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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51코스 2부는
광양시에서 ㅡ 순천시를 거처 ㅡ 여수시까지 걷게 되는 구간 입니다
화살표 따라 광양시와 순천시 경계지점까지 간척지 방조제를 걸어왔습니다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501년 ~ 600년까지) 무렵에 마로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치소)으로 처음 쌓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고을 이름을 마로현에서 희양현으로
바꾸어 9~10세기(901년~1000년까지)까지 사용하였다.
마로산성은 옛 광양읍성에서 동쪽으로 3km 지점에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다.
마로산성에 오르면 남쪽으로는 광양만과 순천왜성이 있고, 북서쪽으로는 광양읍이 있으며
남서쪽 약 6.7km 지점에는 순천 검단산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광양이 백제시대 때
마로현(馬老縣)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발 138m의 피봉산(皮峰山) 능선에 쌓은 산성은 이곳 주민들은 피봉산을 안산, 또는검단산이라고도 부른다.
검단산성 동쪽으로는 직선거리로 2.9km 지점에 순천시 신성리에 위치한 순천왜성(倭城)이 있습니다
1598년(선조 31)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이곳에서 신성리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과 공방전을 펼쳤는데, 이 때 조선산성(朝鮮山城), 한성(漢城), 띠두루봉 등으로 불렸다.
도원수 권율(權慄)과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도(獐島, 노루섬) 송도(松島)에
진영을 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의 연합 함대와 함께 연락하면서
왜군을 격퇴하기도 하였습니다.
<朝鮮之 全羅道요, 全羅道之 光陽이라>고
어사 박문수(조선 영조3년)가 광양을 이렇게 예찬하였습니다
광양(光陽)은 태양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양지 바른땅이라 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곳곳에 광양의 정기가 스며있는 광양읍을 벗어나
광양시와 순천시 경계선을 넘어왔습니다
광양시에서 순천시로 왔습니다. 이제부턴 순천땅을 걸으며 충무사와 순천왜성으로 진행 합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28-1에 위치한 충무사 입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의 격전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다
㉠ 옥포 해전(玉浦海戰)은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 당포 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가메이 고레노니였다.
일본군선 21척은 모두 격침된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목을 베었다,
㉢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혹은 견내량대첩(見乃梁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은 1592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와
대립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전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한다.
정운 장군은 고흥반도 서남쪽의 끝자락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197의 녹도진성에
수군 지휘관인 만호로 배치되어 병력과 선박을 관리했다 합니다
녹도만호란 녹도는 녹동에 있었던 녹도진성이며
만호는 조선 시대 각 도의 여러 진(鎭)에 배치되었던 종4품의 무관 벼슬 입니다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에 세워진 충장공 정운장군 동상은 입니다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에는 충장공 정운장군과
충렬공 이대원 장군 동상이 세워저 있습니다
전라좌수영 휘하에 5관5포를 두었는데, 그 중 1관4포가 고흥에 있다.
그 1관4포중 하나인 녹도진이 녹동에 있다.
송희립(宋希立, 1553~1623) 장군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무신 송희립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도만호(智島萬戶)로
형 대립(大立)과 함께 의병을 모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고, 1598년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왜군에게 포위된 명(明)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구출하면서 전신에 중상을 입었다.
송희립은 1553년(명종 8)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직속군관이 되어 여수 지역에서 생활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희립은 형제들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핵심참모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여 옥포해전, 당포해전, 부산포해전 등에서 차례로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이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데, 송희립은
정탁, 정경달 등과 함께 조정에 간곡하게 상소하여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에 일조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밤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묘도 앞바다에서 송희립 장군은 중상을
당하여 기절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선상의 병사들이 매우 놀라며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하자 기절했던 송희립이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영장(令將) 몇 사람으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의 아들과 조카 등의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시신을 싸서 초둔(草芚)으로 덮은 후에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갑옷을 입고 기와 북채를 들고
독전(督戰)하여 수세에 몰렸던 명나라 진린 도독을 구하는 등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송희립은 이듬해 이 공훈을 인정받아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오르고, 1601년(선조 34)에 양산군수(梁山郡守)로
발탁되었다가 다대포첨사(多大浦僉使) 등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4월 전라좌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송희립은 사후에 흥양(興陽)[현 전남 고흥]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전남 고흥 서동사(高興 西洞祠)와 순천 충무사, 무광사 등에서 송희립을 배향하고 있다.
충무사 안내도
충무사(忠武祠)는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 · 충장공 정운 · 송희립 장군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사 외삼문
충무사 강당
동광문
충무공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영당은 충장공 정운 · 송희립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
내삼문(동광문) 넘어로 순천왜성이 조망되는군요
내삼문(동광문)
이충무공 유적 보존 기사비
이충무공 유적 사업 기적비와 왼쪽 뒷쪽의 충무사 사적비
순천왜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순천왜성 문지1은
본성과 왜성을 연결해 주는 출입문 입니다
걸어왔던길 뒤돌아 보니 아까 들렀던 충무사가 가깝게 조망되는군요
순천왜성을 간략하게 요약된 안내 글 입니다.
천수에 이르는 출입문인 문지2에서 바라본 문지1 방향 입니다
외성에서 본성으로 출입하는 문 입니다
외성에서 출입문을 지나 본성으로 들어 갑니다
본성 안에서 바라본 본성으로 들어 올수 있는 출입문
본성의 천수단 입니다
천수단
<정왜기공도병> 그림은 명나라 종군 화가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를 그린 병풍으로
임진왜란 관련 3대 병풍 그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왜기공도권>이라는 이 그림은 원본이 아니라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미국 컴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정왜기공도권>을
찍은 사진을 확보해 1978년 공개했다고 합니다
순천왜성에서 바라본 충무사
순천왜성 본성에서 바라본 현대제철 순천공장 위치는
1598년에는 바다였는데 간만의 차가 얕은 갯벌을 매립하여 중공업 기업들이 입성하고 있습니다
순천왜성 바로 앞에 있는 장도는 왜군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는데 노루섬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1598년 8울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그는 죽어면서 유언으로 조선에서 철군을 명령했다
그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이순신은 일본군이 철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단 한 명의 왜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작전을 개시했다
고금도 덕동기지를 출발한 조명 연합함대는 ▶ 1598년 9월 15일 나로도(고흥군 봉래면)를 지나 ▶
9월 19일에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던 여수를 거처 하개도(何介島)에 하루를 묵은 후
9월 20일 오전 8시 무렵 묘도에 이르렀다
그 시간에 명나라 장수 유정과 도원수 권율이 순천왜성 아래쪽 불우(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불모퉁이)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 순천왜성에는 고니시유키나가가 이끄는 약 1만5000천 명의 왜군이 운집하고 있었다
조명 연합함대는 9월 20일에 순천왜성 바로 앞에까지 진출하여 장도를 공격했다.
연합수군은 적의 군량미 창고를 급습하여 군량미를 빼앗은 후에 창고를
불태워버리고 다수의 조선인 포로를 구출했으며, 왜군의 해상 전진기지였던 장도를 장악하게 되었다
1597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동안 조명 연합함대는 해상의 불리한 위치에서 순천왜성을 포격했지만
왜군은 계속된 공격에서 바다로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성 안에서 방어전을 폈다
9월 22일에는 연합함대가 왜군의 주진지에 공격을 개시하며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날 전투에서
지세포 만호와 옥포 만호가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명군도 유격장 계금이 부상하고 11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9월 30일에 명나라 유격장 왕원주가 10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합세해왔고 육지의 유정과 합의하여
10월 2일 아침에 다시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흘 동안 공격을 계속했으나 왜군은 방어진지를 이용해
반격했는데, 이 일대의 수심이 얕은 까닭에 연합함대는 대형 군선이 기동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10월 2일 연합수군은 성 가까이 진격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펼처졌고 해안에는 왜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의 처 종형인 사도 첨사 황세득, 군관 이청일과 수군병사 29명이 전사하고
제포 만호 주의수, 사량 만호 김성옥, 해남 현감 유형, 진도 군수 선의문, 강진 현감 송상보가 부상을 당했다
명나라 수군 5명도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육상에서 지지부진히게 싸우던 명나라 광동군은 수군이
썰물을 타고 철수하자 성벽을 타고 내려온 왜군에게 20여 명이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조선 수군은 10월 3일에는 다시 야간 공세를 시작하여 다음 날까지 분전했으나 육지에서는
유정이 지휘하는 명나라 육군이 합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았고, 바다에서도
명나라 제독 진린이 지휘를 잘못하는 바람에 명나라 수군의 사선 19척과 호선 20요 척이 얕은 갯벌로
잘못 들어가 좌초되면서 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불타는 큰 피해를 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순신은 전선 7척을 동원하여 이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썰물 중에 뻘에 갇힌 명나라 배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의 수륙합동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0월 6일 유정은 순천으로 후퇴하고 조명 연합함대는 10월 8일에 고금도 덕동 기지로 귀환했다.
무술년 9월의 난중일기 일부를 옮겨 봅니다
● 9월 17일 나로도에 머물며 진린(陳璘)과 함께 술을 마셨다
● 9월 18일 오후 2시에 행군하여 방답에 이르렀다
● 9월 19일 아침에 전라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참담했다.
한밤에 달빛을 타고 하개도(何介島)에 옮겨 대었다가 날 새기 전에 행군했다
하개도는 어디일까?
다음, 네이브 지도를 세세히 찾아봐도 하개도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여수 신덕해수욕장 곁에 돌출된 섬이 있다. 바로 그곳이 하개도(何介島)로 여겨진다
1598년 8울1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그는 죽어면서 유언으로 조선에서 철군을 명령했다
1598년 10월부터 왜군은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1598년 11월 8일 조명연합 함대는
고금도 덕동기지를 출발하여 11월 13일 순천왜성 앞의 장도(노루섬)에 진을 쳤다
순천왜성에서 철수하려는 왜군의 퇴로를 막아 적을 하나라도 더 섬멸하여 7년 동안 조선을 괴롭힌 적에게
복수하려는 비장한 전투였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퇴로가 이순신과 조명연합 함대에 의해
차단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진린에게 협상하여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려 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순신에게 전투 중지를 제의했지만 이순신은
"장수는 화를 말해서는 안 되며 원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금품을 주고 통신선 한 척을 경상도 쪽으로 몰래 보내
시마스 요시히로가 이끄는 왜 수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11월 18일 사천, 고성, 부산 등지의 왜장들이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해협에 집결하였다.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함대는 11월 18일 (양력 12월 15일) 밤 10시경 순천왜성의 봉쇄를 풀고 노량해협으로 들어갔다
11월 18일 밤 12시경 이순신은 함상에서 하늘을 향해 제를 올리면서
"이 원수를 없앤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며 비장한 각오를 했다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함대 300여 척과 조선 수군의 전선 악 80여 척으로 편성된 연합함대는 새벽 2시 무렵
왜군과 대혼전을 시작했다. 최대 결전은 새벽 4시 무렵에 시작되었다
관음포 쪽에 있던 이순신 함대가 적을 향해 전속력으로 향진했다
호준포, 위원포, 벽련포 등과 천자총통을 비롯한각종 총통으로 함포사격을 하고
불을 붙인 나무단인 신화를 던지며 불화살을 퍼부으며 좌우에서 동시에 화살로 공격하였다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7일) 아침 9시 무렵 이순신은
왜군이 근거리에서 쏜 탈환을 맞아 왼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죽음을 맞던 순간 그는 옆에 있던 아들 회와 조카 왕에게 말했다.
"지금 전쟁이 급하므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왜군은 거의 전멸된 상태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500여 척 중 남은 범선 50여 척을 이끌고
도망처 여수해협을 빠져났다. 조명 연합군도 이순신을 비롯해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방덕룡, 흥안 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의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명나라 수군의 칠순 노장 등자룡도 전사했다.
이순신의죽음과 함께 기나긴 7년의 임진왜란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장도해전이 벌어졌던 지역
노량해전도
왼쪽은 율촌산업단지 입니다
천수기단
본성의 남쪽으로 난 출입문을 뒤돌아 보고~
좌우 어느쪽이던 본성에 갈 수 있습니다
왼쪽은 율촌산업단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남파랑길 51코스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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