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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3:1-17
찬송가 411장 ‘아 내 맘속에’
하나님을 찾는 욥(23:1-9절)
욥의 상황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과도 닮았습니다. 아내의 외도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는데, 누군가 아내와 외도남을 죽여 자신이 혐의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의심하고 정죄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변호사조차 자신을 의심하고 순순히 자백하고 형량이라도 줄여서 용서받자고 한다면 당사자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오늘 이 세 친구의 역할은 욥을 의심하고 자백을 강요하는 변호사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여전히 평행선을 걷고 있습니다.
(1-2)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욥은 오늘도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자신이 받는 고난의 무게가 짊어지기에 버겁다는 표현 입니다. 곧 그릇에 물을 채울 때 그릇의 용량이 넘도록 채워 흘러넘칠 정도로 재앙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때론 우리의 삶에 이런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도저히 하루를 살아내기 힘들 것 같은 육체적 고통 또는 마음의 짓눌림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을 거두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3-7)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욥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습니다. 앞에 있는 세 친구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정직함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처소에 나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털어놓고 싶습니다. 그러면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고대합니다. 욥의 고백은 억울한 고난을 당한 자가 의지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거나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고 언론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손가락질을 하거나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상황 속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오해하고 정죄해도 하나님 한 분만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이 지속될 때 하나님의 시선 안에 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욥도 그러하였습니다.
(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은 하나님의 일하심 곧 자신을 구원하시고 건져주시고 부당함을 빨리 벗겨 주시길 간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더디 이루어짐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하나님의 부재 속에 허덕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 좀 더 감각적으로 붙들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은 시각적인, 촉각적인, 감각적인 붙들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두 돌판을 만들어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의 부재함을 느끼며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였고 아론은 그들에게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보다 보이는 신을 만들어 의지하고 싶은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대상으로 만들어 섬깁니다. 돌, 금, 형상, 자연 등 뭔가 힘이 있고 감각적이고 붙들 수 있는 형태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과 피조물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잘못된 신관을 갖게 됨으로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는 욥(23:10-17절)
(10-12)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0절은 욥기에서 가장 유명한 고백 중 하나이며, 고난 속에 많은 위로를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본문의 의미와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감찰 혹은 시험하시고 순금처럼 정결함을 확증해주실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이처럼 자신의 결백함을 간구하는 고백이던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고백이던지 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가 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Reaching for the invisible God’입니다. 직역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다가가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 책에서 필립 얀시는 고난과 의심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신앙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던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가장 분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찾아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주여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단 한 가지 일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표현이 욥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처지를 모두 알고 계신 분이 없으시기에 다른 곳,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눈 앞에 있는 돌이, 금신상이,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도와줄 수 없음을 알기에 욥은 어리석어 보여도 끝끝내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동네 병원 이곳 저곳을 가보았지만 결국 해결할 수 없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명의가 있는 병원에 예약을 걸고 수 개월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밖에는 도와주실 분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13-14)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마음 먹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자신의 삶에 성취 될 것을 이미 욥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이 됨을 고백합니다.
(15-17)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욥의 이 고백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그것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두려워 떠는 영혼의 눈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 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지구와 우주의 질서처럼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하나님의 힘을 나타냅니다.
욥은 이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삶에 찾아온 화살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욥을 향해 날아온 화살은 그의 소유와 자녀를 빼앗아 갔습니다. 곧 스바 사람들이 침략하여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나귀를 탈취해 갔습니다. 그 뒤에 이어 날아온 화살은 자연재해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습니다. 또한 갈대아 사람이 낙타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또한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죽게 됩니다. 강도와 자연재해를 통해 재산과 자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다음 욥에게 날라 온 두 번째 화살은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찾아온 종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날라 온 화살은 아내의 배신이었고 믿었던 친구들이 무지함속에 던진 정죄의 화살입니다. 여기까지 욥을 향해 날라온 인생의 공격들을 살펴보면 강도, 자연재해, 죽음, 병, 배신, 무지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한 번에 당한 이 고난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욥만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온갖 사기꾼들과 도둑과 강도들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온갖 자연재해를 통해 삶의 터전과 생명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불의의 사고를 통해 또는 병으로 건강과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또한 무지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정죄하는 갈등 상황에서 가정과 국가와 세계 여러 나라들이 고통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욥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욥이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비극을 놓고 자신이 초래한 문제들 혹은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비극들 모두 하나님께 화살을 돌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들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이 땅에 찾아온 문제들입니다. 죽음, 병, 무지, 자연재해 등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의 모습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자연이 훼손됨으로 찾아온 고통들입니다. 그리고 그 범죄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셨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 그런 악과 부조리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이 가지신 것과 같은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선택하는 모든 선택에는 이기심과 탐욕이 깃들어 있기에 결국 그 선택들은 같은 인간, 자연만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선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참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주권으로 완전한 의로움의 기준으로 우리를 통제하시고 벌주신다면 아마 우리의 대부분은 대학교를 가기도 전에 삶을 마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까?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사 하나님을 알기 전 자기 의지로 범죄한 모든 죄값을 치루고 화목함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이 이 땅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함께 기다리며 그 사랑을 흘려보내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첫 제물이 되시사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많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이 본향이 아님을 알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약 이 땅이 완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 예비하신 본향을 사모하거나 고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겪는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때론 우리보다 먼저 이 땅을 떠난 사랑하는 가족들로 인해 우리는 본향을 기억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몸이 약해지고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이 고통만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몸에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내가 병에 걸린 것도 위험에 처한 것도 알지 못한 채 더 빨리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고난에서 찾아오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게 해줍니다. 나이를 먹으며 병과 아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성취와 성공에 취해 이 땅에 잠들어 있지 말고, 영혼의 때를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메시지가 됩니다. 마치 출항하는 배를 놓치지 않도록 뱃고동을 울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보게, 이제 곧 배가 떠날 것인데, 거기서 땅의 것에 취해 신호를 놓치지 말고 깨어서 얼른 이 배를 타게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온갖 부조리와 범죄함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계속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마치 매일 매일 집을 어지르는 아이와 그것을 깨끗이 청소하는 부모의 열심과도 같습니다. 아이는 청소를 해 놓으면 바로 그 순간 온갖 잡동사니를 가져오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더럽힙니다. 그러나 자녀의 성장을 기다려주는 부모는 또 치우고 치우고를 반복하며 자녀 스스로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곁에 머물러 줍니다. 여전히 지금도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타인을, 자연을 무너뜨리며 지구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주권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훼손하지 않으시며 계속해서 우리를 돌보시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고난이 때론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립시다. 때론 아프더라도, 때론 포기하고 싶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에 유일한 답이심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힘차게 창문을 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하루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고난 속에서 욥은 간절히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때론 그 고난의 시기가 길어져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절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외에는 답을 주실 분이 없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합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온갖 고통과 부조리와 병과 죽음과 악함으로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기어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 땅을 새롭고 거룩하게 만드실 주님을 신뢰하기에 오늘도 그 고난의 자리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제 조금 더 성숙하여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그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함께 주님 곁에 머물러 그들의 회복을 위해 함께 기다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2.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욥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인간의 자유의지 남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악 들을 생각해보며 그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역사를 묵상해 봅시다.
4.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고난의 수렁에서도 좌절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