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이후에는 과학뿐 아니라 미술에 있어서도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빠른 변화가 있었다. 입체주의가 전통적 표현 방법에서 떠남으로써 예술적 가능성의 범위는 무한히 넓어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일어났던 거의 모든 실험적인 미술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이후의 아방가르드는 양식적 혁신을 뛰어넘어 무엇보다도 삶과 사회 전체에 변화를 주려는 욕구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바로 예술의 본질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 의문은 오늘날까지 중단될 기미가 없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적인 예술가들이 보여준 인식의 변화는 국제적인 다다 운동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들에게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의 대참사는 문화적 타락의증거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을 형성한 다다의 잔류파들과 계승자들의 기존 사회에 대한 거부는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상상력과 무의식에 의해 해방되는 미술의 역할을 강조하는 보다 긍정적 성격을 띠었다.
좀더 형식적인 측면에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선구적 추상 역시 사회적 목표를 지닌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라는 그룹으로 발전하였다. 데 스틸의 엄격한 기하학적 접근 방식은 더욱 비개인적인 문화 형태의창조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한 광범위한 야망은 2차 세계대전의 또 한 번의 충격을 견디지 못했고 따라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전후 예술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더욱 개인적인 경향력을 띠게 되었다. 나치즘의 박해로 유럽의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들은 재능있고 활동적인 미국 예술가들 및 부유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쉽게 수용하는 미국 사회와 상호교류를 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낡은 세계가 아닌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서 예술적 지도력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생각에 대한 미술 시장과 미술평론가의 수용력, 그리고 현대 미술의 발전에 충실한 많은 협회들의 설립 등은 19세기 후반기에 진보적 예술이 거쳤던 적대감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유동적인 아이디어와 이미지 그리고 사람들이 진전시킨 추상은 1950년대에는 서구의 거의 지배적인 정통미술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곧바른 수용태도는 풍자로 만연된 현대 문화 속에서 크게 확산되었을 날카로운 풍자 미술을 다소 무디게 하였다. 다다와 가장 유사한 전후 운동인 팝 아트가 다다의 무정부적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시끄러운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대 회화와 조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술이라고 인정된 활동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일 것이다. 즉, 완성품보다는 아이디어를 강조하고 흔히 시각적으로 주목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형태들이 이용되는 등 예술의 범위가 극적인 과시감에서부터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한 다양한 운동들도 항상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아마 중요도가 다르게 정리될 가능성이 있다.
<<<다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서구 세계를 뒤집어 놓은 파괴의 제전은 바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예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진보적 정신에 제동을 걸었다.예술적 활동이 억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도 피카소의 천재성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참호전(慙壕戰)같은 자멸적 대학살을 조장한 이유라고 생각한 당대 문화와 그 타락하고 안이한 가치관들에 대한 반항의 형태로 나타났다. '근대 문명' 그 자체가 파괴될 운명에 놓였고, 파괴 수단은 예술이 아니라 '반(反)예술' 또는 '비(非)예술'이었다. '비예술'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예술, 새로운 발전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증명이 되었어요 당시에는 발전이나 교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대전(大戰)이 야기한 심한 좌절감은 세계 각처에서 동시에 폭발하였다. 주창자들은 대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로서 대부분이 뉴욕, 취리히, 바르셀로나 같은 중립도시로 피신하여 징집을 '기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18년 휴전 직전에 봉쇄되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베를린에서도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관련 단체들이 주도자들간의 상호방문과, 전시회보다는 방대한 출판 공세 - 정기 간행물, 평론지, 선언서 - 를 통해 유대를 맺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다다'로 알려진 미술 운동이다.
1914-15년, 마르셀 뒤샹이 뉴옥에서 행한 몇 차례의 도상파괴적 행위와 특히 그가 제작한 '레디메이드'는 조숙한 다다 정신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제로 시작된 것은 위고 발(Hugo Ball, 1886-1924)이 취리히에서 카바레 볼테르(the Cabaret Voltaire)를 창립한 1916년이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에 미술계에서 유명하게 되는 몇몇 미술가, 특히 장 또는 한스 아르프(Jean or Hans Arp, 1887-1966)가 다다 운동에 가담하였다. 가장 광적인 활동가는 루마니아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 1896-1963)였다. 이들은 카바레 공연에서 모든 표현 형태를 다 동원하여 자신들의 반항심을 표출하였다. 언쟁이나 심지어는 난동까지 (때로는 성공적으로) 일으키도록 계획되었으며 이러한 이벤트는 1960년대 '해프닝'이라고 칭하는 것들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다다라는 이름 자체는 무의미한 단어이다. 그것의 유래에 대한 설명들은 상반되고 있으나, 여러 언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단어이면서 의미상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아기의 옹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브르통은 "다다는 심상(心想)의 상태이다."라고 하였고, 아르프는 "다다는 자연처럼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다는 자연을 따르고 예술에 반하는 것이다..다다는 무한의 의미와 한정된 수단을 상징한다. 왜내하면 다다인들에게 삶은 예술의 의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1918년 차라가 선언한 다다의 첫번째 선언문에는 무계획, 무변명, 무설명이 명시되어 있다. 반항으로서의 이 운동은 복합적인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들도 이 사회의 일부분이면서도 그 사회의 파괴에 전념하였던 다다주의자들의 태도에는 자연스럽게 불화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 취리히에서 차라의 충실한 추종자는 변덕스러운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였다. 입체주의에 참여한 적이 있는 피카비아는 이미 뒤샹과 만 레이(Man Ray, 1890-1977)와 함께 뉴욕에서 그리고 1916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예술적 혁명을 선동하였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취리히에서 예술에 대한 파괴적 관점과 인생 자체의 허무주의적 시각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발이 베른으로, 독일인 창립멤버였던 휠젠벡(Richard Huelsenbeck, 1892-1974)이 1917년 베를린으로 떠나고 차라가 피카비아를 따라 파리로 간 1920년에 취리히 다다 시대는 막을 내렸다.
독일에서 주요 중심지는 베를린, 쾰른 그리고 하노버였다. 휠젠벡이 주도한 베를린 다다는 풍자적이며 날카로운 정치적 성향이 짙었고, 그들의 표적은 다른 곳에서보다 더 좁고 엄밀히 한정되었다. 그들의 무기는 요하네스 바아더와 함께 휠젠벡이 1918-20년 사이에 출판한 수많은 잡지 <클럽다다>, <다다>였다. 다다의 편집자는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2)이었다. 이들 정기 간행물들에는 격렬하고 선동적인 인쇄 문구와 합성사진들이 무질서하게 게재되었다. 대조적으로 1919-20년의 쾰른 다다는 반(反)미학적이라는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미학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두 명의 주요 예술가들, 즉 아르프와 막스 에른스트가 속해 있었다. 존 하트필드와 에른스트는 대중인쇄물들을 이용하며 풍자적인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였고, 기괴함과 기이한 성적 이미지를 자유롭게 다루면서 종종 파리의 초현실주의를 예시하기도 하였다. 파리 다다의 경우는에른스트가 1922년에 파리로 건너가게 되면서 활발하게 되었다.
하노버에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887-1948)는 메르츠(Merz)를 창안해냈다. 베를린 다다는 그가 너무 부르주아적이라고 거부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일관성있게 다다의 원칙에 전념하였던 인물로서 완고한 개인주의자였으며 무정부주의자였고 기발한 몽상가였다. 메르츠('상업적'이란 뜻을 지닌 kommerziell이 인쇄된 글자를 짲어 만든 의미가 없는 이름)는 잡지(1923-32년)의 제목이었고, 독일과 1937년에 나치 정권을 피해 망명을 간 노르웨이 그리고 1940년부터는 영국에서 작업한 그의 미술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결코 극단적인 '반예술'의 위치를 채택하진 않았지만 콜라주나 부조 몽타주에 도시 생활의 파편들-버스표, 찢어진 신문, 마분지, 나무나 금속 조각들-을 사용하며, 기본 재료들을 절묘하게 균형 잡힌 통일된 구성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모든 예술 현식을 포함하는 총체적 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첫번째 메르츠바우(Merzbau)는 ('성적 고통의 대성당'이라고 명명된 방을 포함하여) 수평적으로는 그의 집안 무든 방들을 거치고, 수직적으로는 바닥에서 창문 밖까지 뻗친 무수한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끝없는 구조물이다. 하노버에 있는 이 메르츠바우는 1943년에 폭탄으로 파괴되었고 노르웨이에 있었던 것은 1951년에 불에 타버렸으며 영국판의 부분은 뉴케슬 대학이 보존하고 있다.
파리에서는 1920년 이후에 다다의 전성을 구가하였는데 대체로 전시회와 같이 열린 퍼포먼스에서 시작하여 소동 속에 막을 내리곤 했다. 그러나 곧 그 추진력은 약화되어 1924년에는 초현실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Francis Picabia,L'enfant carburateur.1919
Francis Picabia, Udnie, 1913, Huile sur toile, 290 x 300 cm
Picabia
Francis Picabia, Amorous Parade, 1917
Francis Picabia
<나는 기억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우드니를 다시 본다> 1914년 뒤샹을 만난 직후 1910년까지 피카비아는 분명한 입체주의적 성향을 보이면서 타고난 색채감각을 추상적 형태의 섬세한 실험에 솓고 있었다. 1913년 뉴욕에서 미국의 과학 기술의 경이로움에 감응하여 그의 '기계 제작자(machinist)'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기계적이고 암시적인 생물형체적 형태가 역동적인 구성을 이루는 양식이었다. 가브리엘르 뷔페-피카비아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그의 작업은 매우 자발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결코 계획이나 방법 또는 교리에 의존하지 않았다."
Kurt Schwitters, "Revolving"
Kurt Schwitters, Merzbild 5B, 1919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 2, 1912년.
추상적 형태에 대한 뒤샹의 접근 방신을 섹시옹 도르 회원들의 그림들에서처름 분석적이거나 단호하지 않았고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이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에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이 작품의 주요한 영감은 세 개의 점선이 보여주듯이, 인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일 때 엉덩이의 회전에 나타나는 움직임의 역학이었다.
Marcel Duchamp, Bicycle Wheel, 1913
자전거 바퀴가 있는 나무 걸상은, 대량 생산되는 일상의 사물을 원래의 상황에서 이탈시켜 관람자에게 예술로 제시한 최초의 '레디메이드'이다. 보는 이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적웅과정이 그 형태보다 더욱 의의가 있으며, 비록 형태들이 대개 기계적인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내고 또한 이들이 상당히 새로운 기술적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뒤샹은 형태 자체를 중요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 또는 그의 비(非)작품, 그리고 그의 삶의 양식은 20세기 중반과 후반의 다양한 미술 현상을 예시하였다. 대(大)다다이스트로서 그는 특히 팝 아트의 네오 다다적 요소들을 예견한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였다. 그의 '모빌'을 이용한 실험들 - 걸상위에서 회전하는 자전거바퀴가 첫번째 작품이다 - 은 키네틱 미술보다 앞선 것이었다. 우연적 요소의 활용은 다른 미술가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자민, 대형 유리 작품이 우연히 부서졌을 때 뒤샹은 기뻐하며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재조립된 작품으로만듦으로써 추상표현주의자들을 예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념미술의 경향을 이미 예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림을 만드는 것은 관람객이다.'라고 믿으면서 관람객의 참여를 기대하였다. 그는 역설 속에서 살았다. 그는 교양있는 사람으로 매우 예민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었으며, 체스와 룰렛 게임의 확률을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예술로 생계를 영위하기를 거부했다. 말년에 그가 한정판으로 '샘'의 복제를 허가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50년 전에 서명을 함으로써 유일한 원작으로 만들었던 예술작품으로서의 특권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으나 한없이 매혹적인 그의 혁신들은 진지한 미술에 가한 가차없는 풍자의 반영이자 모든 기존 가치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거친 익살로 가득 찬,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떠한 요소도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1년에 '나는 예술가에 지나지 않는다..나는 더 이상 도상타파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Marcel Duchamp,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1915-23
<심지어, 총각들에 의해서도 발가벗겨진 신부(대형유리). 뒤샹의 비회화(이젤 그림이 아닌 유리에 제작된 것이다)는 상세하게 설명된 주석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주석서가 있더라도 비평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아마도 오브제 작품의 구상과 계획으로서의 개념미술의 최초의 예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후에 '주어진 대로'에서도 나타나게 될 두 종류의 힘 즉 남성(하단부)과 여성(상단부)을 표현한다. 성적 합일에 대한 욕망의 모든 감정이 제거되었으나 여전히 우연적 요소가 있을 듯한 자동 기계장치의 과정으로 표현되어 있다. 운반 도중 유리가 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오히려 뒤샹은 '이제 완성되었다'라고 말하고 먼지가 낀 후에 일부는 털어내고 일부는 고착시킨후 사진을 찍어 두었다고한다. 1937년 뒤샹이 깨어진 원작을 세심하게 재조립한 것은 아마도 우연을 지배하려고 하는 충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체계적으로 역설적이고, 역설적으로 체계적이었던 그는 1920년대에 룰렛 게임에서 항상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예술에서의 우연을 즐겼다.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전시회에 변기를 출품함으로써 뒤샹은 사실상, 전위예술가들까지도 인정하였던, 미술 작품은 미술가에 의해 제작된다는 가정을 무너뜨렸다. 중산층의 기호나 인습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자부하던 독립예술가협회였지만 노골적으로 저속하고 작가불명인 ,'샘'은 그 협회로 하여금 그들이 비난하던 바로 그 중산층의 무례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뒤샹, L.H.O.O.Q., 부제,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1918, 뒤샹이 주석을 단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엽서는 어린아이의 장난 같으면서 동시에 심오하게는 무정부주의적인 다다 미술 작품의 정수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 하나의 '레디메이드'라고 할 수 있다. 이 익살을 계속되고 있어서 여러가지 유형의 작품들이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통념을 향한 또 하나의 공격이었다. 모든 명화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모독하는 것이며 예술의 신성함과 유일한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또한 고상한 취미, 모든 심미안에 대한 모욕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취향에 순응하지 않기 위해 나자신과 모순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가 '반예술적'이었다는 사실도 부정하려고 하였을지 모른다. '당신이 옹호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하나의 사물이 갖는 양면일 뿐이다.' 이런 Icon을 파괴하는 출발이 이코노클라즘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장르를 예시해준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상의 초상,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To Be Looked At (From the Other Side of the Glass) with One Eye, Close To for Almost an Hour" by Marcel Duchamp, oil paint silver leaf, lead wire and magnifying lens on glass (cracked), 19 1/2 by 15 5/8 inches, 1918, MOMA, Katherine S. Dreier Bequest
Picabia, Take me There, 1919
<나를 거기로 데려가 주오> 대문자로 씌어진 '피마자유 단지'와 '악어의 틀니'라는 무의미한 구절은 자극적이고 인습파괴적 구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피카비아가 1920년 잉크 얼룩에 <축복 받은 성모>라는 제목을 붙였던 극단적인 무례함을 이미 예시한다.
Jean Arp, Collage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ce,1916-17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 콜라주>, 아르프는 우연의 법칙은 "무의식에 완전히 몰입"함으로써만이 경험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법칙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순수한 삶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타고난 창조적 욕구와 미학적 아름다움의 기준을 동시에 인정하는 그는 흔히 기존 미술을 타파하는 무정부적 수단으로서의 기회에 관심이 있었던 다다 미술가와는 약간 다른 입장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로 인해 그는 곧바로 초현실주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Jean Arp, Automatic Drawing, c. 1918
Man Ray, Le Violon d'Ingres, 1924
Man Ray, The Rope Dancer Accompanies Herself with Her Shadows, 1915
<그림자를 늘어뜨린 줄타기 광대> 이 그림은 유화이면서도 분명한 콜라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림자의 견고한 형체는 광대를 나타낸 섬세한 별 모양, 광대의 줄이 만들어낸 구불구불한 선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Man Ray, Tears
Man Ray
Hannah Hoch,Cut with the Kitchen Knife Through the First Epoch of the Weimar Beer-Belly Culture, 1919
Hannah Hoch, The Pretty Maiden, 1920
*****************************
표현주의, 야수파에 이어 입체주의, 이태리 미래주의, 러시아 절대주의, 구성주의등을 다루어야 하나 너무 잘 알려진 부분도 있고 딱딱한 사조가 계속되어 모더니즘이후 1980년대 부터의 포스트 모더니즘운동에 막강한 영향을 끼친 20 세기 다다이즘을 올렸습니다. 사실주의, 인상주의에서 주장되어온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only)은 과거에 종교, 입헌군주에 봉사해왔던 화가들의 자율성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뒤샹은 사회를 위한 예술(art for societies' sake)인 포스트 모더니즘을 여는 개념미술의 선구적 연구자로 불리며 세잔보다 한수 위인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칭해지는 인물입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미술도 '과학'처럼 연구와 실험성이 있어야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잔, 고갱, 고호, 피카소, 뒤샹, 라우센버그, 노만, 볼탕스키.......,낙서 그림으로 유명한 사이 톰블리도 거의 30년을 신화연구를 바탕으로 한 낙서 그림에 몰두해 왔다는 것입니다. 기존 미술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역발상과 그에 대한 외줄 연구만이 새로운 예술을 열어준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그리고'라는 낡아 빠진 수구 꼴통의 호랑이 담배피는 시절 이야기를 왜 아직도 하고 있는 것인지, 회화의 A, B, C,..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있다면 무엇인지.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하는 시절에, 못본 척 해 버리고 자연에 묻혀서 자연과 교감하며 자신을 키워나가는 야수회이면 족한 것인지 생각좀 해봐야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 고추 만지듯 색바랜 기법타령에 전수에.... 이래서야 조만간 이 좁은 한국 미술세계에서도 도태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다이즘 - 거의 백년전 이야기입니다. 우리 야수회도 새로운, 독창적인, 새시대를 열어주는 그림을 만드는 연구를 열심히 합시다.
Rain Song - george win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