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내내 국외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것은 대종교였다. 이들은 4도 본사를 중심으로 물적 기반의 제공은 물론, 인적 충원에서도 중심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항일지사들 대부분이 대종교인 이였다.
나철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교구 책임자인 서일, 신규식, 이동녕, 강우, 이상설은 물론 김교헌, 서일, 신채호, 홍범도, 김좌진, 안희제, 안재홍 등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미 서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대종교인들은 1918년부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서는 선언문인 대한독립선언(일명 무오독립선언)을 준비해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1919년 발표된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된것으로 처음부터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하면서 이를 침탈한 일제에게는 털끝만큼의 양보도 불가하고 이를 위해 이천만 동포가 총궐기 무력으로 대항하여 반드시 독립을 이루겠다는 대일 선전포고였다. 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다수가 대종교인들로 이들은 끝까지 단 한명의 변절자 없이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들이다.
대종교 항일무장투쟁의 대표적인 인물은 백포 서일이었다. 그는 1911년에 중광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해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1920년에는 김좌진을 영입해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과 사관연성소의 교장을 맡겨 독립군을 양성하게 하였다. 만주 서쪽의 신흥무관학교와 동쪽의 사관연성소는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 교육기관이 되었고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유명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새롭게 독립군의 연합부대로 편재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도 '서일'이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가장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더욱 가혹하였다. 더욱이 일제 말기에 발생한 '임오교변'은 만주지역에서 포교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종교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체포되고, 자금과 문서 등은 압수되고 불태워졌으며 체포된 인사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이어져 10명이 순도하는 등 대종교에 대한 탄압은 극에 치달았다. 다행히 2차 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압제는 끝났지만 대종교의 만주시대는 접어야 했다. 그리곤 36년 만의 환국이었지만 국내 환경도 대종교에 결코 녹녹치 않았다.
우선 국토의 분단은 하나의 민족을 강조해 오던 대종교로서는 뜻밖의 상황이었다. 더욱이 무분별한 외래문화의 수입은 민족정신에 대한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왔다. 우리 안방을 내어준 형세였다. 그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환국한 윤세복을 중심으로 대종교는 일치단결하여 부흥운동에 나섰다.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의 체계화를 위한 경전의 간행,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활동 그리고 사회참여 활동이었다.
그러나 대종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민족정기의 회복운동이었다. 이를 위해 대종교는 '개천절'과 '광복절' 등을 가장 민족적인 의식으로 치르고자 했다. 그리고 민족의 구심점으로서 단군을 추모하는 민족관 건립과 함께 단군영정을 봉안하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대종교의 노력으로 개천절이 국경일이 되고 단기(檀紀) 년호가 사용되었으며, 전국적으로는 단군 회복운동이 전개되는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결코 만족할만하지는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외세와 결탁한 지배 권력이었다. 그들은 단군보다도 외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외래 종교를 더욱 흠모하게 홍보하고 교육시켰다. 남산의 일제 신궁 자리에 단군민족관을 세우고자 했지만 외래 종교의 극렬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개천절보다 크리스마스를 더욱 성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민족보다는 시민을 강조하고, 우리 말과 글보다는 외국어를, 우리 역사보다는 서구 역사를 더욱 중요시하게 하였다.
환국한 대종교의 쇠락은 그대로 한국 민족주의의 조종이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민족주의가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일찍 민족을 버린 민족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