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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세워져 698년부터 926년까지 만주, 연해주와 평안도, 함경도에 걸쳐 있던 왕조였다. 그러나, 발해의 주민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이룩한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해사에 대해서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견해가 다른 것은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이었는가, 고구려인들과 종족적 계통이 다른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발해사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나, 또한 이 문제를 뒤로 하고 이것을 연구한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즉, 역사의 주인공에 대한 인식없이 그들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족사적 계승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분야에 있어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의 견해는 각기 다르다. 한국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은 말갈을 고구려와 계통이 다르다고 간주하고, 발해는 바로 이들 말갈족이 세운 국가이고 그들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며, 러시아는 말갈국으로써의 발해라는 데에는 중국과 견해를 같이 하면서, 당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립국설을 주장한다.
남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민족사적 계승문제를 밝히는 부분에 상당한 비중이 두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을 모두 민족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주관적 연구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의 교류와 민족의 계승문제는 별개로 보아야 하고, 발해사에 대한 복원은 진실의 복원문제일 뿐이지, 타협의 산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현실에서는 평화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평화를 보는 잘못된 시각일 뿐, 그 진실의 복원작업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이야기다.
2. 발해 연구사
한국사에서 60년대와 70년대의 발해사 연구는 북한이 주도해 왔다. 특히, 62년에 내놓은 박시형의 논문은 지금에도 그 가치는 크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 신라사 위주의 신라중심적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첫째의 문제는 남북한이 서로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다. 중국이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던 '홀한주도독부'로 간주하고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의 문제는 북한이 남쪽의 통설인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후기신라'로 규정짓고 '발해와 후기신라'라 하면서 발해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 다르다. 먼저 발해사 논문이 서술되어 온 사학사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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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리대희, [발해의 력참로],{력사과학}, 1991-3
(47) 채태형, [발해남경남해부의 위치에 대하여],{력사과학}, 1991-3
(48) 김혁철, [실학자 홍석주의 발해력사관],{력사과학}, 1991-4
(49) 장국종, [발해본토안 말갈인의 분포상태],{력사과학}, 1991-4
(50) 한인덕, [김책시 동흥리 24개돌유적],{조선고고연구}, 1991-4
(51) 김성호, [발해와 후기신라의 관계],{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2) 김영성, [발해의 남변에 대하여],{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3) 김혁철, [실학자들의 발해력사관],{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4) 박시형,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5) 장국종, [발해의 주민구성],{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6) 장상렬, [발해의 건축],{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7) 조대일, [발해의 공예],{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8) 채태형, [[협계태씨족보]에 실린 발해사관계사료에 대하여],{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59) 현명호, [발해의 고구려와의 계승관계를 모호하게 한 별칭 [발해말갈]에 대하여],{발해사연구론문집(I)}, 1992
(60) 김종혁,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발해유적발굴에서 이룩된 성과],{조선고고연구}, 1992-1
(61) 채태형, [료동반도는 발해국의 령토],{력사과학}, 1992-1
(62) 김혁철, [실학자 리종휘의 발해력사관],{력사과학}, 1992-2
(63) 장국종, [발해의 [고려후국]의 존립과 그 수도에 대하여],{력사과학}, 1992-2
(64) 현명호, [발해를 배제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론]이 [삼국사기]에 정착된 경위],{력사과학}, 1992-2
(65) 김종혁?김광남, [화대군 금성리 무덤떼발굴보고],{조선고고연구}, 1992-2
(66) 김종혁, [가응산성 조사보고],{조선고고연구}, 1992-3
(67) 채태형, [[삼국사기]의 말갈관계 기사에 대하여],{력사과학}, 1992-3
(68) 김성호, [705년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국교관계수립],{력사과학}, 1992-4
(69) 류병홍, [발해유적에서 드러난 기와막새무늬에 대한 고찰],{조선고고연구}, 1992-4
(70) 한인덕, [성상리토성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93-1
북한의 발해사 연구에서 최초의 논문을 작성한 이는 박시형이다. 1910년생인 그는 1940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나와 1945년 10월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여, 1946년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가, 그 해 8월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직에 들어갔었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되자 김석형과 함께 북한 학계의 최고 명예직인 과학원 원사로 추대되었고, 뒤이어 과학원 산하 역사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어 역사학계를 지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최초 논문(1962)은 그뒤 단행본(1979)으로 완성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사학사 상 최초의 저서로 그 사학사적 위치는 확고하다. 더군다나 그 이후 이에 비견될만한 것이 우리 학계에서 나온 바도 없어 이것의 중요성은 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뒤 중국에서 나온 왕승례의 {발해간사}(1984) 등과 대립하게 되었고, 남쪽에서도 이 두가지가 다 소개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전자가 한국사적 입장에서 쓴 것이라면, 후자는 중국사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1980년 전반까지의 발해사 연구는 박시형의 무대였다고 할 수 있다. 문헌에서는 손영종의 것(1980)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박시형이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주영헌과 박진욱, 장상렬이 함께 하던 시기였다. 기록이 적은 발해사이기에 고고학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 만큼 고고학이 갖는 위치도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고고학에서 발해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도유호로부터였다. 북한의 고고학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는 그는 고고학 잡지의 효시인 1957년의 문화유산 창간호에서 고고학이 발해사의 복원에 기여해야 함을 독려하고, 발해 연구의 필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울러 그는 구체적으로 함경북도 화대군(구 명천군) 고분이 발해 유적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 최근 우리는 함경북도 화대군(구 명천군내)에서 허다한 석조분(石造墳)과 또 그밖의 고분들을 답사한 일이 있다. 아직 발굴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관계로 그 사이의 자헤한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우리가 받은 초보적인 인상은 그것이 발해(渤海)의 유적인 듯 하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발굴을 진행함에 따라 그 정체는 알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추측과 마찬가지로 정말 발해의 유적, 유물로 판명된다면 이는 실로 거대한 사변으로 될 것이다.기록에도 남아 있는 바와 같이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을 주로 하여 생겨난 나라로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하던 나라였다. 일찌기 그 유물중의 와당(瓦當)이나 토불(土佛)을 볼 때 나는 직관적으로 먼저 그것이 고구려의 유물에 흡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일본인 어용학자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나라의 력사를 론하는 데서 발해는 빼여 버리는 것이 상투이다. 이제 화대의 유적을 발굴, 조사함에 따라 발해에 대한 우리의 태도은 달라지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위와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화대군에 대한 발굴은 곧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던 것 같다. 그의 관심이 원시문화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함북 화대군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은 1986년과 1992년에야 그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 발해 유적임도 증명되었다. 이로써 발해사의 복원에 있어 고고학 분야의 역할을 강조하였던 도유호의 지적은 사학사적으로 의미있는 발언이었음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발해 고고학이 결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터(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를 중국과 공동발굴하고 부터였다고(1966)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있었기에 북한 단독으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이후 이것은 북한 발해 고고학의 큰 지표가 되었다. 지금 같아서는 한국이나 북한 어느 쪽도 중국과 이와 같은 공동발굴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워낙 중국과 한국이 발해의 민족사적 계승 관계를 달리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1960년대에 그와 같이 양국이 공동발굴을 하였던 것은 적어도 당시의 중국학계가 보는 발해사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지 않았는가 생각되게 한다.
박시형이 제시한 발해사의 기본적인 연구방향은 주영헌 등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조중공동발굴보고서를 시발로 {발해문화}(1971)에서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전무했다. 1934년에 김육불이 집대성한 {발해국지장편}과 {동북통사}가 가장 대표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중국사 중심의 발해사 연구는 '문화혁명'이 지나가고 79년부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적극화되었다. 아울러 남쪽에서의 발해사 연구도 1980년대 이전에는 별무했다. 따라서, 박시형과 주영헌의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단지, 당시의 발해사 연구는 고구려사에 부수된 한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본격적이지 않았던 한계가 있었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몇년간의 공백이 있다가, 1986년부터 다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변화는 이미 1970년대말 '사회역사원리'로써의 주체사상이 역사학에 반영되면서 일어났다. 특히,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발해는 신라보다 우위에 있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 발간된 {조선전사}는 남쪽의 일반론인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후기신라?로 정리되었고, 그 순서에 있어서도 ?발해와 후기신라?라 하여 발해를 앞세웠는가 하면, 발해의 건국을 ?창건?이라 하여 그 비중을 높이었다. 역사상 ?창건?이란 표현은 북한 정권에서만이 사용되어 오던 것이었다. 발해사가 북한에서 ?창건?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북한 학계는 이미 발해를 어느 왕조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 중심의 계승의식을 갖고 있는 남한과의 차별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발해사의 이러한 위상 변화에도 불구하고, 1980년도까지의 이것이 북한 역사학의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발해사가 북한 역사학계의 중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한 시기는 90년부터였다. 1990년부터 1993년 초까지 약 3년간에 무려 39편의 논저가 발표되었는데, 이 숫자는 발해사 연구가 시작되던 1962년부터 지금까지 발표된 70편의 약 56퍼센트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이것은 이미 비중있는 단행본이 1979년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시기에 따른 발해사 연구를 숫자만으로 비교할 수도 없으나, 아무튼, 지금도 북한 역사학과 고고학의 대표적 잡지인 {력사과학}과 {조선고고연구}가 1990년부터 매번 발해사 논문을 싣고 있는 것은 북한 역사학의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90년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제도적 배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인 전영률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여기에 관심을 갖고 직접 지원을 하고 있으며, 고고연구소의 김종혁 소장도 발해 유적 발굴에 직접 참여하는 등 사회과학원의 두 연구소가 발해사 연구에 전념하다시피 하고 있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역사연구소 발해사 연구실에 장국종을 영입하여 이에 대한 연구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장국종은 본래 휘문고 출신의 월북사학자로써 조선시대 학자이다. 그의 업적 중에는 남한 학계가 주목하지 못하던 때에 쓴 ?대동법?에 관한 연구 등 조선후기 상공업사에 관한 것들이 많다. 또한 장국종 이외에도 채태형 같은 이도 다른 분야의 학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 북한에서 발해에 관한 논문을 내놓고 있는 학자로는 문헌쪽에 장국종 등 약 8명이, 그리고 고고학쪽에서는 김종혁 등 5명 등 모두 13명 정도이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 발해사 논문을 쓴 사람은 모두가 약 370명선인데, 이 중 중국이 19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 일본이 90명, 그리고 남북한이 77명이고 러시아 등 기타가 13명 정도이다. 77명의 남북한도 분석해 보면 남한이 52명이고 북한이 25명이다. 논문 편수로는 남한이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지금 활동하고 있는 발해사 연구자는 오히려 북한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남한의 발해사 연구자는 전임연구자가 서너명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연구 배경
북한의 발해사 논문에서 학문외적 특징을 한가지 들자면, 모든 논문들이 앞세우는 교시문 중에 김정일의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실력자 김정일이 문화부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만큼 발해사가 그들이 새롭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들은 학자간의 이론이 거의 없다. 시간적으로 견해의 변화가 있어 온 것을 제외하고는 같은 시기의 의견차는 없다. 공동 연구가 발해사에도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논문의 주가 필자명은 잡지나 책의 쪽수만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분위기는 발해사 이외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나 발해사는 더욱 하나의 의견으로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발해사가 갖는 민족사적 특수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남북한을 막론하고, 발해의 고구려계승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다. 단지, 그 세부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논리적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북한은 나름대로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이 발해사 연구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는 곳이 과거 발해의 일부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반면에 남한이 북한만큼 발해사 연구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남한이 발해의 옛 땅이 아니라는 원인도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의 발해사 연구는 남북한을 가리지 않는다. 민족사에 대한 인식이 시공을 떠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이로써 현대사의 끊어진 대화도 이룰 수 있다는 데에 발해사 연구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이것은 작년 비록 제 삼국인 러시아에서였지만, 북한과의 일정한 거리에서 공동발굴하였던 것이 우리 국민들의 큰 관심을 일으켰던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또한 남북한이 발해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과의 학문적 대립에서 오는 자극도 무시될 수 없을 것 같다. 즉,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으로써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하는 것이 남북한의 공통된 주장인데 반해, 중국은 발해가 말갈이 세운 국가로써 당의 지방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사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남북한에서 발해사에 관심을 갖게 하였던 외부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발해가 어떠한 국가였는가라는 학문적 입장보다 이와 같은 민족사적 이해관계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원인은 이미 이 때부터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발해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그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발해의 일부였고, 발해의 민족사적 계승관계에 얽힌 문제를 밝히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늘날 그들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즉, 한국사가 신라중심적으로 되어 온 것을 비판하고, 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사적 맥을 오늘날 그들 정권에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조선-고구려-발해 중심의 연구가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핵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사에서 발해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첫번째 작업은 신라의 삼국통일론을 부정하고 발해사의 위치를 높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생각은 역사연구소 소장 전영률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2. ① 신라 통치배들이 외세를 끌어 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의 북쪽 땅은 당나라의 강점 밑에 놓여 있었고 신라는 조선판도의 대동강 이남만 병합하였을 뿐이다. 고구려의 옛 땅에는 또한 그 유민들이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의 장군인 대조영의 지휘 밑에 발해국(698-926)을 세웠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북쪽에 발해, 남쪽에 신라가 서로 병립한 국면이 조성되었으며 이런 국면은 근 230년간 계속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통일국가가 아니라 국토의 남쪽 지역을 차지한 조선의 한 개 지역왕조에 지나지 않았으며 ②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는 고려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③ (신라를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발해를 조선력사에서 떼내려는 것이며 ?신라중심설?과 ?신라정통설?을 내세움으로써 남조선 괴뢰들의 매국배족적인 ?북진통일론?에 그 어떤 력사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어용행위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우선 위의 글 ①, ②는 사실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신라가 발해를 건국한 이후의 신라는 ?조선의 한 개 지역왕조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과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는 신라가 아닌 고려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글 ③은 남쪽의 ?통일신라?설을 현실적 판단에 의해 비판하는 해석의 부분이다.
먼저 북한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히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우선 발해사의 입장에서 글 ①은 필자도 동의한다. 적어도 발해가 건국되고 난 이후의 신라는 삼국통일의 신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발해건국 이후의 신라는 남북국의 하나인 (대)신라일 뿐이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이 사실로써 밝혀진 이상 고구려까지를 통합한 것으로 여기는 ?통일신라?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 최초의 통일왕조를 보는 시각은 다르다. 신라는 그 동기와 방법이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정치적 통일을 이룬 최초의 왕조이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과에 대한 사실과 과정에 대한 비판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698년 발해가 건국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 이후 30년만의 일이었고, 이동안은 한국사에서 신라왕조밖에 없었다. 따라서 적어도 신라에 의한 고구려멸망에서부터 발해가 건국되는 시점까지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신라에 의한 백제의 통합과 고구려왕실의 멸망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사 최초의 통일왕조를 고려로 보는 것은 문제이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조인데, 후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삼국이 아니라, 남국 신라의 후삼국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통일을 민족사 최초의 통일로 여긴다면, 이것은 발해사를 제외한 또 다른 신라중심의 해석으로밖에 볼 수 없다. 후삼국시대도 발해와 함께 하였던 엄연한 남북국시대였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북한의 발해사 위주의 역사인식은 북한이 옛 발해땅의 일부에 있다는 의미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북한 정권의 정통성론과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국가의 '창건'이란 표현을 발해와 북한 정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발해의 창건은 곧 북한정권의 창건과 비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고구려-발해의 계승과 발해의 창건이 갖는 의미를 단순히 그들이 발해땅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정권의 정통성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와 대립적인 자세는 남한의 신라중심적 '통일신라'론에서도 일정하게 찾아지는 것이어서 발해사를 둘러싼 분단사학의 한계가 여기에서도 찾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북한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글 ①, ②가 아니라 글 ③이다. 현실적 이해관계가 신라의 통일을 보는 시각을 다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쪽의 통일부정론 등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다. 북쪽의 주장이 현실 정치의 배려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은 그들의 남북국사에 대한 인식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는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고 신라의 삼국 통일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다가, 1962년판 {조선통사}에서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의 발해국의 성립"으로 인식의 변화를 보여 이것이 오늘날 북쪽 학계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보는 북쪽 학계의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단순히 연구 결과에 의한 서술의 변화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논문의 여러 군데에서 확인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문에서도 보듯이, 신라사에 대한 시각의 변화도 당의 실천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의 신라사에 대한 인식은 전에 없던 견해가 새롭게 창출된 것은 아니다. 특히, 신라의 통일부정은 이미 신채호가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견해가 신채호의 것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북한 정권의 실천 과업의 이론적 기저가 되고 있는 '주체의 사회역사원리'가 모든 역사관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적 입장에서라면, 신라사에 대한 북한 학계의 인식은 오히려 초기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의 그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지만, 남북국시대의 올바른 이해라는 측면에서 북한이 민족주의 사학의 긍정적인 부분을 적극 수용하고 발해사적 입장에서 신라사를 보려한 한 부분은 남한도 인정하여야 한다.
또한 글 ③과 같은 북한의 비판에 대해서도 남쪽 학계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통일신라'관을 계속 견지하려고 하는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발해 건국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에서의 신라사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아울러 분단사학의 왜곡된 통일관과 신라의 삼국통일관이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주로 관변쪽의 주장들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역사학쪽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비판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남한에서도 인정되어야 할 부분은 ?통일신라론?이 결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사실의 문제에서 접근되었다고만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나 후삼국 통일의 연구만을 통해서 오늘날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은 역사의 질적 발전 원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힘의 분열과 통합이라는 현실적이고 산술적 판단에 기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입장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에 의미를 더한다면 한국사의 방향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다만 삼국통일에 대한 연구에서 모색해야 할 점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후삼국의 통일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복원하고, 그 결과를 보편적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아무튼 역사학에서 나타나는 분단의 한계는 그들의 논문형식에서도 적나나하다. 즉, 중국과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주를 붙여 소개?비판도 하지만, 1945년 이후 남한 학자들의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4. 연구 동향
북한의 발해사 연구가 보다 적극화될 수 있는 배경은 그들 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이 있으나, 모두를 그렇게 여길 수 없다. 학문적인 면에서도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결코 간과할 수 없을만큼 발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밝히는 부분은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단순히 정치적 주체사상의 한 단면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민족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수주의적인 태도로 매도할 수도 없을 것 같다.
(1) 주민구성문제
발해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말갈인들의 국가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도 여기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발해사연구실로 옮겨온 장국종이 처음 낸 논문이 바로 주민구성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도 그들이 주민구성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없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시라토리[白鳥庫吉]가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언급한 이래 믿어지고 있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과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러시아는 지배와 피지배 주민을 막론하고 모두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의 발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특히 한국과 중국의 견해차는 심하다.
한국도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한 생각이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1988년 필자는 종족계통과 정치?군사적 관계로 보아 발해의 주민 모두는 대부분 고구려유민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북한도 1990년 장국종의 글부터 필자와 같은 입장으로 주민구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바뀌어져 있다.
북한은 초기에 지배층의 고구려유민과 피지배층의 말갈설을 수용하고 있었다. 즉, 발해 주민의 10분의 3내지 4는 고구려유민이었고, 다수는 말갈이었다는 견해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박시형의 다음 글로 확인할 수 있다.
3. 발해국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종족-신분, 환언하면 ?량반?에 해당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이였는데, 그들은 중앙은 물론이요 지방 관직까지 거의 독점하고 있었고 군대 복무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이와 관련하여 발해국에서의 고구려인과 말갈인과의 수적 비중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상기와 같은 종족-신분적 관계가 성립되기 위하여는 고구려인이 지나치게 많을 수도 없을 것이다. 원래 고구려인이 주민중에서 지나치게 적었다면 말갈인과의 력량 대비상 그러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을 것이요, 또 상기 류취국사의 표현도 그렇게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단순히 ?말갈인이 많고 토인은 적다?는 표현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고구려인이 거의 반반으로 될 만큼 많은 수를 차지할 수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량자 간의 수적 대비를 정확히 따지기는 곤난하나 구태여 천착을 한다면 고구려인은 주민중에서 대략 10분의 3-4정도는 차지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이 수적 관계는 지방과 력사적 시기에 따라서 각이할 수 있었겠지마는, 적어도 일본사절들이 주로 래왕하던 연도 즉 그의 소위 동경 룡원부 일본도(東京龍原府日本道)와 수도가 있던 상경룡천부(上京龍泉府)지방, 다시 말하면 예로부터 속말말갈의 거주지로 되여 있던 지방들은 이에 가까운 형편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로 부터 서쪽 료하 방면 즉 옛 고구려의 중요지역으로 나올수록 고구려인의 비중은 더 많아 졌을 것이다. 또 발해국은 동쪽으로 원 속말말갈이 아닌 다른 말갈 제 부족을 거의 다 완전 통합하였거나 예속 관계에 두었기 때문에 이 지방들은 거의 전부 말갈인들의 주지역으로 되였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중략) 발해는 원 고구려인의 국가였다. 다만 이 관계에서 원 고구려와 발해의 차이를 말한다면 발해에서는 주민중에서 말갈인들이 원 고구려 시기보다 량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는 그것 뿐이다. 그것은 두개 왕조의 령토를 비교할때에 큰 차이는 없지마는 원 고구려 령토가 서방 료하 방면과, 남방 신라 방면에서 다소 줄고 동방 말갈족들의 거주지 방면에서 상당히 팽창하였으며 또 주민으로 볼 때에는 3국의 통합 전쟁 과정에 적지 않은 고구려인들이 신라와 서방으로 이주하고 그대신 동방에서 말갈인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하였다는 거기서 오는 것이다.
박시형이 발해의 주민구성문제에서 공헌한 것은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보다 확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를 통해 발해국의 창건자가 말갈인이 아닌 고구려인이었음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즉, 727년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 스스로를 ?고(구)려국왕? 내지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빼어난 견해로써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서 보이는 ?천손(天孫)? 사상이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발해의 고구려계승과 독자성을 보다 확실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발해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왕족인 대씨를 비롯해서 귀족들 모두는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유취국사(類聚國史)}의 수령(首領)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주민구성을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수령은 발해의 부, 주, 현 지방들에 상당한 수로 존재하였고 그들의 대부분은 곧 고구려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발해의 군사제도에 있어서 이들 수령들은 특권적인 사람들로 말갈(군)을 령도?지휘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가 말갈이 고구려인보다 많았다는 점에서 출발한 것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일본인들의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크게 뛰어 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 고씨와 발해의 대씨는 동성이씨(同姓異氏)였다고 하여(1992) 지배층의 순환마저도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은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 발해로의 정치적 순환이었으며, 대조영의 아버지는 고구려시대에 송화강유역의 지방 장관에 있던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써 결코 중앙귀족도 아니었던 지방출신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같은 생각은 1990년 장국종의 글에서 변화되었다. 다수의 고구려유민이 발해의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관점은 발해의 피지배주민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4. 발해총인구의 압도적부분을 차지한것은 고구려계통의 발해사람(고구려주민)들이었으며 말갈사람과 그밖의 종족은 매우 적었다. 그 전날 고구려령토였던 발해의 기본령역(본토라고도 함)안에 나라의 총인구의 대부분이 살고있었으며 말갈인등이 주로 사는 변방(동북쪽변방의 북위 45-46도이북지방)은 면적이 매우 넓었으나 기후와 생활조건 등이 불리하여 인구밀도가 희박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기 내외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도하여 발해국의 기본 주민이 마치도 말갈사람이였던 것처럼 여기는 견해들이 류포되어 있었다.(중략)
지난 시기 발해의 주민구성이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는것을 밝힌 학자들가운데는 통치층주민의 족속을 따지는데만 주목을 돌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통치층도 발해주민에 속한 것인만큼 그 계승관계를 밝히는것도 중요한 문제로 나서며 그것은 문제해명에서 일보전진으로 된다. 지난날 발해의 통치층마저도 고구려의 통치층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조건에서 그 문제를 밝히는것도 발해의 주민구성을 해명하려는데서 일정한 기여를 한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써는 발해주민구성의 계승문제를 전면적으로 해명하였다고 볼수 없다. 주민구성의 계승문제를 전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지배층주민과 함께 피지배층주민구성의 계승문제까지 밝혀야 할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고구려유민계통의 발해인과 말갈인의 비중과 호상관계에 대해서도 밝혀야만 주민구성의 계승문제가 전면적으로 해명되였다고 볼수 있다.
위 장국종의 견해는 기존의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필자의 생각과 일정하게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말갈을 중국인들이 동북방 주민들의 범칭이자 비칭인 타칭으로 보고, 그 종족계통을 다원적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위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발해의 주민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말갈이다. 그러나, 도대체 말갈이 어떤 종족이었는가 하는 점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말갈은 {수서(隋書)}에 따라 그들이 7부 말갈로 나눈다. 또한 그 종족계통도 숙신[秦이전]→읍루[漢]→물길[後魏]→말갈[隋?唐]로 변해 왔다는 일원론이 일반적이다. 장국종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말갈의 일원론적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갈에 대한 연구사를 비롯한 종족계통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말갈족의 분포에 관심을 갖고, 만주의 동북지역만이 말갈족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말갈의 다원계통설에서 볼 때,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이란 동북지역의 흑수말갈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남하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나, 이것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소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수서}만으로 보아서는 송화강유역에 속말말갈이 많았고, 백두산유역에는 백산말갈이 많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주로 고구려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단지, 그곳 주민들은 고구려시대에는 피지배주민들로써 문화적으로 뒤져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말갈인을 자처했던 것도 아니었다. 말갈이란 오직 당나라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부르던 타칭이었다. 그들은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인임을 자처할 정도로 고구려계승의식이 강했다.
장국종이 발해본토에 고구려인들이 더 많았고 (흑수)말갈인들이 희박했다고 하는 지적은 옳으나, 이러한 주장은 말갈이 갖는 기록상의 문제 제기로부터 나왔어야 했다.
북한의 이러한 말갈에 대한 생각은 {구당서},[북적열전(北狄列傳)]의 항목이름으로 적혀 있는 ?발해말갈?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박시형은 당나라가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말갈? 또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은 당나라 사람들의 침략에 대한 집요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당나라는 ?자국의 수십, 수백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방대한 재부를 탕진하여 고구려국을 멸망시켜 그 령토를 완전강점하려?다가 그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고구려인들에 의한 발해가 건국되자, 이러한 사실을 자국민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어 고구려의 발해를 말갈의 발해라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시형의 1992년 글에서는 말갈이 고구려인보다 많았다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1962년 글에서 그는 발해를 굳이 ?발해말갈?이라고 한 이유는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고구려인 보다 말갈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고, 고구려를 멸시하여 ?말갈?로 대치하여 썼던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발해말갈?이라고 하는 기록이 말갈의 숫자를 반영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이것이 발해가 말갈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주도권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인이었다는 전제를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시형도 그의 이러한 주장에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 같으며, 이와 같은 역할을 장국종이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유민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당서}에서 발해를 가르키는 이른바 별칭 ?발해말갈?에 대한 북한의 적극적인 견해는 현명호에 의해 체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즉, 그는 이것의 사용시기, 사용범위, 발해말갈과 말갈의 진상, 이것의 자료적 유래 등을 비교적 소상히 논증하고 있다. 발해말갈이라는 용어는 발해 1대 고왕 대조영기(698-718)와 2대 무왕 대무예기(719-736)에 쓰여지던 것이라고 하고, 그 사용범위도 당나라 사람들끼리 또는 그들을 ?추종한 신라통치자들과의 사이에서나 통용되였지 그 당사자인 발해를 대상하여서는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발해말갈?이라는 별칭은 당나라가 발해를 적대시할 때 사용하던 용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박시형의 생각과 일치한다.
(2) 지리 고증
북한의 지리 고증의 배경에 대해서는 손영종이 잘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는 ?력사적 사건, 현상들이 일어났던 장소문제를 정확히 해명하는 것은 인민들의 투쟁무대, 활동무대를 밝히는것으로서 력사적사실들을 바로 평가함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들은 발해의 서쪽과 남쪽 경계, 그리고 남경남해부와 동경용원부 등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발해의 서변과 남변의 경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이러한 것은 발해의 강대성을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도 하나, 이것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발해의 서쪽 변경에 대한 연구는 북한만이 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손영종의 1980년 논문부터가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요동반도는 7세기말이나 8세기초부터 이미 발해땅에 포괄되었으며 결코 당나라의 땅이거나 거란족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발해의 서변에 대해서는 당나라 연구에서 일부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당사에서의 요동은 한결같이 발해가 아닌 당이나 그 기미주로 생각되어 왔다. 즉, 일제의 야나이 와다루[箭內瓦]는 8-9세기에도 요동이 당나라 땅이었다고 하였는가 하면, 김육불(金毓?)은 당의 기미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중국측의 역사지도에 그대로 반영되고, 이를 따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 견해는 당나라가 요동을 포함해서, 평안남북도 서해연안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손영종은 926년경 발해가 거란과 싸울 때를 보거나, 732년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요동이 발해의 땅이 아니고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 직후에 안동도호부를 옮겨갈 정도로 요동반도에서 세력이 약하였거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영종의 생각은 박시형의 글에서 보다 강화한 것이다. 박시형은 처음부터 요동을 발해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는 본래 {발해사}(1979)에서 압록강 하구까지 발해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부분을 이루고 있던 요동과 그 서남쪽으로 연결된 요동반도는 발해에서 계승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출판된 {조선전사}에서는 ?발해건국이후 이 지역은 발해령토안에 포괄되였다?고 하면서, 박시형이 연해주로 비정하던 안원부(安遠府)의 위치를 요동으로 수정하기도 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손영종(1980)은 이보다 체계적으로 요동의 발해 영역설을 논증하였고, 채태형(1992)이 이에 가세하고 있다.
발해의 서변과 관련된 것은 이른바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설이다. 즉, 소고구려국이 발해와 당사이에 있었다는 히노[日野開三郞]의 생각은 중국측 기록으로만 볼 것 같으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나라가 발해건국과 함께 발해 견제와 고구려유민의 부흥을 막기 위해 친당적 소고구려를 건국하게 하였고, 이들은 일정하게 자주적 외교활동도 하였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699년에 보장왕(寶臧王)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다른 고구려유민들을 통치케하였고, 그 이후 당의 기록에서 고구려(고려)가 등장한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698년에 이미 안동도호부가 없어진 상황이었기에 고덕무는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게 된 셈이었고, 이른바 친당적 ?소고구려?가 발해와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노태돈은 소고구려를 인정하면서도, 그 건국시기가 고덕무의 안동도독 임명시기가 아니라, 당에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나고 안 이후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북한의 장국종은 ?소고구려?를 ?고려후국?이라 표현하고, 고덕무가 다스리던 지역은 없었으며, ?고려후국?의 중심지는 평남의 성천(成川)과 평북의 신의주(新義州)였다고 하며, 후루하타[古畑徹]는 고구려유민들의 요동거주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이것의 국가적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아무튼, 소고구려국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여기서의 한가지 공통되는 견해는 적어도 요동반도는 당시에 당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고구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당의 기미주로 생각하여 당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손영종도 ?고려후국?과 같은 ?고려국?의 존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곳의 위치는 요동반도 남단과 평안북도 일대였다는 것이다. 요동반도의 발해 서변설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는 발해 건국 초창기에 이미 발해는 요동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한다. 발해가 고구려 본토를 완전히 수복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손영종의 생각은 장국종이 내놓은 고려후국의 성천과 신의주설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발해의 남변에 대한 연구는 북한에서 처음 나왔다. 이에 대해서 남한과 일본은 신라의 북변 경영과 니하의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일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발해사의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김영성(1992)이 처음이다. 김영성의 글이 기록의 한계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견해를 크게 보완?수정한 것은 아니나, 발해사의 입장에서 양국의 국경을 전반적으로 획정해 보려 하였다는 것은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발해 남변을 서부와 중부 그리고 동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서부는 신라의 군현 설치기록에 근거하여 신라의 서북변을 추정하고, 군현설치 한계의 북쪽이 곧 발해 영역이었다고 추정하였다. 그 결론은 ?발해는 대동강을 기본계선으로 하여 그 북쪽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후기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지역(재령, 해주를 제외한 황해도 서쪽지역)은 발해의 후국인 후고구려국[필자:소고구려]의 강한 영향하에 있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중부는 ?수안, 곡산 등지를 경계로 하여 후기신라와 접경하고 있었으며, 강동, 양덕, 성천 이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부는 양국이 니하(泥河)를 경계로 하였다고 하기에 니하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그 경계가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는 니하를 강릉의 연곡천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렇다면, 발해의 동부 남변은 멀리는 강릉까지 미쳤던 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니하를 강릉 근방으로 보았던 견해는 이미 서병국에 의해 제기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와의 주 경계는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함남의 원산과 덕원(새로 편제된 강원도)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발해의 두번째 수도로 알려진 중경현덕부에 대해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첫 도읍지인 구국(舊國)과 중경이 같은 곳이라는 정약용 설을 비롯해서,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토리야마[鳥山喜一] 설 등이 있다. 북한은 전자를 지지하며, 그 위치도 첫 도읍지인 구국인 돈화 오동성을 나중에 중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경현덕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후자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1971년의 하남둔고분과 1980년의 정효공주묘의 발굴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북한의 동경용원부의 위치 비정은 매우 독특하다. 지금까지 토리야마[鳥山喜一]이래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동경용원부의 길림성 훈춘설을 부정하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설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태형은 팔련성이 동경용원부가 아니었음을 네가지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요사}[지리지]에 동경용원부가 돌로 쌓은 20리의 성이었다고 하는데 팔련성은 흙성이며 그 둘레도 2,800미터 즉, 7리밖에 안된다는 점, 둘째는, {신당서} [발해전]에 동경용원부는 ?동남으로 바다에 면?했다고 하는데 팔련성은 바다로부터 약 200리 가량이 떨어졌다는, 세째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 정천군사이에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의 시발역은 최북단의 덕원이 아니라 강릉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 네째는 발해와 일본의 교섭으로 볼 때 겨울철에도 사신들이 오고 갔는데, 훈춘의 항구 역할을 하였던 모구위(현 러시아 포시예트)는 겨울철에 어는 항구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동경용원부의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부거에는 무엇보다 고구려, 발해시기의 성터가 있는데 그것은 흙성이 아니라, 돌성이라는 점, 둘째 그곳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면해 있다는 점, 세째 그곳은 얼지 않는 항구인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는 점, 네째 조선시대 역참제도를 중심으로 볼 때, 그곳은 강릉으로부터 39개의 역이 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채태형도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지만, 동경용원부의 청진설은 아직 가설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오경 터 중에서 보다 확실히 입증된 곳은 남경남해부이다. 종래 남경남해부는 정약용이래 함경남도 함흥설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남경남해부는 함남 북청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먼저 북청은 삼수, 갑산 지방과 그 이북지역을 통하는 군사,교통,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그렇고, 문헌적으로는 {북청도호부신증읍지}와 {증보문헌비고}를 통해서도 확인되며, 최근 그곳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청해토성(북청토성) 안에서 관청터가 발견되었고, 그 서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절터(신포시 오매리)가 발견되었는가 하면, 청해토성에서 동북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평리에 큰 무덤떼가 있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대외 관계
발해의 대외 관계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 및 돌궐, 거란 등과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대외 관계에 관한 본격적인 북한의 발해사 논문은 적다. 다만, 박시형의 처음 글(1962)과 {발해사}(1979)에 개설적으로 쓰다가, 박영해가 1987년에 비교적 자세한 대외관계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최근(1992)에는 김성호가 이에 가세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관심을 갖게 된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박시형의 개설적인 글 이외에서는 찾아 보지 못하다가, 김성호의 글부터 이에 대한 본격적이 관심이 표명되고 있다.
박영해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1) 당과의 국교 개시기, 2) 당나라의 흑수주설치 기도와 발해의 등주공격, 3) 북중국의 할거적인 봉건세력(치청번진)과의 관계, 4) 당과의 국교 정상화로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관계는 1) 사신교환과 국교의 목적, 2) 일본과의 경제교류, 일본에 중 문화적 영향, 그리고 거란과의 관계는 약술하고 있다.
박영해의 대외관계 논문은 신라와의 관계는 당과 거란과의 관계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언급되었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발해의 신라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늦었던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관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한 경향은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발해와 신라는 대립적이었다는 개설서적인 견해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양국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신라와의 관계사는 1956년판 {조선통사}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양국이 계속 평화상태를 유지하였다고 보았고, 이로써 양국은 왕래가 빈번했으리라는 것이다. 이어 박시형의 이러한 서술을 보다 적극화하여 양국의 교섭이 {삼국사기}보다 더 빈번했을 것이라고 하고,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의로 발해를 말살하려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남기게 된 ?실책?의 소산이라 하고, ?당시 동방의 국제정세가 어떻게 되여 있었던지 간에 적어도 이백수십년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족의 두 나라가 이와 같이 몰교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도 하여 교섭이 빈번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발해사}(1979)는 {삼국사기} 보다는 좀더 왕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동족인 두 나라가 수백년간 내왕이 매우 적었다고 하고, 그 이유는 전적으로 7세기 중엽 이후 심한 사대주의?외세의존 정책에 매달린 신라봉건 통치계급들의 죄악의 결과라고 하였다. 대립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양국의 관계는 매우 빈번했던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장상렬은 발해의 건축이 근본적으로는 고구려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신라건축과의 공통점도 있음을 밝혀 양국의 교섭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발해 건축에 통합신라 건축의 공통성도나타나는데, 성시와 건축계획, 돌쓰는 솜씨, 자[尺]와 건축부재 등이 그것이며, 이들을 살펴보면 양국의 기술 발전 수준이 대등하였으며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고고학개요}에서도 이어져 ?그들은 언어와 풍습이 같은 한겨레로서 화목하게 살았으며 접촉과 교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같은 문화를 이어 받은 사정과 함께 두나라 문화의 공통성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양국의 교섭 사실은 기록상으로는 발해와 신라양국간에 신라도(新羅道)가 있었다는 {신당서} 기록을 포함해서, 신라의 정천군으로부터 발해의 책성(柵城)까지에 걸쳐 39개의 역이 있었다는 가탐의 {고금군국지}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는 장상렬의 지적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최근 러시아에서 발굴된 봉황이 있는 기와무늬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입증이 되었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기록은 {협계태씨족보}이다. 여기에는 발해와 신라의 관계에 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 무왕 19년 봄 2월에 발해 수군이 출동하여 신라군사와 합세하여 일본병선 300척을 물리쳤다고 하며, 발해 원왕(元王)[大虔晃] 8년에 황룡사 탑이 무너졌다고 발해에 알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본기)가 성덕왕 30년(731)과 경문왕 8년(868)에 일본병선이 침입했다는 내용과 황룡사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에 대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이것에 근거하여 김성호는 남북국사에서 신라는 발해를 '섬기는' 입장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앞으로 이 귀한 족보의 사료적 가치는 다시 한번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고고학적 성과
문헌에서 복원할 수 없는 부분을 고고학이 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다. 발해 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198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확인된 고고 유적은 다음과 같다.
① 평지성:북청군 북청토성(청해토성,토성리토성), 회령군 인계리토성, 김책시 성상리토성 ② 산성: 어랑군 지방리토성?장연산성?남증산성, 함흥시 덕산산성(덕산동 평산성), 회령군 운두산성, 북청군 평리산성?룡전산성, 단천시 화장리 가응산성 ③ 강안(江岸) 보루: 어랑천 및 명간천 유역의 강미봉보루?장승목보루?노루목보루?석양대보루?귀암대보루?팔경대보루?안교동보루?, 신포시 하천산보루 ④ 차단성: 어랑군 새덕차단성?지방리 차단성 ⑤ 건물터: 북청토성 내의 집자리들, 개심사터, 청진시 송평구역 및 어랑군 회문리 24개석, 김책시 동흥리 24개석, 신포시 오매리 절골 및 금산건축지 ⑥ 무덤:함남 리원군?북청군?신포시?흥원군, 함북 회령군?청진시?화대군 지역의 정문리 하평리 자가리 금성리 등의 대규모 고분군
이곳들이 발해유적이라는 사실은 발해문화의 특징인 손끝무늬를 한 기와나 발해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릇들이 이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안보루는 적들이 강을 건느거나 강을 따라 상륙할 수 있는 요충지에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이런 성은 대체로 토성 혹은 토석혼축성이며 그 형태는 장방형으로 쌓은 것, 등고선을 따라 쌓은 것 등이 있고 때로는 2-3중으로 쌓은 것도 있으며, 차단성은 적들이 통과할 수 있는 골짜기나 큰 길을 차단하는데 유리하도록 쌓은 방어시설을 말한다. 이러한 것은 주로 교통 군사적 목적에서 쌓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이 생기게 된 목적은 위와 같이 교통?군사적인 것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발해의 가상 적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야 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없으나, 생각키로 내부적으로는 지방행정의 정비라는 치안의 문제와 함께 외부적으로는 신라와 일본 등에 대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언제 생겼는지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 연대를 짐작할 만한 정확한 명문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성상리 토성이나 가응산성과 같이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있어왔던 것들이 있어 이것들이 고구려 산성을 개조 발전시킨 것이라는 정도밖에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북한의 발해 고고학도 역시 발해의 고구려계승성을 밝히는 것에 그 촛점이 모아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여러 증거들로 볼 때에,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고구려적인 요소를 더 확인하고 있다는 데에 그 성과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상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 가운데 가장 변하지 않고 보수성이 강한 것으로는 역시 무덤과 집자리 등의 건축방법을 꼽을 수 있다. 북한에서 발굴된 무덤떼 중에는 전통적으로 고구려 고분군에서 많이 발굴되는 돌곽흙무덤, 돌곽돌무덤, 돌칸흙무덤, 돌각담무덤 등이 함경도 지역의 무덤떼(고분군)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집자리에서도 고구려적 전통이 강한 구들(온돌)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구들은 160여년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터의 왕이 자던 곳이나, 오매리 절터 등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온돌시설이 발해시기에 완전 서민화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난방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고고학에 대해서는 그 비판도 없지 않다. 가장 큰 대립을 보이는 것은 문헌과 고고학을 막론하고 중국이다. 그러나, 북한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중국보다 오히려 남한에서 더한 것 같다. 송기호의 지적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북한의 고고학을 "객관적인 논증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주장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발해사가 "1980년 대에 들어와 더욱 심한 상태로 나타나 모든 것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체사관의 강화에 따라 더욱 국수주의적으로 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발해문화에 전래된 외래 문화를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경성, 서고성, 팔련성 등의 평지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뜬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고분에서도 토광묘나 전축분의 것까지 고구려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토광묘는 토착 말갈 계통에 속하며, 전축분은 중국계통에 속하는데" 전축분의 정효공주묘마저 고구려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외래문화를 무시하는 북한의 '주체적'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와 종족의 교류는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고학은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다.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 학문적 객관성도 지키려는 흔적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북한의 고고학이 우리와 다른 것은 적어도 계획발굴이 많다는 것이다.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적 성격이 강한 곳부터 먼저 발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은 고구려와 발해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 땅의 발해유적에서는 '모든 것이 고구려'것일 수 있다.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오히려 문제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토광묘를 말갈의 전형적인 묘제로 보려는 중국학계의 견해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하여 북한의 고고학을 비판하는 것은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덤 쓰는 방식의 가장 저급한 방식의 토광묘(흙구덩이묘)는 고구려인들도 많이 사용하던 것이다. 고구려인을 돌방무덤이나 돌곽무덤을 쓰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지배층이나 귀족의 고구려사람만을 고구려인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에도 우리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묘제는 토광묘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갈의 전형적 묘제를 계승한 종족이라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고고학은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인민중심의 주체사상에 의한다 하더라도, 발해고고학에서 관심을 갖어야 할 것은 서민들의 묘제라 할 수 있는 토광묘계통의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도 유적의 보존상태가 좋고 유물이 많이 나오는 돌무덤에만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매우 비민주적인 발굴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토광묘는 유적의 보존상태가 나쁘다는 것은 다 아는 바다. 그러나, 이러한 큰 전제가 그들의 논문에서는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굴된 고구려 지배층의 석실묘를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화려한 유물을 남겼던 사람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결코 발해사를 완전하게 복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5.맺음말
북한의 발해사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 신라사 위주의 신라중심적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특히, '사회역사원리'로써의 주체사상을 발해사에도 크게 반영시키려는 것도 또한 하나의 특징이다.
초기의 발해사 연구는 지배층 중심의 역사연구였다. 왕조 중심의 기록을 따라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구성문제에 있어서 피지배민에게도 관심을 갖고 다수의 고구려유민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지리 고증에 있어서는 남경남해부가 북청이라는 점을 밝혔고, 기타의 발해유적을 많이 발굴하여 발해문화의 일단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발해인들의 생활터도 전보다 많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개방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도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발해사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북한연구 1994년 봄호, 대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