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마재는 우선 그 생김새부터가 재미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 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을 지키는 파수꾼 같다.
마재의 다산 문화의 거리(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문화관과 실학 박물관, 여유당 생가 등이 잘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정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바다처럼 넓어졌으나 2백 년 전의 능내리(마재)와 배알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이웃 마을이었음에 틀림없다.
정약현 · 약전 · 약종 ·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정약종(아우구스티노)와 그보다 앞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그의 아들 정하상(바오로)과 딸 정정혜(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정씨 부자(父子)가 한국교회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1779년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하는 등 초기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한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펴냈으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당시 사제와 교우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정하상은 아홉 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고, 그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청원서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정하상은 또 한국교회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가 유교 전통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박력 있는 명문장으로 웅변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心書)”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써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암브로시오)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과도 지척이고, 마재 앞 한강을 건너면 이벽 성조의 집이 있다. 때문에 한국 교회 창립 선조들은 마재에서 멀지 않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학을 공부하는 강학회를 열어 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처럼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라 할 수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는 마재 사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해 1999년부터 다산 문화의 거리를 본격적으로 개발해 여유당 생가를 복원하고 실학 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주변 환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의정부교구 또한 2006년 전담사제 임명하고 마재 성지에 대한 성역화에 나서 2007년 3월 새로 마련한 현 부지에 전통 한옥 양식의 성당과 명례방(만남의 방) 등을 완공하였다. 한옥 성당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상과 성모자상을 모셨으며 제대 밑에는 정약종 순교자 무덤의 흙을 넣기도 했다. 이어 2008년 9월 28일 이한택 주교의 주례로 마재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가롤로)의 시복으로 정약종 일가 모두가 시복 시성된 것을 계기로 성가정 성지로의 도약을 위해 2년간 심순화(카타리나) 작가와 함께 성가정 성지 조성작업을 실시하였다. 2017년 5월 27일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는 성가정 마재 성지 선포식과 성가정 동산 및 성가정 십자가의 길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7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