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었을거다. 진눈깨비가 유난히 불규칙적이고 산만스레 흩어 내리던 날. 하늘색은 회색과 흰색의 냉랭한 콘트라스트였다. 아침녁 동서울터미널에서 경기 북부로 향하는 버스 안은 창백했다. 신규발령. 예나 지금이나 이 네 글자 속에는 긴장과 어색, 서투름의 갖은 감정들이 스며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보통이 아니라던데, 조심조심하그라.’ 수화기 너머 부모님 말씀에 호기롭게 웃어보였지만, 사실 마른 침 넘어가는건 숨길 수가 없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치익’하고 버스 앞문이 열린다. 바깥 찬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길목에는 전방의 장병들이 바삐 오가고, 노래방이며 줄지어선 분식집이 옹기종기 있었다. 굳이 길을 물을 필요도 없이, ‘○○고등학교 1km’ 팻말이 한 눈에 찾아진다. 학교 교무실까지는 금새였다.
쭈뼛대며 교무실 문을 노크하고 나선 모든게 한순간이었다. 교사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우리 학교는 특수교육 전문가가 선생님 밖에 없어요.’라는, 교장선생님의 ‘공황’같은 격려까지 접수하고, 특수학급 교실 열쇠를 받기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마침내 특수학급 교실 문 앞. 거기 정물처럼 말이 없는 소년이 있었다. 나처럼 이 학교를 처음 찾은 신입생이었다. 전동 휠체어 위에 살포시 얹혀진. 민석이(가명)는 나를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휠체어가 꼭 끼어보일만큼 몸집이 큰 소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만히 멈춰선 채, 서로의 낯빛을 살폈다. 열일곱과 서른살.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세월이 흐른걸까. 얼마 전. 이 학교에서 민석이를 보살펴온 특수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석이 졸업식이었다. 다시 찾은 동네에는 익숙한 친밀감들이 그득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플랑카드 아래 와글와글한 교정. 저만치 민석이와 어머님이 서 있다. ‘민석아. 살빠졌네?’, ‘어머님 얼굴 좋아지셨어요!’ 선물꾸러미를 든 우리들 모두 상기된 얼굴빛이다. 아. 몇 년만의 졸업식인가. 선생님들은 소담하게 준비한 선물 꾸러미를 꺼내었다. 나는 휴대용 게임기를 꺼내어 놓았다. 민석이 얼굴이 환해진다. 게임을 좋아하던 아이다. 추억이 예민한 감각으로 마음을 쓸어내린다. 다들 말은 않았지만, 서정적인 어떤 감동이 마음에 그득했다.
민석이. 내 첫 제자인 이 아이는 ‘근이영양증' 환자였다. 통계상 5만명당 한명 발병한단다. 근육 단백질들이 차츰 지방화되어 스무살녁 어느 순간에는, 마침내 심장 근육까지 지방화되어 삶을 마치게 되고만다는. 세상에는 헤아리기 힘든, 많은 애틋한 사연이 있다지만, 근이영양증 환우들의 사연은 유독 서글프다. 그 시절, 내 마음을 가득채운 건, ‘내가 민석이의 졸업식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근심 같은 거였다. 상당수 근이영양증 환우들 삶이 학령기 이전에 끝남을 알기에. 내 첫 제자가 학교 대신 흰 병실에 가늘게 눕혀져 있는 모습을 보게될까, 나는 두려웠었다. 그래서였을거다. 이번 민석이의 졸업식이 단순히 제자 축하의 자리만은 아니었던게. 그건 내게 일종의 ‘인간 존재’에 관한 명징한 울림이요, 삶의 두터운 신앙적 의미를 은유(隱喩)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민석이의 건강은 딱히 좋아진게 없었다. 여전히 90kg 정도의 육중한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고, 팔을 일부 흔드는 동작 외에는 전동휠체어 기능에 온전히 의탁해 있었다. 우려만큼은 아니지만, 근육 지방화에 상당한 진행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소년 민석이는 고요했지만, 숨길 수 없는 영민함과 자존심을 단단히 품고 있었다. 오랜 장애가 없었더라면, 공부도 꽤 했을거다. 그런 민석이가 휠체어의 좁은 사각형 안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모습. 대변이 마려울 때는 아예 학교 등교도 주일날 교회 출석도 거부했던 녀석의 옹골찬 자존심란. 그 시절, 내게 경이(驚異)로 느껴진 또 한 사람이 바로 민석이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단단한 표정으로 민석이를 들어올렸다. 가정에선 육중한 자녀를 매일같이 목욕시키고, 대소변 처리했다. 그러면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까지 온전히 보살피는 그 억척스럽고 철근같은 단단함이란. 대체 어떤 '의문의 힘'이 그녀를 견인하는지, 부모인적 없는 내가 그 답을 알기란 어려웠다. 딱 한번, 그런 강인했던 여인께서 하염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민석이가 감기에 잘못 걸려, 어느 아침 몸이 돌덩이처럼 굳은 채 대형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긴급한 조치 후에, 어머님은 민석이 몸을 주무르며 응급실을 지켜야했다. 한편으로 치매환자인 시어머니를 집에 두고 온 위험천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어머님은 무작정 내게 전화했다. 병원으로 제발 와달라고. 난감했다. 수업과 학교에서의 공식적인 업무가 수북했다. 나는 정중히 난색을 표하려했지만, 이내 접었다. 수화기 너머 통곡 섞인 외침이 폐부를 찔렀다. “선생님. 제발 도와주세요."
더는 여지가 없었다. 학교에 급히 사정을 전하고, 아이가 입원한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 시간부터 민석이 어머님 대신, 나는 하루종일 병실에서 딱딱하게 굳은 아이 몸을 주물렀다. 퇴근시간이 지나자, 동료선생님들이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내 대신 아이를 주무르러 왔다. 그날 밤, 병원을 나서다가, 나는 어지러움에 휘청댔다. 어쩌면, 몸보다 근심에 더 고단했던 건지도. 긴 밤길, 이사야서의 말씀이 뇌릿 속에 떠올랐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인생의 애환을 설계하신 그 분의 본 뜻을 알 수가 없는 한 피조물은 쓸쓸한 밤길을 먹먹히 걸을 뿐이었다. 울음이 눈밑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이 아이의 '마음고생'을 지켜보다가, 겨울이 다 가던 어느 날, 나는 인사이동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이별은 만남의 순간만큼 서툴었다. 민석이 가족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이삿짐을 쌌던 날. 버스를 타고 터벅터벅 부임했던 나는, 이 시골을 떠날 때 작은 중고차 한 대와 늘어난 경력을 매어달고 있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다시 이 특별한 졸업식 날. 사람들의 시선 속에, 민석이가 졸업장을 받으러 강단에 오른다. 전동바퀴가 움직이는게 아니다. 민석이의 고매한 인생이 전진하는거다. 삶의 진지함과 가족애의 두터운 심층(深層)을 은유하는 듯한 풍경이다. 연단을 향하는 박수소리가 참 길다. 나도 박수소리에 힘을 보탠다.
분명 이 아이의 삶은, 이 땅의 평균적 삶보다 짧을거다. 향후 아이와 가족의 경제적 여건도 딱히 좋아지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런 일상의 통념적 가치들이, 우리네 삶을 빛내는 것이 아님을 안다. 세속적 성취가 삶의 척도일리도 없다. 기독 신자이신 어머님과 민석이 모두 그 진리를 알고 있을게다. 주께서 피조물에 허락하신 인생. 삶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빛내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아이의 삶이 보석처럼 빛을 내길. 운전대를 잡고 조용히 기도를 해본다. 혹 민석이의 시간이, 낡은 시골 방 안에서, 강아지를 돌보는게 대부분일지라도. 혹 병원 중환자실에서 흰 벽을 올려다보며 카셋트 테입의 성경 말씀을 듣는 일이 전부일지라도. 나는 소년의 삶이, 병실 바깥의 어떤 시시한 삶들보다 훨씬 온전하고 아름답길 기원한다.
귀가길. 마음 한구석이 미열(微熱)로 뜨듯하다. 잠시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겨울이 끝트막에 선 창밖 풍경을 바라 본다. 먼 손님같은 봄이 슬몃 서툰 온기를 꺼내는 듯한 2월이었다. /
첫댓글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귀한 나눔 감사해요.
특수교사의 삶이 어떨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세속적 성취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비록 보잘것 없는 모양으로, 별거없어 보이며 그러면서도 고단하고 애잔한 삶을 살아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앞으로도 신실하신 분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때로는 절망스러워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소망을 두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땅에 봄비같은 글이네요...감사해요~^^
늘 힘든 사람들의 삶을 항상 묵상하며 제게 주신 은혜를 감사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