는 전제하에서 제시된 의견이지만 불교에서는 이미 유식과 여래장 사상의 3성설과 3종 여래장에서 보이듯이 마음을 체상용의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불교의 관점을 단지 체용론의 의미와 용어를 차용해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격의불교시대에 있었던 많은 사례 중 한 부분이지만 불교의 관점을 이해하고 정리해 가는데 중국 사회에서 체용론의 도움은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성게에는 ‘일중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일체법이 진공묘유로 원융무애한 법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법계 속에서 우리는 공이다 유다라는 상대적 개념에 치우친다면 법성에 모순된 중생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 예로 ‘중생즉부처’, ‘번뇌즉보리’라는 대승의 무분별적인 가르침을 접하고 법계의 한 측면인 무분별, 진여로써의 평등에만 잘못 집착한다면 학의 다리를 잘라 오리의 다리에 붙여 똑같게 하는 것이 평등이라고 주장하는 편견을 낳게 될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마치 제각각의 풀들이 아우려져 수풀을 이루듯 화엄에서 말하는 개별성을 아우르는 총체성일 것이다. 앞의 편견을 대치하고 위해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의 반야, 중관, 유식에 이르기까지 때론 법계의 현상적 측면으로 중도를 실현하기 위해 연기를 강조하고 법계의 이치적 측면으로 중도를 실현하기 위해 공을 번갈아 강조해 왔다. 이로 인해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 등에서 중생의 집착을 타파하기 위해 일체법인 우리의 마음을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3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지관수행이 가능하게 된다. 지는 법계의 진여적 측면에서 정적이고 평등한 마음의 측면을, 관은 현상적 측면에서 동적이고 분별적인 마음의 측면을 극대화 시켜가는 것이다. 이는 불교 역사에서 연기와 공의 측면을 인연에 따라 번갈아 강조하며 중생의 집착을 타파한 것과 같다.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수행에서 지나 관에 치우치면 안되고 지관쌍수를 통해 원융한 법성에 수순하는 중도를 지향해 가야 한다. 이를 통해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지혜가 생겨나게 되고 이로써 법계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고 집착없이 개념을 자유로이 운용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먼저 원력을 세운 뒤 지수행을 닦고 다음에 바로 관수행을 일으켜야 된다고 한다.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지로 모든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알아야 일체의 색법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더라고 자유로울 수 있다. 또 관으로 일체의 현상법은 우리 마음을 따라 나타난 것임을 알아야 일체법에 있어 무언가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더라도 생각을 일으키는 즉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법화경에서도 사리불이 수기 받는 것은 자신이 성문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법계의 한 측면에만 집착하고 공, 열반, 연기, 중도를 받아들이게 되면 원융무애한 법계의 이치에 수순할 수 없이 절름발이가 될 것이다. 어떤 이가 열심히 도량 불사하되 이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다고 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이 말에 중도의 이치가 녹아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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